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부모를 모르는 천재
스티브잡스는 1955년 2월 24일에 고아로 태어났다.
엔지니어 출신의 양아버지 덕택에 기계에 대한 흥미가 남달랐던 잡스는 매일 라디오나 냉장고, 심지어는 자동차까지 뜯어보며 기계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 나갔다.
친구의 라디오를 뜯었다가 못쓰게 만드는가 하면 양아버지의 자동차를 망가뜨리는 등 늘 말썽을 피웠지만 잡스의 양부모는 잡스를 나무라기는 커녕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해 주었다.
양아버지로부터 본격적으로 전자제품에 관한 수업을 받은 잡스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 곧 많은 사람들로부터 전자제품의 수리를 의뢰받는 등 점차 천재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들은 장거리 전화기 블루박스를 내놓았는데, 이는 당시 미국의 전신전화회사인 AT&T의 네트워크를 교묘하게 이용한 획기적인 제품이었다.블루박스는 학생 신분인 그들이 만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불티나게 팔려나갔지만, 곧 불법이라는 신고가 들어와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다.
■ 대학생이 된 잡스
1972년, 잡스는 홈스테드 고교를 졸업하고 리드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의 새로운 문화를 접한 잡스는 여전히 기계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인도의 신비와 종교적 철학, 히피문화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그러던 그에게 우즈는 게임업체 아타리에서 일해 볼 것을 권했다.
아타리 개발부에서 일하던 잡스는 우즈와 함께 "퐁"에 심취해 있었다. 게임을 하느라 밤을 지샐 정도로 열성을 보이던 우즈는 잡스에게 퐁을 업그레이드할 것을 제안했다. 즉, 퐁 게임에 텍스트를 넣는 이색적인 아이디어였다. 부시넬은 두 사람이 제작한 퐁의 업그레이드판을 보고 상업성이 있다고 판단, 퐁의 싱글 플레이어버전인 "Break Out"을 제작하도록 했다. 각지에서 Break Out의 주문이 쇄도하면서 아타리는 물론 잡스와 우즈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들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었다.
잡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1983년까지 전 세계 게임시장을 석권하며 기세등등하던 아타리는 그러나 후에 일본의 닌텐도와 세가와 같은 게임 회사에 밀려 사라지게 되었다.
■ 애플컴퓨터 탄생하다!
1977년, 드디어 스티브 워즈니악, 마쿨라와 손잡고 애플을 설립한 잡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식을줄 모르는 그의 열정이 고아로 태어나 초라한 차고에서 작업에 매달리던 가난한 청년을 반듯한 첨단기업의 오너로 만들어 주었다. 애플이 설립과 동시에 컴퓨터산업의 선두주자로서 승승장구하자, 처음에는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투자자들도 너도나도 앞다투어 투자를 약속했다.
잡스는 이것을 기반으로 더 작고 더 빠르며 더 나은 성능을 가진 컴퓨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애플 I을 발표하면서 컴퓨터산업의 미래를 연 그가 이제 모든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야심을 세운 것이다.
■ 애플, 꿈의 세계를 열다
1977년 4월 16일, 제 1회 웨스트코스트 컴퓨터 전시회를 통해 애플 I을 능가하는 강력한 성능의 애플 II가 발표되었다. 당시 전시회장에 마련된 애플부스는 애플 II의 뛰어난 성능과 화려한 컬러모니터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 IBM과 같은 메이저급 제조회사에서조차 당시 컬러모니터를 개발할 능력이 없었으며, 단지 연구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스티브 잡스가 이끄는 애플의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잘 알 수 있다.
개인용 컴퓨터 즉 PC(Personal Computer)라는 개념조차 잡히지 않았던 당시, 잡스와 우즈(스티브 워즈니악)가 표방한 것이 "우리는 우수한 컴퓨터를 개발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연다" 였기 때문에 애플은 이 부문에 대한 연구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애플 II는 이러한 애플의 기업이념을 고스란히 담은 진정한 의미의 첫 작품이었다. 강력한 성능과 작은 크기, 화려한 컬러모니터로 무장한 애플 II는 웨스트코스트 컴퓨터 전시회장을 찾은 13,000여명의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또한, 당시 애플 II의 성공과 함께 화제를 모은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깜찍한 애플의 사과 모양 로고였다. (잡스가 도안하였다.) 애플의 로고는 마치 유행처럼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번져 셔츠나 스티커, 노트 등이 제작되는 등 큰 인기를 모았다. 우스갯소리지만 왜 잡스와 우즈가 그들의 컴퓨터와 회사 이름을 애플(Apple)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설들이 많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이 잡스와 우즈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비틀즈의 음반회사 명칭이 당시 애플레코드사였다는 것이다.
■ 잡스의 기발한 경영법
사실 애플의 성공은 애플 II의 강력한 성능 덕분이기도 했지만, 잡스의 기발한 경영법도 애플의 성공에 한 몫 단단히 했다. 첫번째는 회사내에서 인력과 돈을 들여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애플 외의 제작자를 끌어들여 애플 II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한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78년 6월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디스크Ⅱ라는 FDD였다. 새롭게 등장한 이 저장장치는 케이블로 본체와 간단히 연결되는 외부기억장치였다.(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이와 같은 외장형 FDD가 많았다)
당시 이러한 외장형 드라이브를 채용했던 PC는 탠디라디오사 제품과 애플Ⅱ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당시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에게 큰 인기가 있던 프로그래밍언어인 파스칼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애플의 전략은 곧 커다란 효과를 나타냈다. 비지칼크 이외에도 워드 프로세서인 "워드 스타", 데이타베이스 프로그램인 "d Base Ⅱ"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뒤를 이어 탄생했고 이같은 훌륭한 소프트웨어의 힘으로 애플 II는 더 많은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다.
두번째는 학생들에게 자사의 컴퓨터를 이용한 교육 시스템을 장기적으로 계획한 것이다. 애플은 그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아이들은 못참아"라고 명명된 캠페인을 펼쳐 캘리포니아주의 각 학교에 한 대씩의 애플Ⅱ를 기증했다.
애플의 이러한 전략들은 결국 장기적으로 회사에 직접적인 자산이 되었다.
버클리공대 대학원생이었던 앤디 헤르츠펠드를 애플의 빅팬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쉐어웨어를 주로 개발하던 그는 애플을 만나자마자 곧 애플의 직업프로그래머로 변신했다. 그의 첫 작품은 당시 대문자만 나오던 애플Ⅱ의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매킨토시용 프로그램을 개발해 애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애플은 달랐다.
1981년에는 한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IBM이 드디어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IBM은 다른 제조사들과 달리 자사가 개발한 시스템을 공개하여 많은 프로그램 개발자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수적으로 우세한 IBM이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잠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물량이나 규모 면에서 애플보다 우세했던 IBM의 시장참여에 많은 제조사들은 긴장했다. 그러나 애플은 달랐다. 잡스는 광고를 통해 "애플은 새로운 경쟁자를 진심으로 환영한다."라는 문구를 내보내며 도전자들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와 자신감을 표시했다.
그러다가 1983년 1월, 매킨토시 프로젝트와 별개로 애플 IIe가 발매되었다.
MOS Technology/SynerTek 6502 1MHz의 고성능 프로세서를 장착한 애플 IIe는 애플이 내놓은 가장 성공한 기종 중의 하나였다. (국내에서도 1980년대에 Apple II/IIe 호환기종이 많이 사용되었다) 애플 IIe는 80컬럼 디스플레이 기능과 소문자 표시 기능을 제공했으며, 기본 64KB 램에 뱅크 개념을 도입하여 128KB까지 램을 확장할 수 있었다(확장슬롯 1개 부착). 또한 오픈 애플과 클로즈 애플키 등을 처음 제공했고 보조슬롯(auxiliary slot)을 지원했다. 키보드 역시 촉감이 좋은 키보드로 교체되었다. 애플 IIe는 한 달에 6~7만대 가량 판매되었는데 이것은 애플 II+의 판매량에 비해 두 배나 많은 것이었다. 또한 경쟁기종으로서 많은 기대를 모았던 IBM PC jr가 히트하지 못하면서 애플 IIe는 1983년부터 1993년까지 10년간 꾸준히 판매된다.
■ 성공, 그리고 시련
1983년 발매된 애플 IIe가 대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같은 해에 발매되었던 애플의 실패작 "Lisa"가 가려져 있다.
리사는 애플 시리즈와 달리 호환성이 뛰어났고 소형 마우스가 달려 있어 일일이 키보드로 명령어를 입력할 필요가 없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적용한 놀라운 컴퓨터였다.
그러나 1만 달러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가격이 문제였다. 경쟁사인 IBM이 경쟁기종으로 내놓은 XT(eXtented Technology,)는 8088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사용하였으며 내부는 16비트, 외부는 8비트로 처리하도록 설계된 컴퓨터였다. IBM XT는 리사에 비해 기능은 조금 떨어졌지만 가격 면에서 리사를 압도할만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시장은 IBM XT의 차지가 되었고 리사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애플 III의 실패와 리사의 실패로 잡스는 경영진 개편을 계획한다. 그러나 잡스는 이 계획이 나중에 눈물을 머금고 15년간 애플을 떠나야만 하는 사건의 서곡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잡스는 함께 애플을 설립했던 마쿨라에게 CEO직을 맡기려고 했으나 마쿨라는 한사코 이를 거절했다. 대신 마쿨라는 당시 펩시콜라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던 존 스컬리를 소개했다. 당시 마케팅부문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스컬리는 젊은 잡스가 나이답지 않은 두둑한 배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CEO직을 수락한다.
그 해 1월 24일, 2,495달러에 판매를 시작한 매킨토시 128K는 모토로라 MC68000 8MHz프로세서에 128KB의 기본 메모리를 장착했으며 최초로 GUI방식을 채택했다. GUI란 Graphic User Interface의 줄임말로, 컴퓨터의 명령들을 타이핑 대신 마우스로 가리키거나 클릭함으로써 정보를 입력하고 출력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리사보다 훨씬 싼 가격에 야심작으로 내놓은 매킨토시 128k는 당초 애플이 기대했던 판매량을 훨씬 밑도는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사용자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잡스가 고집하는 고성능의 비싼 컴퓨터가 아니라 값이 저렴하고 실용적인 컴퓨터였으며 이 점은 스컬리에게 있어 잡스를 트집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결국 스컬리는 부진한 경영실적을 이유로 이사회를 소집, 애플 III와 리사의 실패, 매킨토시 128K의 판매부진으로 인한 애플의 자금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사진의 승인을 얻어 잡스를 애플에서 몰아내고 만다. 인생 최대의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잡스는 자신이 직접 만들고 일구어 놓은 애플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마침내 애플은 스컬리를 새 회장으로 맞아들였고, 잡스는 1억 달러가 넘는 주식만 손에 쥔 채로 터벅터벅 애플을 나왔다. 1985년의 일이었다.
잡스는 모든 것을 잊고 유럽으로 훌쩍 자전거여행을 떠났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고성능 컴퓨터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도저히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내쫓은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재기하고 싶었다. 그 어느 때보다 그는 투지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3개월의 방황을 마치고 잡스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새로 창업할 회사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계획을 세우며 시간을 보냈다.
■ 새로운 도전, NeXT 와 Pixar Studio
새로운 회사를 세울 만반의 준비를 끝낸 잡스는 드디어 1985년, 고성능 컴퓨터 개발회사 넥스트를 설립했다. 넥스트의 설립은 애플 II를 통해 모든 사람이 컴퓨터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시대를 지향했던 그의 생각이 전문가를 위한 고성능 컴퓨터의 생산으로 옮겨진 최초의 산물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넥스트는 모든 면에서 애플보다 혁신적인 컴퓨터를 만들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디자인과 성능, 그리고 모든 면에서 세상 어느 컴퓨터보다도 뛰어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잡스는 직원 하나 하나를 채크하며 정열을 쏟았다. 그야말로 컴퓨터에 미친 사람 같았다.
한편 1985년, 잡스는(아직 애플에 몸담고 있을 때)스타워즈(1977)를 감독했던 조지 루카스가 자신의 스튜디오를 매각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흥미를 느낀 잡스는 차를 몰아 샌라파엘에 위치한 루카스필름을 찾아갔다. 그러나 루카스필름은 불법체류자들이 오가는 구질구질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잡스는 적지않게 놀라고 말았다. 정체불명의 이 별볼일없는 곳에서 스타워즈 같은 마술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컴퓨터 화면에 뜬 고화질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싹 정리되었다. 잡스는 그림들이 모두 컴퓨터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잡스는 이 회사를 인수하고 싶어졌다. 당초에 조지 루카스는 3천만 달러에 스튜디오를 매각하려고 했지만 처음 GM과 필립스로 구성된 컨소시엄과의 거래가 깨지면서 자금문제로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잡스는 이 사실을 알고 3천만 달러의 1/3에 불과한 1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스튜디오를 사들이는데 성공했다. 후에 애플에서 나와 넥스트를 설립하고 나서 1986년 2월 최종적으로 스튜디오를 사들인 잡스는 이름을 Pixel과 Art를 합쳐 Pixar Studio라고 붙였다.
픽사는 48명의 그래픽 전문가가 뭉친 집단으로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또 하나의 천재집단이었다. 조지 루카스 산하에 있을 때는 자금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스티브 잡스 넥스트 회장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이 천재들은 다시 자유로운 작품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한편 1988년 10월, 드디어 넥스트에서 제조한 "넥스트 컴퓨터" 가 일반에 공개되었다.
매킨토시보다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고성능 컴퓨터 넥스트를 두고 언론들은 "스티브 잡스의 부활"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토로라의 68030/ 68040 칩을 이용한 워크스테이션급 컴퓨터였던 넥스트는 검은색의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고 보드에 입출력 기능을 모두 담아 음악 제작용으로도 사용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UNIX체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객체지향적인 구조였으며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잡스는 재기에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언론들의 대서특필과 반대로 넥스트 컴퓨터는 팔리지 않았다.
성능은 그 어느 기종보다 우수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가격이 문제였다. 당시 대학생들이 즐겨 쓰는 컴퓨터의 가격이 대당 1,500달러선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넥스트의 가격은 무려 1만 달러가 넘었다. 가격을 대폭 내려야 했지만 잡스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1985년부터 3년 동안 쏟아부은 정열과 자금, 연구진들의 노력이 아까와서 견딜 수 없었다.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는 문제였다. 결국 다른 판매방식을 모색할 뿐 가격은 그대로 1만 달러로 유지되었고, 넥스트 컴퓨터는 잡스의 또 다른 실패작으로 남게 되었다.
■ 토이스토리의 성공
그러나 그러는 사이, 픽사는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1989년, 컴퓨터 그래픽(CG)만으로 제작된 "틴 토이"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면서 픽사는 서서히 그 명성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픽사의 제작진들은 잡스의 대대적인 자금지원과 그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풀 3D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월트 디즈니로부터 합작요청이 들어오고, 잡스는 픽사가 의뢰한 전체 제작비 5천만 달러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당시 풀 3D 애니메이션은 그 가능성은 인정받고 있었지만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며 아직 누구도 시도해본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월트 디즈니와 같은 큰 기업도 선뜻 제작에 나서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러나 잡스는 픽사가 이미 "틴 토이"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실력파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95년 11월, 픽사의 첫번째 극장용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가 마침내 미국 전역에서 개봉되었다.풀3D CG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연출하는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화면에 관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도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여기까지 발전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이 스토리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푹 빠져들 수 있는 탄탄한 시나리오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 덕분에 감독 존 래스터가 제68회 아카데미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하였기도 했다. 토이 스토리는 개봉 첫주에만 무려 419만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총 수익은 1억 8천만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곧바로 출시된 각종 캐릭터 상품은 실로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가 영화 총수익의 3배가 넘는 수익을 잡스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잡스는 즉시 픽사의 주식을 22달러에 내놓았고, 증권사는 곧 픽사의 주식을 사려는 투자자들로 만원이 되었다. 픽사의 주가는 순식간에 39달러까지 치솟았고 이로써 잡스는 10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토이 스토리의 성공에 이어 픽사는 1998년 두 번째 작품 "벅스 라이프"를 선보였고, 이 작품 역시 커다란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넥스트 컴퓨터의 실패로 한때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전폭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주인 스티브 잡스를 위해 픽사가 크게 보답한 것이다. 픽사는 이어 1999년에 "토이 스토리 2"를, 2002년에 "몬스터 주식회사(아카데미 주제가상)", 2003년에 "니모를 찾아서"를 개봉, 잇달아 대히트시키면서 세계 최고의 3D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우뚝 서게 되었다.
■ 끊임없는 도전, 끝나지 않는 신화
픽사의 대성공은 잡스에게 커다란 행운으로 다가왔다.
넥스트 컴퓨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애플 시절 못지 않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애플의 사정은 달랐다.
잡스를 쫓아내고 나서 애플은 그가 이룩해 놓았던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성과를 모두 상실한 상태였으며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애플의 뛰어난 제품디자인은 이미 다른 컴퓨터 회사들의 개성 없는 것을 따라가고 있을 정도였다. 애플은 거의 파산직전이었다. 1992년 주당 60달러에 육박하던 주식은 다른 컴퓨터 제조사의 주가가 3배 가까이 뛰어오르던 호경기였던 1996년 말에 오히려 17달러로 곤두박질쳤으며 연간 매출도 110억 달러에서 70억 달러로 내려앉았다. 애플의 경영진은 더 이상 대안을 찾지 못했고, 결국 길 어밀리어 애플 회장은 스티브 잡스를 찾아가 다시 애플로 돌아와 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잡스에게 애플의 임시 경영 고문직을 부탁했고, 잡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자신이 만든 꿈의 기업 애플의 주인 자리에 다시 올라설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잡스는 자신이 만든 기업을 자신이 직접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연봉을 단 1달러만 받을 것을 선언하고 애플로 돌아왔다.
1996년, 애플에 넥스트를 매각하고 잡스는 애플로 다시 돌아왔다.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난 후 11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애플은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변해 있었다.
애플에는 직원들이 키우는 개들이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고, 복도나 문 할 것 없이 들어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보통이고, 업무 시간에 졸거나 아예 드러누워 자는 직원도 있었다.
잡스는 이런 느슨해진 분위기가 애플을 위기로 몰아넣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잡스는 길 어밀리어 회장에게 새로운 사칙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회사에서 개를 키우는 것을 금지하고, 복도에서 담배 피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직원과 개 알러지가 있는 직원들을 배려한다는 것이었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감봉 내지 퇴사시킨다는 초강수였다. 단 한 명의 직원을 위해서라도 직원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금지하는 대신, 모든 사원을 위해 우선 식당을 다시 짓고 특급요리사를 데려와 질좋은 서비스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강력하게 반발하던 직원들도 차츰 깨끗해지는 환경과 개선된 식사시설 등에 만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애플은 점차 이전의 의욕적이고 도전적이며 개성넘치는 분위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하고 싶은 것만 찾던 애플의 직원들이 스티브 잡스라는 확실한 책임자 밑에서 철저한 관리를 받게 되면서 애플은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1997년 9월, 이사회는 결국 길 어밀리어 회장을 해임하고 스티브 잡스를 애플의 임시 회장으로 선출하게 된다. 잡스는 그 후 1년에 걸쳐 이전의 실패를 바탕으로 새로운 컴퓨터 개발에 몰두했다. 더 이상 그는 전문가를 위한 고가의 고성능 컴퓨터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잡스는 애플의 새로운 기본 정책인 단순함, 편리함, 기능성에 인터넷 사용 기능을 더한 저가형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998년 드디어 애플은 새로운 컴퓨터를 발표했는데, 바로 "iMac"이었다.
iMac은 매킨토시의 저가형 모델로 성능은 물론 디자인에서 소비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내부가 훤히 보이는 반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와 밝은 색상은 소위 "튀는 디자인" 의 대표격으로 각광받았다.
사람들은 처음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돌아왔을 때 그를 믿지 못했다. 잡스를 둘러싼 많은 루머와 억측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한 번 실패한 사람은 다시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는 선입견도 강했다. 그러나 iMac은 이전에 잡스가 실패를 겪었던 것들과는 달랐다. iMac은 컴퓨터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1998년 7월 말까지만 27만 8천대의 경이로운 판매고를 올렸다. 애플은 곧 빨강, 오렌지, 파랑, 그린, 보라의 다섯 가지 색깔 iMac을 선보여 디자인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기능 면에서도 꾸준한 업그레이드를 통해 만족할만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땅에 떨어졌던 애플의 주가도 다시 뛰어올랐다.
1999년 말에 애플의 주가는 무려 118달러까지 올라갔으며 시장 가치는 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애플은 iMac시리즈를 비롯해 eMac, iBook, PowerMac, PowerBook, iPod시리즈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2000년 1월,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정식 회장으로 취임했다. 1985년 애플에서 내몰린 후 16년만의 일이었다. 세상은 그의 식지 않는 열정과 뛰어난 능력을 다시 한 번 인정한 셈이었다.
고아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 스티브 잡스. 그보다 더 성공한 사람,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도 있지만 그만큼 인생의 많은 면을 경험한 경영자는 드물다.
컴퓨터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유독 스티브 잡스를 "수퍼스타"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등장과 함께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했으며, 그 자신이 벤처 비지니스의 성공 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플 I의 탄생을 되새겨 보라. 보잘것 없는 사과상자에 그가 담았던 것은 컴퓨터라는 원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애플의 도전은 곧 스티브 잡스의 도전이다.
스티브 잡스는 앞으로도 그가 걸어온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며 진정한 "수퍼스타"인 그를 따라 수많은 "빅팬"들 역시 영원한 지지를 보낼 것이다.
첫댓글 감동이 있는글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해요
감사히 읽고 갑니다^^
잘봤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