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문학의 특징】
일찍부터 프랑스 국민은 타민족과의 접촉ㆍ마찰이 보다 빈번하여 인간 관찰의 세련된 천착취미(穿鑿趣味)를 그대로 그들의 문학에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끊임없이 새롭고도 살아있는 인간상(人間像)을 파악하려는 일관된 노력이 엿보인다.
이미 BC 1세기에 카이사르(시저)에 의하여 정복된 후 로마화한 골르(Gaule) 전역에는 갈로 로망(Gallo Romains) 문화가 찬란하게 개화함으로써 후에 프랑크족이 동쪽에서 침입하여 왔을 때는 오히려 정복자를 갈로 로망화하여, 그들의 왕인 클로비스(Clovis: 466∼511)를 대관(戴冠)과 동시에 그리스도교로 개종케 하였다.
그 뒤 그리스도교로서 유럽 여러 지역을 통일한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大帝)는 프랑스인의 시조와 같이 숭앙을 받으면서 형성되어가는 국민의식에 초점을 지어주었고, 그의 몰후(歿後) 31분된 강토 중의 하나가 오늘의 프랑스가 된다. 다시 샤를 8세(재위 1483~1498)의 이탈리아 원정은 르네상스 운동의 강력한 조류를 수입하여 프랑스의 문화의식이 로마의 그것을 계승하는 계기를 이루었으며, 중세기(中世紀) 십자군(十字軍) 전역(戰役)과 아울러 16세기 종교개혁(宗敎改革)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프랑스는 가톨릭을 옹호하는 중추적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문화 관념은 국민관념과 상반되는 일 없이 조화하며, 로마인의 정신적 후계자로서 그리스ㆍ로마 이래의 문화유산(文化遺産)을 다시 받아들여 그의 정신적 자원(資源)을 구하는 휴머니즘의 자세를 취한다. 이 휴머니즘의 정신적인 태도는 찬란한 17세기의 고전문학(古典文學)의 성숙을 거쳐서 계몽사상(啓蒙思想)으로, 대혁명으로, 그리고 왕정복고(王政復古), 제3공화제(第三共和制) 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연맥(連脈)을 지어 흐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형이상학(形而上學)도, 신학(神學)도 그것이 국민의 문화재(文化財)로 되기 위해서는 문학의 형식을 거쳤으며, 또 그것이 문학의 한 기능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대사상가나 대과학자가 동시에 유명한 문장가였다. 따라서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도 문화적인 여과(濾過)에 의하여 일반적인 지식으로 화하는 것이다.
프랑스 문학은 휴머니즘에 근원을 두고, 고전(古典)을 존중, 부흥하는 한편, 예리한 눈으로 현실의 인간을 관찰, 인간심리와 정열을 분석한다. 이와 같은 심리 분석적 경향은 몽테뉴ㆍ라신ㆍ스탕달ㆍ프루스트 등이 서로 뒤를 이으며, 인간혼(人間魂)의 비밀을 캐내고 있다. 그 인간들은 가령 어떠한 특이한 환경에 놓인다 하여도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에 접하는 것이다. 프랑스 문학은 전시대의, 아니면 동ㄴ시대의 문학이 표현한 인간상(人間像)의 보습(補習)이며, 시정(是正)이었다.
거기에는 한 사람의 괴테도, 한 사람의 셰익스피어도, 한 사람의 단테도 존재하지 않으나, 몽테뉴에 파스칼을, 데카르트에 볼테르를, 부알로에 보들레르를 병치(竝置)했을 때 그의 대립에서, 또는 그것을 넘어서 위대한 힘이 존재한다.
【중세문학(中世文學)】
프랑스말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한 골르족이 귀로 듣고 옮겨받은 라틴어가 변화하여 성립된 것이며, 처음부터 문학어(文學語)는 아니었다. 중세기에 있어서의 라틴어는 구라파 제국의 공용어였으므로 그에 의한 문학작품은 지식인의 손으로 씌어, 지식인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정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지식인에 의하여 사용된 라틴어와, 교육이 없는 민중이 귀로 듣고 배워서 와전(訛傳)된 라틴어의 새로운 언어는 그들의 토어(土語)인 셀트(Celte)어를 사멸(死滅)시키고, 로망어(Roman語)를 이루었으며, 그것의 최고문헌(最古文獻)은 842년에 쓰인 <스트라스부르의 선서(Les Serment de Strasbourg)>이다.
프랑스어에 의한 문학작품이 나타난 것은 원래 그 목적이 포교(布敎)에 있었던 만큼 라틴어 문학의 번역된 형식으로 된 <성 레제전(傳)(La Vie de St. Leger)>과 <성 알렉시스전(La Vie de St. Alexis)> 등과, 이어서 프랑스어 자체로 된 서사시 <무훈의 노래(Les Chansons de geste)>였으며, 주로 회교도(回敎徒)에 대한 그리스도교도의 투쟁을 노래하니, 그 대표적인 작품은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이다.
이와 병립(竝立)하여 아서왕(Arthur)의 전설을 중심으로 노래한 <브르타뉴담총(Roman breton)>은 <원탁 이야기(Les Romans de la table ronde)>라고도 부르며, 귀부인(貴婦人)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도(騎士道)의 연애를 취택(取擇)한다. 후세 작가들은 특히 가극(歌劇)에서 이것의 영감(靈感)을 많이 받고 있다. 이 무훈시(武勳詩)와 <브르타뉴담총>은 12세기에 걸쳐서 제작되어 유음배(遊吟輩: jongleurs)들이 귀족들의 성관(城館) 또는 시장 등을 편력하며 노래하고 다닌 것이다.
프랑스의 서정시(抒情詩)는 먼저 남방의 트루바두르(Troubadour)에 의하여 발달하였다. 본시 프랑스어는 오크어(langue d'oc)라는 남방어와 오일어(langue d'oil)라는 북방어로 구분되며, 오일어(語)가 발달되어 후일의 프랑스어를 이룬다. 트루바두르는 오크어로 노래한 시인들이며, 그들의 연애를 노래한 서정시는 당시의 유럽을 풍미하였으나, 13세기에 그들의 비호자(庇護者)이던 투를루즈 백(伯)이 알브 사교(邪敎) 토멸전(討滅戰)에 패멸(敗滅)함으로써 중세기를 장식하던 트루바두르군(群)도 사산쇠잔(四散衰殘)하였다.
이상은 모두가 주로 지배계급인 귀족사회의 환경ㆍ현실ㆍ이상을 반영한 문학이며, 이에 대립한 서민문학(庶民文學)으로서 양쾌방자(陽快放恣)한 문체로 된 속담(俗譚: fabliau)군(群)과 동물설화(動物說話) <여우 이야기(Le Roman de Renart)>는 골르인의 특징인 농조(弄調)의 신랄한 비판정신이 때로는 권력계급을 풍자해 가며, 민중을 대변하여 차츰 일어서 가는 서민층의 실력을 반영하고 있다.
중세기문학은 13세기의 우의문학(寓意文學) <장미 이야기(Roman de La rose)>를 고비로 하여 100년전쟁을 거쳐 쇠퇴하게 되고, 14세기 후반, 15세기는 현세적(現世的)ㆍ풍자적(諷刺的)ㆍ비판적(批判的)인 경향을 통하여 르네상스에로 옮겨지는 과도기에 위치해 있다. 중세의 연극(演劇)은 민중에게 교리를 설명할 목적으로 시작되며, 대규모의 종교극(宗敎劇)을 발전시켜 간 것이 직업화함에 따라 종교적 분위기를 이탈함에 이르고, 1548년에 종교극의 상연이 금지된 이후 민속연극(民俗演劇) 상연으로 완전히 전향(轉向)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라틴어 운문(韻文)으로 씌어오던 연대기(年代記)도 프랑스어로 된 산문(散文)으로 대치되며, 우수한 산문가(散文家)들을 내었다.
한편, 시가(詩歌)는 15세기에 들어 부르고뉴 궁전을 중심으로 수사학파(修辭學派)가 일어나서 형식적 기교에 흐르는 작풍(作風)을 이루었으며, 그 밖에도 샤를르 도를레앙 같은 우수한 서정시인도 있었으나, 누구보다도 비용은 프랑스 문학사상의 최초의 위대한 서정시인(抒情詩人)으로서, 무궤도(無軌道)한 생애에 궁핍과 죽음의 공포와 사랑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그의 자아심정(自我心情)에 충만한 영감(靈感)은 문예부흥(文藝復興)의 여명(黎明)을 고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중세기는 그리스도 교리의 냉혹한 전횡(專橫) 밑에 사색(思索)의 자유가 억압된 생활, 즉 종교의 시대였고, 문학작품은 거의 작자와 생애를 알 수 없는 무명씨(無名氏)의 것이 많았다. 그 반면에 르네상스 이후의 문학은 명백히 그것이 개인의 것임을 보여주며, 16세기에 이르러 자유사상(自由思想)과 자연ㆍ인생의 예찬이 시작된다. 여기에 교회의 규율이라는 질곡(桎梏)에서 벗어나려는 인간혼(人間魂)의 움직임이 있다. 마로는 의연이 신교도(新敎徒)의 편에 서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귀족 승려 등의 전권(專權)과 우열을 풍자ㆍ조롱하는 경묘(輕妙)하고 쇄탈(洒脫)한 시를 남겼다.
라블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승직에 있으면서도 방자한 생활로 각지를 방황하면서 어릿광대처럼 웃기며 진실을 말했다. 그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1534)를 저술했으며, 팡타그뤼엘의 입을 빌려 자연은 원래 선(善)하다고 말한다.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며, 자연의 성선(性善)을 믿는 것은 곧 르네상스의 정신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프랑소와 1세 왕이 이탈리아를 3차에 걸쳐 원정(遠征)하던 차에 당시 그곳에 찬란하게 개화하던 르네상스 문화와 접촉하여 많은 예술가를 초빙함으로써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인간관을 발견하고, 전 분야에 걸쳐 독창적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휴머니즘의 잠을 깨우고, 중세적인 모든 것과의 대립에 달했던 것이다. ‘결코 르네상스는 화려한 시대가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은, 이 시대는 중세적 잔재(殘滓)와 싸워야 했으며, 절대적 진리로 믿어지던 교리(敎理)에 이론(異論)이 생기는가 하면, 고대문화와 과학의 맹아(萌芽) 사이에서 신음해야 하고, 개인 간의 알력(軋轢)이며, 내란(內亂), 흑사병(黑死病)의 맹위(猛威), 대학살사건(大虐殺事件) 등 혼란을 극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몽테뉴는 시대를 초월하는 지성을 가지고, 생활을 기록하며, 인간지성(人間知性)에 회의(懷疑)를 품으면서 주의 깊게 자기를 관찰해 간다. 그에 의하여 탐구된 인간 소질은 다만 ‘나는 무엇을 아느냐?’로 표현되는 이념뿐이다. 그의 회의사상(懷疑思想)의 목표는 마음의 평화를 확보함에 있다. 그는 자연을 상냥스러운 안내자로 택하고, 자연이 그에게 준 바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인다. 이것은 라블레와 한가지로 르네상스의 철학이다. 그의 거작(巨作) <수상록(隨想錄)>은 결코 현대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프랑스 문학 사상 최대 걸작이다.
16세기 시가(詩歌)는 수사학파(修辭學派) 이후 플라톤 사상(思想)의 영향을 받은 리용학파에 이르러 내성적(內省的)인 난삽(難澁)한 시풍(詩風)을 보이며, 그 수령 세브(Maurice Sceve)는 상징파(象徵派)의 원조(遠祖)로 간주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시가(詩歌)는 롱사르를 중심으로 하는 칠성시파(七星詩派)의 결성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들은 죽은 고어(古語)에가 아니라, 산 자국어(自國語)의 개화에 영광을 주려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이탈리아 추종)追從)의 태도를 끊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어에 새로운 형식과 운율을 적용하며, 자국어에 의한 문학이 그리스ㆍ라틴어에 열등(劣等)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여야 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심정을 그리스 고전에서 전수(傳受)하여 본격적인 프랑스 고전문학의 형식을 마련코자 한 벨레의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顯揚)>(1549)의 선언이다, 이 시파(詩派)는 17세기 이후 망각(忘却) 속에 저버려져 있다가 낭만파(浪漫派)의 대두(擡頭)에 의한 서정취미(抒情趣味)의 발흥(勃興)으로 그 진가(眞價)가 다시 인정된 것이다.
【고전주의(古典主義)】
16세기 휴머니스트들은 중세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해 왔다. 17세기는 중세 붕괴에 필요했던 자유분방성(自由奔放性)이 정리되는 시대다. 중앙집권ㆍ절대군주제(絶對君主制)의 확립으로 사회의 질서가 정제(整齊)와 규율을 숭상하던 취미는, 문학에 반영되어 취미의 세련을 강조하는 고전주의(古典主義)의 본격적인 발전 단계로 들어갔다. 당대인에 관한 부알로의 날카로운 비판은 고대 모방에 의한 체계법칙(體系法則)을 요구하고, 그의 스승이며, 고전주의(古典主義)의 전형적(典型的) 시인 말레르브의 엄격한 시형(詩形)을 추앙(推仰)한다. 때문에 프랑스의 시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몰개성(沒個性) 속에서 서정(抒情)의 용천(湧泉)을 잃는다.
17세기 초부터 기성(起盛)한 살롱은 랑부예 후작부인(侯爵夫人: Marquise de Rambouillet) 등의 살롱을 중심으로 하여 온갖 장르의 문예가 생기게 되었고, 그것은 작태취미(作態趣味)의 발전에 알맞은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다. 이에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고전주의의 비판의 기준을 설정코자 창설된 관립기관(官立機關)이다.
고전주의 문학의 왕좌(王座)는 희곡(戱曲)이 차지하였다. 중세기의 종교극(宗敎劇) 이후 꾸준히 발전해 온 희곡은 1636년 코르네유가 <르 시드(Le Cid)>를 발표함으로써 전성기(全盛期)에 들어간다. 그는 윤리적 견지에서 인생을 관찰하며, 이상인간(理想人間)을 묘사하고, 그 반대로 라신(Jean Racine)은 현실 그대로를 직시(直視)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천성을 묘사했다. 라신에 있어서의 비극의 원천은 연애이며, 강렬한 삼정의 갈등이 비극을 자초한다. 몰리에르는 냉철한 비판안(批判眼)으로 사회상을 투시하고, 신랄하게 인간을 풍자하며, 성격의 약점을 척결(剔抉)함으로써ㅏ 포복절도할 희극을 꾸몄다. 이 불후의 3대 국시인(劇詩人들은 인간 감정의 보편성을 묘사하고, 다양한 성격을 창조함으로써 기계적인 규칙주의의 협착성을 극복하였다.
17세기ㅏ의 살롱은 많은 장르의 문학을 가꾸어 냈다. 라퐁테느는 경묘한 해학조(諧謔調)의 <우화시(寓話詩)>를, 라 로슈푸코는 격언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이기심의 소산이라는 것을, 그리고 라 브뤼에르는 <사람은 가지가지(Les Caracteres)>를 내놓았다. 그 밖에 회화적이며, 생기 있는 묘사로 이름 높은 레(Retz) 추기경의 <회상록>이 있고, 라파이에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은 로마네스크문학의 극치인 심리소설이다. 세비녜 부인의 서한(書翰), 보쉬에의 <추도문집(追悼文集): Oraisons funebres)> 등도 이 위대한 세기를 장식하는 작품들이다,
사상면에서는 데카르트가 <방법론(Discours de la methode)>(1637)을 저술, 합리주의 철학을 선도하고, 현대의 모든 사고방식의 규범을 지어주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문학상의 각성은 스스로 고대와의 비교를 보이면서, 고전주의의 붕괴를 유도하게 되었다. 권위에 대한 비판 반향은 증대해 가는 부르조아지(bourgeoisie) 세력 위에 새로운 문학정신을 낳았다. 고전파의 문학은 이성주의(理性主義)의 회의적ㆍ무신론적인 방향으로 신장, 영국의 계몽철학에 연결되고, 마침내는 시대를 비판함으로써 혁명의 소지를 만들어갔다.
18세기의 작가는 모두 지배층의 부패를 풍자했다. 보마르쉐의 <세빌리아의 이발사(Le Barbier de Seville)>(1775)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1781)은 혁명정신을 예고하였고,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L' Esprit des lois)>(1748)을 저술하여 삼권분립(三權分立) 입헌제도의 이론을 확립했다.
18세기는 볼테르ㆍ디드로ㆍ루소에 의하여 대표된다. 이들에 의하여 고전주의가 국가와 교회에 연결된 유대는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볼테르는 고전적 취미와 군주제도를 지지하면서 문학ㆍ철학ㆍ역사 분야 등 널리 사회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는 지배자의 교화에 의한 사회개혁을 기도하였으며, 루소는 고전주의의 몰개성(沒個性)에 대하여 자기고백의 형식으로 감성(感性)의 우위(優位)를 주장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이 사상은 현대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학적안 여러 부문의 근본문제의 근원을 캐어 준 것이다.
디드로를 중심으로 한 <백과전서(百科全書)>는 18세기 후반의 계몽사상을 대표한다. 그 밖에 18세기에는 17세기 초의 말레르브 이래 고갈(枯渴)되었던 순수서정(純粹抒情)의 원천이 셰니에에 의하여 소생하였다. 17세기의 고전주의는 왕조의 운명과 더불어 18세기에 멸(滅)했으나, 그의 이성적(理性的)인 문학정신은 현대에도 그 생명을 잃지 않고 있다.
【시민사회의 문학】
낭만주의 문학에서처럼 서민이 문학에 표현되기는 아마도 19세기에 비롯한다. 1879년의 대혁명, 나폴레옹의 전제, 7월 혁명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 전통은 근본적으로 파괴되었다. 혁명의 와류(渦流)에서 일조에 몰락한 귀족청년들은 그들의 도피유랑(逃避流浪)에서 외국문학의 진수(眞髓)를 체득한다. 스탈 부인은 독일문학의 명상취미를 수입했으며, 사토브리앙은 시적 감상(感想)이 넘쳐흐르는 유창한 산문소설로 대자연의 우울ㆍ비조(悲調)ㆍ유원(幽遠)한 맛을 노래했다.
여기서 낭만주의는 출발하여 변천이 심한 현실의 불안과 고독감에 젖어 문학은 주로 공상ㆍ명상의 가운데서 영감을 찾게 되었다. 라마르틴은 자연 속에 녹아들은 인간감정을, 비니는 철학적 명상으로 우주 속에서 생명의 진실한 의의를, 뮈세는 오로지 인간감정 속에 살며 지쳐버린 세기말병(世紀末病) 환자의 고뇌를 노래하고, 구하며 호소하였다. 위고는 낭만주의의 통솔자이며, 그의 희곡 <에르나니(Hernani)>(1830)의 상연은 고전취미 타도의 결정적인 일격(一擊)이었다. 그는 낭만파의 승리를 끌어들이고 이 신학파의 완전무결한 ‘아버지’로 군림하였다.
낭만주의ㅡ이 운동은 신비주의와 ‘예술을 위한 예술’에로 기우는 한편, 타방으로는 현실에로 향해가는 사실주의(寫實主義)에로 옮겨갔다. 시(詩) 우위의 문학이 시민사회의 발전과 함께 산문우위(散文優位)로 변해갔다. 발자크와 스탕달은 인간과 사회를 정확하게 관찰함으로써 각기 사실주의와 심리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그들에 의하여 시민사회가 관찰ㆍ비파노기고, 그 특징이 명백히 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정변은 물질지상주의를 가져왔으나, 문학은 사회와 인간의 기원(祈願)이 배치(背馳)되는 데서 과학주의적 낙관론을 버리고, 도리어 인생에 절망하며, 객관적 표상미(表象美) 속에 제작의 의ㅡ이를 찾게 되었다.
시가(詩歌)는 르콩트 드 릴(Lecone de Lisle)를 중심으로 하는 고답파(高踏派)의 시대로 되고, 소설에는 <보바리부인>의 플로베르가 나왔다. 일체의 주관적 망상을 버리고 인생을 객관안(客觀眼)으로 비판 분석하는 태도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문학에 적용하게 되고, 콩트의 실증주의(實證主義)에 영향을 받아 졸라(Emile Zola)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주의 문학으로 연장된다.
여기에 때를 같이하면서도 현실주의를 거치지 않고, 직접 상징파의 감성을 받아들인 시인은 보들레르이다. 그의 시집 ,악(惡)의 꽃>(1857)은 오랫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으나, 상징주의ㆍ순수시ㆍ초현실주의의 시원(始源)이 됨으로써 프랑스 문학사상에 획기적인 수확을 가져왔다. 보들레르를 시조로 하는 상징파는 베를레느ㆍ렝보ㆍ말라르메에 의하여 대표되며, 말라르메야말로 그 중심인물로서 그의 진지한 예술 탐구는 현실을 넘어 높이 관념계의 순수무구경(純粹無垢境)에 달하며,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에 의하여 소우주(小宇宙)를 건설하였다.
【현대문학】
20세기의 문학은 제1차 대전을 경계로 하여 전시대(前時代)를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와 함께 그것에의 비판에 몹시 동요하고 있다. 문화ㆍ인간성ㆍ평화 옹호의 회합이 많은 지식인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는 사실은 이것들의 위기 불안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에 있어서는 이 같은 새로운 휴머니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옹호가 개개인에 의하여 여러 가지의 입장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지드ㆍ발레리ㆍ프루스트 등은 각자의 작품으로 대전 후의 세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가 제2차 대전으로 돌입했을 때는 개개 입장의 많은 사람들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fp지스탕스 문학(반항문학)을 낳았다.
현대의 문학은 사회봉사의 문학이라고도 하겠다, 사르트르ㆍ카뮈ㆍ말로 등은 그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문학이 사회에 등을 지고는 잇을 수 없을 만큼 시대적 중압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기계화하는 인간을 시정하려는 휴머니즘의 태도, 인간상(人間像)의 참구는 끊임없이 해해지고 있다. - 손우성 : <문예대사전>(학원사.19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