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다섯째 이야기, 피 묻은 투표 용지(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13)
[삽화-백소(白笑)]
발제자가 두 번째 제기를 하였다. 우리에게 선거란 무엇인가? 선거라는 것이 우리의 정열과 노력을 쏟아부을 만큼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제기였던, 이번 선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제기만 했지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내놓지 않았던 발제자가 두 번째 제기에는 어느 정도 견해를 피력하였다. 선거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견해에서부터 심지어 대중을 기만하고 불평등 세상을 고착시키는 것이 선거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하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신돌석씨는 발제자의 말을 듣자 총선 직전 어떤 사람이 SNS에 올린 ‘피 묻은 투표용지’라는 시가 떠올랐다. 그 시는 ‘그대 받아든 투표 용지 한 장이/ 200년 전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청년노동자가 그렇게 받고 싶어하던/ 목숨을 바쳐서라도 온몸을 던져서라도/ 끝끝내 받고야 말리라 다짐하던/ 바로 그것이었던 것을 그대는 아는가’로 첫째 연이 시작된다. 바다 건너 먼 나라는 영국을 말하는 것이리라. 신돌석씨는 영국에서 있었던 차티스트운동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투표권이 정말 어렵게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소중한 권리라는 것을 새삼 느꼈던 적이 있었다.
이 시는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우리의 투표권이 부정하게 사용되는 것에 항의하여 바로 60여 년 전 4.19혁명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흘렸던 것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투표권도 없던 중고생들이 언니 오빠 형 누나들의 죽음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목숨 걸고 싸워서 지켜낸 것이 바로 지금 당신에게 건네진 투표용지라는 것이었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 투표날만 주인이고 지나고 나면 노예가 된다는 생각 때문에 망설이거나 외면하지 말라고 한다. 망설이기를 외면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자들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한다. 바로 정치허무주의를 부추기는 자들이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상 정치허무주의를 유포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이 시에서는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의 바람을 향해 가기 위해, 그 모든 껍데기를 몰아내고, 투표날이 아닌 날에도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투표하라고 한다. 피 묻은 투표 한 장을 소중히 받들고, 피 묻은 용지 위에 민주주의의 피가 묻은 도장을 찍으라고 그 시를 끝맺는다. 선거가 우리의 꿈을 바로 이룰 수는 없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의사를 표시하고, 우리의 꿈을 향해 가는 길을 연다는 것은 확실히 맞는 이야기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투표 얼마 전에 신돌석씨가 들은 강연 중에는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투표 이야기가 있었다. 강사는 선거를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타협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피지배층으로 하여금 혁명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피지배층의 의사에 지배층이 어느 정도 맞추어줄 수밖에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우리 현대사에서도 나타났고, 때로는 아주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를 불러오기도 했다고 하였다. 아니 어찌 보면 그러한 대변화의 앞에는 반드시 선거가 있었다.
4.19혁명 이전에 3.15부정선거와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던 10.26사태 전 해에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은 제1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가 1/3을 차지했고, 지역구도 동반당선되는 식이었기 때문에 여소야대는 되지 않았지만, 정권에 대해 주권자인 국민들이 강력하게 경고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유신정권은 그 경고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이전의 강압통치를 지속하다가 결국 부마민주항쟁을 맞이하고, 10.26사태로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두환 정권 역시 마찬가지이다. 1985년에 있었던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고, 그것이 전두환 정권이 궁극적으로 몰락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는 신돌석씨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신돌석씨는 당시에 공장에 다녔었다. 정치에 대해 운동권 학생들처럼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들 중에는 그런대로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침 신돌석씨가 다니던 공장에, 신돌석씨와 같은 프레스반에 학생 출신 노동자 조철구가 들어오면서 그와 친하게 지내다 보니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삽화-백소(白笑)]
2.12총선 때 신돌석씨가 누구를 찍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일요일에 조철구와 함께 종로 유세장에 갔던 기억은 난다. 무슨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던 것 같다. 당시 민정당 후보가 나중에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한 이종찬이었고, 신민당 후보가 총재이었던 이민우였고, 민한당 후보가 정일형박사와 이태영변호사의 아들 정대철이었다. 운동장에 사람들이 가득한 가운데 유세가 벌어졌다. 분위기가 굉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세장을 가봤는데, 유신 이후 그런 분위기가 거의 사라졌다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총선이 끝난 뒤 정치에 무관심한 듯하던 공장 노동자들도 술 마실 때면 저마다 한마디씩을 했다. 특히 김대중이 총선 며칠 전에 귀국해서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정치에 쏠려 있었다. 결과는 사실상 민정당의 참패였다. 서울의 경우 신민당이 민정당에 비해 거의 배가 되는 득표를 했다. 하지만 중선거구였기 때문에 동반당선이 가능하여 의석수는 차이가 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소선거구였으면 아마 서울은 신민당이 싹쓸이했을 것이다. 부산에서는 신민당과 민한당이 동반 당선해서 전체 12석 중 민정당이 겨우 3석을 얻는 참패를 하였다.
이런 결과가 나왔음에도 전두환 정권은 반성은커녕 밀어붙이다 김근태고문, 권인숙성고문, 박종철고문치사 등을 일으키면서 결국 화만 불러일으켰다. 2.12총선은 민심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는 측량기 구실을 하였고, 야당과 주권자 국민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집권여당은 침체되고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더욱 무리수만 두게 하였다. 가장 최근에는 박근혜 탄핵 직전에도 당시 여당이 선거에서 지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선거는 시대의 대변화에 앞서 그 조짐을 보여주고,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발제자가 세 번째 제기를 하였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의 결과는 이후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인가? 선거 치르고 보름 정도 지나다 보니 분위기가 선거 다음 날 같지는 않았다. 이제 이번 총선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진보가 궤멸되었다고 보는 이들은 아직도 적지 않다. 아니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차이이므로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러한 인식을 하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발제가 끝난 뒤 토론자 중 한 사람이 말을 하였다. 이번 총선을 통해 친외세 친자본 지배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는 것으로 그의 토론은 시작되었다. 진보정당들은 완전히 서로 다른 길로 갔다. 녹색정의당과 노동당 등 진보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정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으며, 보수야당에 기대어 겨우 세 석을 얻은 진보당만이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하지만 진보당이 과연 진정한 진보정당인가? 진보정당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포기한 채 보수야당과 협상을 통해서 고작 세 석의 의석을 얻은 진보당은 민중을 위한 진보정치를 하기 어렵다고 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제 진보정치를 다시 시작한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모순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는 곳에 반드시 희망은 있다고 말한 그는, 여전히 진보대단결이 중요하며, 진보당이 이번의 과오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그 길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고 하였다.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도 커다란 틀로 하나가 되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본다며, 이제 정말 사회대전환을 꿈꾸는 진보정치가 되자고 하였다. 충분히 그렇게 말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상당히 비장한 태도로 토론을 한다고 신돌석씨는 느꼈다.
이어서 발언을 한 토론자는 이번 선거는 연합정치의 승리라고 하였다. 준연동형 유지와 병립형 회귀에서부터 이번 총선을 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준연동형을 유지시킨 것이 반윤전선을 유지시킬 수 있었고, 그것 때문에 압승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하였다. 조국혁신당의 돌풍이 이번 총선에서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는데 이것만 보아도 유권자인 국민대중은 반검찰독재 투쟁에 정치세력이 나서줄 것을 요구한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한 정파가 그것을 독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연합정치는 불가피한 것이다.
[삽화-백소(白笑)]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고 진보궤멸 등의 말을 하면 곤란하고, 진보당은 현실적인 길을 간 것이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연합정치만이 진보세력이 세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더불어민주연합이 민주진보연합이냐, 위성정당이냐의 문제는, 양측의 힘겨루기에서 결정나는 것인데, 결론적으로 위성정당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민주당의 일방적인 행태는 유감스럽지만 그것은 진보당이나 시민회의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므로 연합정치 자체를 파탄낼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토론자 두 사람의 발언이 끝난 뒤 청중 중에서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이번 총선으로 윤석열 정권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는데, 숨 돌릴 틈을 주면 그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탄핵을 향해 몰아쳐 가야 한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 국힘당은 흔들리면서 가담하는 의원들이 나올 것이다. 불과 열 석 안팎이면 탄핵이 된다. 대중투쟁을 가열차게 해나가면서 숨 돌릴 틈 없이 몰아부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번 총선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입법부와 시민사회에 내린 명령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사회자는 너무나 다른 세 사람의 발언에 대해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발제자에게 세 사람의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서 마이크를 넘겼다. 발제자는 슬며시 웃음을 띠면서 세 분의 말에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의 현실이 복잡하다는 말로 운을 뗐다. 자기도 탄핵에 대해 반대하지 않지만, 이번 총선의 결과는 당장 탄핵에 나서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좀더 필요한 것이라고 보는데, 비정상을 정상화시키는 것, 예를 들면 거부권 행사에 대한 시정 등을 해나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고 하였다.
발제자가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발언 기회를 주면 한마디 하고 싶다고 하였다. 사회자가 그러시라고 하자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발언을 이어나갔다. 이번 총선이 야권의 압승인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야권은 반윤세력이다. 그러므로 윤석열 정권은 일단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거부당한 것이다. 여기서 진보세력이 어떤 비중을 갖는지는 좀더 논의를 해봐야 한다. 하지만 반윤세력은 윤석열 정권을 심판할 정도로 압승했는데, 진보세력은 궤멸되었다는 말은 상당히 어폐가 있게 들린다. 윤석열 정권 심판은 진보세력에게 아주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진보정치는 보수적 민주세력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지는 서로 논의해 보자. 이 정도까지만 해도 아직 진보진영은 대단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길을 찾기 위해서도 함께 논의의 틀을 만들어 가야 한다. 지난 일들에 대한 평가가 자신들의 정당화, 합리화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의 제안을 해보면 노동자, 농민의 문제는 공동으로 하되, 기후정의, 차별 철폐 등은 정의당, 자주와 평화의 문제는 진보당 등으로 특화해서 장점을 살려나가고 그런 가운데 연대하는 것도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윤석열 정권이 탄핵 등의 방법으로 임기를 단축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민주세력에게 좋은 방향으로 귀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진보세력에게는 더욱 그렇다. 민주세력 집권이 있을 수 있지만, 오랜 시간 외세와 수구세력이 이 땅에 이루고자 한 보수대야합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마지막으로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정치상황을 재편하는 것도 생길 수 있다.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윤석열 정권만 퇴진시키면 무조건 좋다는 식일 때 이런 상황에 대한 대응은 불가능하다. 윤석열 정권을 퇴진시키고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함께 머리 맞대고 논의해 보기를 바란다.
신돌석씨는 발제자가 정치색이 없다고 하더니 상당히 깊은 고민을 하였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멀리 내다보아야 하고, 더 넓게 연대해야 하며, 더 깊이 사고해야 한다. 일단 신돌석씨는 이번 총선에서 있었던 연합정치가 밑거름이 되어 좀더 멀리 내다보고, 좀더 넓게, 좀더 깊이 연대하는 연합정치가 탄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토론회를 하면 언제나 그렇듯 다들 별로 흡족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중구난방이거나 일방적인 제시 따위가 아닌 깊이 있는 토론회가 되었다고들 이야기하였다. 여전히 과제가 많은 현실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