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4일 화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10,1-10
복 음 : 마르 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평생 살아가면서 이혼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또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떨까요?
그런데 어떤 연구 결과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평생 살아가면서 200번 정도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또 50번은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극도의 혐오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부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바로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 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삶 안에서 고통과 시련도 커지게 됩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부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였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사람은 상대방을 적으로 여겨서 항상 결점을 없애려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을 전우로 여기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함께 어려움을 짊어집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지혜가 가득해야 합니다.
이 지혜는 자신이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혜롭고 완전한 사람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생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요구하는 삶이 아닌,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하는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내게 요구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마르 3,22).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친인척이 찾아왔으니 다른 것을 다 뒤로 하고 먼저 만나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군중이었습니다.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육체적으로도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진정한 형제, 누이,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요구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요구를 들어주는 삶을 살고 있나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 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 받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엄청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시고,
최후 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 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 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 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인 사람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32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가족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리아를 당신의 가족에 분명히 포함하셨다.
사람들이 당신께 알려준 사적이고 개인적인 혈연관계로서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마리아도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
우리는 당신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한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이다.
또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을 앞세워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즉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더욱 복되신 것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혈육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참조)
혈연관계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도 복되시다고 천사도 엘리사벳도 말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 관계조차 마리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참조: 마태 3,8-10; 루카 11,27-28; 로마 9,1-8)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송하신 것은 혈연관계로 당신을 낳아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 말씀은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자신을 지어내시고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에 복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학생 때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나환자 마을로 봉사를 갔을 때입니다.
친구는 그곳 아이들에게 자기가 만든 노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가 1983년 겨울이니 어느덧 40년이 지났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노랫말과 멜로디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오늘은 그 노랫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만나던 즐거운 일요일에 우리 사랑 영원하라
주님께 기도하며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마저도
우리들의 사랑을 축복하는 곳으로
이 세상에 너보다 어여쁜 이 있다면
이 세상에 너보다 사랑한 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다 거짓말이야
어여쁜 너 어여쁜 너 나의 천사여”
노래의 제목은 ‘나의 천사여’입니다.
유안진 선생님은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의 허물도 모두 예뻐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허물이 크고, 늘 죄를 짓고 살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023년을 시작하면서 저도 ‘천사’를 몇 번 만났습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께서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덕분에 새해가 시작하는 1월 1일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성지순례로 시작한 2023년은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새벽 5시에 무덤 성당으로 조배를 갔습니다.
미사를 예약하지 못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천사 같은 수녀님이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미사를 봉헌하는데 순례 온 한 교우분이 미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의 몸가짐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덤으로 미사를 봉헌한 네 명의 사제들의 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앞둔 화요일에 베들레헴 주님 탄생 성당으로 순례를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현지에 사는 한 형제님이 친절하게도 주님의 탄생 성당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고,
경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4박 5일의 짧은 성지순례였지만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 덕분에
감사하고 은총이 충만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저 역시도 이웃을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천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에는 27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태조, 한글을 창제한 세종,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정조, 나라의 문을 닫아야 했던 고종 등이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존경받는 왕은 세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방, 과학, 문학, 외교, 예술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글의 창제는 세종의 가장 빛나는 업적입니다.
한글은 그 만든 목적이 유일한 문자이며, 창제의 원리가 전해지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창제원리는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되는 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을 사랑했고, 백성들의 고충을 이해했고, 백성들에게 문자를 선물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다른 세포에게 영양분을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세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양분을 나누지 못하는 세포는 ‘암’세포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새해에는 ‘나’라는 틀에 갇혀있기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의 것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회개의 여정
-회개, 비움, 친교, 섬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제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제 넋이 당신을 당신을 갈망합니다."(이사26,9ㄱ)
아침성무일도중 이사야서 찬미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제 설날 연휴에 우리 수도형제들은 ‘영웅’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후에 수도 형제들의 표정을 얼핏 보니 흡사 단체피정한 분위기 같았습니다.
얼마 전 ‘탄생’과 ‘영웅’을 영화를 본
제 느낌 역시 ‘성지순례’한 또는 ‘대피정’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으로 강렬한 ‘회개의 표지’와도 같은 영화 작품이었습니다.
어제처럼 저녁 9시 늦게 취침하기는 처음입니다.
다음날 12:30분쯤 기상하기에 늦어도 오후 8:30분에는 취침하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 경남 진주의 의인義人, ‘어른 김장하’ 2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후부터 틈틈이 1부에 이어 2부까지 다 봤습니다.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1944년생이니 저보다 5년 연상이니 거의 동시대분입니다.
또 많은 분들에게 동영상 보기를 권하기도 처음입니다.
흡사 상쾌한 숲속을 산책한 느낌이었습니다.
산소 같은, 나무 같은, 산 같은 참 좋은 사람, 진인眞人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닮고 싶은, 존경할만한 분이었습니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현 시국時局 삶의 하늘이 흡사 짙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하더라도
일시적 현상으로 얼마 지나 푸른 하늘이 나타날 것이니 지극한 인내로 참고 기다리며
부단한 기도와 분투의 선한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호흡을 길게 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푸른 하늘을 가린 어둠의 구름들 오래 가지 않고 곧 지나갈 것이라는 이런 믿음이,
희망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구원합니다.
동영상 내용 중 “장학금을 받았는데 특별한 인물이 못되어 죄송하다”는 제자의 말에,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는 어른의 말씀도 감동적이었고
곳곳에 심금을 울리는 말도 내용도 많습니다.
이웃들의 증언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하루 삼식三食은 “놈”, 이식二食은 “님”, 일식一食은 “양반”이란 유머에 웃었습니다.
선생은 자신을 세끼 차려주는 음식을 먹는 삼식이라 했습니다.
또 김장하 선생은 “결이 다른 사람이다” 란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시종일관한 김장하 선생의 한 생애였으니 세례 유무를 떠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예수님의 참 형제임을 깨닫습니다.
이분 또한 강렬한 회개의 표지가 되는 인물입니다.
세례받아 명시적으로 가톨릭신자가 아니 되었더라도 이
렇게 사심 없는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은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예수님을 닮은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의 참 형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피정 와서 면담고백성사를 본 열심한 자매가
제 ‘행복기도’를 나누고 싶다 하기에 수백 장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제 참 좋은 깨달음 덕분에 행복기도 처음에 ‘참회합니다’를 넣었습니다.
제 행복기도를 바치는 분들은 꼭 다음처럼
맨 앞에 반드시 ‘참회합니다’를 넣어 읽으시기바랍니다.
예수님이 참가족에 속한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희망,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 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반드시 맨 처음에 ‘참회합니다’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 공생애 첫 일성도 회개하라.였고, 미사도 자비의 참회송으로 시작합니다.
영성생활도 ‘회개(메타노니아)-비움(케노시스)-친교(코이노니아)-섬김(디아코니아)’의 순서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주신 예수님의 응답 말씀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감동의 울림을 주는 생명과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어디에 있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마리아 성모님을 격하하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최고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시종일관 아드님 예수님과 함께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순종과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역시 빛나는 예수님의 참 형제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성인의 생애가 참 화려하며 파란만장합니다.
참으로 모든 좋은 자질을 지닌 성인으로
‘개신교의 로마’라 일컫는 악조건의 종교개혁의 본산지
제네바 교구장의 재임 중 활약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설립자인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의 영적우정도 널리 알려진 미담입니다.
성인은 1662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같은 교황에 의해 1665년 시성 되었으며,
187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고,
192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작가와 언론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고전에 속하는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이란 책도 저술하셨습니다.
특히 ‘신심생활입문’은 ‘준주성범’과 더불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양대 권장 도서에 속합니다.
성인은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리옹에 있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의 작은 방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뇌일혈을 일으켜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받고 만 55세에 선종합니다.
바로 다음 마지막 감동적 임종어가 예수님의 참 형제였음을 입증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
그대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은혜롭고 감동적인 대목 둘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대로,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 유익하고 감동적인 강론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 실행한 하느님의 뜻 자체인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강론의 요지 셋이 아주 분명합니다.
1.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The Word of God is for everyone).
2.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에게 참회를 요구한다(The Word of God calls everyone to conversion).
3.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선포자로 만든다(The Word of God makes us heralds).
얼마나 은혜로운 요약인지요!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한 분이요,
부단한 참회를 요구하는 분이요, 우리를 복음 선포자로 만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과 예닮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여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순종하여 실행할 때
비로소 우리 모두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과 ‘결이 같은’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됨을 깨닫습니다.
이보다 큰 기쁨도 행복도 없을 것이며 우리 삶의 모두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예수님과 깊은 우정의 형제자매들로 살게 해 주십니다.
"너희는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26,4). 아멘.
예수의 새로운 가족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집(3,20)에서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모여든 군중을 가르치시고,
돌보시는 동안에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그를 붙들러 나섰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정면으로 예수와 맞섰다.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제불(파리의 신)이나 다른 더러운 악령에게 사로잡혔거나,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구마 기적을 행한다고 비방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바ᅟᅣᆼ하는 율법학자들에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3,29)고 못을 박았다.
이는 곧 예수께서 모든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제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집 앞에 와서 사람을 시켜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은 ‘형제’라는 단어가
히브리 및 그리스 문화권에서 아주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계혈족의 2촌만을 형제라 하지 않고
조부, 증조부, 고조부 등 아버지와 1촌의 관계를 갖는 모든 혈족을 관계상 ‘형제’간이라고 한다.
이 점을 무시하면 성모 마리아에 관한 ‘平生童貞敎理’에 하자가 발생한다.
아무튼 예수를 만나려 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잡으려고 찾아 나선 바로 그 친척들을(3,21) 말하는 것인가?
이 대목은 정확히 말하기가 힘든 부분이다.
형제들만 왔다면 몰라도 예수의 어머니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그 친척들과 오늘의 가족들은 별개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前者가 맞다면, 예수가 미쳤다거나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잡으러 찾아 나선 예수의 친척들 중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後者를 따르자면, 왜 갑자기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타나
예수를 만나려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묻다보면 결국은 예수가 미쳤다는 생각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를 걱정하여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온 것으로 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의의 초점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절)
예수께서는 둘러 앉아 있던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신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다.”(34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이 말씀이 허공을 가르며 외쳐지던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나마 문밖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했는데,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조상을 두고 함께 자란 형제들을 무시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어머니며 형제들이라니!
정말 예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말이 나왔으니 예수는 사실상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本意는 그다음 말씀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면 모두 다 예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께서는 혈연적이고 세속적인 가족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족공동체를 택하신 것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자신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고 계신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우리 자신은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포 맺어지는 혈연은 한 번으로 영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관계를 허물어버리셨다.
이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설정되었다.
그 소속 기준은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행하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