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하는 것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 킹제임스 흠정역 (삼상16:23b) - 라는 말씀이 있다. 머나먼 미국 아틀란타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리 某 牧師라는 분의 설교 한 대목이 생각이 난다. 주일예배 시간에 일해도 상관없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신경 안 쓴다. 담임 목사는 예배시간에 빠지면 지옥 간다고 할지 모르지만 예배시간에 일(아르바이트)을 해도 괜찮다. 다만 예수님만 섬겨라. 주일예배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일자리(일터·직장)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열심히 일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 성수주일을 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도의 자격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강조하는 한국 대부분의 목사들의 논조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그러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듯이 우리는 일상에서 감사가 먼저고 그 다음이 기도라고 했다. 또 십일조 문제도 그렇다. 어떤이는 십일조가 구약 시대에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분깃이 없었으므로 이들의 생활을 위해 십일조를 제정한 구약시대의 하나의 규정이라고 주장하고 신약시대에는 일반 감사헌금 그리고 구제헌금에 치중하는 것이 새 시대의 규정이라고 주장하는 목사도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구십프로는 지금도 십일조가 성도의 기본 책무다. 믿음의 정표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 리 某 牧師는 일프로의 십일조도 있다며 십일조를 떼 먹지만 말아라. 하늘의 법이니 지켜야만 우리가 복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육십평생 살아오면서 일프로의 십일조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 나름 경천동지(驚天動地) 하였다. 아뭏던 우리는 감사는 하지 않으면서 항상 구하기만 한다며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행위라고 일갈 했다. 감사치 않으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아뭏던 리 某 牧師의 논조 중의 하나인 간구보다 감사가 먼저다라는 말에 주목해 본다.
불면으로 고통스럽게 몽롱한 밤을 지새우면서 기도와 찬송을 반복하는 가운데 온갖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문득 14년간 택시 운전 할 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택시 운전을 하게 된데 대한 감사의 기억이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는 막장(원래 탄광의 괭을 일컬얻지만 지금은 택시를 가리킨다)택시. 중학교 중퇴에다가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나에게 있어서 고용해준 것 이것 만으로도 택시업체에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어쩌다 막장일이라고 하는 택시까지 내가 하게 되었나. 여태까지 직장생활 한다고 주일성수도 제대로 못하는 삶을 살면서 담임 목사의 질책(믿음이 없고, 믿음이 연약한 여러 성도들에게 본이 안 된다며)을 당해왔는데 이제는 아예 주일날 쉬지 않는 운수업으로 떨어지다니. 이렇게 살다가 나의 꿈인 글만 쓰면서 사는 삶은 영원히 오지 않는게 아닌가? 원망과 불평이 나왔다. 아니 나는 열 여덟 중학교를 중퇴하는 그 순간부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며 살아온 것 같다. 목사의 자식이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나는 꿈의 사람 사브넷바(요셉)와는 전혀 다른 삶을 출발했다. 사브넷바가 아라비아 상인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 간 나이가 열 일곱, 나보다 불과 한 살 적은 같은 청소년이었다.
60여년 전에 나는 목사(高神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연세가 무려 52세가 되어서 나를 낳으셨는데 그렇게 태어난 나는 1년 8개월 만에 소아마비에 걸려 하지가 완전히 마비가 되고 말았다. 나의 인생은 이렇게 시작 되었는데…. 이것을 영적인 눈으로 보면 분명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캐치하지 못했다. 태어난 가정도 자란 환경도 나는 특수하였다. 태어나 보니 나에게는 두 명의 이복 형님이 계셨는데 큰 형님은(큰 조카가 나 보다 두살 적음) 나의 아버지 뻘이었고 둘 째 형님은 나보다 무려 18살이나 터울져 있었다. 게다가 후처로 들어온 나의 어머니는 전 남편의 딸을 데리고 들어오셨는데 이 누님도 나보다는 무려 16살이나 나이가 많은 누님이셨다. 故 육영수 여사와 동갑이라고 알려진 어머니. 나를 낳으신 어머니는 내가 8살 나던 해에 간경화로 돌아가시고 나는 9살 때 부터 새 어머니 손에 의해 양육되어졌다. 나의 친 어머니보다 두 살 많으셨던 새 어머니는 자식을 놓지 못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所生이 없으셨다. 대신 일본에서 교육을 받으신 분이셨으므로 인품과 학식, 신앙만큼은 남다른 분이셨다. 성도가 오십명 넘는 곳도 있었지만 나는 거의 산간오지 성도가 열명 내외의 교회로만 전전하며 살았다. 하지 마비로 기어다녔던 나는 여섯 날 나던 해에 현신애 권사님의 안수기도로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치유를 받고 보조기를 한 채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어린시절 그리고 학창시절은 이렇게 이어졌다. 또한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평균 2년 반에 한 번씩 임지를 옮기신 아버지를 따라 나는 전학을 다녔다. 어린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는 과정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나는 다리 병신이라고 참으로 많은 놀림을 당하며 살았다. 어린 나에게 있어 정신적 안착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경상북도 內를 나는 동서남북으로 오가며 살았다. 공부에 적응도 친구에 대한 적응도 환경에 대한 적응도 하지 못한 인생. 그 실체를 나는 어릴 때부터 뼈저리게 체험하며 자라왔다. 국민학교 입학은 대구(‘70년 당시 경북 달성군 월배읍)에서 했지만 오지중의 하나인 경북 청송에서 중학교 졸업을 5개월 남겨놓고 문교부가 정한 공식적인 교육이수를 마감하게 되었다. 내가 18세 나던 해에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내려오시던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말았다. 평소 강단에서 설교하시다가 소천하는게 당신의 꿈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천을 한게 아니라 중풍으로 인생을 마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 쓰러짐은 나의 인생에 대 격변을 안겨 주었다. 나의 꿈과 희망 모두가 송두리째 사라졌던 것이다.
노후가 전혀 대비 되어 있지 않은 아버지는 결국 고향으로 내려와 작은 집 문간방에 세를 얻어 새어머니와 나 이렇게 셋이서 살게 되었다. 한 1년을 그렇게 살다가 영세민 자격을 얻은 다음 다른 집으로 월세방을 옮겨 나왔다. (실은 내가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였던 박근혜씨에게 도와 달라고 청와대 민원실로 호소의 편지를 보낸 뒤에 얻은 영세민 자격이었다. 이때가 10.26 사건이 일어나기 8개월 전 일이었다)
대부분 또래 친구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에 몰두 하고 있는데 반해 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인생 길을 걷게 되었다. 백마(지금의 일산)의 시계수리점을 시작으로 서울로 들어와 세검정에 있는 신문 보급소 옥수동의 자개농방을 거쳐 대구로 내려와 안경제조회사의 종업원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자양동(건국대 후문) 시장내에 있던 모자 만드는 보세공장에서 일을 하기도했다. 아버지가 소천 하시고 나는 낯선 고향 땅에 머물게 되었다. 아내를 얻은 나는 포장마차를 조금 하다가 나는 구두닦이로 생계를 이었고 아내는 식당. 날품 밭일등 그야말로 온갖 일을 다해가며 삶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출석하던 교회의 주선으로 결혼식을 올린 다음 충남 서산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서산에서 분식점을 열었으나 그때 아내가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 더 이상은 분식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나혼자 분식점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매일강좌 서산지사라는데 주급을 받아가며 일을 했으나 생계엔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서산에서 약 9개월 정도 살다가 딸 아이를 놓고는 천안으로 이사를 나와 인쇄소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5년 가까이 근무를 하다가 마침 대구에 있는 영남일보에서 복간(復刊 – 언론 통페합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신문사가 문을 열게됨)기념으로 편집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지만 1차 면접에서는 통과(아마 인쇄소에서 편집일을 했던것이 참작이 된 것 같다)되었으나 2차 면접에서 장애가 심하다는 이유로 낙마하고 말았다. 나는 정신적 고통이 너무 심한 인쇄소를 떠나 수원에서 전자 임가공업체를 하고 있는 친구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근무를 하면서 친구라고 무슨 특혜를 받거나 한적은 없었다. 오직 현장 라인에서만 일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때가 내가 사회로 진출한지 10년이 되는 해였던 것 같다. 사브넷바는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간지 10년만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인생 반전을 이루어 냈지만 나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감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산 사브넷바. 감사는 커녕 삶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한 나. 두 사람의 십년후의 삶은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이곳에서 5년간의 근무를 마친 나는 친구의 주선으로 장애인복지 공장인 무궁화동산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곳은 삼성전자에서 파견나온 직원들이 관리를 하는 곳이었고 또 이곳에서 일하는 장애인들 모두는 한결같이 전문대졸 이상들이었다. 최하가 고등학교 졸업이었는데 그나마 고등학교 졸업자는 몇 명 되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라인 관리자인 직장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나로서는 기가 죽는 판이었다. 모든 생산 및 자재 입출고 관리는 엑셀프로그램으로 하였고 보고 및 각종 서식과 프리젠테이션은 삼성에서 독자 개발한 정음(訓民正音)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었다. 주임. 대리. 과장. 차장. 부장. 공장장 모두의 직위는 삼성전자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중학교 중퇴인 내가 이곳에서 일하기엔 너무나 버거웠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말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가족을 위해 이를 물고 버티어 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속에서도 나는 감사를 하지 않았다. 왜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야만 하나 라며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관두게 되었다. 이곳 무궁화동산에서 근무하면서 내 인생에 유익을 준게 하나 있었다면 일본의 교환근무였다. 일본 전역에 5개 권역으로 나뉘어 장애인 전용 공장이 있었는데 내가 근무한 곳은 오이타현 내 벳부에 있는 태양의 집이었다. 벳부는 원래 온천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또 하나의 명물이 바로 이 장애인 전용 공장이었다. 이곳 태양의 집 안에는 혼다태양을 비롯하여 혼다 R&D태양. 오므론태양. 미쓰비시 상사태양. 덴쇼태양. 후지쯔태양. 소니태양 등 일본 굴지의 대기업들이 이곳에 입점을 하고 장애인을 고용하여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침 무궁화동산과 혼다태양 그리고 혼다R&D태양과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상·하반기로 나누어 교환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운 좋게도 내가 뽑혀 1개월간 근무를 하고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체류를 하는 동안 일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살아온 나에게는 문화적 충격에서부터 시작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나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였고 또 일본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겠다는 마음도 가지게 되었다. 무궁화동산에서 근무하면서 내가 유일하게 감사하였던 것이 바로 이 교환근무였다. 일본에서의 근무도 나름 경력에 반영되는 것 같았다. 무궁화동산을 나와 나는 또 직장을 구해 나섰다. 인쇄소의 도안과 편집일 어찌보면 그것이 나의 적성에는 가장 어울리는 직종이었지만 출판사가 아닌 인쇄소에선 나에겐 비전이 없었다. 그 뒤 10여년간 몸 담았던 분야가 전자 임가공이었으므로 결국 그 분야의 일자리를 알아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식당개도 3년이면 컵라면을 끓여먹는다고 한다. 아무리 전자에 문외한이라고 하나 나에겐 이미 10년의 짬밥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나의 나이가 38세. 생각보다 쉽게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전자공학 전공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수학적 수치에 상당히 둔하였다. 그러다보니 저항(抵抗)값 하나 제대로 읽을줄을 모르고 일해왔다. 대신 실무가 아닌 데이터분석등 이론 만큼은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하였다. 또 무궁화동산에 있으면서 어깨 넘어로 익힌 것이 한 몫을 하여 나는 이곳에 품질 대리로 들어가게 되었고 1년 반만에 과장을 거쳐 품질차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사실 차장이라고 해봐야 중견 기업체도 아니고 임가공업체의 차장이 뭐 그리 대단하랴. 그러나 어찌 되었던간에 중학교 중퇴 실력으로 그것도 장애인으로서 차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불혹(不惑)에 들어서고 나서다. 그러나 나에게는 깊은 감사가 없었다.
열 아홉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거의 22년 가까이 일을 해온 셈이다. 어떨 때는 일주일 내내 승용차를 끌고 출장을 다녀야먄 하는 격무속에 육신이 너무 힘들어 쓸어질뻔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직장을 관두고 생소한 보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 문제 있어서도 나는 하나님께 자문을 구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자문을 구하기는커녕 아내의 반대도 무릅쓰고 화재보험대리점을 개설하게 되었다. 졸지에 내가 사장이 된 것이다. 1년 정도 아무런 수익도 창출하지 못하고 벌어놓은 돈마저 야금야금 까먹고 결국 빚을 지게 되었다. 또 하나는 이 때 출석하고있던 개척교회에서 교회건축을 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어놓았다. 눈치 빠른 아내가 살고있던 빌라를 혹시 담보설정하여 자기몰래 건축헌금을 할까봐 나에게 선재 제동을 걸고 나왔다.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마을입구에 땅을 매입한 아버지가 草家로된 교회를 헐고 새로 예배당 건축에 나섰는데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 시찰. 또는 노회를 다니며 건축헌금을 구걸하다시피 하여 예배당을 지었던 기억이 났다. 젊은 목사가 지하 3층 물이 줄줄 새는 예배처소를 벗어나 새로 예배처소를 짓겠다는데ᆢᆢ.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난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 정말 간절히 무릎을 꿇고 여쭈어봐야 했었다. 그런데 기도를 하지 않았다. 얼마있지 않아 담임 목사가 내가 앞장서 주길 간곡히 청해왔다. 대부분 짝 믿음 가정이었기 때문에 집사님이 앞장 서주지 않으면 아무도 헌금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나는 아내가 이미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32평 짜리 빌리를 담보로 교회건축 5천만원을 하게 되었다. 그 보상으로 나는 안수집사의 임직을 받게 되었다. 어찌보면 무대포였으리라.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이해가 국민의 정부 말 카드대란이 발생한 해였는데 결국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집을 날려버리고 가정이 해체가 되는 참화를 겪게된다. 인생 황금기라고 하는 45세때였다. 나는 살아남기위해 다시 취직을 했다. 여전히 차장이라는 타이틀에 고용은 되었으나 이미 나의 정신은 충격의 여파에 빠진 상태였으므로 업무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한 군데(평택에 있는 반도체 업체로 지금까지 내가 몸담았던 직장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업체였다)업체에 취직을 했다. 수원서 평택까지 승용차를 끌고 왕복 2시간 반을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였는데 다니다보니 사실상 부도가 난 업체였던 것이다. 6개월 가까이 다녔으나 월급 한 푼 받지 못하고 기름값 정도 그것도 가불형식으로 받아내곤 하였다. 집에는 난리가 났다. 쌀 한포대 살 돈도 없었고 난방도 다 끊긴 상태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이웃 교회 사모님이 주는 쌀 한포대로 겨우 연명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직장을 관두고 다른 곳에 취직을 하였다. 취직한지 한 달 만에 나는 그곳을 나와야 했다. 낮에는 근무를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사장이 알게 된 것이다. 결국 한 달 월급만을 받은채 나오고 말았다. 아내가 이혼을 선포하고 나섰다. 나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담임 목사가 나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다. 심방 아니 아내와 면담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일체의 액션도 취해주지 않았다. 결국 아내와 23년간의 결혼생활을 마감하고 남남이 되어버렸으며 교회를 건축하고 안수집사 임직을 받은 교회(합동측)와도 결별을 고하게 되었다.
오갈데 없어진 나는 나의 소지품을 직장 후배집에 잠정적으로 맡겨놓고 역시 직장 후배로서 미혼으로 살아가는 친구집에 얹혀살며 택시를 하게 된 것이다.
감사로 시작하지 않은 삶. 그리고 감사하지 않은 삶의 결과는 이렇게 전개되어졌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왔더라면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께 진지하게 여쭙지를 않았다. 주 · 야간 교대근무를 하면서 나는 잠실로 교회를 다녔다. 새벽 4시에 교대를 하였는데 주간에는 택시를 받아 손님이 많을 때는 입금을 해놓고 교회를 다녔고 손님이 없을때는 입금을 물어넣고 교회에갔다. 또 야간때는 잠간 눈을 붙이고 교회를 다니곤 했다. 한 5년간을 그렇게 다닌 것 같다. 내가 주일날 예배에 빠질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매주 대표기도 인도 전담자가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잠실 주 경기장을 메인스타디움으로 하여 열리는 국내외 마라톤대회로 교통 통제 있지 않는 날 주일만 빼고는 매주 잠실로 교회 출석을 하였다. 6년 가까이 잠실로 교회를 다니면서 고속도로 요금소 요금 징수원들에게 전도지와 설교 테이프를 참 많이 뿌렸으며 승객들에게도 전도를 많이 한 것 같다. 전도를 하다가 때때로 승객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아뭏던 이때가 가장 보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09년 지천명(知天命)을 목전에 둔 나에게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 이때 나는 여관에 달방을 얻어놓고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급성심근경색으로 관상동맥 하나가 막혀 요단강가에 이르게 되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 10분만 늦게 도착. 골든타임을 놓쳤더라면 뇌사로 숨졌을 거라고 했다. 심혈관중재시술을 받고 스텐드 두 개를 삽입한 나는 더 이상 일상의 무리한 생활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다니던 잠실로의 교회 출석을 중단하게 되었다. 병원 의사는 택시 운전마져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것만은 관 둘 수가 없었다. 택시를 처음 운전할 때만 하더라도 12시간 안에 삼백키로는 기본으로 영업을 하였지만 심혈관 중재시술후에는 이것마져 버그웠다. 이백키로 타는것도 체력에 부쳤다. 그리고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온몸 이곳 저곳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발생된 질환이 배뇨장애였다. 택시 운전을 처음 시작할 때보다 영업환경이 급격히 안 좋아진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배뇨장애로 인해 가까운 인천공항조차 갈 수 없게 되었다. 하루 입금을 하고도 다문 얼마간의 수입은 쥐어야 하는데 허구헌날 입금하기조차도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더 이상 택시영업을 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되어 만 13년 7개월간을 해온 법인택시 운전을 마감하게 되었다. 정부에서 조금 지원해주는 생활비로 나 한몸 건사하며 글이나 쓰며(2002년도에 소설가로 등단을 하였음) 살자고 한 것이다. 종일본가(終日本家) 은둔의 삶을 살며 나는 지난날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한평생 쉼없이 살아온 나에게 새로운 인생이 열렸던 것이다. 인생 2막이라는 말이있다. 인생 2막을 살면서 나는 지난온 날을 반추하며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되나 하는 문제에 천착해야만 했다. 일본 벳부에 있는 “태양의 집”의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겠다는 꿈을 십수년 전 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만만치 않다. 우선 내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를 통해 문서선교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는 생각에 요즘 그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기본은 감사가 우선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 1주일에 가사도우미 아줌마가 두 번 와서 반찬과 국을 마련해 주고 집안을 정리해 주는것도 감사며 믿음 좋은 사위와 딸이 언제나 나를 주 안에서 공궤해주는것도 감사요. 일상의 모든 것이 감사다. 찬송가 460장과 489장을 나는 즐겨 부른다. 그렇다. 한평생 나는 주님의 명령인 범사에 감사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 초로에 접어들어 범사에 감사를 하게되니 지난 세월을 허송한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내온거 주님의 크신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감사와 찬송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간구라는 사실 다시한 번 더 주목해본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는 성경 말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다. 매사에 성령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리라! .
첫댓글 감사합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너무 아파서 🥺. 주님만을 의지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정적인 문맥의 흐름을 보면서 글을 좀 쓰시는 분인가 싶었는데 작가셨군요. 혹시 선생님의 성함이나 등단작의 제목을 알 수있을까요? 아니면 블로그 주소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취미로 글을 쓰는지라 소통하고 지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