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6. 2(주일) -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 (2024년 21주)
제목; “심히 큰 능력의 보배 예수님”
성경; 고후 4:5-12 (p.288) (시 81:9-10, 428<488>, 94<102>, 5)
<예배의 부름> (시 81:9-10)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며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사실 6월을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하지만, ‘호국 보훈’이란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호국 보훈’(護國 報勳)이란 말은, ‘호국’((護國)은 보호할 호(護), 나라 국(國), 나라를 보호하고 지킴, ‘보훈’(報勳)은 보답할 보(報) 공훈 훈(勳), 공훈에 보답함, 즉 ‘호국 보훈’(護國 報勳)은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힘쓴 사람들의 공훈에 보답함’이란 뜻입니다. 요즘은 실제로 공훈을 세운 것도 없는 ‘가짜 유공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정말 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참된 유공자들을 우대하고 공경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6.25전쟁 당시 큰 공훈을 세우고도 그 공적을 별로 인정받지 못하나 한 부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동키부대’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켈로(KLO)부대’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아마 다른 지역은 몰라도 파주에 계신 분들은 ‘켈로(KLO)부대’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탄에 있는(보광사 근처) 고령산 정상에 있는 부대가 일명 ‘켈로(KLO)부대’이기 때문입니다. ‘켈로(KLO)부대’로도 불리는 ‘동키부대’의 정식 명칭은 ‘8240부대’입니다. (☞ 동키부대 백령도 유적지 사진 보고)
‘동키부대’는 6.25전쟁 당시 전선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때로는 유격전을 치뤘던 부대입니다. 동키(Donkey)는 ‘당나귀’란 뜻으로, ‘동키부대’는 1951년 미군이 지급한 ‘앵글로9’ 무전기의 모양이 ‘당나귀’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일명 ‘8240부대, KLO(켈로)부대, 울팩부대’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백령도에는 동키부대원으로 활약한 분들의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지만, 이 부대는 비정규전을 치렀기 때문에 대부분 공로가 알려지지 않았고, 이름조차 모르는 무명 대원들이 대다수입니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의 지리와 언어에 익숙한 이북 출신 한국인들을 모집해 북한 지역에서 정보 수집과 게릴라전 등을 비공식적으로 수행한 특수부대입니다. 1953년 8월12일 국방부 일반명령 219호로 창설된 국방부 8240부대사령부가 이 유격부대의 인사, 행정, 포상 및 징계권을 이양받으므로,‘미 육군 8240부대’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미군 소속이지만 ‘카투사’와 달리 병적을 법적으로 공식 관리하지 않아서 군인 신분이 아닌 미군이 고용한 민간고용인 신분이었으므로, 이들의 이름과 공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휴전 후 이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되었고 그 중 일부는 육군 정보국으로 소속을 옮겨 계속 근무하거나 특전사 창설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특수부대에 발자취를 남겼지만 이관 전의 기록이 없다시피했기 때문에 이전에 전사, 행방불명, 부상, 기타 이유로 켈로를 떠나게 된 인원들은 (동료의 증언, 보증이 없는 한) 신원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병역미필 신분이라 다시 한국군에 징집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90년대 후반부터 이런 인원들을 위해 부대원 명단 복원 및 신원 확인 작업 등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완전히 다 복원된 건 아닙니다. 당시 16세 이상으로 구성된 동키부대원 중 생존해 계신 분은 현재 80대 중반 이상 되신 분들인데, 이들에 대한 보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놀라운 점은 동키부대원의 70%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동키부대는 초기 백령도에 기지를 두고, 주 무대는 황해도와 평안도였는데, 이 지역은 당시 한국 교회의 주요 거점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당의 세력에 맞서 기독교 청년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이들이 후에 동키부대로 옮겨져서,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공산화되는 조국을 지킨 것입니다. 이 동키부대원 중 가장 유명한 분 중의 한 분이 바로 소망교회 원로목사이신 곽선희 목사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를 박해하고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공산당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이웃 사랑을 확대하면 나라 사랑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것이므로 애국, 곧 나라 사랑은 당연한 것입니다. 6.25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이하는 호국보훈의 달에 우리 주변에 우리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수고한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보훈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고후 4:5-12)은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도록 교인들을 선동하는 것에 대해, ‘질그릇 비유’를 통해 자신이 전한 구원의 복음과 사도직을 변증하며, 영광만이 아닌 박해를 감수하는 사도직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 곧 전도자를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가진 질그릇으로 비유하여, 비록 사도(전도자, 그리스도인)가 질그릇같이 가치 없고 약한 존재이지만, 그 속에 있는 보배, 곧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 복음은 가장 귀한 것으로, 사도가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종국에는 영원한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소중한 비유인 ‘질그릇 비유’가 주는 교훈과 은혜는 무엇입니까?
1. 우리(내)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질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그릇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는 질그릇으로 비유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
우리가 늘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이 질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하나의 질그릇, 곧 흙덩이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너는 흙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여기서 “질그릇”(오스트라카노이스 스큐에신)은 직역하면 ‘흙으로 벚어진 그릇’이란 뜻으로, 비유적으로‘깨지기 쉬운 그릇’(시 31:12,)을 의미합니다. 본절에서부터 15절까지 사도직의 어려움과 영광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가운데 바울은 사역자들을 질그릇에 비유하여, 그릇 자체는 가치가 없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우나 그 내용물인 보배인 복음은 매우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들어서 ‘아담’(אדם)이라고 불렀습니다."아담"이라는 것은 명사로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여성명사, ‘아다마’(אדםה)로 말하면 ‘흙’이란 뜻이며,형용사로는‘에돔’(אדם)이라고 하며‘붉다’는 뜻으로써 ‘흙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놓고 “아담”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 흙덩어리야”하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유대인)의 전설중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들어서 구웠는데 한 번은 너무 희게 구워져서 실패했고, 또 한 번은 너무 많이 구워서 까맣게 되어 실패했고. 세 번째 구웠더니 황색으로 잘 구워져서 이것을 아담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황인종이 인간의 원종자라고 하는 말로써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전설에도 유대인의 선민의식과 우월주의가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유대인 자신들이 셈족으로 황인종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인간은 처음부터 흙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구워 만든 것으로서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가르쳐 주는 진리대로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많은 돈을 들여 무덤을 장식하는 일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속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그렇게 밖을 굉장하게 꾸며 놓는다고 하여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어떤 때 무덤을 이장하는 일이 있어서 예배를 인도하러 가서 보면, 가난한 사람의 무덤은 파 보면 깨끗이 썩어서 몇 개의 뼈를 남기고는 벌써 흙이 다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두꺼운 관으로 굉장한 치장을 한 부잣집의 무덤을 파고 보면, 아직도 시신이 썩지 않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흉하고 불쾌한 기분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관을 크게 하고 무덤을 별나게 꾸미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시신은 빨리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좋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들어가는 무덤도 그렇지만, 살아있을 때에도 먹고 입고 하는 것에 너무 투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흙으로 된 우리 몸을 치장하기 위해서 비싼 옷을 화려하게 입고 신경을 쓰는 것을 볼 때이면 “중고품에 새 것을 걸치면 무엇을 하나?”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나 겉보다는 알맹이가 좋아야 하는 것인데 알맹이가 중고인 터에 겉을 장식한다고 하여 무슨 수가 나는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내세우려 하면 드러낼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가문으로 하면 정통 베냐민 지파요, 학력으로는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배경으로 보면 바리새파의 일원이었고,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는 남다른 배경도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셋째 하늘에 올라갔던 신비한 체험이 있고, 사역의 열매로는 그가 개척한 수많은 선교지가 있으니, 지금으로 하면 이력서에 쓸 것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늘 자신이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며 살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더 부각시키고 노출시켰습니다. 사역자로서 약점일 수 있는 육체의 가시가 있음을 드러내 말합니다. 남들을 위해 기도하면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지만 정작 그는 질병을 달고 다니는 역설적 상황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에서는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를 두려워하며 야반도주한 사실이 있는데, 그 사실을 거리껌 없이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은 약하지만 그 약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임을 인정함으로 갈등을 극복하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으로 분명 ‘흙’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겸손히, 깨끗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깨어지고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하므로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충성스런 일꾼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2. 우리(내)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므로, 그릇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는 질그릇이 중요한 것은 그 흙덩어리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질그릇 자체는 흙으로 만들어져 깨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이 보배를 가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고 말하는 이 두 구절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흙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생기”을 불어넣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Pascal)은 그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팡세》의 서두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명언은 성경에서 “상한 갈대”(마 12:18-22, 사 42:1-4)에서 유래했습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매우 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는 사람은 사람(인간)이 못 됩니다. 생각함으로 비로소 갈대 같으나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인간의 값은 그 속에 있는 보화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깨끗하게 보전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값이 평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3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루아흐, רוח)이 함께 하지 않으면, ‘사람’(아담,אדם )이 ‘육체’(바사르, בשׁר)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형상)은 떠나고 흙덩이만 남은 인간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육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육체 위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 귀중한 진리는 우리에게 더욱 오묘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보배(보화)를 가졌으면 그 값은 그 보배에 의하여 평가된다는 말입니다.우리의 육체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질그릇 속에 보배가 있으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의 평가를 받습니다. 이것은 자랑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그릇은 질그릇입니다.
옛날 이야기에 당나귀가 정승을 태우고 다니면 인사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당나귀가 어느 시간에 자기가 인사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입니다.
어느 호텔의 주차장에서 운전기사들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왜 싸우나?’ 하고 한참 구경을 했는데 그 이유는 어느 높은 분을 모시고 다니는 기사가 교만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기사면 어디까지나 기사지 높은 분을 모시고 다닌다고 해서 자기도 높아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실수를 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질그릇 자체가 보화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일 뿐입니다.
여기에 좀 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하여 깊은 의미의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Christian Life,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제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본문의 의도인데 그것은 ‘질그릇 인생이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중생하여 헌신적으로 충성하고 병을 고치기도 하고 귀신을 내어쫓기도 하여 자랑도 가지고 영광을 누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이 변하여 금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며 흙덩어리가 변하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입니다.문제는 바로 질그릇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여기에 있으며 흔히 말하는 실망이나 절망이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이 먼저 자기의 자기 됨을 시인하는데 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잠시라도 자기 위치를 떠난 일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죄인임을 알고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4:12-15)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그릇과 보배에 대한 말씀은 매우 ‘역설적(paradox) 진리’입니다. “질그릇”은 약하고 천한 것이며 “보배”는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릇 중에는 금그릇, 은그릇, 나무 그릇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질그릇이냐 하면 ‘약하고 깨지기 쉽고 천하다’는 의미에서 사람을 질그릇에다 비유했습니다. 이 약하고 깨지기 쉽고 천한 질그릇 같은 우리들에게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이라는 보배를 주셔서 우리를 귀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하는데 죽도록 충성하므로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일꾼이 됩시다.
3. 질그릇에 담긴 가장 중요한 보배는 예수 부활 생명 복음입니다(5)
사도 바울은 질그릇인 본인이 가진 보배가 무엇인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5)한 마디로 자신이 전파하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 곧 예수 부활 생명 복음과 이 복음을 위하여 자신이 종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설교 내용. 곧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설교자가 어떤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었으며, 목소리 톤이 좋고 나쁘고, 재미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그 설교의 내용,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지금은 은퇴한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오셔서 이미 30대 후반부터 수많은 집회를 인도한 능력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50이 넘어서 1년 동안 미국 신학교로 설교학 공부를 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그런데 매주 한 편씩 설교를 준비해서 발표하고 그 설교에 관해서 학생들이 토론하고 교수님이 코멘트를 해주셨는데, 자기 설교에 관해서 한 번도 잘했다는 코멘트를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정말 심혈을 기울여 열심히 설교를 준비했는데, 교수님께서 도무지 긍정적인 코멘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교수님께 자신의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의 설교에는 예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았다는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이 결여되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이 50대 목사님이 한 대 맞은 듯이 ‘띵’ 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자기가 했던 설교의 메시지에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목사가 된지 20년이 넘어서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그의 설교의 모든 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부활을 통한 구원의 생명, 곧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 교훈이 내 말, 내 교훈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말과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거짓 교사들과 차별하며 자신의 사도직을 변증하는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나는 그의 종이라고 전파하는 것’이 거짓 교사들과의 가장 큰 차이이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 공격하는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진리인지, 성서에 합당한지의 여부를 가리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그의 일행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싸움의 대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메시지인데, 그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를 가지고 논점을 흐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달을 보아야 하는데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가지고 따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비난하며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이 보기에 바울 사도는 정통성 없는 이단아 같은 존재였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살아서 활동하실 때에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그러므로 그를 사도라고 칭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둘째, 자신들은 추천서를 가지고 가야 인정받는데, 바울은 그런 것 없이도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셋째, 자신들은 재정 지원에 매여 있는데, 바울은 자비량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곳곳마다 엄청난 구제 현금을 모아서 지원하는 것을 보며 재정 문제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넷째, 더구나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을 향해 사역하는 태도도 못마땅합니다.그들이 생각하기에 너무도 중요한 할례의 징표도 이방 선교에는 걸림이 된다고 무시하는 바울을 보며 유대교 배경과 예루살렘교회의 후원을 받는 교사들은 바울을 대적하기로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변증한 것처럼 바울과 그 일행이 아닌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정당성이 핵심입니다. 그가 자신들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사역의 열매가 분명하며, 이방인의 지역에까지 사역의 영역을 넓힌 것을 시기하여 그에게 인신 공격을 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메시지와 메신저를 구별해서 볼 것을 요청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이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메시지의 핵심은 예수가 구원자이시며, 그를 주인으로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비량을 하면서까지 사역한 것은 말씀의 종으로서 군림하는 자가 아닌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인 것입니다. 마땅히 칭찬받을 만한 사역의 자세이며 선명한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은 지금 편견에 사로잡혀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선입견, 편견에 사로잡히면 본질을 보는 눈이 어두워집니다. 사람을 주목해 보지 말고 그의 메시지와 그 사역의 열매를 지켜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19-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5)이 말씀을 명심합시다. 사도 바울은 바로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질그릇인 우리는 복음의 내용도 목적도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 대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나 감정이나 편견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이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부활 생명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참된 사도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고 악선전을 해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고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4. 결(結) : 시련과 박해를 받아도, 영원한 천국을 대망(大望)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시련과 박해가 오지만 그것을 견디고 이기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과 비난, 그리고 핍박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은 비결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8-10)라고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환난을 당하는 중에서도 놀라운 도움과 위안과 평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에게 다가오는 시험과 박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는 고백을 통해, 그가 당하는 모든 내적, 외적 고난을 십자가의 길로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보장한 삶은 꽃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입니다. 풍요가 보장된 삶이 아닌 빈곤을 무릅쓰는 삶,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삶입니다. 지금 당장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망으로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보여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주의 종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의 분량의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최고의 복이요, 주님과 동행함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그가 겪은 안팎의 고난을 통해 이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과 그 일행이 사망과 같은 고난에서도 견디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라는 말씀은 그 깨달음의 결과입니다. 박해에도 꿋꿋하게 서 있는 모습, 공격을 받으면서도 살아 있는 모습, 오히려 그 결과 진리가 더 빛나게 되는 결과를 보면서 죽음을 통과한 생명, 즉 십자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필수 과정이요, 오히려 복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약할 때 강해지는 비밀, 죽음을 각오할 때 주어지는 영생 질그릇같이 연약해도 복음의 메시지를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울처럼 경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6-18)고 말한 후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5:1-2)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생명!” 그 소중한 생명이 우리의 몸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무슨 말이나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겠습니까? 질그릇인 우리는 잠깐이지만 보배인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 우리에게 다쳐오는 시련과 박해를 극복하고 승리하며,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며 소망 중에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III.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놓고 말하기를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인격을 격하시키고 학대하며, 한숨으로 인생 무상을 읊조린다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낙심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무능하고 필요 없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비록 흙으로 된 질그릇이지만,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이란 보배를 가졌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어떤 시련과 박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며, 소망 중에 오늘도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파하는 충성스런 전도자로 생명을 살리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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