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순교자현양회 성지순례]
장소 : 전주교구 초남이성지, 전동성당
날짜 : 11월 26일(토요일) 06시 30분~19시00분
<초남이 성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
지금의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부락!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 45세) 복자의 생가터가 자리한 곳이다. 1756년 이곳 초남리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우리나라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 복자의 이모이자, 권상연(야고보 1751~1791) 복자의 고모인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항검은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유항검은 전주 초남리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가문의 아들로 지냈으며,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양명을 꿈꾸었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윤지충의 이종사촌 형이자 권상연의 외종사촌 동생인데, 유항검은 바로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 신앙으로 입문하게 된다. 유항검은 모계를 통해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과 일족일 뿐만 아니라, 이종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6), 이승훈(베드로), 정약전도 인척간이었으므로 초기 신앙의 시작이 되었던 경기도 양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에게 교리를 배우고, 그를 대부로 삼아, 이승훈에게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 미래의 며느리인 이순이(루갈다)의 친정 외숙부들을 통해 천주교 신자가 된 셈이다.
유항검은 호남의 갑부로서 덕망이 출중했으며, 자기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식솔들에게 나눔의 생활을 실천하며 전교하였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도에서 체포된 200여 명 대부분이 그가 전교한 사람들이었다.
고향에서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유항검은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철신, 홍낙민(루카), 최창현(요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과 함께 신부(神父)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假聖職)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리하여 윤유일(바오로)이 밀사로 파견되었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비용도 부담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리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 받는다.
유항검은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유관검, 윤지헌(프란치스코, 37세)과 함께 참수치명 받았다. 조정은 유항검의 머리를 풍남문 누각에 매달았다. 또한 그의 생가를 파가저택(破家瀦宅)하고, 그 많던 재산도 몰수하였다.
같은 해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는 큰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 22세)과 작은아들 유문석(요한 1784~1801, 17세)이 전주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에는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1782~1802, 20세)와 조카 유중성(마태오 1783~1802, 18세)은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치명(斬首致命)하였다. 유항검의 16세 미만의 세 자녀는 귀양을 보냈다. 그의 9세인 둘째 딸 섬이는 경상도 거제부 관비로 보내고, 6세인 셋째 아들 일석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관노로, 그리고 3세인 넷째 아들 일문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관노로 보냈다.
유항검 가족들의 시신은 일꾼들과 신자들이 거두어다가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초남리 바우배기에 가매장하였다. 전동성당 초대 주임사제인 보두네 신부가 1914년 3월 사순절에 전동성당으로 안치했다가, 같은 해 4월 19일에 전주시 동편에 자리 잡고 있는 치명자산 위에 모셨다.
초남이 성지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사제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1795년 4월에 1주일 동안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유항검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와 세례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초남이에 머물러 있는 기간에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은 첫 영성체를 하고는, 부친의 허락을 받고 평생 동정(童貞)으로 살기로 서원(誓願)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인 양반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신자인 이윤하의 딸인 이순이(루갈다)가 그녀였다. 루갈다의 아버지인 이윤하(마태오 1757~1793)는 전주 이씨로서 지봉 이수광의 손자이자, 성호 이익의 외손자로, 할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고 권철신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윤하는 명례방 김범우(토마스) 집에서 열린 천주교 집회에 참석한 주요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루갈다의 어머니 권씨(1754~1835)는 권일신의 누이 동생이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주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이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유 요한과 이 루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부부였다. 이곳에서 이 둘은 1801년에 치명할 때까지 4년간 동정생활을 하였다.
한국의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복자와 권상연(야고보) 복자 및 윤지헌 (프란치스코) 복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 32세)의 본관은 해남으로 아버지는 윤경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6대조는 고산 윤선도이고, 증조부는 공재 윤두서이다, 윤지헌(프란치스코)는 그의 동생이다. 권상연은 내외종간이고, 유항검은 이종사촌이며, 정약전과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 형제들과는 고종사촌 간이다.
권상연(야고보 1751~1791, 40세)은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권세학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지낸 명문세가였다.
윤지충은 1784년 한양의 명례방에 사는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 天主實義 1603>와 판토하의 <칠극 七克 1614>을 보고 빌려와 교리를 묵상하고 나서 신앙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신앙을 전해 준 사람은 고종사촌인 정약전이었다. 윤지충은 그에게 서적들을 빌려와 묵상했고, 부족한 부분은 정약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권상연은 윤지충을 통해 서적을 접하게 되었고, 윤지충이 세례를 받고 내려왔을 때, 당시 평신도 성직시기 전라도 담당 신부였던 유항검(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상(喪)을 당하였다. 천주교 열심한 신자인 어머니는 평소에, 죽거든 장례식에 미신적이거나 또는 천주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간곡히 일렀다.
윤지충은 외종형인 권상연과 상의한 후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천주교회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정중하게 상례(喪禮)를 갖추었다. 그러나 유교의 제사 의식에서 봉행하였던, 음식을 차리거나 신주(神主)를 모시는 의식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교 의례 거부 사건이 잘못 확대되고 알려지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체포되었다.
1791년 10월 29일에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었다.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에 이들의 처형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싸전다리 시장, 즉 전주 남문 밖 시장인 지금의 전동 성당터에서 이루어졌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당당하게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의 칼날을 받았다.
이들의 머리는 장대 끝에 높이 매달려 9일 동안 효시되었다. 이후 장례가 허락되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초남이 바우배기 일대에 묻었다.
한편 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 37세)은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전라도 방문 때 세례를 받았다. 1796년 전라도 공동체가 ‘대박청래운동(大舶請來運動)’을 추진할 당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큰 배를 청원하는 편지를 쓸 때마다, 유항검과 유관검 형제와 함께 서명하는 등 초대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01년 3월 28일 신유박해 때 동료들과 함께 윤지헌도 체포되어 전라감영에서 심문을 받았다. 윤지헌은 유항검과 함께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풍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런데 2021년 3월 11일에 초남이 성지 바우배기 일대를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윤지충과 권상연 및 윤지헌의 묘와 유해가 발견되었다. 묘에서는 각자의 인적사항이 적힌 백자사발지석도 출토되었다. 지석의 기록은 세 복자의 인적사항과 일치하였다. 전주교구는 유해의 진정성 확인을 위해 6개월에 걸쳐 고고학적, 해부학적 조사를 진행한 후, 2021년 9월 1일에 성해(聖骸) 진정성의 교령(敎令)을 선포하였다.
<출처 : 초남이성지>
▲한국복자수녀회 수녀님 성지 설명
▲출발전 기도
▲윤지충 바오로 순교자의 다섯 번째 목뼈가 예리하게 잘린 모습(참수형의 흔적)
▲초남이성지 교리당(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 순교자 안치되어 계심)
▲초남이 유항검 생가터 성당
▲풍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