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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 - 6. 용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삶의 기술!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용서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게 하여 주옵소서!”였다면 조금 더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냥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말씀이었다면 그렇게 하셨을 텐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가 이렇게 항변할 수 있습니다. “받은 것이 있어야 주지요.”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일정을 확인하며 지난해에 집회를 부탁한 곳에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속실에서 확인 차 연락을 했더니, 그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황당하기도 하고 기분이 몹시 나쁜 순간이었습니다. 자기들이 1년 전에 일정을 잡아달라고 전화를 해서 다른 약속을 잡지 않았는데, 바로 얼마 전에도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었지만, 그 일 때문에 거절을 했는데….
왜냐하면, 저에게는 “처음 한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더 유익이 되는 일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는 일은 적어도 저에게는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 스케줄에 그 사람의 전화번호와 이름도 적혀 있는데, 모른다는 겁니다. 그냥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될 일을 정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저에게 기대감이 생긴 것입니다. 그 일정이 취소되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기에 1년 전부터 아무 계획도 잡지 못하도록 막아 놓으셨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갑자기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화낼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제가 목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저는 교회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합니다. 어떤 교회와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지 말입니다. 얼마 전 새벽에 문자가 왔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다는, 그래서 아침 일찍 확인해 보았습니다. 새벽 4시 어간에 쓰신 메일입니다.
한국사회와 교회를 안고 고민하며 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대략 그런 것이었습니다. 30대의 나이에 영락교회 대예배 설교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고, 곧 승동 교회 담임으로 청빙되어 세운 목표가 “교인 배가 운동”이었다고.
그런데 하나님은 목사님을 질책하셨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속에 있는 야망을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제안을 하셨죠. “우리 함께 한국은행 같은 교회 만들어보자!” 한국은행은 은행을 위해 존재하는 은행입니다. 은행을 돕기 위한 은행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교회가 되자고 말입니다.
오늘 용서의 말씀을 드리면서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이제 나를 위한 용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용서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만큼의 헌신이 아니라 내가 용서하는 만큼의 은혜를 바라보는 조금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말입니다.
얼마 전 터키로 성지순례를 가면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터키에서는 한국을 '코레'라 부르고 한국 사람을 '코렐리'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한국 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온 사람들도 역시 '코렐리'라고 부른답니다. 한국전을 통해 800여 명의 사람이 전사를 했고, 참전 용사들은 돌아와서도 긍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유지되던 좋은 관계가 한순간에 깨졌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터키의 첫 상대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한국 심판으로 결정된 것을 대서특필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는 한국전에서 도와줬던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 심판의 오심으로 터키는 브라질에 역전패를 당하고 맙니다.
기대가 깨어지면 더 큰 좌절과 분노가 생기지요. 당시 터키 축구협회 회장은 "50년 전에 터키가 한국을 돕기 위해 800명의 목숨을 바쳤는데 오늘 한 한국인이 터키의 7천만 국민을 학살했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언론들은 나름대로 터키인들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터키는 일본에서 벌어진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에 다시 패한 뒤 한국에서 3 4위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터키 사람들은 계속해서 한국에 대하여 냉담했고, 짐짓 무관심한 태도로 한국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두 나라의 관계가 경기를 시작하면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의 응원단석에서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 가득히 펼쳐진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터키의 중계 아나운서는 감격에 겨워 열렬한 어조로 한국에 대한 감사와 감동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날 무렵, 터키 아나운서는 50년 전의 우정을 아직도 잊지 않는 한국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이후에 한국과 터키는 다시 "도스트" 즉 "형제"가 되었습니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관계가 깨어진 것도, 관계가 회복된 것도,
한순간에 형제가 원수가 되고, 원수가 형제가 된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회복은 어느 편에서든 보여줘야 하는 뭔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용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
크리스천의 건강한 삶, 성숙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14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살아가는 모습 중의 하나가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모습으로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이죠.
지난 수난 주간에 집회를 인도하신 노완우 목사님이 첫날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몸의 창조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병”은 재수 없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리하지 못해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지배하는 것은 머리입니다. 그 중 대뇌의 기능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대뇌는 ‘주어’를 모르기 때문에 욕을 하면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죠.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퍼붓는 원한을 대뇌는 ‘자가 인식’합니다. 용서가 필요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말이 우리의 건강을 파괴하기 때문이죠. 또한, 대뇌는 ‘시제’를 모릅니다. 과거의 원한을 잊지 못하고 이야기하면 대뇌는 지금의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또한, 대뇌는 ‘언어의 지배’를 받습니다. 말이 권세가 있는 것은 말 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대방을 욕하면 그 욕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하고 상대방을 향해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데 어떻게 좋은 말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집회 시간에 그런 실험을 했습니다. 오른손과 왼손을 겹쳐 보세요. 딱 맞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을 펴고 가운뎃손가락에 세 번만 명령하고 겹쳐보세요. “짧아져라, 짧아져라, 짧아져라! 혹은 길어져라, 길어져라, 길어져라!”라고 말입니다. 말의 힘을 보게 됩니다.
세 가지 용서
건강하고 온전한 용서는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을 믿는가?
시편 103편 12절 말씀에 보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마틴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많이 지쳐 있을 때, 심신이 피곤하여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사단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두루마리를 펼치며 이야기합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너의 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루터는 더욱 위축되고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순간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단을 향하여 호통을 칩니다.
요한 1서 1장 9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다음에 그의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숙함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온유함, 인내, 겸손 그런 것들이 아닌가요? 그런데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쫓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밝은 모습, 자신 있는 모습, 기쁨이 충만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고난주간에 집회를 오셨던 노완우 목사님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육신의 상태와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표현인데요. 만약 여러분의 자세가 웅크려진 상태에서 밝은 이야기를 할 수 있나요? 밝은 이야기를 할 때는 자세와 표정이 당당하고 밝아지지요.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문제로부터 우리가 당당해져야 당당한 크리스천의 모습과 관용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F. B. 마이어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이,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원문 성경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그리고(And)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공동번역 성경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요, 장로교 창시자인 칼빈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백하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씀은 인간은 모두 버림받은 존재라는 절망적인 말씀이 아니라 죄인임을 깨닫고 그 길에서 돌이키면 구원의 길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용하고 얌전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 착한 사람이라고, 심지어 죄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하면서 자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즉 사랑하지 않은 것, 선을 행치 않은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둘째,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했는가?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의 모습인가? 노완우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그분의 간증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분이 건강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구타를 당해 생명이 경각에 달렸던 적이 있답니다. 병원으로 후송되어 중환자실에서 죽어서 병실을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했고, 만약에 나간다면 자신을 때린 고참을 죽이고 싶었답니다. 당시 신앙생활을 잘하던 군의관이 들어와서 기도하자고 하면 분노가 일었답니다.
그 이야기를 잠깐 소개합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잘못한 일이 있어서 벌을 받다가, 고참이 발로 가슴을 찼는데, 거기가 터져버렸다. 그때부터 6개월간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반식물인간으로 분류되어서 먹여줘야만 했고, 대소변을 가려줘야만 되는 몸이 되었다. 그래서 통합병원을 거쳐서 진해에 있는 통제부 안에 있는 병원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월남전 때 다쳤던 식물인간과 같이 분리되어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하나님, 제가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요? 하나님, 정말 저에게 이럴 수 있나요?”라며 항의도 해 보았다. 그런데 저를 주치했던 분이 장로교회 안수집사님이셨다. 늘 오셔서 기도하고 진료하고, 기도하고 진료하셨다.
어느 날, 내가 나를 봐도 너무 비참해서 사진으로도 다 찍어놓았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고 있다. ‘이때를 잊어버리지 말자.’ 그 사진을 보면서 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마음속에서 되새기곤 한다.
주치의가 하는 말이 “네가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똑같은데,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자.” 사실 기도훈련이 잘되어 있는 사람은 그렇게 기도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내 영적 수준은 “어떻게 의사가 고쳐줄 생각은 안 하고 기도만 하느냐고 기도하면 낫겠냐고” 반문했고, 주치의는 “그럼 어떻게 해. 이 방법밖에는 없는데.”라고 하면서 가곤 했다.
투병생활 중에 김옥기 전도사님이라는 할머니 전도사님이 계셨다. 내가 일등병 때 병원에 갔는데, 오래 있다 보니 상병을 달았다. 그분이 지나가는 말로 하시는 말씀이 “노 상병, 죽어도 천국은 가야 되잖아.” 그런데 그 말씀이 얼마나 뜨겁게 다가오는지 ‘아! 내가 죽기는 죽는 거구나.’
다음날 김옥기 전도사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혹시 노 상병, 하나님께 서원한 것 있나?”
“서원이 뭔데요?”
“목사 되겠다고 약속한 거 없나?”
“그런 거 없어요.”
“내가 기도하는데 자꾸 그런 마음이 드는데, 한번 생각해봐라.”
“없어요. 생각해볼 것도 없어요. 없어요.”
“그래? 그럼 알았어. 기도하자.”
그러고서 밤중에 혼자 기도를 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눈을 감고 있는데, 언뜻 지나가는 생각이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목사님 불쌍해서 손들어줬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래서 다음날 전도사님이 오셨기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전도사님이 막 웃으면서 그것도 서원이라고. 그럼 살려주면 목사가 되겠느냐고. 살려만 주시면 목사 되겠다고. 서원기도는 헌금이 들어가야 된다고 해서 상병 월급 2,100원에 900원 보태서 3,000원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 저 살려주시면 목사가 되겠다.”라고 서원기도하고 삼일 째 새벽에 하나님이 저에게 믿음을 주시는데, 일어날 것 같은 믿음과 확신이 생겼다. 나는 지금도 그런 믿음과 확신이 오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한다.
그때까지 피골이 상접했던 내가 허리가 꺾이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손뼉을 치면서 같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6개월 동안 누워 있으면서 본 책이 있는데, 근골계, 신경계…. 이런 책을 봤다. 손을 못 움직이니까 누군가가 넘겨줘야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근골계를 펴 놓으면 다른 사람이 넘겨줄 때까지 읽고 또 읽었고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이 외워지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빨리 자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유는 나를 때렸던 그 최 상병이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내가 꿈속에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다 죽여 보았다. 총으로 쏴 보고, 칼로도 찔러 보고, 목을 톱으로 켜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망하고 최 씨만 들어도 자다가 몸서리처질 정도였는데, 이제는 너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내가 하나님 만났을까!’ 그분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래서 퇴원명령을 내려달라고 했더니 의가사 제대 서류를 제출하고 날짜를 기다리면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원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퇴원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라고 해서 “이런 일이 있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되겠다.”라고 했더니 이분이 우시는 것이다. 왜 우시느냐고 했더니 “네 얘기를 들으니 내가 회개해야 되겠다.”라고 하면서 우시는 것이다. “참으로 고맙다. 네 덕분에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깨닫게 되었다.”라며 퇴원명령을 내려주셨다.
그런데 그분이 하는 말이 “공로패 하나 해 드려라.”라고 하시는데, 농담인 줄 알았다. 그래도 공로패를 하나 해 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여주에 들러서 4,000원을 주고 패를 만들었다.
‘감사패’
“병장 최○○!
귀하는 노완우를 때려 병원에 입원시킨 후 기도하다가 하나님 만나게 한 공이 있어 이 패를 드립니다.”
패를 하나 만들었다. 순진하게도 장로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백일보충대를 찾아갔는데, 이미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고참은 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회개하고 울었는지 성자가 돼 있었다. 들어가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가니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울고. 내가 감사패를 전해줬더니, 보고 웃고, 보고 울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용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니까,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죠. 그 사람 때문에 받은 은혜를 생각하게 되죠.
셋째, 나 자신을 용서했는가?
우리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포함합니다. 김승동 목사가 쓴 [지혜력]이라는 책에 보면, “용서”에 대하여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용서는 수문이 열린 댐과 같이 과거를 흘려보낸다.
용서는 타인을 과거의 모습도 아닌, 미래의 모습도 아닌, 우리가 원하는 모습도 아닌 지금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을 용서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회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죄책감을 부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을 더 많이 용서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 용서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더욱 용서를 실천하고 위탁하며 자신에게 성실해야 한다.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용서받은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모님에게 잘못한 것, 우리의 실수로 가정에 피해를 준 것들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부모님 몰래 차를 몰고 나가서 사고가 났습니다. 모르는 척할 수 있지만,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잘못을 구합니다. 부모님은 분명히 화가 날 것입니다. 경제적인 손실을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고, 그 차가 아끼는 것이라면, 새 차라면 훨씬 더 많이 화가 날 것입니다. 물론 야단을 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은 부모라면 그 일을 저지른 자식을 용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 차가 귀해도 자식보다 소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합니다.
하나의 경우는, 그 자식은 자신의 죄를 고하지 않는 한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시간의 자유, 공간의 자유 모두 말입니다. 자신의 잘못의 흔적인 차를 바라보지도 못할 것이고, 아버지의 눈길도 피하게 될 것입니다. 자꾸 방어적으로 변화되는 자신과 아주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경우는, 용기를 내어 잘못을 구하고 나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죄송한 생각이 들어 다음 날에도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용서를 구했지만 용서받은 것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한, 매일 그 죄를 고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부모가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처는 계속해서 상처로 남습니다.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대해질 수 있는데, 용서받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편협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봅니다. 용서받은 감격이 있어야 상대방에게 관대해집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생각하건대 우울증에 대부분은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기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용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용서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낚시 금지”입니다.
한 여인이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좋은 남편 그리고 소중한 자녀를 둘씩이나 기르면서 사는 사람, 누가 보아도 우울증에 걸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루는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목사님에게 찾아가 기도를 받고 상담을 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남편을 내 보내고, 아내에게 묻습니다.
“혹시 우울증에 걸릴 만한 일이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그러자 이 여인이 과거의 일을 고백합니다.
언니와 함께 살던 시절, 언니가 만삭이 되어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에 가 있는 동안 형부와 불륜을 맺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일이었고, 시집을 가서 잘살고 있었지만, 언니를 볼 때마다 죄의식은 점점 커졌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이 여인을 데리고 호숫가로 가더니 말을 합니다.
“작은 돌을 가져다가 호수에 빠뜨리세요.”
그리고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번에는 더 큰 돌을 가져다가 빠뜨리세요!”
“돌이 어디로 갔죠?”
그녀가 호수 밑에 내려갔다고 대답하자 목사님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큰 죄나 작은 죄나 다 예수님의 은혜의 못에 들어가면 똑같습니다. 모두 가라앉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숫가에 이런 팻말을 붙여놓으셨습니다. [낚시 금지] 다시는 옛 죄를 떠올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혜의 강에 들어가서 자유함을 입으십시오.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렇죠! 어느 날 우리가 진리를 접하는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용서를 받았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구나! 우리가 그 죄를 기억하지 않기를 원하시는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기억 속에서 잊힌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사단의 세력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용서받은 체험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경험이 있는 자가 용서할 줄 아는 은혜를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감격이 적으면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도 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용서가 계속 일어나도록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여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입니다.
언제 보아도 은혜가 되는 부분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어쩌면 가장 사랑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아파하셨을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나를 배신했는데, 이제 너희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니?”라고 묻지 않으십니다.
단지 옛사람으로 돌아가 있는 제자를 향해 첫사랑이 회복되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옛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단지 네가 나를 지금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뿐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기술입니다.
과거의 경험. 미래의 기대, 우리의 기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가 기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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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