SS모텔→ 죽림굴 → 울산병영성지 → 양산(중식)
16Km 40.2Km 37.7Km
40. 죽림굴
죽림굴, 곧 대재 공소(1840-1868년)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근 간월산 일대의 옛 신자촌인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 시대의 피난처이다.
이 석굴 공소는 대나무로 덮여 있어서 ‘죽림굴’이라고 불렸다.
폭 7m, 높이 1.2m 규모지만 입구가 낮아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년)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 공소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으로,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Catacombae)였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경신박해(1860년) 때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미사를 집전하며
스승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한 대재 공소 회장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김종륜 루카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이 지방에서 교우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뒤이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타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교희 프란치스코
(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장하치명’(杖下致命)한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와 오빠 김영제가 체포되자 그 뒤를 따르고자
김 아가타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친 김 아가타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죽림굴로 찾아 들었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웠다.
그녀는 3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양업 신부를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신부가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동리에 나가 구걸도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했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결국 병석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김 아가타의 유해는
간월 공소 뒷산에 모셔졌다.
간월 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정녀 김 아가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기에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붙잡혀 가려 했던
그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만은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3월 4일 부산교구는 간월에 있는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했다.
1986년 10월 29일,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9일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하였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6년 2월에는 죽림굴 주변을 정리하면서 안내석을 새로 세우고
입구에 계단도 만들었다.
죽림굴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언양에서 간월행 버스를 타고 홍류 폭포에서 내려 왕방재로 등산해
간월산 정상에서 배내 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는 길은 왕복 3시간이 걸린다.
혹은 언양에서 밀양으로 연결된 24번 국도로 석남사를 지난 뒤,
이천행 비포장 도로를 따라 이천(배내) 본 동네 입구에 이르기 전
안내판 표시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닦여진 산길은 3.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이다.
어제 방문하려고 했다가 단풍객들로 인해 포기하고 다시 찾은 죽림굴.
순례자들이 가장 난코스라고 하는 곳 중의 하나로 왕복 3시간을 걸어야 한다.
전에는 언양성당에도 순례도장이 있었지만, 죽림굴을 방문하진 않는 경우가 많아
지금은 죽림굴 안에 도장이 비치되어있어 직접 등산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언양숙소에서 6시 출발 6시 30분에 등산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몸이 불편해 주차장 바로 아래에 있는 김밥.어묵파는 집에서 기다리게하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주위의 단풍을 보며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앞에는 등산객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을 오르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수시로 보이는 안내판에는 죽림굴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들었나 걱정이 되었지만 안내책자 지도를 보니 맞는 것 같아
더욱 빨리 오르다보니 50분 만에 간월재 휴게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죽림굴은 찾을 수가 없었다.
휴게소에 이미 간월산 억새를 보기위해 올라온 젊은 연인 한 쌍이 있어
죽림굴을 찾는다고 지도를 보여주자 이리저리 길을 찾더니
잘못 올라온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오늘 일정도 빡빡한데 2시간 가까이 허비한 것이다.
내려올 때는 거의 뛰다시피하여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올라오는 등산객을 차례로 6팀 정도 만났는데
그 중에는 나에게 간월재가는 길이 맞느냐고 물어와
친절히 가르쳐주는 가이드 역할도 했다.
등산로 입구인 주차장에서 6시 반에 출발했는데
1시간 40분 후인 8시10분경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다리도 아프고 허기가 졌지만 김밥과 오뎅을 허겁지겁 먹고
아내와 함께 다시 올바른 등산로 입구를 찾아 차를 몰았다.
한참 비탈길을 달려 내려오니 위의 표지판이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다시 죽림굴을 향해 올라갔다.
왕복 2시간 이상 걸린다고 한다.
마음은 급했지만 이미 2시간 가까이 등산을 한 후라
몸이 조금 전만큼 말을 듣지 않았고, 조금 전 올라갔던 길보다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이 계속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갔다.
입구에서 20분 쯤 오르는데 앞에서 젊은 남녀가 내려온다.
청년이 앞에서고 뒤에 여자가 따라오는데 청년이 나에게 묻는다.
간월재 가는 길이 맞느냐고?
조금 전 나는 간월재를 다른 길로 갔다왔기에 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차를 가지고 왔느냐고 묻자, 아래 주차장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죽림굴을 가려고 조금 전 잘못 찾은 주차장을 설명하자
여자친구가 '그것봐! 제2 주차장이라고 했잖아!' 하면서 투덜거린다.
두 분이 이 일로 기분상하지 않고 좋은 산행이 되길 빌며 다시 오른다.
나는 왕복 2시간을 허비했는데 그들은 1시간 이내니 나보단 상황이 나은 편이다.
거의 다 온 지점에 모녀가 산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70대 정도이고 딸은 40대 정도로 보였다.
죽림굴 가느냐고 물으니 간월재를 간다고 했다.
그들은 조금 아래 자연휴양림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간월재에서 죽림굴로 내려오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 길도 몰랐고 아내가 주차장에 기다리고 있었기에
올라갔던 길을 다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고 자위해본다.
그들을 추월해서 산을 오르니 50분 만에 죽림굴에 도착했다.
죽림굴을 방문하고 돌아오는데 그들을 만났다.
어머니 말씀이 '건강해서 좋습니다' 하고 나에게 말했다.
순간 기분이 좋아지면서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30분만에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10시 20분이었다.
결국 죽림굴을 갔다 오는데 4시간 가까이 소요된 것이다.
울산에 들러 양산에서 점심약속이 있기에 서둘러 울산으로 출발했다.
오늘 죽림굴 순례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다리도 후둘거리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울산으로 가는 차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며 생각해본다.
길을 잘못 들었기에 평생 가보지 못할 수도 있는 영남알프스라 일컫는
간월산과 신불산 갈래길인 간월휴게소와 억새군락지를 갈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기쁘다.
41. 울산병영순교성지
울산 병영 순교 성지는 예전에는 장대벌 성지라고 불리었습니다.
장대벌은 장대가 있는 벌판이라는 뜻인데
장대는 지휘관이 병사들을 지휘할 때 올라가던 돌로 쌓은 대를 말합니다.
당시 병영은 군사를 훈련하는 장소이면서 중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로도 쓰였습니다.
첫번째 순교자인 오치문 베드로를 비롯하여 지난 진목정성지,
경주관아와 옥터에서 설명드린 세 분의 복자도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박해’는 천주교가 퍼져나가는 데
‘민들레 씨앗’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한양(서울)과 근기(경기), 내포(충청) 등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영ㆍ호남 일대로 피신하면서 복음이 퍼졌고, 경상좌도 일대,
곧 낙동강 동쪽 남부 지역에서도 교우촌을 중심으로 복음이 뿌리를 내렸다.
언양 간월과 울산 죽령 등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일대
교우촌이 대표적이다.
100년에 가까운 박해는 병인박해기에 이르면서 절정을 보인다.
1866년 봄의 박해 병인양요 직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의 박해,
1868년의 박해,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해 발발한
1871년 신미양요 사건에 따른 박해 등 네 차례에 걸친 병인박해 중
1868년 박해를 특히 ‘무진박해’라고도 부르는데,
한양 출신으로 죽령 교우촌 공소회장으로 활동한 이양등(베드로, ?∼1868) 회장과
공주 출신 김종륜(루카, 1819∼1868), 김해 출신 허인백(야고보, 1822∼1868) 등은
울산 지역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가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박해의 손길은 진목정으로 향하고
이들은 박해가 일어나자 단석산 소태골의 호랑이굴, 곧 범굴로 숨어든다.
현재 진목정 성지(경북 경주시 산내면 소태길 24-13)에서
20여 분가량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천연동굴이다.
해발 827m의 비교적 험준한 산악지대 골짜기로 숨어든 교우들은
10여 명이 지낼 수 있는 30m 길이의 굴에서 살게 된다.
꿀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생활을 해온 이양등 회장 일가 3명을 비롯해
상주 멍에목(경북 문경시 동로면 문안길 일대)과 언양 간월 교우촌을 거쳐
죽령 교우촌로 이주했던 김종륜 일가 5명, 1860년 경신박해 당시 잡혀가
50여 일간 고초를 당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돼 풀려나와
역시 죽령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허인백 일가 4명 등 12명이었다.
낮이면 남자들은 목기를 제작하거나 신을 삼고, 여자들은 동냥을 해 끼니를 이어나갔다.
또 밤에는 모두 동굴 바닥에 꿇어앉아 정성스럽게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고
교리와 성인 이야기를 나누며 가족들에게 신심을 일깨우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 세월이 2년이나 지속됐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였다.
1868년 4월 독일 상인 E. J. 오페르트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이구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이른바 ‘덕산 굴총 사건’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박해의 피바람이 분다.
이양등 회장 등 세 명은 죽령교우촌이 발각된 직후에 경주 포졸들에게 잡힌다.
세 순교복자는 천국으로 들어가고 경주 관아로 끌려간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 허인백 등 3위 복자에 대한 문초는 아주 혹독했다.
그 참상이 「병인치명사적」 제3권에서 이렇게 전해진다.
“세 차례 형문 일 차씩 치니 다리에서 뼈가 드러나고 피가 많이 흐르고
또 진졸들이 돈 달라 하여 사사로이 노(줄)로 톱질하매 다리가 끊어지게 되었더라.…”
그럼에도 이 회장 등은 굳건하게 신자임을 고백하고 신앙을 증거한다.
이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영이 있던 울산 병영에 이송된 이 회장 등 세 명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이송된 지 이틀 만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순교는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허인백이 한 말이 이를 방증한다.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사람 천국으로 들어간다.”
이어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ㆍ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른 이들은
1868년 9월 14일 참수형을 받았다. 이
들이 참수된 곳이 현재 정확히 어딘지는 고증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 순교자의 시신을 가매장했던 동천강변 가매장터는
6·25전쟁 이후까지도 팻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울산시에서 강변 정비를 하면서 없어졌다.
그 아쉬움은 1957년에 울산본당(현 복산본당)에서 매입한 터전에
‘울산 병영 순교성지’가 세워져 달랠 수 있다.
울산 병영 순교성지성당은 제대를 중심으로 전 신자가 원형으로 둘
러앉아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독특한 성당이다.
천장 십자가 중심 아래에 제대가 놓여 있고, 제대 중앙과 감실에 못이 세 개 박혀 있어
이 회장 등 3위 순교복자를 기리고 동시에 예수님 십자가에 박혀 있던 못 세 개를 기념한다.
아내의 은사인 김** 선생님과 남편을 찾아뵈었다(12시 30분)
양산 아파트로 찾아가 댁을 방문하여 잠시 기도를 한 후
죽림굴에서 시간을 많이 낭비했기에 곧 바로 근처 식당(화화갈비)으로 갔다.
인기있는 업소라 번호표를 받고 10분 기다리다 안내를 받았다.
김**선생님은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에 손수 만든 소품과 손편지를
한 해도 거르지않고 우리 부부에게 보내시는 아주 성실한 분이다.
그래서 바쁜 일정임에도 시간을 내어 만나뵌 것이다.
마땅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구입한 경주빵을 전하고
점심은 우리가 대접했다.
제주에 돌아와 밀감 1상자를 보냈다.
선생님은 여행중에 먹으라고 삶은 밤을 반씩 쪼갠 것과 숟가락,
삶은 계란, 삶은 고구마 한 보따리를 주셨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것이 무척 좋았다.
조만간 여유있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을 것을 약속하며
선생님댁에 모셔다 드리고 우리는 김범우묘소로 향했다(14시)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