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열전 ⑯ 순천 복음화의 초석을 놓은 존 프레스톤 선교사
(변요한, 1875~1975)
오늘의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기까지 선교사들의 희생과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목사 선교사로 처음 한국에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를 시작으로 이 땅을 찾은 외국 선교사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복음의 귀한 소식을 전했다. 이중에는 존 프레스톤(한국명 변요한) 선교사가 있다. 그는 부산 경남지역을 품은 호주 데이비스 선교사처럼 호남지역 특별히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며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미국 조지아 주에서 1875년 출생하였으며 남장로교 출신으로 북장로교 학교인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 1903년 4월 18일 목사안수를 받아 그해 1903년 11월 아내 애니와 함께 목포에 도착했다.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기까지 호남지역의 든든한 복음의 조력자로 활약했다.
호남지역의 든든한 복음의 조력자
호남선교가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선교스테이션을 통한 선교의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이션의 선교운동은 교회, 병원, 학교를 통한 영적 각성, 문맹 퇴치, 육체 치유, 항일운동을 통한 입체적인 선교활동이었다. 물론 예배 시에는 통회자복을 통한 눈물의 회개운동도 있었다.
프레스톤 선교사가 목포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유진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가 광주 선교지부 개설을 위해 떠났다. 이에 프레스톤은 조셉 놀란과 함께 목포 및 인접 도서지방까지 돌보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임성옥 조사를 대동하여 지방전도 여행을 떠나 강진의 학명리교회와 해남의 원진교회, 맹진교회, 남창교회를 세웠고, 1905년 교장으로 취임한 목포 영흥학교를 최초의 석조 건물로 건축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프레스톤은 광주 선교지부가 확장되자 1909년에 광주로 이동했는데, 1909년 오웬이 갑자기 소천하자 오웬이 순회하며 전도하던 순천과 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까지 맡게 되었다.
순천에는 오웬과 지원근 전도사의 노력으로 순천읍교회(현 순천중앙교회), 대기리교회, 구상리교회 등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고, 이때 광주와 순천지역의 교회개척을 이끈 조상학이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프레스톤은 유진 벨과 함께 순천읍교회를 방문했을 때 매주 5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도전을 받았다. 이곳에 미국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선각자의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천 선교지부 설립 그리고 매산학교 시작
프레스톤 선교사는 남장로교 한국선교와 전남지역 기독교의 발전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그는 순천을 자주 오가며 순천지역에 선교기지를 신설해야 하는 필요성을 제시했다.
광주와 순천 사이에 높은 산들이 지역을 격리시키고, 육로 교통이 불편해 교회와 신자를 돌보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남해안 지역과 섬진강 유역을 감당할 선교기지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으로 1910년 선교기지 개설위원회가 구성되고, 1911년에는 개설 장소가 논의 되었다. 순천과 벌교가 주요 후보지로 거론되었는데, 벌교가 당시 교통 및 상업 중심지였지만, 앞으로 순천의 발전 가능성이 더 클 뿐 아니라 여수지방의 도서선교에도 유리한 지리적 이점이 있음을 고려해 마침내 순천에 선교지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미국남장로회 선교지부는 1913년 4월 순천 선교지부 선발대로 프레스톤과 코잇 가족을 순천으로 보내 매곡동(매산) 선교사 주택에 짐을 풀고 선교활동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시 매곡동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의 매장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복음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순천 매산학교이다. 매산학교는 1910년 4월 순천 금곡동에 사숙을 설립해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으며, 은성학교라는 학교명으로 시작하여 매산남학교와 여학교를 건축했다.
1913년 4월 매산남학교는 초대 교장 코잇, 1921년 4월 2대 교장에 크레인이 봉사하면서 가난한 학생들이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다 1916년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치는 문제로 일본과 충돌하여 1차 폐교당했다. 1919년 데라우치 총독이 사임하고 사이토 총독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통치제도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체제로 변화하였는데, 매산학교가 이때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37년 9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가 이뤄지자 결국 다시 자진 폐교한 후, 1946년 8월 해방이 된 이후에 2차로 복교를 하였다. 또한 프레스톤 선교사는 현지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현지인을 교회 지도자로 양성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농한기를 이용해 농촌지역 지도자 양성을 위한 달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달성경학교는 연초에 1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었는데, 5년간 계속하게 되면 졸업한 후에 교회의 지도자급인 영수가 되거나 조사의 자격으로 개척교회를 담당하게 되었다. 후에 이 달성경학교는 순천보통성경학교로 발전하여 농촌교역자와 목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순천 알렉산더 근대식 병원
순천 알렉산더 근대식 병원 설립과 교회개척
프레스톤은 의료선교사로 순천에 파송된 팀몬스 부부와 협력해 1915년에 순천 안력산 Alexander병원을 세웠는데, 이 병원은 35개의 침대, 좋은 설계와 시설을 갖춘 병원이었으며, 이곳을 통해 수많은 극빈자가 의료혜택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복음전파에도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프레스톤은 부락마다 다니면서 쪽 복음 성경을 배포하는 등의 다양한 전도를 하였고, 교회 건축비를 지원하고 대출해 주는 방법으로 많은 교회를 설립해 전라남도의 부흥을 일으키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는 순천에서 가곡리교회와 평중리교회, 사룡리교회의 설립에 기여하였다.
1918년에는 순천읍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교회역사 수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여수지역에서 여수, 장천, 봉양, 우학리교회와 여수서교회, 봉전리교회, 서정교회에서 동사목사로도 시무하는 등 그의 사역은 쉴 틈이 없었다.
이외에도 완도 관산리교회를 설립하였고, 나주 삼도리교회, 덕곡교회, 해남 고당리교회, 무안 성남등에서에서 시무하고 진도에서 분토리교회를 설립하였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장을 지내는 것을 비롯하여 여수와 순천지역 여러 교회의 설립과 당회를 조직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한국 출국
미국 남장로회 순천 선교지부는 개설 초기부터 큰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그것은 학교를 세워 복음을 증거하고 인재를 양성했을 뿐 아니라, 병원을 세워서 사회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남장로회 역시 복음전도, 병원사역, 교육사역이라는 세 개 항목을 선교지부 개설의 원칙으로 삼을 정도였다. 선교스테이션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호남의 전도율은 약 30%까지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프레스톤은 일제의 강제 탄압으로 인해 1940년 광복을 5년 앞두고 한국을 떠나가야 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노회에서 탈퇴한 후 순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0년 그가 가르친 한국인 사역자들은 프레스톤을 배웅하며 순천역에서 환송예배를 드렸다.
일본은 이날의 환송식을 문제 삼아 환송 나갔던 목사와 전도사들에게 미국 첩보원이란 누명을 씌워 순천경찰서에 검속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광복을 이룰 때까지 일본에 의한 전남기독교 박해가 계속 이어졌다. 양용근 목사(구례읍교회)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수감되었다가 1943년 12월 5일 광주형무소에서 옥사당했다.
제주도와 전라남도를 오가며 목회활동을 하던 이기풍 목사는 여수 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나 1942년 6월 20일 주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사랑의 성자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도 기나긴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프레스톤 선교사 헌신은 복음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선교의 자취는 지금까지도 순천 곳곳에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산관
순천지역
※ 선교사 열전 이야기를 연재하며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하였다. 이밖에 매산학교 역사관 사료를 참고하였다.
출처 : 고신 뉴스 K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