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1~6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이다.
고난 주간이 되면 너무나 많이 듣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아마도 온 세계의 많은 목사님들이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오늘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가자가 전한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약 700년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700쯤에 앞으로 예수님이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인가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예언을 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런 예언과 함께 태어나는가?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 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런 예언이 있었고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
신약 성경은 그 예수님의 태어남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 한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의 탄생은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탄생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은 구약 성경에 예언한 예언의 성취였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들은 예언의 성취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사셨던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고, 그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 700년경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태어날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을 했다.
그 예언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탄식의 말씀이요,
이사야 선지자의 탄식의 말씀이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태도였다.
그러면 그 시대만 그랬는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랬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증거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어떨까?
이 시대 많은 주의 종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전한다.
그 말씀을 많은 성도들이 듣는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야 어떠하든지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일까? 받아드리지 않을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예수님에 관한 복음, 즉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일까? 아닐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 1절 말씀에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탄식의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우리들이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강한 팔의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잘 부르는 찬송에 이런 가사가 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하나님은 이렇게 강한 팔로 일하고 계신다.
또 이런 찬송도 있다.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하나님은 이렇게 강한 팔로 일하고 계신다.
그 강한 팔의 능력을 힘입는 사람은 평안함과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강한 팔의 능력을 힘입고 사는가?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강한 팔의 능력을 힘입고 사는가?
그렇지 않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하신다.
왜 그런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 시대에도 그랬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이 시대도 그렇다.
그런데도 정말 안타까운 것은 실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믿는다고 착각하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나는 과연 이사야가 예언한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는 앞으로 이 세상에 메시야 이신 주 예수님이 오시는데 그 예수님은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예언의 말씀은 이렇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데 그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한다.
오늘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내용이 16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죄가 없다.
죄가 없는 예수님이 이렇게 수많은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고난은 어떤 고난인가?
그 고난의 대속의 고난이었다.
죄 없으신 예수님.
어린양과 같이 순결하신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또한 우리들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죄이다.
죄가 무서운 것은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단 하나의 죄를 범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였다.
그러나 그 한 가지의 죄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모든 축복을 다 빼앗겼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다.
죄에는 공짜가 없다.
죄를 범했으면 반드시 그 죄의 형벌을 우리 자신이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는가?
그렇게 범한 죄의 형벌은 바로 우리 자신이 받아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죄 없으시고 순결하신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고난을 당했고 죄의 형벌을 다 담당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고난이요. 이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그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그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
그 예수님을 믿으면 놀라운 결과가 온다.
그런데 그 놀라운 결과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예수님을 믿으면 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그 예수님을 믿었던 제자들은 그 예수님에 대해서 전도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주 예수님을 믿으라!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요, 그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결과가 온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회개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그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한다.
세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과의 연합이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연합했다는 표시로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렇게 세례를 받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이다.
그 사람은 죄 사함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의인이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
바로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
그 사람에게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이 믿어진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실제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그 사람에게 성령님이 오신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예수님이 대속의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들에게 온 축복이 무엇인가?
그 내용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받으신 대속의 고난에 대해서 16가지를 말하고 그 고난의 대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축복에 대해서 말한다.
그 축복의 내용은 수없이 많이 있지만 오늘 말씀은 딱 두 가지의 단어로 요약해서 가르쳐 준다.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으로 온 두 가지의 축복은 평화와 나음이다.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와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축복은 바로 ‘평화와 나음’ 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 두 가지의 축복을 주시려고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16가지의 고난은 바로 우리들에게 이 두 가지의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두 가지의 축복은 과연 어떤 축복인가?
‘평화’ 의 축복이란 어떤 축복인가?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다. 싸움이다.
원수가 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며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싸움의 반대인 평화는 무엇인가?
평화는 좋은 관계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좋은 관계의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 축복에 대해서 성경은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부분에서 우리들에게 좋은 관계의 축복을 주시는가?
그 첫 째는 바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된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요,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거기에서 해결되어 버린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된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오늘도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들이 인생에서 겪는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
또한 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믿으면 그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평화의 축복을 주시는데 그 평화는 바로 이런 하나님과 내가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일하시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니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신 그 분이 내 인생에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풍성해 진다.
두 번째의 좋은 관계는 바로 나 자신과의 화목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고 주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그 예수님이 내 안에서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면 그 사람은 자신을 바라볼 때 놀라운 자긍심을 갖는다.
자연 상태인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자신과 화목의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이 사람은 자화상이 좋아진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과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이다.
세 번 째는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내 안에 넘쳐 나고 그 사랑의 축복 안에서 자기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는다.
부부관계도 좋아진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좋아진다. 성도들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나아가서 더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가 맺어진다.
네 번 째 좋은 관계는 만물과도 좋은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자주 부르는 찬송에는 이런 찬송이 있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평화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만물이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만물 가운데서 특별하게 좋은 것. 그것은 바로 돈이다.
돈과 내가 좋은 관계가 된다.
이전에는 내가 돈을 사모하여 돈을 좇아갔지만 돈은 자꾸 나에게서 도망을 간다.
그러나 내가 만물과 화목하게 되면 돈이 나를 좋아하여 나에게 달려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삶의 비밀이다.
내가 살아 보니까 그렇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평화란 바로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좋은 관계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축복은 ‘나음’의 축복이다.
이 축복은 건강의 축복이다.
건강은 두 가지의 건강이 있다.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고난의 내용을 이렇게 말한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3절)
간고는 무엇이며 질고는 무엇일까?
한자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간고(艱苦) 질고(疾苦)
두 가지 다 고통인데 이 두 가지 고통은 각각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간고는 영어로 sorrow 이다. 이것은 슬픔의 고통이다.
질고는 영어로 sickness 이다. 이것은 질병의 고통이다.
이 두 가지의 고통을 요약하면 정신적인 질병의 고통과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질병이 있다.
정신적인 질병과 육체적인 질병이다.
이 설교를 하는 나 자신도 이런 질병이 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 질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정신적 질병의 고통을 담당하시고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을 담당하셨다.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질병에서 나음을 받은 것이다.
그러기에 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믿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믿고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잘 알 듯이 이 설교를 하는 나는 허리가 좋지 않다.
이 질병은 나의 가족들이 대부분 앓고 있는 질병이다.
그런데 나는 이 질병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새벽마다 기도할 때 선포 한다.
주 예수님이 나의 질병의 고통을 담당하시고 이미 고난을 당하셨기에 나는 나음을 받았다고 선포한다.
매일 새벽마다 선포하고 또 선포한다.
현대 의학은 사람의 질병의 치유에서 우리의 마음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질병에 관해서 이렇게 믿고 선포하는 것 자체가 신비한 능력이 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믿고 선포하면 하나님이 들이신다.
하나님이 내가 선포하는 그 믿음을 보신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내 질병가운데 역사하신다.
나는 믿고 선포하면서 건강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나는 이렇게 육체적인 건강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나는 이렇게 정신적인 건강의 축복도 누리고 있다.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와 저주를 다 짊어지시고 고난당하신 주간이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믿는 사람인가?
나는 과연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으로 오는 축복을 누리는 사람인가?
평화와 나음의 축복!
나는 이 축복을 받았다.
나는 날마다 이 축복을 누리고 있다.
그러기에 이 찬송이 나의 찬송이 되었다.
나는 요즘 이 찬송에 푹 빠져 있다.
“삶이 기쁜 샘이 되어 바다처럼 넘치네.~~~♬”
나는 이 평화와 나음의 증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