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다녀온 후
내 마음은 어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음으로 충만하다.
이제까지 한국에 방문할 적마다 어머니를 찾아뵙고 편안케 하려는 목적에 충실하다보면 이주나 삼주의 짧은 기간동안은
무척이나 바쁘고 숨이 벅찬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친구들과의 연락이나 만남은 꾸준했었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다 만난 듯한 충족감과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얼굴을 개인적으로 더 못보고 오긴 해서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작은 외삼촌은 연세가 있으셔서 경조사에 찾아다니시지를 않으신다고 하시고
몇몇 어려움이 있으셔서 개인적인 만남도 부담스럽다고 하신다.
연락이 끊어졌던 쌍호, 양호 오빠와 다행히 통화가 연결되었고 두 분을 뵐 수가 있었다.
쌍호 오빠가 동암역으로 마중나오셔서 그 차로 인천 석남동 쪽이지... 거북빌라인가로 양호오빠댁으로 방문했다.
순례 언니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두 오빠가 계모 밑에서 자랐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도 계셨고
큰 이모, 우리 어머니, 작은 이모도 있는데 학교 선생이면서도 동기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텐데
고등학교에 입학시키지않고 한 명은 양장점, 한 명은 양복점에 취직시켰고
쌍호 오빠는 탈출했고 양호 오빠는 이년동안 돈을 벌어서 공고에 입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동기간들도 어쩌면 외면했을 수도 있다 싶기도 하다.
두 오빠는 다행히도 가정을 잘 지키고 평안하게 사시고 계시다.
쌍호 오빠가 그 아픔과 미움을 예수님 안에서 딛고 더 편하게 사시면 좋겠다.
나의 인생의 롤모델이신 작은 외삼촌은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작은 외숙모에게 슬픔을 안겨줬을 때와
우리 어머니를 슬프게 했을 때 내 마음도 아팠지만 그 오빠들에게도 잊지못한 슬픔과 분노를 안겨줬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어서 너무나 큰 충격이 왔다.
작은 외삼촌은 교장으로 은퇴하셔서 350만원 이상의 연금을 받으시고
우리 어머니한테 빌려간 돈으로 북쪽에 땅과 건물이 있어서 월세를 받으실 거고
자택 또한 많은 월세를 받으시니 제법 남부럽지않는 재력가 이시다.
조카들에게 쉬쉬하시지만... 막내 주일이가 길가다가 지주막하 출혈로 쓰러져 6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큰 아들 주홍이도 간경변으로 투병 중이라고 한다. 원인은 유전적인 병이라고 한다.
내가 느끼기로는 당신께서는 교육계의 자랑이고 소설도 쓰셔서 등단도 하시고 2남 1녀를 지극히 사랑하시는데
조카들을 서럽게 하셨고 병든 아내를 슬프게 하셨고 피난 중에도 보살펴준 누님을 울게 하셨다.
아무리 장로라고는 하나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계시지아니한가
아무리 새벽기도를 가고 헌신을 했다 하나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분을 어떻게 보실까 싶다.
결국은 몇 번의 통화 이후 그 분과의 만남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