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샘교회 정병선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뱀의 치명적 유혹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뱀의 정체도 중요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간 사람의 연약함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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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유혹(2)
본문 : 창세기3:1-7
하와에게 결코 죽지 않는다며 영생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알랑댔습니다. 여기서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선악을 안다는 것을 뜻하는데, 뱀은 지금 ‘선악을 아는 것’과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선악을 알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뱀이 하와에게 던지는 미끼의 핵심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라는 이 구차한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거예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선악을 알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사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금지한 유일한 일입니다. 다른 건 다 허락했어요. 유일하게 금지한 것이 선악을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뱀은 그 무한한 자유는 다 거두절미하고 금지 사항 하나를 물고 늘어집니다. 그 금지 사항 하나가 하나님과 사람의 유일한 차이인 것처럼 교묘하게 꾸밉니다. ‘너희가 선악을 알면 너희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너희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런 계략입니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선악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유일한 차이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차이만 제거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더욱이 그 길이 그리 험한 길도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선악을 모르는 이 장막만 제거하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뱀은 이 착각과 환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꼬드깁니다. 그 차이의 벽을 깨버리라고. 그 차이의 벽만 깨버리면 너희도 능히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참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구미가 당기는 매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뱀의 말은 언제나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거짓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아담이나 하와가 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리고 있는 축복입니다. 만물 중에서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할 수 있는 최상의 은총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 해도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을 만큼 받을 수 있는 모든 재능과 능력을 다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자를 닮았으면 됐지 그 이상 무슨 축복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 해도 인간 이상의 피조물을 만든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저는 인간이 하나님이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작품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 같은 존재 이상의 존재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이 참 감사합니다. 살면서 때때로 고민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고, 깊고 오묘한 세상의 신비를 알아가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참 감사합니다. 영화와 음악을 창조하는 인간, 말과 글을 사용하는 인간의 일원이라는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도 그분이 저에게 특별한 뭔가를 해주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만들었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그분이 나를 알고, 그분이 내 허물을 용서하시고 내 연약함을 품어주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감사해서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야말로 제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감사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예배를 통해서 제가 인간이라는 것, 제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뿐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대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에 버금가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엄중한 진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 해도 사람은 만들어진 피조물이지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질적 차이는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절대 타자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알 수 없고, 영원히 포착되지 않는 절대 미지의 존재입니다. 절대 타자입니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선악을 알고, 선악 이상의 지혜를 안다 해도, 아니 부활을 한다 해도 인간은 피조물이지 창조자의 위치에 올라설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뒤바뀔 수 없는 절대 진실입니다.
그런데 뱀은 이 명백한 진실을 뒤집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진실을 뒤집었습니다. 마치 창조자의 위치에 올라서야 하는 것처럼, 그것이 매우 좋은 일이고 마땅한 일인 것처럼 꼬드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을 이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개나 꽃을 생각해봅시다. 개나 꽃이 존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호랑이가 되기 위해서 개가 존재하나요? 나비가 되기 위해서 꽃이 존재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는 개로서 존재하고, 꽃은 꽃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사람이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신이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사람으로서 살 때, 또 사람답게 살 때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神)은 하나님으로 충분합니다. 아담이나 하와까지 신이 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담이나 하와는 그냥 아담과 하와로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이 가장 가치 있습니다.
그런데 뱀은 마치 신이 되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이 하와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으로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더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될 수 있다고 꼬드겼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힘써야 할 것은 신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정말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이 넣어주신 무한한 가능성을 제대로 개발하고 끌어내서 하나님의 형상을 빛나게 하고, 하나님이 맡긴 세상을 잘 돌보고 아름다운 문화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뱀은 지금 하와가 정작 힘써야 할 일은 제쳐두고, 하지 말아야 할 일, 할 필요가 없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뱀은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요?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창조세계 전체를 죽음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창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배경이 있습니다. 이 일이 어느 정도 승산이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면 승산 없는 게임을 왜 하겠습니까? 사탄도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뱀은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뱀이 승산을 점친 배경이 있을 텐데 그 배경이 무엇일까요? 뱀이 하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배경은 하와에게 있는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는 ‘자유’와 ‘의지’라는 두 단어가 합해진 합성어입니다. 우선 ‘의지’를 먼저 살펴봅시다. 의지는 어떤 일을 이루려는 적극적인 마음입니다. 갈망하는 뭔가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입니다. 말이 추상적이니까 비슷한 말을 통해서 이해해봅시다. 의지와 욕구는 반걸음 차이입니다. 욕구와 욕망도 반걸음 차이입니다. 의지, 욕구, 욕망, 이 셋은 서로 비슷한데 약간 다릅니다. 관점의 차이, 강도의 차이가 조금씩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의지, 욕구, 욕망은 한 통속입니다. 어떤 의지가 있기 때문에 뭔가를 욕망하는 것이고, 뭔가를 욕망하기 때문에 의지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의지를 가진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 욕망을 비롯해서 안전 욕망, 지배 욕망, 권력 욕망, 애정 욕망, 소속 욕망, 과시 욕망, 모방 욕망, 생명 욕망 등 갖가지 욕망이 인간 안에 깊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진 이 의지는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는 인간과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뜨거운 감자입니다. 자유의지야말로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최고의 면류관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폭발물입니다. 자유의지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힘과 권세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비록 피조물이지만 본능이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갈망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힘과 권세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자’ - ‘스스로 주인인 자’로서 욕망한다는 뜻입니다. 이걸 뒤집으면 이런 뜻이 됩니다.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든지간에 욕망하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이야기가 성립됩니다. 먹을 수 있어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령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아예 먹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금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했다는 이야기 속에는 아담이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한 것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뱀은 바로 이 부분을 내다보면서 승리를 점쳤습니다. 자유의지를 잘 건드리면 선악과를 먹게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뱀의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자유의지를 통해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김으로써 결국 선악과를 먹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뱀의 전략은 아주 간교합니다. 진실을 뒤집고 비트는 데는 가히 천재적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은 주체자는 아닙니다. 진정한 주체자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주체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통제를 받을 뿐이지 어떤 것에도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주체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하고 다릅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주체자입니다. 만드신 분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주체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의지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주체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너의 자유의지는 여기까지다. 이 안에서 자유를 즐겨라.’고 말씀한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겁니다. ‘네 안에는 자유의지, 즉 욕망이 있다. 너는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선악과만은 안 된다. 그것마저도 욕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취하면 안 된다. 그것은 너에게 금지된 욕망이다.’고 말씀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피조물 이상이 되는 것을 욕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뱀은 이 엄정한 진실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는데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죽음은 감추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거짓 환상만 부추겼습니다. 사실 자유의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해진 한계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일정한 형식과 시스템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뱀은 바로 그런 자유의지의 속성을 꿰뚫고서 하나님이 금지한 것을 거부하라고 자유의지를 자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지한 것을 먹으라고, 먹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하와의 자유의지를 자극한 것입니다.
결국 뱀이 한 말의 속뜻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눈치 볼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금기에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눈치 보지 말고 네가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쫄지 말고 네 마음이 원하는 것, 네 마음에 땡기는 것 취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니 도덕이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현대인들이 주장하는 소리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뱀의 이 말은 어떤 면에서 가장 현대적인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긍지를 가지고 신봉하고 있는 매우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이 금지한 것을 지키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다고 뱀이 주장한 것처럼 요즘 사람들도 소리 높여 주장합니다. 예의니 도덕이니 그런 것 지킬 필요 없다고, 그런 것 지키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다고 떠듭니다. 오히려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고 떠듭니다. 네가 욕망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취하라고 떠듭니다. 너는 너의 주인이다, 그러니 네가 욕망하는 것을 취할 권리를 향유하라고 떠듭니다.
특히 이 시대는 책임감은 최소화하고 욕망은 극대화하는 시대입니다. 힘든 것은 회피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아무리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도 재미없으면 거부합니다. 예배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재미없는 예배를 혐오합니다. 진리가 빠진 예배는 용납해도 재미가 빠진 예배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욕망을 정당화하고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입니다. 욕망을 생산하는 사회입니다. 욕망을 생산해야 무한 소비와 무한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주역인 자본가들은 쉼 없이 만인의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는 작업을 합니다. 수많은 광고를 통해서 끝없이 욕망을 생산합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대부분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욕망을 쫓아 살고 있습니다. 소유 욕망, 지배 욕망에 이끌려 돈 벌고 성공하는데 올인합니다. 재미라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게임과 영상에 미쳐 삽니다. 오락에 빠져 삽니다. 지금 당장 즐겁고 재미있는 것에 몸과 마음이 찌들어 있습니다. 재미없는 것을 조금도 참지 못합니다. 부모나 선생님이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데 왜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되레 큰소리칩니다. 내 인생 내가 살겠다는데 왜 간섭하느냐고 큰소리 뻥뻥 칩니다.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재미는 죽고살기로 추구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런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인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 시간에 자기 맘대로 합니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고, 자고 싶으면 잡니다. ‘왜 그렇게 사냐?’고 한 마디 하면 ‘그냥이요…하고 싶어서요…’ 그게 끝입니다.
이 시대의 가치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왕이다”입니다. 사람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다들 내가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 이런 가치관에 물들어 있습니다. 내가 왕이라는 가치관에 아는 듯 모르는 듯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욕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겁니다. 누구의 간섭도 거부하는 겁니다. 이런 모든 양태는 뱀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뱀이 했던 말을 21세기 최첨단 지식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뱀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거짓입니다. 뱀의 주장이 자유의지의 기본 속성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했다는 면에서 거짓입니다. 물론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유의지는 금기를 깨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가려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 스스로 자유의지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유의지를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뱀은 그걸 부정했습니다. 단지 부정만 한 게 아니라 거짓 환상을 심어줬습니다. 뱀이 말하는 대로 하면 정말 해방된 삶을 살 것 같고, 하나님과 같이 진정한 주체자로서 맘껏 신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줬습니다. 사실은 전혀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데, 죽음이라고 하는 비극적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데, 뱀은 엉뚱한 환상으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은폐시켰습니다.
뱀은 오늘도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뱀은 언제나 진실을 은폐시킵니다. 진실을 은폐시키고 그 자리에 영화처럼 멋지고 그림 같이 황홀한 거짓을 내세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오늘도 그 옛날의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속절없이 넘어갑니다. 영화처럼 멋지고 그림처럼 황홀한 거짓에 홀딱 반해서 선악과를 먹어버립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을 보십시오. 다들 열심히 선악과를 먹고 있습니다. 나도 먹고 너도 먹고 다들 먹으니까, ‘아!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사는 거구나!’ 하면서 누가 선악과를 더 많이 먹나, 먹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말씀했습니다. 선악과 속에는 죽음이 있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늘도 선악과 먹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얼마나 멋있게 죽음을 살아내는지 죽음 살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 살기 경쟁, 바로 이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사실 이런 인생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살아야 할 인생살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경험하는 인생살이는 뱀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불행한 인생살이입니다. 원래의 인생살이가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불행한 인생살이에 더 이상 굴복하지 말라고, 뱀의 장난에 놀아나지 말라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답게 살라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는 사탄의 속임수, 뱀의 거짓 마술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