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의 봄날 2 (용주사)
“어머. 일주문이 없는 절도 있어요? 용주사는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절이라면서요? 그런데 일주문이 왜 없을까요?”
이해가 안 되는 세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절에 들어가는 입구에 사찰의 상징인 일주문이 없다는 것은 학교에 교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게 말이죠, 조선 초기 법전인 경국대전에 더 이상 사찰을 창건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답니다.”
“그래요? 조선 때는 왜 절을 못 짓게 했을까요?”
“그게… 세희 씨, 저 일주문부터 촬영해야 되지 않아요? 저쪽에 앉아서 얘기 나누고 잠깐 쉬었다가 드론 띄울까요?”
삼봉이 범어사 일주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화단 조경석을 가리키며 휴식을 제안했다.
“네, 그러죠. 절 입구인 일주문부터 촬영해야 될 것 같네요. 먼 길 안 걷다 걸으니까 다리가 제법 아픈데요? 호호.”
세희도 좋다며 삼봉의 제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넓적한 돌 위에 나란히 앉자 삼봉이 조선 초기에 절을 못 짓게 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려 말기에 불교의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랍니다. 공민왕은 호국불교라고 일컬으면서 스님인 신돈을 왕사로 모시고 큰돈 들여서 불사도 자주 베풀었대요. 심지어 정치까지 신돈에게 맡겼답니다.”
“어머, 그러면 고려 백성들이 아주 피곤했겠는데요?”
“그렇죠. 죄를 지은 사람이 중으로 가장해서 숨기도 하고, 아예 놀고먹는 거지 무리가 중들과 섞여 술타령이나 하면서 난잡하게 지냈답니다. 중이 되면 부역에 안 나가도 되었고요. 넘쳐나는 사찰의 돈과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을 여러 중이 심부름꾼을 시켜 백성들에게 비싼 이자로 빌려주면서 괴롭혔대요.”
“어머나, 고려 백성들의 절에 대한 원성이 엄청 높았겠는데요?”
“그랬지요! 그래서 내가 나섰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네? 싸부께서 나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바로 이성계 장군의 왼팔인 책사 삼봉, 정도전 아닙니까? 하하.”
“어머, 싸부의 별명 삼봉이 그 삼봉이에요?”
“그럼요! 세희 씨는 무슨 삼봉인 줄 알았어요?”
“음… 그냥 세 사람 몫은 하는 사람이란 뜻인 줄 알았죠. 호호.”
“그래요? 뭐, 그것도 맞기는 합니다. 그런 뜻이라면 열 봉, 아니, 백 봉이 더 맞을 텐데요. 하하.”
삼봉이 기분 좋아 웃음이 계속 나온다.
“그런데, 책사 삼봉께서 고려 말 때 나서서 뭘 어떻게 백 봉 하셨는데요?”
“정도전인 제가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워서 신진사대부들을 끌어모았지요. 그래서 왕사 신돈에게 정치를 제대로 하라고 압력을 좀 넣었어요.”
“왕사인 신돈한테요? 어떻게요?”
“절의 토지에 세금을 매기고 절에 소속된 노비들도 부역에 동원되도록 했지요. 그러고 아예 아무나 중 놀이 못 하도록 도첩제를 시행하게 했고요.”
정조대왕이 축성한 수원화성이 있는 수원에서 크고 자란 삼봉이라 그런지 역사에 대해 주워들은 풍월이 상당한 것 같다.
“도첩제요? 그게 뭔데요?”
“나라에서 승려의 신분증명서인 도첩을 발행하는 건데, 승려가 된 자는 포 등으로 보상을 바치게 했어요.”
“어머, 참 잘했네요. 그래서 많이 개선됐나요?”
“많이 개선됐지요. 그래서 군역 면제자인 승려가 줄어들어서 우리 이성계 장군님 군대가 막강해졌습니다.”
“아, 그래서 이성계 장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조선을 건국하게 된 거군요?”
순진한 세희가 삼봉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뭐, 그런 점도 있지만, 우리 이성계 장군님은 충신이라서 그런 역모를 꾀할 분은 아니었어요. 음, 흠.”
얘기하던 삼봉이 아예 진짜 정도전이 된 기분이다.
“그래요? 그런데 어쩌다 반란을 일으켰대요?”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등극했는데, 이 양반이 최영 장군하고 짝짜꿍이 되어서 명나라 요동 땅을 치라고 우리 장군님한테 명령을 내린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5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까지 올라갔어요.”
“아, 맞다. 그래서 압록강까지 갔다가 그거 뭐냐, 회군인가 해서 돌아온 거지요?”
“맞아요. 위화도 회군이요.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서 되돌아와서 최영 장군을 죽이고 우왕을 폐한 다음에 그 아들인 창왕을 임금으로 옹립했지요. 바로 제가 4불가론을 내세워 위화도 회군의 명분을 제시했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명분이지요.”
“4불가론이요? 뭐라고 했는데요?”
“첫째는 군량미나 군사 규모 면에서 명나라에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고, 둘째는 농번기의 전쟁은 농민의 호응을 받기 어렵다는 점이고, 셋째는 우리 군사가 북쪽으로 나가면 왜구의 침입이 증대할 거라는 점이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 번째는 그때가 장마철이라서 시기상으로 전투에 불리하여 군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크다는 점이었어요.”
“그랬군요. 들어보니까 다 맞고 옳은 주장 같네요. 그래서 반란의 명분도 서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서 성공하게 됐군요.”
“그랬지요. 최영 장군이나 충신들을 따르는 자들도 많았지만, 우리 쪽에 줄 서는 대신들이 많아서 순조롭게 왕을 갈아치우고 허수아비 임금을 세웠지요. 하하.”
“이성계 장군이 충신이었다면서요? 그러면 그걸로 끝내야지, 왜 나중에 왕건이 창건한 왕씨 왕조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 왕조인 조선을 세웠대요?”
“아, 그거요? 실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인 왕 씨가 아니고, 중 신돈의 핏줄인 신 씨였어요. 그러니 중의 핏줄인 신씨 왕조에게 머리 조아리며 충성할 수는 없지 않아요?”
“어머나, 그게 사실이에요? 왕후가 왕사인 신돈하고 어찌했다는 말인가요? 설마요!”
“그게 아니고, 신돈에게 반야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자식이 없어 고민하는 공민왕에게 바쳐서 아들인 우왕을 낳게 했답니다. 우왕은 신돈의 집에서 자라다가 7살이 되던 해에 궁궐에 입성하게 됐어요.”
“그게 다 이성계가 지어낸 얘기라는 말도 있던데요?”
“아니에요! 명나라에서 사실이라고 확인까지 했는데요? 우리 사신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예부자문이라는 문서에 다 나와 있어요.”
삼봉이 전하는, 우왕이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아들이며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핏줄을 받은 아들이라는, 루머는 모두 이성계의 무리들이 역모를 꾀하기 위해 지어낸 얘기라는 설이 유력하다.
명나라에서 작성했다는 ‘예부자문’도 이성계 패들이 가짜로 조작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요? 그럼 고려의 마지막 임금들이 신돈의 후손이 맞는가 보네요. 그러면 삼봉 정도전이라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좋게 평가해야 되는 건가요? 혹시 싸부가 별명이 삼봉이니까 억지로 지어낸 얘기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내가 어려운 일의 해결방안을 잘 제시한다고 꾀돌이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책사 정도전의 호를 따서 삼봉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정도전에 대해서 좀 자세히 알아봤지요. 하하.”
“그랬군요. 그 정도전이라는 사람은 혹시 요상한 꾀를 내어 주군을 잘 섬기는 모사꾼 아니에요? 나라를 새로 세워서 일등 공신이 되면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요. 호호.”
세희가 삼봉의 약을 올렸다.
“아니에요. 정도전은 왕이 모든 권한을 쥐고 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임금은 어버이로서만 존재하고 정치는 능력 있는 신하들이 해야 한다는, 소위 문민정치를 구상한 거죠. 지금 같으면 대통령제인데, 외치는 대통령이 하고 내치는 총리가 직접 관장하는 내각 책임제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그러면 조선 왕조를 세우고 정도전이 정사에 크게 기여한 것도 많겠네요?”
“그렇죠. 도읍이 될 한양의 청사진을 그린 것도 정도전이고,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정비해서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입니다.”
“그래요? 그건 그렇고, 조선왕조 때는 아예 절도 못 짓게 했다면서 정조대왕이 용주사는 어떻게 지었대요?”
“아, 그 대답을 하려고 내가 고려 말기 얘기를 했네요. 고려의 불교 폐단이 그렇게 심했기 때문에 조선왕조 때는 성리학을 존중하고 불교를 배척하느라고 아예 절을 새로 짓지는 못하게 했어요. 다만 옛 사찰 터에 다시 세우는 것은 허락했어요.”
“아, 그럼 용주사 자리에 옛날에 다른 절이 있었나 보군요?”
“맞아요. 신라 말기에 지은 갈양사라는 절이 있던 터랍니다. 그래서 정조가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하고 새로 절을 짓도록 한 거죠. 국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부친에 대한 효를 실천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정조는 즉위 13년을 맞던 해에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산기슭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수원화성과 행궁을 만드는 대대적인 역사를 벌인다.
아버지의 묘와 화성의 건설 과정을 보기 위해 수시로 이곳까지 거동하게 되자, 아예 시흥으로 질러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안양에 만안교라는 돌다리도 새로 만들게 된다.
“그랬군요. 그런데 왜 절의 대문이나 마찬가지인 일주문을 안 세웠대요?”
“예, 그건 조선이 유학을 체계화한 성리학을 통치의 근본으로 삼아서 공자님 말씀인 사서를 경전으로 삼는 유교를 숭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전국에 향교를 많이 두었는데, 이 용주사 절의 대문으로 일주문 대신 향교나 서원에 세우는 삼문을 세운 겁니다. 삼문은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가운데 문은 국왕의 행차가 없을 때는 항상 닫혀있고 양쪽의 문으로만 드나들었어요.”
“어머, 그래요? 절간 앞에 학교 교문을 세운 셈이네요. 그런데, 절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지 않아요? 국고 탕진한다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지 않았을까요?”
“용주사는 국고로 지은 게 아니고 백성들의 성금으로 지었답니다.”
“어머, 백성들이 절 짓는 데 쓰라고 돈을 거둬서 줬다고요?”
“예.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 아니까, 정조대왕의 효심에 감동해서 그랬다나 봐요.”
용주사(龍珠寺)는 정조 14년(1790년)에 창건했는데,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만 7천 여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용주사에는 국보 제120호인 동종(銅鐘)이 있다. 구리 2만 5천 근을 들여 주성했는데, 높이는 1.44m이고 지름은 87cm이다.
이 동종은 국보 제1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인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의 주인인 ‘염거화상’이 조성한 것이다.
또한 정조대왕의 어명으로 도화서의 유능한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가 그린 유형문화재 제16호인 대웅전 후불탱화인 ‘삼세여래불’도 보관되어 있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의 삼세불을 그린 이 ‘삼세여래후불탱화’는 탱화 가운데 최초로 서양화법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한 그림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깊은 효심에 대해서는 감동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그죠? 효녀 심청전도 그렇고.”
세희가 백성들의 모금이 이해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 민족의 심성이 삼강오륜에 바탕을 둔 유교 사상을 그대로 답습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조선 초기에 성리학을 중시한 건 아주 잘한 것 같아요. 그게 다 삼봉 정도전 덕분 아닙니까? 하하하.”
살아있는 삼봉이 좋아서 죽는다.
“사도세자는 임금 노릇도 안 했는데, 무덤을 왕릉이라고 부르는가요?”
문득 생각난 듯 세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예. 처음에는 사도세자 무덤을 현륭원이라고 불렀대요. 나중에 임금으로 추대해서 융릉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답니다. 용주사 앞에 융릉이 있는데, 부인이었던 혜경궁홍씨와 합장되어 있어요.”
왕위에 오른 정조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승하고 무덤을 현릉원이라 이름 지었는데,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이 왕계 혈통 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임금 격인 장조(莊祖)로 추승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아, 죽고 나서 무덤 속에서는 함께 모셔졌군요. 다행이네요. 그러면 그 효심 많은 정조대왕 무덤은 어디에 있어요?”
“예, 그 부모님 무덤인 융릉 바로 옆에 한 울타리 안에 있어요. 한 오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데, 건릉이라고 부릅니다. 그 건릉에도 정조대왕과 왕후가 함께 합장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왕릉을, 융릉과 건릉을 합해서, 융건릉이라고 부릅니다.”
“어머! 참 희한한 무덤이네요?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는데요.”
“예,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수원으로 곧장 모셔가서 융건릉과 용주사를 드론으로 촬영해서 작품 만들게 해드릴게요. 하하. 아, 참! 제부도에도 모셔가고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삼봉의 머릿속에 자기의 나와바리인 수원에서 세희와 다정히 노니는 자신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수원시 외곽에 있는 용주사는 이렇듯 정조대왕의 효성이 깃든 효심의 본찰이자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 사찰을 거느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오랜 역사와 문화재 그리고 수행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