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장시키는 것

[고운님]

나를 성장시키는 것

김명희

1. 출근 첫날 오랜만에 걷는 공원의 풍경은 조금 낯설고 썰렁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지난 몇 년간 힘겹게 살아왔던 나의 마음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막혔던 가슴이 트인 듯 후련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직장에서 그나마 스트레스를 풀 곳은 점심 먹고 운동 삼아 산책하는 회사 근처 공원이었다. 그마저도 지난 한 해 동안은 하지 못했었다. 겨우내 잘 버틴 새 싹들이 오밀조밀 봄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나뭇가지에 간간이 봉오리가 맺혀있다. 활짝 핀 꽃은 아니지만 난 그 봉오리들이 더없이 반갑고 사랑스러웠다. 곧 봄이 오 겠구나.

2.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것 같아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실장에게 조목조목 대는 나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울먹거렸다. 그런 일이 생긴 것이 내 탓 같았고 내 잘못 같았다. 그래서 더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가정 형편상이 라고 대충 말하기에는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므로 나 는 긴 시간 상담했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사정을 들은 실장은 차마 그만두지 말라 고 만류 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업무 마무리를 한 후 실장에게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떠나는 날 한꺼번에 짐을 가지고 나가는 초라한 모 습을 보이기 싫어 진즉에 조금씩 가져간 탓으로 짐은 간소했다. 지점장한테는 이 미 그 전에 인사를 했으므로 그동안 많은 배려에 감사했다는 문자로 바쁠 그의 시 간을 뺏지 않기로 했다

3. 남편의 암이 재발 되었다. 오년 완치 판정을 받고 일 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남 편의 암 재발 소식으로 우리의 삶은 크게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답답해하는 우리들의 마음과 달리 병원에서는 이런저런 검사로 6개월 정도 의 시간을 끌었다. 하릴없이 무조건 기다리는 답답함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 었기에 집은 침묵으로 고요했다. 웃고 떠들면 자기가 아프지 않아서 저런다고 탓할 것 같아서. 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힘들다고 짜증을 내는 것 같아서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며 지냈다. 회사에는 말하지 않았다. 동정받기 싫은 나의 자존심 때문 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 할 수 있는 직장이 있었기에 6개월이란 기 다림의 시간이 더 견디기 쉬웠던 것 같았다.

4. “도대체 왜 못 간다는 건데?”

짜증을 내는 남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는 갑상샘암 재발로 병 원에 입원해서 동위원소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두 달 전 마라톤 동호회에서 다 섯쌍 부부가 남편의 치료가 끝나면 제주도로 마라톤 대회 겸 3박 4일 여행을 가 자고 계획을 잡았다. 우리를 위해 동호회 회원들이 애써 마련한 일정이었다. 그 계 획대로 비행기표를 예약해야 하니 주민등록번호를 보내라는 그에게 못 간다고 했으 니 황당했을 것이다. 남편이 짜증을 내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그래도 그에 게 여행을 못 가는 이유를 설명할 순 없었다. 6년 전, 암 수술 후 동위원소 치료를 위해 2박 3일 혼자 병실에 있었던 남편은 폐소 공포증으로 13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했다. 방사선 때문애 아무도 출입할 수 없었던 그곳에서 혼자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싶어서 한참을 울었었다. 그런 연유로 혹시라도 남편이 내가 말 못하는 이유를 듣게 되면 충격으로 그곳에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기막혀하는 그에게 퇴원하면 말해주겠다고 했다. 어이없다는 듯 남편이 전화 를 끊어버렸다.

5. 남편이 입원하기 한 달 전, 오랜만에 딸네 집에 방문했을 때 딸이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갑상샘암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담담히 전했다. 말 문이 막혔다.

“언제 알았니?”

”두 달 전에요. 회사에서 건강 검진했을 때 발견되었어요. 재검사결과 림프에 전 이가 되었다고 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고 잠자고 있는 손주들의 얼굴만 말없이 쳐다 보고 있었다. 사위는 자기들은 걱정하지 말고 아버님만 잘 챙겨드리라고 했다. 그 순간 나에게 남편은 이미 뒷전이 되어버렸다. 우린 살 만큼 살았지만 젊은 딸은 어 찌 해야 하나, 어린 손자들은 또 어찌해야 하나, 사위는 또 얼마나 마음 아플까 하 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가슴이 아팠다. 한반도 초대해, 본적 없는 이 상황이 어이 가 없고 황당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들만 벌어지는지 삶 자체가 원망스러웠다. 하 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6. 딸은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당신 탓이라고 자책할까 봐 걱정된다며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했다.

“아빠한테는 당분간 말하지 마라.”

그래도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했다. 때가 되면 내가 말하겠다고 했 다. 한 달 후 동위원소 치료를 위해 독방에 입원하는 남편, 3박 4일을 혼자 지내는 것도 힘든데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 긴 시간 동안 자책하며 잠 못 자고 괴로워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침묵이 나에게는 최선책이었다. 그렇게 아무 말 안 하고 입원 시켰는데 하필 제주도 여행 일정이 딸의 수술 날과 겹쳤던 것이다. 퇴원 절차를 밟 자마자 그 이유를 빨리 말하라고 다그치는 남편에게 딸의 수술 소식을 전했다. 며 칠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나는 회사에 사표 를 냈다.

7. “언니! 지금 어디세요? 지점장님께 인사 안 드렸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실장의 다급한 전화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 웠다. 바쁘신 것 같아서 문자로 인사드렸다고 했더니 급하게 나를 찾는다고 다시 오실 수 없느냐고 했다. 나왔던 회사에 다시 들어가는 발걸음은 참으로 무거웠다. 지점장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맞으며 앉으라고 했다.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이런 저런 나의 사정을 다시 한번 듣더니 말했다. 나만 괜찮다면 사표 수리는 당분 간 하지 않고 보류시키겠다고 했다. 회사가 싫어서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만둬야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도 했다. 얼마가 되던 상황이 진정되면 다시 나오라고 했다. 고맙기도 했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나 같이 장기간 사표 수리가 보류된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여러 사람의 배려로 얼마가 될지 모르는 기나긴 휴가에 들어섰다.

8. 봉우리만 맺었던 공원의 꽃들이 하루가 다르게 다투며 피어나 간다. 진달래가 피 는 듯하더니 어느새 목련이 매화꽃이 조팝나무가 라일락이 시간을 따지지 않고 우 르르 피고 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봄이 빨리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다시 출근 후 정신없이 바빠서 한동안 가보지 못했던 공원에서 모처럼 만발한 철쭉을 보 며 걷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경탄스럽게 쳐다보는데 하늘에 흰 꽃이 만발해 있다. 이팝나무꽃의 고운 자태가 눈부시다. 언제 저렇게 이팝나무꽃이 많이 피었을 까 싶어 감탄하는데 시어머니의 수줍던 미소가 떠오른다. 곱고 단아하며 사랑이 많 았던 시어머니가 마치 이팝나무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9. 생각해 보면 지난 이 년 동안은 내 생애 큰일들이 정말 많았다. 오랫동안 치매 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연이어 남편의 암 재발, 그리고 딸 의 암 발병, 어느 책에서 읽었던 ’시련은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다‘는 말은 맞았다. 난 그 오랜 시간 속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무엇을 사 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내 앞에 펼쳐질지 모른다. 서둘러 도망가는 봄처럼 지금의 이 평온이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슬픔도 즐거움도 모두 다 바로 내 소중한 삶이라는 걸, 내 곁에는 나를 아끼고 사랑하며 기도해 주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감사하며 산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바로 오늘!

나를 성장 시키는 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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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 (서정순)]

고은님
아픈만큼 성장한다는 말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지금 담담하게 감사하며 성장된 작가의 모습을 그려냈네요.
그 과정의 아픔이 나의 아픔처럼 다가와
안아주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아내였던 나와
누군가의 엄마로 박수를 보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에바]

오랫만에 명희씨 글을 보니 반가워요.
읽는 내내 뭉클했어요.
힘든 일 겪으며 성장하고 있는 모습 감동입니다!

[레나]

힘든 시간을 담담하게 펼쳐낸 명희 글, 잘 읽었어요. 처음 내가 본 명희는 지금도 똑같아요. 그 모습으로 이번엔 나를 감동시키고 맘 울컥하게 했어요. 대견하고 사랑스런 여인! 모진 시간 견디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대의 시선이 온화해요. 합평회 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