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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5일 오늘의 역사
2018년 미국 정치인 존 멕케이 사망
2017년 미얀마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 인종청소 시작
9월24일까지 한 달간 로힝야 족 6,700명 이상 학살, 다섯 살 미만 어린이 730명, 난민 62만 명 학살 피해서 방글라데시로 감
2017년 허리케인 하비(8.19 발생) 미국 텍사스 강타(8.25 휴스턴에서 소멸) 일주일간 폭우 1320mm 최소 82명 사망
2015년 ‘수사반장’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배우 김상순 별세
드라마 ‘수사반장’‘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등으로 잘 알려진 배우 김상순(78)씨가 25일 자택에서 폐암으로 별세했다.
서울 경기상고와 경기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씨는 1963년 KBS 공채 탤런트 3기로 데뷔했다. 그는 최불암·조경환·남성훈과 함께 1971년 드라마 ‘수사반장’에 출연해 우직하고 사명감 넘치는 형사역을 잘 소화해 인기를 끌었다. 최불암씨는 “고인은 건실함의 산 증인 같은 배우였다”며 “제가 반장으로 이끌던 형사들이 다 먼저 떠나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는 농촌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주연을 맡아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이후 ‘신돈’‘아내’ 등 드라마에 꾸준히 출연했고, 올해 초 영화 ‘JSA 남북공동초등학교’에 나오기도 했다.
2014 부산 포함 남부지역에 시간당 130㎜ 폭우 사망 5명, 정부 특별재난지역 선포
고리 원전2호기 가동 중단(순환수펌프가 멈춘 사실을 은폐하려 중단했다는 의혹도 있음) 지하철과 열차 침수하거나 선로 유실로 운행 일부 중단, 4천545개 건물침수피해, 창원 하천에 시내버스 휩쓸려 승객 등 7명 목숨 잃음
2014년 한국 리틀야구대표팀 2014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전승 29년 만의 우승
2012년 최초로 달에 발 디딘 닐 암스트롱 세상 떠남(73세)
2009년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 별세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던 미국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2009년 8월 25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故) 케네디 의원은 지난 반세기 가까이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보건과 인권, 외교 부문 등에서 상당한 정치적 족적을 남겼지만, 그보다 많은 미국인들의 뇌리에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형제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 기억돼왔다.
케네디 의원은 1962년 케네디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첫 상원의원에 당선된 이래 50년 가까이 줄곧 상원의원 자리를 지켜온 미 현대 의회사의 산 증인이다.
케네디 의원은 1969년 당내 상원 원내대표가 된 이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됐으나 여러 스캔들에 휘말린 끝에 대선후보로 나서진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줄곧 상원의원직을 수행하며 미국 내 진보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얼마 전 투병 중임에도 불구, 건강보험 개혁 입법안의 상원 표결시 ‘사표(死票)’를 막기 위해 자신의 사망시 후임자를 신속히 지명토록 주법 개정을 요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해온 주요 입법과제를 최후까지 돕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009년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1) 발사 실패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1)가 2009년 8월 25일 오후 5시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으나 과학기술위성2호를 정해진 궤도에 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궤도 진입 실패와 관련해 러시아 제작 액체로켓을 포함한 상·하단 로켓 엔진의 추진력과 자세 제어 또는 분리 과정이 논란이 되었으나 페어링(위성보호덮개) 분리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발사 후 나로우주센터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발사 후 1단(하단) 엔진과 2단(상단) 엔진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위성을 2단 로켓에서 정상적으로 분리시켰으나 목표궤도에 정확히 올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나로호의 임무는 발사 후 540초에 상단 고체로켓에 붙어 있는 과학기술위성2호를 분리시켜 지구상공 306㎞ 궤도에 진입시키는 것. 하지만 나로우주센터 발사지휘센터는 분리 30초 전(발사 후 510초)에 이미 상단로켓의 고도가 360㎞라고 발표했다.
목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과학기술위성2호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위성2호가 자칫 ‘우주 미아’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창진 한국연구재단 우주단장은 이와 관련, “과학기술위성2호는 상용위성과 달리 자체 자세제어능력이 없어 궤도를 수정할 수 없다”며 “실험위성이 문제일 뿐 우주발사체 자체의 발사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패 원인으로 지목된 페어링 덮개 분리는 바로호 발사 후 첫 중요단계로 페어링은 위, 아래 두 개가 하나의 짝으로 이뤄졌는데 이 중 위쪽 페어링 분리가 안 된 것으로 보인다. 페어링이 분리되지 않은 채 비행을 했기 때문에 나로호는 정상 속도보다 느리게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나로호에 탑재된 과학기술위성2호가 지구를 돌기 위한 속도를 얻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느린 속도로 분리된 위성은 추락하거나 대기권 비행 중 전소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로호는 발사에 앞서 7번 예정을 연기했으나 결국 임무에 실패했으며, 향후 원인 규명 및 추가 발사 역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야 함에 따라 독자적인 발사체 기술 확보가 우주 개발 사업에 절대적인 핵심 요소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2003년 인도 뭄바이서 연쇄 폭탄테러로 200여명 사상
인도 최대의 경제 도시 뭄바이에서 8월25일 발생한 연쇄 차량 폭탄 테러로 인도 전역이 충격에 휩싸였다.
뭄바이와 수도 뉴델리 등에는 경찰 전 병력이 동원된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고, 인도 증시는 3% 가까이 폭락했다. 이날 테러는 지난 1993년 뭄바이에서 이슬람 과격세력의 연쇄 폭탄 테러로 250여명이 숨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관광 중심지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 시대 건축물인 ‘인도의 문(Gateway of India)’ 인근과 뭄바 데비 힌두 사원 인근에서 잇따라 폭발이 일어났다
목격자들은 이날 폭발로 뭄바이 ‘인도의 문’에서 최소한 10여대의 승용차가 파괴됐으며 강력한 폭발로 인해 인근 호텔의 유리창이 거의 박살나고 거리에 핏자국과 유리 파편이 널려 있다고 전했다.
이번 사건으로 인도 전역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으며, 수도 뉴델리에는 6만명의 전 경찰 병력이 시설물 경비에 투입됐고 시내 곳곳에 폭동 방지용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2001년 단사천 한국제지 회장 별세
단사천 해성그룹 회장이 2001년 8월 25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단사천 한국제지 회장은 이북에서 단신으로 월남, 부와 기업을 일으킨 대표적인 창업 1세 재벌이다. 그는 특히 이북 출신 사업가답게 `현금`동원 능력이 가장 뛰어났던 재계의 숨은 실력자였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부친의 갑작스러운 작고로 18세 때 외가인 서울로 내려온 그는 5년 동안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23세 때 `일만상회`라는 미싱조립회사를 설립,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6.25 이후 서울에서 북한출신 재계인사들과 함께 사채시장을 주름잡아 명성을 얻었으나, 나중에 직접 사업을 경영하는 데도 관심을 쏟았다.
생전에 한국제지·계양전기·해성산업·한국패키지·우영엔지니어링 등 5개 기업을 일구었으며, 그가 일군 기업군은 1300여 직원들을 거느린 재벌로 성장했다. 그는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해성문화재단과 학교법인 해성학원을 운영해왔다.
2001년 황용주 전 MBC 사장 타계
소신을 지켰던 학자요 언론인이었던 황용주 전 MBC 사장이 2001년 8월 25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해 경남 밀양에 세종중·고를 설립했으며 부산대, 연세대에서 강의를 하다 1956년 국제신문 논설위원으로 스카우트돼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정치· 사회· 문학 제반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보이는 글을 썼던 그는 1957년 부산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 겸 주필, 사장을 지내며 초창기 부산일보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64년 MBC사장으로 옮겨 방송 경영을 맡았다.
그러나 방송사 사장이면서 논객으로서 소신을 밝혔다가 필화를 겪었다. 미·소·중·일의 남북한 정부 인정, 남북공동 UN가입 등을 주장한 글 `강력한 통일 정부에의 의지`를 1964년 `세대`지에 기고했다가 반공법으로 구속됐던 것.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언론계를 떠났다.
1999년 ‘황혼이혼’ 소송 낸 70대 할머니 승소
A씨(71)는 월남한 남편(91)과 57년부터 결혼생활을 했다. 59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40)을 낳았고, 혼인신고는 69년 마쳤다. 사별한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재혼하면서 포기했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온 남편도 A씨를 만나면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사채업을 했던 남편은 사업수완 덕택에 재산을 크게 늘렸지만, 남편은 최소한의 생활비 이외엔 A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또 남편의 간섭으로 A씨는 바깥출입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92년부터 다니기 시작한 성당도 숨어서 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A씨 부부가 파경에 이르게 된 것은 93년. A씨가 영세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노발대발하며 대전 아들집으로 A씨를 쫓아낸 것이 계기였다. 결국 A씨가 이혼소송까지 내는 일이 벌어졌지만 1년여 뒤 일단화해했다.
하지만 남편이 “반성문을 써오라”며 A씨를 다시 집에서 내쫓자 A씨는 다시 이혼소송을 준비했고, 남편은A씨와 상의 없이 10억원을 제외한 수십억원대 재산을 모 대학에 기부했다. 이에 A씨는 97년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 재판부는 “해로하시라”며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특별8부(재판장 황인행)는 25일 “남편은 A씨에게 위자료 5000만원과 3억원의 재산을 나눠주고, 부동산도 시가의 3분의1 만큼을 분할해 주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40여년간 부부로 생활해오다 뒤늦게 이혼소송을 제기한 A씨에게도 책임이 있으나, 더 큰 책임은 평생을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일관한 남편에게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재산을 일방적으로 기부한 점과 부부간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한 책임은 남편에게 있다고 밝혔다.
1999년 국내 이동전화 가입자 2000만명 이상… 국민 2.3명당 1대꼴
국내 이동전화 공식 가입자가 2000만명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국민 2.3명당 한명꼴로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SK텔레콤 등 이동전화 5사는 25일 “가입자가 20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국내 휴대전화 가입자는 지난해 6월 서비스 시작 14년 만에 1000만명을 넘어선 지 불과 1년 2개월 만에 2000만명을 넘었다.
정보통신부는 “정식 가입자는 2000만명을 넘어섰지만, 아직은 10% 정도의 허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하지만 휴대전화 이용자가 머지않아 유선전화 가입자수(2060만명)를 추월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1994년 국제우취연맹(FIP) 총회 개최
1992년 전 민중당 대표 김낙중씨 등 4명 보안법 위반 구속
국가안전기획부는 1992년 8월 25일 북한의 남파간첩으로부터 거액의 공작금을 받아 반체제활동을 한 혐의로 전 민중당 대표 김낙중씨(57)와 김씨의 비서 심금섭씨(63 청해실업 대표), 평화통일연구회 사무총장 노중선씨(52)와 운영위원장 권두영씨(63) 등 재야인사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안기부는 김씨가 지난 1955년 자진 월북, 대남 공작원으로 포섭돼 1년 동안 간첩교육을 받고 남파된 뒤 진보적 지식인으로 위장, 36년 동안이나 고정간첩으로 암약해 왔다고 발표했다. 김씨는 1990년 2월부터 남파된 북한 공작원 최모, 이모 등과 접촉,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전파하라는 지령을 받고 함께 구속된 심-권-노씨를 포섭해 활동했으며, 1990년 10월 17일부터 1992년 8월 14일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단파 라디오 등을 이용해 "14대 총선전까지 민중당에 입당, 합법적인 정당활동을 통해 혁명과업을 추진하라"는 등의 북한지령을 수신, 그에따라 활동하면서 이를 수시로 북한에 보고했다고 안기부는 밝혔다.
법원은 1993년 10월 12일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 민자당총재직 사퇴
1991년 우크라이나 등 8개 공화국 소연방으로부터 독립선언
1991년 태풍 글래디스 상륙 울산 545.0mm 사망 103명 재산피해 2,357억원
1991년 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 처음 공개
핀란드 헬싱키대학 학생인 리누스 토발즈가 중형 컴퓨터에 쓰이던 유닉스 운영체제를 PC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컴퓨터 운영체제(OS) ‘리눅스’를 1991년 8월 25일 뉴스그룹에 처음 공개했다. 리눅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리눅스의 성공은 결코 토발즈 한 사람이 이뤄낸 것은 아니었다. 소프트웨어는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한 전세계 수천명의 프로그래머들이 함께 만들어낸 공동 창작물이었다.
토발즈는 OS 핵심부분인 커널을 개발했지만, 리처드 스톨만이 주도하는 GNU 프로젝트에 참여한 수만명의 프로그래머들은 보조 프로그램 및 다양한 응용 소프트웨어를 내놓아 성능을 개선시켰다. 스물한살의 풋내기 대학생이 만든 리눅스는 탄생 10년째인 2001년 8월, 세계 서버 운영체제 시장의 27%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고, 초기에는 1만 라인이던 리눅스는 1천만 라인의 방대한 프로그램으로 거듭났다.
1990년 전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 여사 별세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70)이 1990년 8월 25일 자택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 전총장은 1921년 평남 맹산서 태어나 1943년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뒤 1952년부터 모교 교수로 재직했다. 1961년 총장에 취임, 1979년까지 재임한 그는 이화여대 명예총장을 맡아오다 1986년부터는 명예총장직을 유지하며 재단 이사장으로 있었다.
그는 배짱이 든든하기로도 유명했다. 6·3사태때 치열한 시위를 벌였던 입학정원을 그 해도 증원받지 못했다. 입학시험을 끝낸 순간까지도 증원 허가가 나지 않고 문교부에서 초과분을 문제삼자 그는 “학교가 뽑은 학생을 구제해야 한다”며 직권으로 7백명 학생의 입학을 마무리하고 사표를 냈다가 6개월 후 복귀했다. 1965년 봄 6개월 간의 자존심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1980년 문교부 장관 재임 중 그는 중고등학교 교복을 없앴고 문교부의 지시공문을 대폭 없애 ‘자율장관’이란 이름을 얻었다.
1989년 보이저2호 해왕성 접근
1988년 남북교류특례법안 제정
1986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안에 새로 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준공 및 개관행사가 1986년 8월 25일 오후 3시에 현장에서 열렸다. 개관식에는 문공부장관, 국회문공위원장, 서울시장, 예총회장, 현대미술관장 등 1천여명의 문화예술계인사가 참석했다.
1984년 3월 29일 착공, 총1백88억원을 들여 2년4개월 만에 완공된 신축미술관은 2만평의 부지위에 연건평 1만2백72평의 철근콘크리트건물로 9개 전시장과 1만평규모의 야외조각장을 갖추고 있다. 미술관은 봉화대모양의 램프코어를 중심으로 왼쪽에 원형조각전시장, 오른쪽에 말발굽형 회화 전시장이 있고, 앞쪽에는 도서실 강당 등 교육시설이 들어섰다.
개관과 함께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아시아현대미술전` `프랑스 20세기 미술전` `美와이즈만 컬렉션전` 등 4개 기념전시회가 일반에게 공개됐다.
1986년 영광 원자력발전소 원전 1호기 완공
1985년 첫 공인중계사 자격시험 실시
1984년 방사능물질 대량 적재한 프랑스 화물선 벨기에 해상에서 침몰
1981년 소말리아, 리비아와 단교
1981년 다케이리(竹入), 일본 공명당위장(公明黨委長) 방한
1979년 먼데일 미국 부통령 중국방문
1979년 태풍 주디 강타 사망‧실종 135명 피해액 340억원
1978년 중공 베트남 국경서 유혈분쟁
1977년 금산 제2위성통신지구국 완공
1975년 제5회 비동맹제국 외상회의(30일까지 페루의 리마) 북한 가입
1972년 경복궁 중앙국립박물관 개관
1972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구권 지정
1972년 중국의 첫 거부권 행사로 방글라데시 유엔 가입 부결
1965년 무장군인 고려대학교에 난입
한일 협정의 철회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고려대학교에 무장군인을 투입하였다.
저녁 7시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시위대책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내무장장관과 각 대학 총학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표한 대통령의 특별담화 !
(박정희 대통령 육성...정부 불러가라, 국회해산하라, 그 다음엔 학생이 정치를 하겠단 말입니까?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담화를 발표하는 이 시각부터 철저하게 강한 단속을 할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다음날 서울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대학은 휴교에 들어갔다
1961년 브라질 군부쿠데타 쿠와드로스 대통령 사임(후임 굴라르)
1960년 로마올림픽 개막
1960년 8월 25일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84개국 53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7회 올림픽이 개막됐다. 이 대회에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 극적인 우승자들이 많이 탄생했다.
우선, 가장 빛나는 활약을 한 사람은 에티오피아의 무명 마라토너 아베베였다. 로마제국의 ‘정복의 길’로 대표되는 아피아 가도를 맨발로 완주, 2시간15분16초2분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이것은 올림픽신기록이자 아프리카 흑인 선수로서 얻은 올림픽 최초의 우승이었다. 2위 역시 아프리카 모로코의 라지가 획득, 이로써 1ㆍ2위 모두가 아프리카에 돌아갔다. 아베베는 4년 후 동경올림픽에서도 2연패를 달성,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는 쾌거를 이뤘다.
가장 극적인 우승자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에 걸렸던 미국의 여자 육상 선수 루돌프였다. 그녀는 여자육상100mㆍ200mㆍ400m 3종목에서 우승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한편, 복싱 라이트헤비급에서 케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 우승함으로써 그는 이후 은퇴할 때까지 약 6천80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입을 거둬들이며 가장 고가의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또한 헝가리출신의 50세 선수 게레비치는 선수로서 가장 장수한 우승자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다. 그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후, 6번째로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6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비극적인 패자로는 사이클 100km 단체전 레이스 후 사망한 덴마크의 옌센이 꼽힌다. 그의 사망원인은 흥분제 과다복용이었다. 이로써 그는 올림픽사상 약물복용사망 제1호가 됐다.
1958년 뇌염으로 전국 국민학교 휴교령
1956년 ‘킨제이 보고서’를 낸 알프레드 킨제이 사망
1956년 8월 25일 미국의 동물학자 알프레드 C. 킨제이 박사가 색전증으로 사망했다. 킨제이가 세상에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1948년 1월 7일 ‘킨제이 보고서’로 알려진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킨제이는 보도인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에서 저명한 곤충학자 휠러 밑에서 말벌을 연구한 그는 하버드대를 거쳐 인디애나대에서 동물학 교수로 재직했다.
여학생회의 요청으로 여학생들을 위한 ‘결혼 강좌’를 진행하던 중 학생들이 인간의 성에 관한 인식과 연구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자료수집에 착수했다. 성상담은 그가 사례를 수집한 중요한 활동이었다. 상담 사례가 1938년에는 62건, 1939년에는 671건, 1940년에는 957건에 이르고 2차대전을 거쳐 수천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보고서의 토대가 됐다.
킨제이가 록펠러 재단과 국립연구평의회의 지원을 받아 1만8천명에 달하는 미국 남녀와 가진 개인 인터뷰를 통계적으로 연구한 후 ‘인간 남성의 성적행동’(1948)과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1953)의 보고서를 발표하자 그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 충격적인 성의 실태가 나오자 ‘뉴스위크’지는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을 둘로 갈라놓은 이래 이보다 충격적인 과학서는 없었다고 보도했다.
이로인해 그는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아 그의 보고서는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지만 성해방론자들조차 너무 "까발렸다"고 눈살을 찌푸렸고, 심리학자들은 "무지와 지성 사이의 형평을 무너뜨려 사회불안을 초래했다"며 그를 공격했다.
1956년 미국의 발명가 조지 워싱턴 피어스 사망
1954년 대한우표회가 주최한 제1회 우편전시회 개최
1950년 딘 소장, 인민군에 포로로 잡혀
6·25 개전 초기, 소련제 T34 탱크에 우리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 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 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곧 진로가 잘못됐음을 깨달았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밤을 기다려 산쪽으로 우회했다. 깊은 밤, 딘 소장이 친히 부상병들의 물을 뜨러 갔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의식을 잃은 사이, 그를 찾지 못한 호위장교는 본부에 실종 사실을 알렸다. 1950년 7월 20일이었다.
이제 딘 소장 혼자뿐이었다. 산속을 헤맸고, 86㎏이던 체중도 58㎏으로 줄었다. 방황 36일째인 8월 25일, 전북 진안을 지날 때 길을 안내하겠다는 청년을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그의 밀고로 공산당 자위대에 붙잡힌 것이다. 지옥 같은 3년간의 포로생활이었지만 “육체는 포로라도 정신은 포로가 아니다”라며 버텼다. 1953년 9월 4일, 교환포로 제1호로 자유의 품에 안겼다.
1948년 북한, 총선거 실시
1945년 미국 인천에 상륙. 미국 소련 양군의 북의 38도선 분담점령을 방송
1944년 프랑스군, 파리 해방시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파리 해방도 시간문제였다. 1944년 8월 22일 베를린으로부터 파리 사령부로 한 통의 전문이 타전된다. “파리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지시였다. 전문을 수신한 통신장교는 고민에 빠졌고, 그는 12시간 늦게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때쯤이면 파리를 파괴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령관도 ‘인류문화의 보고’ 파리를 그의 손으로 파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다.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진격작전이 잘못되면 그 역시 파리를 파괴한 장본인으로 남을 판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파리 진격을 프랑스 제2기갑사단에게 맡겼다. 8월 24일 프랑스군은 파리에 입성했고, 이튿날 파리 주둔 독일사령관 폰 촐티츠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제패 사진 일장기 말소게재
1936년 8월 10일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15회 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孫基禎)은 일본팀으로 출전,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에서 우승하게 되었다(2시간 29분).
이에 전국민이 환호했고, 이어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손기정이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오르는 사진을 실었는데 이 사진은 일본의 [아사히 스포츠]라는 조일(朝日)신문 발행 주간지에서 전재한 것인데 그 사진에서 일장기를 교묘하게 흐려버리고 발행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이길용과 삽화가 이상범을 검거하고 신문은 무기한 정간처분을 내렸다.
(그때 [조선 중앙일보]도 일장기를 말소한 뒤 발행했으나 발각되지 않았음.)
그러나 운동부 기자 유해붕을 경찰에 자수시키고 9월 5일자로 자진 휴간하기도 했음)[동아일보]는 그 이듬해 발행권이 취소되었다.
일제시기의 민간지 창간의 배경은 이른바 『굴뚝론』으로 설명되어진다.
즉 굴뚝을 만들어 열기를 빼내듯 민간지 창간으로 민중들의 독립열기를 가라않히고,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듯 민간지에 나타난 내용을 보고 민심을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그 배경에서 태어난 여러 신문 중 바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있었던 것이다.
즉 이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의 통치구도속에서 출발을 했던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채찍과 당근』의 정책으로 신문을 길들였다.
대표적인 예로 "일장기 말소사건"을 들수 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신문정간이라는 조치를 당하고 이를 해제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총독부와 타협으로 기자해고라는 조치를 취하고 만다.
조선일보 역시 독자의 신망을 얻기 위해서 배일적인 신문임을 자처하지만 총독부와 타협해 정간해제의 조건으로 역시 기자를 해고하는 양면적인 행위를 보인다.
이런 조선, 동아일보도 역시 친일적인 논조가 아니면 생존하기 어려운 시기라 상업주의적 논조와 식민지적 황색 저널리즘의 경향까지 나타나게 된다.
1933년 조선소방사업령 공포
1923년 경성전기, 안국동 선 전차 운전 개시
1921년 미국 독일 평화조약 성립
1919년 이승만, 워싱턴에서 임시정부한국위원회 결성
1918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출생
1912년 중국동맹회, 국민당으로 개편
1912년 독일의 정치가 에리히 호네커 출생
1908년 방사능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헨리 베크렐 사망
1900년 독일 철학자 니체 사망
1900년 8월 25일 정오 독일 바이마르에서 "신은 죽었다"라며 구시대의 종언을 확신에 찬 어조로 선언했던 프리드리히 니체가 사망했다
그는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함께 20세기를 만든 3대 사상가로 꼽힌다. 약관 25세의 나이에 바젤대학 교수가 된 그는 `비극의 탄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피안` 등 문제작을 잇따라 발표하며 주목을 끌었다. 그의 저서는 당시 익숙했던 데카르트, 칸트 등 근대사상의 계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전임교수 10년 만인 35세 때는 건강이 악화돼 급기야 학교를 떠나야 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개신교 목사였지만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의 종교`로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이미 인류가 `신`으로 표현되는 절대자에 의존하던 시기는 지났다고 선언했다.
몸은 19세기를 살았지만 정신은 20세기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20세기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는 서양 근대 합리주의의 한계를 누구보다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1885년 서울-인천간 전신업무 시작(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통신 실용화)
1884년 프랑스 제4공화국 초대 대통령 오리올 출생
1841년 스위스의 외과의사 코허 출생 - 1909년 갑상선 연구로 노벨상 수상
1828년 우루과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776년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 사망
1466년 과전법 혁파, 직전법 실시
1451년 고려사 139권(卷) 완성
고려 34왕 475년간의 정사(正史)로서 이조 태조가 개국 후 정도전․정총 등에게 명하여 「고려역대실록」․민지(閔漬)의 「강목(綱目)」․이제현의 「사략(史略」․이색의 「금경록(金鏡錄)」등을 참고하여 펀찬하였으나 그것은 37권의 편년체(編年體)로된 조잡한 것이어서, 다시 태종이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교정케 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종때에 와서 왕명으로 사국(史局)을 열어 정인지․김종서 등이 개찬(改撰),
1451년(문종 1)에 완성하였다.
1270년 카페 왕조에서 가장 인기있던 프랑스의 왕(1226-1270 재위) 루이 9세 사망
1033(고려 덕종 2) 천리장성 쌓기 시작
626년당나라 태종이 즉위한 뒤부터 당나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큰 야심을 품고 있던 태종은 본국의 군웅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자마자 동돌궐 원정에 착수하는 등 주변 국가들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631년(영류왕 14)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고구려에 와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 : 고구려 때 전사자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그들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합동 분묘 비)을 헐어버린 사건은 고구려의 의구심을 한층 더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장차 당나라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 해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동북쪽으로는 부여성(扶餘城 : 지금의 農安)에서 서남쪽으로는 발해만의 비사성(卑沙城 : 지금의 大連)에 이르기까지 1,000리에 걸친 장성으로, 16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어 647년에 완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주청(奏請)으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고 했으나,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의 명으로 연개소문이 642년 1월부터 그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어쨌든 천리장성의 축조는 연개소문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특히 이 공사를 감독하던 연개소문은 642년 10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들어가 영류왕을 비롯해 자신의 반대파를 대량 학살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무단 독재 정치를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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