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2일 설 (하느님의 말씀 주일)
제1독서 : 민수 6,22-27
제2독서 : 야고 4,13-15
복 음 : 루카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구정 미사
류해욱 요셉 신부
새해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면서
음력으로 새해를 맞아 드리는 특별한 미사입니다.
새해를 맞으며, 인디언들이 지닌 지혜를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인디언들은 1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인디언들은 1월을 새해의 시작으로써 의미보다는
외적인 계절의 순환을 바라보면서도 자신들의 내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머무는 달로 본 것이, 저에게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새해가 밝았으니 새로운 마음을 지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깊이 우리 자신의 내 면을 들여다보며 원래 지녔던 마음,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장사익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의 노래 중에 ‘꿈속에 사네’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들어보신 분들, 기억날 거예요.
묵은 해니 새해니 구별할 것 없네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여보게,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변해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새해를 맞으며, 새로운 결심을 하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인디언들이 지녔던 지혜, 마음 깊은 곳에 머물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무엇이 꿈속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좀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게 하시려고,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알아듣기 쉽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속뜻은 깊은 묵상을 통해 알아듣게 됩니다.
무엇을 위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바로 축복을 받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비유에서 충실한 종은 주인이 맡긴 일을
바로 자신의 일로 여기며 주인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과 자기를 동일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종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행복’이라고 옮긴 단어는 실상 ‘축복’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한테 주인은 모든 재산을 맡깁니다.
재산은 하느님 축복의 상징입니다. 그는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한테 주시기 원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 축복을 받을 준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축복보다 세속적인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물질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면
스스로 축복을 저버리고 매를 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 안에서 우리는 진정 축복받을 준비를 하며
늘 깨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했을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오죽 미웠으면 죽이고 싶기까지 했을까 생각하면 참 슬퍼집니다.
여러분들, 어느 때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사람을 미워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신다고요.
저는 사람을 많이 미워해 보아서 잘 압니다.
뭐, 정말 그 사람이 나쁘거나 나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냥 상대를 나와 비교할 때 그가 미워집니다.
대개 상대가 나보다 잘났다고 느낄 때, 그가 미워집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 “지가 뭔 데?”라는 욕이지요.
“지가 뭐 잘났다고…….”
우리는 남이 잘난 것을 참 못 봐주는 경향이 있어요.
좀 봐주면 서로 좋은데 그게 잘 안되지요.
복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이유의 정답이 나와 있어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네요.
그들도 인간이니까 가끔은 안식일을 어기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자기들은 겁이 나서 감히 못하는데
예수라는 자는 겁 없이 안식일을 어기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안식일을 어기면 큰일 나야 하는데,
벼락을 맞아 죽어야 하는데 멀쩡하거든요.
속으로 은근히 부아가 나는 겁니다.
“지가 뭔 데. 감히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하는 거야.”
게다가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입니다.
자기들은 감히 하느님의 이름, 야훼조차 입 밖에 내면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예수라는 자는 감히 그 존엄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그분을 아빠(아람어로 Abba가 우리말 아빠처럼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라고 부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눈뜨고 못 봐주는 일입니다.
“지가 뭔데……. 감히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러?”
예화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늘 이웃에게 불만투성이인 사람이 있었답니다.
“난 이 마을 사람들처럼 비열하고 치사한 사람들은 본 적이 없어.
그들은 저질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지.
모두가 자기가 무얼 잘못하는지 모르거든.
그들은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결점만을 떠들어 대고 있을 거야.”
우연하게 그 곁을 걷던 천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정말 그렇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저 사람 좀 보라고요.
비록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난 그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지요.
저 탐욕스럽고 잔혹한 눈을 보세요.
자신이 무슨 사립 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아보고 있잖아요.”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잘 봤군요. 너무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한 가지만은 파악을 못 하는군요.
그것은 당신은 지금 거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내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셨어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짜 내면의 모습을 비춰보도록 이끌어 주셨지요.
거울을 보니까 자기의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고 미워지는 겁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겉모습과 다르거든요.
우리가 내면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얼마나 화가 납니까?
화풀이를 엉뚱한 거울에게 합니다. 그래서 거울에 대고 욕을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알게 된 재미있는 시 하나 들려드립니다.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의 기쁨을 맘껏 누리시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한 해의 첫날을 기리는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새로 온 날이 낯설다는 의미에서 낯설다의 어근인 ‘설다’에서 온 것으로
본 시각과 한 해가 새롭게 개시되는 날을 의미하는 ‘선날’이
설날로 바뀌었다고 보는 시각이 대표적입니다.
낯선 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설’입니다.
이렇게 낯설고 새로운 날에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예전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으로 힘든 날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는
멋진 날들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 어제와 다른 참 기쁨의 삶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지요. 여우가 길을 가다가 잘 익은 포도를 발견합니다.
이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먹으려고 폴짝폴짝 뛰어 보았지만,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도저히 포도를 딸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의 노력 끝에 여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서 여우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갈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우가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포도를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떠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포도를 얻을 수 있다면 커다란 만족감을 얻게 되겠지만,
모든 노력으로도 얻지 못한다면 그 실망감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다 보니 포도를 먹지 못했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생각도 바꾸면 삶이 편안해진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좌절과 절망을 가져오는 생각은 안 됩니다.
또 불평과 원망을 가져오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뒤로 할 수 있는 지혜,
미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왔을 때 깨어있는 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고 명령하십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바로 미래의 삶인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과거에 갇혀 있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의 삶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이 새해 복을 더 충만하게 받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리라.
...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2-26)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입니다.
사실 루카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나아가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일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일입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 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 ‘주어진 선물’, 곧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무엇보다도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축복’인 것입니다.
곧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곧 상대를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가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축복하는 행위’가 곧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어떻게 빌어주는가?
곧 ‘축복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이렇게 하면 됩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그가 응답하게 도와주십시오!
또한 그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협조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축복하는 이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축복하는 이 안에 ‘먼저’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하는 이가 먼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축복받은 이가 축복을 주는 이가 됩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인 ‘축복기도’는
우리 안에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다시 한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이 한 해 내내토록 차고 넘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오늘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베풀어진 이 ‘축복’이
일 년 내내토록 날마다 여러분의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피고
올 한 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게 하소서.
또한 당신께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안에 머물고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하소서.
아멘.
“준비하고 있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설날을 지내면서 ‘고향의 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어려서 고향 땅을 떠나 서울에서 살았지만 제가 태어난 고향 선산을 갈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80순이 되어가는 고향 큰 형님이 선산을 돌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집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집 뒤에는 산이 있습니다.
개울이 내려가는 끝에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5대조 할아버지는 박해를 피해서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김제, 정읍,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라서 포졸이 오면 도망가기 쉬웠다고 합니다.
집 앞 마당에는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32년 전 사제서품 받고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향 어르신들이 모두 오셔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오늘 설날을 지내면서 선산이 있는 고향, 제가 태어난 고향 땅이 그립습니다.
언제고 시간이 허락되면 고향 땅 선산에 가서 친지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친지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려 합니다.
낯선 땅에서 서글픈 노래를 불렀던 민족이 있습니다.
시편 137편은 그들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행복하여라, 네 어린 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저는 이 시편을 성경보다 먼저 ‘보니엠’이라는 보컬 그룹의 노래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멜로디는 경쾌했지만, 나중에 내용을 알았을 때는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아셨고, 다시금 고향 땅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설날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건강입니다.
몸이 아프면 산해진미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면 재물이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은 재물입니다.
재물은 우리를 풍족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친구입니다.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허전하기 마련입니다.
건강, 재물, 친구가 모두 채워진다면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설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을 듬뿍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인들은 또 다른 복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인들이 받아야 하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받을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참된 행복’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복이 주어질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입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2023년 설날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여, 당신은 대대로 저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은 제 좋아하는 시편이고 방금 부른 윗 화답송 후렴도 참 좋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시편 기도도 은혜롭고 위로와 힘이 됩니다.
설날 아침 미사에 잘 어울립니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이 잘되게 하소서.”(시편90,14.17)
오늘은 하느님의 축복이 넘치도록 주어지는 설날입니다.
설날이자 연중 제3주일이고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기도 합니다.
반갑고 고맙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30일 자의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해 매년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내도록 제정하셨습니다.
작년 하느님의 말씀 주일 때 교황님의 다음 강론 대목도 여전히 호소력을 지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예상을 폭로하며, 지나치게 인간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허물고,
그분의 참다운 얼굴과 그분의 자비를 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음을 기르고 새롭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영성생활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두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지 우리에게 계시하는 말씀을 중심에 둡시다.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말씀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참 기쁨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이 인간의 본질임이 다음 시편이 입증합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 말씀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참으로 축복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자녀’ 두 말마디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본질적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말씀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없이,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날 미사 중 강론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야 할 꽃자리 하늘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 구체적 방법을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첫째, 감사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감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하느님 찬양이 살맛 나는 인생을 만듭니다.
설날 저녁 성무일도 시 후렴 둘의 곡도 참 흥겨웠습니다.
“우리 힘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자.”
“초승에 한보름에 우리네 축제일에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자.”
하느님 찬미,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 찬양해야 영혼이 삽니다.
영혼 건강에는 하느님 찬미, 찬양이 제일입니다.
아침 성무 시편기도 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 구절입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5,1-2)
찬양의 기쁨, 찬양의 행복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계속되는 축복 속에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은혜로운 설날 미사 중 당신 사제를 통해
우리 모두 하나 하나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축복 중의 축복이 평화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매일의 삶에서 평화의 증인이 되도록 하자”는
어제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당신 자녀들에게 복 주시는 일이며,
주님의 복덩어리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며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우리가 자발적 기쁨으로 행해야 할 우리의 우선적 마땅한 의무입니다.
둘째, 겸손하십시오.
섬기십시오. 겸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뒤따라야 할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평생 주님 섬김의 배움터 삶의 자리에서
한결같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자만하지 마십시오.
무지한 이들이 교만하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로운 이들은 겸손합니다.
매사 세상에, 세상 사물에 집착함이 없이 초연합니다.
이탈의 참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도 이와 일치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실상을, 진상을 아는 자가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갈수록 주님을 닮아 지혜롭고 겸손한 삶입니다.
이래서 예닮의 여정에 항구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열쇠의 답입니다.
셋째, 깨어 사십시오.
준비하십시오. 유비무환입니다.
막연히 깨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주님을 기다리며 맡은 바 책임에 충실하며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오늘 이렇게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될 것이요,
천상탄일의 선종의 복된 죽음일 것이니 내일은 전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참으로 주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둔 신망애의 하느님 자녀들은
하루하루 깨어 기쁘게 삽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가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주님인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행복하게 하늘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바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주어진바 거룩한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노파심에서 거듭 당부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아니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감사와 찬양’, ‘겸손과 섬김’, ‘깨어있음과 준비’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의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마침 가톨릭평화신문에 나온 ‘산다는 것’(김용해)이란
묵상시默想詩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니 이제 알게 되네요
세상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높아지려는
그 욕심과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나이가 들고 죽음을 보면서 이제 깨닫게 되네요
세상 산다는 것은 사랑이란 것을.
서로 아끼고 섬기고 서로 나누고 도우면서
그렇게 사랑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것을.”-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설 명절입니다.
음력을 사용하던 옛날에는 오늘이 새해의 첫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해가 바뀐 것은 1월 1일입니다.
二重과세를 하자고 있는 오늘의 설 명절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설 명절에 조상들에게 茶禮를 올립니다.
가톨릭신자라서 차례를 올리지 않는 이들도 미사를 봉헌하며,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합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지만,
우리의 삶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십니다.
그분들과의 인연이 있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습니다.
그분들은 떠나가셨지만, 우리는 그분들과의 어떤 연대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분들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분들과 맺었던 우리의 인연이 소중하고, 은혜롭게 기억되는 그만큼,
우리는 오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그분들과의 소중한 인연들을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을 생각하면,
그분들로부터 우리 안에 흐르는 獻身의 삶을 다시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분들도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힘든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분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이 살고 가신
‘사랑과 섬김’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사랑과 섬김’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오늘 다시 바라봅니다.
그것이 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말합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세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등불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종과 같은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은
힘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우리 위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 많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지 않아서 자녀가 성장하고,
자녀가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웁니다.
노쇠한 부모를 모시는 자녀도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습니다.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가 또한 그러합니다.
예술가의 작품활동도 그렇고, 우리가 하는 공부나 노동도
그것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에 전념 헌신해서 성취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중요한 일들은
모두 우리 위주로 편하게 살아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잊고, 헌신하여 이루어낸 일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헌신과 섬김을 실천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섬기는 사람이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높이거나 誇示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마르 8,11)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한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과시하는 일은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단순히 실천하셨습니다.
유다교 지도자들의 敵意나 그 사회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도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켜서, 당신이 잘되는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사람들에게 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분으로 처신하면서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요 선생인 내가 그대들의 발을 씻었다면, 그대들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행한 대로 그대들도 행하도록 나는 본을 보였습니다.”
「요한복음서」(13,14-15)의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그분의 섬김을 우리가 배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섬김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그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는 몸짓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흩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살 듯이,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도 세상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실천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각자 ‘허리에 띠를 띠고.’ 복음의 ‘등불을 밝히고’ 나서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신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하겠다고 마음 다짐하는 것은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겠다는 마음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분이라, 부모들은 역경을 딛고도, 자녀를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그리고 자녀 된 사람들은 노쇠한 부모들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스승들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고, 선배들은 후배들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원하였던, 혹은 원치 않았던,
모두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정성과 사랑을 은혜로운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의 흐름에 우리가 합류하는 일입니다.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이 실천하신 선과 자비는,
하느님을 인류 역사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들을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실천한 은예로움이 있어 하느님이 인류 역사 안에 살아계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이 세상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體面致禮나 허세도 아니고, 독선도 아닙니다.
허리에 띠를 띤 종이라는 말은 체면치례나 허세를 찾는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헌신적으로 살겠다고 마음 다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고 넘쳐흐르게 하겠다는 마음 다짐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