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世 直提學公(諱賜)派 坡州公(諱純祐)의 壻
동명집 제16권 / 비갈(碑碣)
병조 참판에 추증된 서공의 묘갈〔贈兵曹參判徐公墓碣〕
[DCI]ITKC_BT_0349B_0170_010_0100_2013_005_XML DCI복사 URL복사
가선대부 병조 참판에 추증된 서공(徐公) 휘 주(澍)는 자가 경림(景霖)이며, 연산인(連山人)이다. 공은 살아 있을 적에 집안에서만 보냈는데도 죽은 뒤에 이처럼 추증된 것은, 그의 아들이 정사 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참록되어서이다. 집이 결성(結城)에 있었는데,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30) 2월에 병으로 인해 졸하였으며, 향년은 54세였다. 그해 7월에 살던 곳의 지석촌(支石村)에 장사 지냈다.
증조의 휘는 종수(宗秀)로,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휘는 연(憐)으로,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천령(千齡)으로, 연기 현감(燕岐縣監)을 지냈다. 어머니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정주 목사(定州牧使) 정웅(鄭熊)의 딸이다.
공의 전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파주 목사(坡州牧使) 정순우(鄭純祐)의 딸이다. 후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사인(士人) 이응린(李應麟)의 딸이다. 정씨 부인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후적(後積)은 석성 현감(石城縣監)이며, 바로 공을 참판에 추증되게 한 자이다. 차남은 효적(效積)이다. 딸은 정랑 최정원(崔貞元)에게 시집갔다. 이씨 부인은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생원 정환(鄭晥)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무주 현감(茂朱縣監) 남식(南烒)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이조 참판 김반(金槃)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부제학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에게 시집갔다.
후적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필영(必榮)이고, 장녀는 김민중(金敏中)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석명(韓錫明)에게 시집갔다. 효적은 5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필형(必亨)ㆍ필원(必遠)ㆍ필후(必厚)ㆍ필성(必成)ㆍ필행(必行)인데, 필성은 진사이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정환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뇌경(鄭雷卿)은 장원으로 급제하여 필선(弼善)이며, 장녀는 이조 참의 이행우(李行遇)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세마(洗馬) 조실구(曺實久)에게 시집갔다. 남식은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남일성(南一星)과 남이성(南二星)이고, 딸은 수찬 오달제(吳達濟)에게 시집갔다. 김반은 5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김익희(金益煕)ㆍ김익겸(金益兼)ㆍ김익훈(金益勳)ㆍ김익후(金益煦)ㆍ김익경(金益炅)인데, 김익희는 응교이고, 김익겸은 생원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딸은 아직 어리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독실하고 도타웠다. 과부가 된 누님 섬기기를 어버이를 섬기듯이 하니, 온 향리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가산(家産)이 부유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친구들이 찾아오면 창고에 쌓여 있는 곡식을 다 나누어 주어 수백여 명을 살려내었다. 공은 아버지 위로는 잇달아 6대가 외동아들이었다가 공의 대에 이르러서 두 아들에 여섯 손자가 있었으며, 사위와 외손과 외손사위가 벼슬길에 나아가 조정에서 두드러졌으므로, 온 향리 사람들이 음덕(陰德)에 대한 보답을 받은 것이라고 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공께 후손 있는 것이 마땅하거니 / 公宜有後
공께서는 굶주린 자 살려내었네 / 公活餓人
창고 속에 쌓인 곡식 나누어 주어 / 破其倉積
부유함을 버리고서 어짊 취했네 / 捨富取仁
공에게는 아들에다 사위 있으며 / 公有子婿
안팎으로 손자 손녀 많이 있었네 / 內外諸孫
살펴보고 잘 돕지를 아니했던가 / 不鑑不佑
복 내림이 많은 것이 아니었던가 / 降祉不繁
결성 땅의 지석촌에 있는 산자락 / 支石之村
공이 묻혀 편히 잠든 무덤이 있네 / 惟公眞宅
이런 내용 엮어서는 명을 지어서 / 作此銘章
무덤 앞의 빗돌에다 새기는도다 / 刻之玄石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9
첫댓글 동래정씨 휘 순우(純祐)의 사위 되시는 서공(徐公) 휘 주(澍)의 묘갈명 잘 읽었으며 이 정도라면 명문가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래 정씨(東萊鄭氏) 파주 목사(坡州牧使) 정순우(鄭純祐) 사위 서공(徐公) 휘 주(澍) 의 묘갈명 잘 읽었습니다.
군태님의 좋은정보글 잘공유하고 흔적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