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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포르투갈의 한 가정집 뒷마당에서 1억5000만 년 전 살았던 거대 공룡 화석 발견
2021년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 테러로 미군 13명, 아프간인 170명 이상 사망
카불 공항 외곽에서 IS 아프간 지부인 'IS 호라산'(IS-K) 소행의 연쇄 자폭 테러가 발생, 총 183명이 사망했다. 첫 번째 폭발은 공항 외곽의 애비 게이트에서, 두 번째 폭발은 미국인들의 대피를 위해 모이는 공한 인근 배런 호텔에서 벌어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은 테러범들의 타깃은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을 떠나려는 수천 명의 시민, 그리고 같은 달 31일까지 대피 및 철군 완료를 목표로 두고 있던 미군 등이었다.
2018년 여자 카누 남북단일팀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용선 500m에서 국제종합대회 첫 우승
2016년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 검찰 조사 앞두고 스스로 목숨 끊음
2014년 이스라엘·하마스 장기 휴전 합의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 무상급식 주민투표 개표 무산되자 사퇴
2009년 남북 적십자 회담 재개
남북이 2009년 8월 26일 2년만에 적십자회담을 재개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처음으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은 금강산에서 26일부터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열렸다.
김영철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을 단장으로 하는 남측 대표단은 26일 회담 전체회의 기조발언을 통해 9월 말부터 시작되는 추석 상봉과 관련한 일정과 장소를 제안했고, 이와 함께 ▲중단 없는 이산상봉을 강조한 인도주의 존중 원칙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문제 해결 원칙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해결 상호협력 원칙 등 '이산가족 문제해결에 관한 3대 원칙'을 제시했다.
북측은 기조발언에서 추석 상봉과 관련된 일정, 장소와 관련된 부분만 언급했다. 회담 직후 김영철 수석대표는 “이번에 3가지 원칙을 강조해 제시한 것은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일관된 일들을 해나가자는 것”이라며 말 그대로 원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추가상봉 등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추석 상봉 합의에 우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이후 남측은 27일부터 각급 접촉을 통해 납북자·국군포로 추가 상봉을 합의문에 넣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북측의 거부로 무산됐다.
따라서 이번 합의서에는 추석상봉 문제만 결정됐으며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 추가상봉 등의 문제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게 됐다.
2009년 미국 LA 산불 확산
2009년 8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북부의 라카냐다 부근 앤젤레스 국유림에서 발생한 ‘스테이션 산불’이 고온 건조한 날씨를 타고 계속 번져 피해 면적이 크게 늘고 산불의 재가 한때 LA 시내까지 날아들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28일 산불이 발생한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와 몬터레이 카운티에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31일 오후 5시까지 10만 5000여 에이커(약 4억2500만㎡)가 불탄 것으로 집계됐다.
소방당국은 산불 발생 일주일째인 9월 1일 기온이 다소 떨어지고 습도가 높아져 산불 확산 속도가 느려졌다면서 하루 동안 진화작업이 진척을 보여 이날 오후 5시 현재 진화율이 22%를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인 동포와 상사 주재원이 많이 사는 라카냐다와 라크레센타 지역에 내려졌던 주민 대피령은 대부분 해제됐다.
산불이 거세게 확산되는 이유로는 최근 이 지역에서 수년간 계속된 가뭄이 꼽혔다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도 산불 확산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산불이 높은 산악지대로 번지면서 항공기를 통한 진화 작업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2009년 민주화 헌신 허창수 신부 선종
1990년대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장을 맡아 한국의 민주화·인권운동에 이바지한 허창수(68·독일명 헤르베르트 보타바) 신부가 2009년 8월 26일 독일에서 심장마비로 선종했다고 30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밝혔다.
체코 출신인 고인은 68년 독일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72년 선교를 위해 한국에 파견됐다. 유신체제와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했고, 91년부터 2001년까지 앰네스티 한국지부 지부장을 맡았다
2008년 허리케인 구스타프 아이티 상륙 130명 이상 사망.
2008년 러시아 남오세티야 압하지야 독립 승인.
2008년 인도 동부 오리사서 가톨릭-힌두 단체 간 유혈분쟁
2005년 한일회담 문서 전면 공개
2005년 남한 관광객 개성시범관광
2005년 제1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평양)
2004년 수전 헉필드, 미국 MIT대 첫 여성 총장에 선임
2002년 탈북자 7명, 베이징의 중국 외교부 입구에서 난민지위 인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
2002년 지구촌 최대의 환경회의인 2회 지구정상회의 10년 만에 남아공에서 열림
1999년 대우 채권금융기관, 대우그룹 12개 핵심계열사 워크아웃 결정
102개 대우그룹 채권금융기관들이 1999년 8월 26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채권금융기관 협의회를 열고 대우그룹 계열사중 핵심계열 12개사에 대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방안을 전격 결정했다. 이에따라 대우그룹은 사실상 해체되고,공식적으로 은행관리를 받게 됐다. 김우중회장도 워크아웃 기본방침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크아웃 대상 계열사는 ㈜대우, 대우통신, 대우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자동차판매, 대우전자, 대우전자부품, 쌍용자동차, 대우캐피탈, 경남기업, 오리온전기, 다이너스클럽코리아 등 12개사이며 대우증권 등 나머지 13개 계열사는 제외됐다. 채권단은 대우 계열사들이 상거래와 관련된 물품대금 등을 지급할 수 있게 7억달러의 D/A(비신용장 방식 연불수출) 자금을 신규 지원키로 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워크아웃 대상으로 선정된 계열사는 주력기업이거나 단기 유동성이 어려운 기업이고, 제외된 기업은 정상경영을 하고 있어 독자생존이 가능한 기업”이라고 밝혔다.
1998년 최종현 SK그룹 회장 별세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1998년 8월 26일 워커힐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68세였다. 최 회장은 한국재계의 간판 경영인이자, 매출액 45조로 재계서열 5위인 SK그룹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최 회장은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을 축으로 하는 SK그룹의 기초를 닦고, 성장을 주도했다.
1929년 수원시 평동에서 유생인 부친 최학배씨와 모친 이동대씨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4년 서울대 농대 3학년 재학 중 미국유학을 떠났으며,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1962년 귀국했다. 귀국 후 형인 최종건씨가 운영하던 선경직물(주)의 부사장으로 취임, 수출 드라이브를 타고 이 회사를 굴지의 섬유전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73년 12월 형이 급환으로 타계하자 그룹 총수 자리를 이어 받았다.
1993년 2월에는 유창순 회장의 뒤를 이어 재계의 대표자리인 전경련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5년여간 21∼23대회장을 내리 역임했다. 그는 전경련 회장으로 있으면서 재계 1세대와 2세대를 성공적으로 조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6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대통령이 거액 수뢰혐의로, 12월 3일에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12·12와 5·17 조사반란 주도혐의로 각각 구속 수감 되었다. 노태우 전대통령의 거액 비자금 사건은 10월 19일 민주당 소속 박계동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이 재임 중 각계로부터 받은 거액의 비자금을 퇴임 후에도 감추어두고 있다고 폭로함으로써 검찰 수사가 시작되어, 대기업 총수 등 40여 명에게서 4,100억 원의 비자금을 만든 사실을 밝혀내고 노태우 전대통령을 서울구치소에 수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2·12쿠데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경진압에 대한 국민의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졌으며, 김영삼 전대통령은 이를 '역사 바로 세우기,로 규정했다. 국회는 12월 19일 신한국당·국민회의·민주당 3당합의로 '5·18 특별법,을 제정, 처벌근거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전두환을 비롯한 1980년 당시 신군부 측 핵심인사 11명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를 적용, 구속기소했다. 재판 결과 이듬해 4월 1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12년의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12월 22일 김영삼 전대통령이 국민대화합의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했다.
1991년 홍콩스타TV 위성방송 시작
1987년 제일제당 B형 간염치료제 국내 첫 개발
1985년 한적대표단, 제9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참석위해 평양 도착
1981년 북괴, 미국 SR71기에 미사일 공격
1980년 제1회 서울 오픈국제탁구대회 열림.
1980년 집중호우로 고리 원전1호기 정지
1976년 독일 소프라노 가수 레만 사망
1974년 세계최초로 대서양횡단비행에 성공한 린드버그 사망
1972년 제20회 뮌헨올림픽 개막
사상 최대인 122개국 7,156명의 선수가 참여한 제20회 올림픽경기가 1972년 8월 26일 서독 뮌헨에서 개막됐다.
경기초반의 영웅은 미국의 수영선수 마크 스피츠였다. 개인 4종목, 릴레이 3종목에 출전해 모두 금메달을 획득, 올림픽경기사상 가장 많은 7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의 꽃은 소련 여자 체조선수 올가 코부트였다. 갸날픈 몸으로 고난도의 기술을 보여준 올가는 `뮌헨의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뮌헨올림픽은 가장 불행했던 대회로 기록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의 숙소를 습격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살해하고 11명을 인질로 삼아 이스라엘에 억류중인 팔레스타인 게릴라 200명의 석방을 요구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 대회가 24시간 동안 중단되고, 구출작전 도중 인질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지는 등 올림픽 사상 최악의 사태가 빚어졌다.
1970년 우에무라 나오미, 5대륙 최고봉 세계 최초 등정
우에무라 나오미(1941~1984)는 여느 탐험가 영웅들과 달리 끊임없는 도전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은 20세기 최고의 모험가였다.
일본 효고현 시골에서 태어난 그가 본격적으로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메이지대 산악부에 들어가고부터였다. 1964년 5월 대학을 졸업하고 알프스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와 접시닦이 등을 하고 포도농장에서 포도 따기에 매달리며 자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1964년 9월 불법노동으로 이민국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갔다.
1964년 10월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샤모니의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1964년 11월 알프스 몽블랑 단독 등반을 시도했으나 첫 도전에서는 간신히 목숨만 건지는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다.
1967년 원주에서 전투경찰대 발대식
1965년 서울지구에 위수령(衛戍令) 발동
한일협정비준안의 국회 통과에 따라 격렬한 학생데모가 계속되자 김성은 국방장관은 1965년 8월 26일 오전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 6개 사단병력을 서울에 투입했다.
무장군인 2백명은 26일 오후 트럭 여섯 대에 나눠 타고 연세대에 난입해, 교문 근처에서 최루탄을 쏘고 구경하던 시민들과 데모학생들을 연행해 갔다. 또 이날 고대생 1천여명이 시위를 벌이기 위해 안암동 로터리까지 진출하자 헌병 3백여명이 최루탄을 터뜨려 학생들의 진출을 막은 후 오후 3시경 무장군인 2백여명이 교내에 들어가 학생 40∼50명을 연행했다.
위수령을 발동해도 데모가 확산하자, 정부는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이른바 정치교수파동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 공비 경북 봉화의 각화사 불태워버림
1958년 인도-파키스탄 휴전
1957년 주한영국군 철수
1957년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성공
1957년 8월 26일 타스통신은 소련이 수일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실험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발표에 의하면 ICBM은 3단식 로케트 T3형으로 전체길이가 33m, 전체중량이 약120t, 사정거리는 8,000km에 이른다. ICBM은 소련의 유럽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접경지대로부터 시베리아 북동부의 무인지대를 향해 발사됐다. 미사일은 초속 5.6km 최고속도 1000km의 거리를 날아서 시베리아 북동부에 근접한 해면에 떨어졌다. 한편 미국도 12월 7일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 공군실험센터에서 아틀라스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에 성공, 미소간의 미사일 개발경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미국은 이번의 실험 전에도 6월 11일 아틀라스 대륙간미사일을 발사했지만 실패한 바 있다.
1957년 명보극장 개관
1955년 한국 IMF와 IBRD 가입
IMF(국제통화기금)는 1945년 12월27일에 정식 발효되었으며,1946년 5월에 워싱톤에 본부를 두고 업무를 개시하였다.
한국은 1955년 8월26일 IMF에 58번째로 가입하였다.
1992년 6월30일 기준 165개국이 IMF에 가입한 것을 감안한다면, 비교적 일찍 회원국이 된 셈이다
IBRD(세계은행)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자매기관으로 1944년 7월 브레튼우즈협정에 따라 설립됐다.
IMF가 국제수지가 일시적인 불균형에 처한 나라에 자금을 제공해 국제통화제도의 안정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반면 세계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가맹국 경제의 부흥과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장기융자가 기본 설립목적이다.
세계은행은 또 국제무역 확대와 국제수지 균형을 조성하고, 투자계획을 작성할 전문가가 부족한 개발도상국에게 기술원조도 제공한다.
가맹국은 180여개국이며 한국은 55년에 가입했다.
자금원은 가맹국의 납입자본금, 세계은행채 발행, 대출회수금 및 이익금 등이다.
우리나라는 95년 세계은행으로부터 차입한 융자금을 모두 갚았으나, 97년 외환위기 이후 다시 융자를 받기 시작했다.
1953년 비상계엄령 전면 해제
1948년 노동 운동가 전태일 출생
1948년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체결
1947년 라베트 미국 국무차관, 소련 외상에게 한국문제 절충안 제시
1936년 온 나라 태풍(-8.28) 사망‧실종 1,232명
1931년 경상도를 제외한 전국에 폭우(~8.27)
1926년 나도향 사망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稻香)과 빈(彬)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나락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할 때까지도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을 나오고도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 그리고 그의 문학적 열정에 대한 할아버지의 몰이해가 그를 바깥으로 돌게한 것이다. 열일곱에 돈을 훔쳐 일본으로 도망쳤다가 고생만 하고 돌아온 뒤부터 도향은 더욱 고독과 번민에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초기 작품들은 눈물과 비애로 가득찬 감상적 낭만주의 경향을 띤다.
이와 달리 1925년에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에서는 리얼리즘의 경향을 보이며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선보였으나, 1925년 말 돈 한푼없이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 잘못이었다. 도쿄에서 걸린 폐결핵으로 귀국 몇개월 만인 1926년 8월 26일에 숨을 거둔 것이다.
1920년 미국, 부인참정권 인정
1919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갑산 혜산진에서 일본군 공격
1916년 이탈리아 대(對)독일 선전포고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차르는 독일 공격을 명령한다.
렌넨캄프의 1군과 삼소노프의 2군이 선봉에 섰다.
둘은 역전의 노장이면서도 오랜 라이벌이었다.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위해 독일로 전진했다.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 많은 병력 덕분에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멈춘다.
그의 눈에 독일군은 이미 오합지졸의 군대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퇴각한 게 아니라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뒤늦게 삼소노프의 2군도 독일로 향했다.
보급철도가 갖춰있지 않아 습지를 걷고 헤쳐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때 독일군은 다소 무모한 결단을 내린다.
서부전선의 병력과 렌넨캄프와 대치하고 있던 군대를 최소한 만 남겨둔채 삼소노프 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1914년 8월26일, 삼소노프가 타넨베르크에 도착해 탈진해 있을때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이날부터 5일간의 전투는 차라리 학살이었다.
3만명의 독일군에 포위돼 25만명의 군사 중 13만명이 죽거나 다쳤고 6만명이 포로가 됐다.
삼소노프는 자살했다.
1910년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 사망
1908년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법 공포
원래 일본 농민의 조선으로의 이주를 목적으로 한 회사로서 일본의 '동양협회'에 의해 제안되고 그 설립이 확정됨에 따라 일본에서 제정된 '동양척식회사법'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와 재계의 주도하에 자본금 1,000만 원의 주식회사로 설립되었다.
한국 정부는 설립자본금 30%에 해당하는 국유지를 출자했지만 일본 정부가 설립과 운영을 주도하여 일본의 국책회사로서 식민지 척식사업을 담당했다. 서울에 본점을 두고 1909년 1월부터 조선에서만 활동하였으나 1917년부터는 본점을 도쿄[東京]로 이전했다.
소유는 일본인에 국한하고 만몽지역까지 활동했으며, 1938년부터는 타이완[臺灣]·사할린·남양군도 등으로 영업지역을 확장했다. 그 결과 1938년말 9개의 지점과 831명의 직원을 두었으며 일제시대말 수권자본금을 1억 원으로 증자하고 10개의 지점을 두었다. 그후 1946년 4월 미군정에 의해 신한공사로 재편·소멸되었다.
1907년 황제, 황태자 단발
1897년 제4대 대통령 윤보선 출생
1894년 한국-일본 공수(攻守)동맹 조인
1886년 육영공원 개원
1884년 스페인의 극작가 가르시아 구티에레스 사망
1883년 인도네시아 순다 해협의 크라카토아 화산 분출. 섬의 2/3 파괴 사망 36,000명 1880년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출생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발표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입법의회는 프랑스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정식명칭은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전문과 17조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혁명의 기본정신을 밝히고 자유와 평등, 국민주권, 재산권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으며 미국의 독립선언과 함께 민주와 자유주의 원리를 표현했다.
제1조는 "인간의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라고 규정해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에 대한 중요성을 나타냈고, 제6조에서는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대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라고 규정해 법 앞의 평등이 봉건적 신분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 외에도 제2조에서는 압제에 대한 저항권, 제3조에서는 주권재민, 제11조에서는 사상과 의사의 자유로운 교환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유럽에서 형성된 민주주의 사상의 총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선언의 근본사상이 자연법 사상과 계몽사상을 통해 자라난 인간해방으로 루소의 일반의지론, 국민주권론, 몽테스키외의 권력 분립론, 존 로크의 자연권론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 인권선언은 1891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헌법에 영향을 끼쳤고, 훗날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1768년 제임스 쿡, 엔데버호 선장으로 1차 탐험 출항
1743년 ‘산소’와 ‘수소’ 이름 지은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 태어남
1743년 프랑스 화학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 출생
1740년 프랑스 기구 제작자 J.M 몽골리에 출생
1723년 세균과 원생동물을 최초로 관찰한 미생물학자 레벤후크 사망
1610년 유정(惟政)대사 입적
1597년 백두산 화산 폭발
1398년 정도전 피살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삼봉 정도전이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이 일어난 1398년 8월 26일 피살됐다. 정치적으로 후일 태종이 된 이방원의 반대편에 섰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삼봉은 어릴 때부터 총기가 남달라 10대에 예악·제도·음양·병력·의학 등 각 분야의 고전을 섭렵,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삼봉은 20세 되던 해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부모상으로 벼슬길에는 5년 뒤에 나갔다. 국운이 기울던 고려말 성균박사에 임명된 그는 영주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종사했다.
조선개국 후 그가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를 배척한 토대가 이때 쌓였다. 1390년 획기적인 전제개혁인 과전법을 도입, 구세력을 축출한 삼봉은 2년 뒤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을 개국했다. 그의 재능은 이때부터 빛을 발했다.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궁궐과 종묘의 위치를 정했으며, 경복궁 등 궁전과 궁문의 이름을 지었다. 또 관제 등 제도를 정비하면서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신왕조의 법적 기틀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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