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이야기
오랜만에 성북동으로 역사문화나들이를 하였답니다.
그 오랜만은 설레임이고 향수같은 그리움의 시간이고
잊여졌던 인사들의 흔적을 찾는 세레임이기도 하였구요.
못 보던 간판과 처음 보는 빌딩과 주택들...
그럼에도 흘러간 시간을 불러 타임머신을 타고
굵고 진한 향기를 인물들을 만나보는 귀한 하루입니다.
성북동 역사문화 탐방에 함께한 사람들..
꽃다지 라야 랄프 제아(존칭 생략) 그리고 이같또로따
▲ 북악스카이웨이 능선과 그 너머 북한산 줄기가 한눈에 보입니다.
길가에는 태극기와 함께 여러 나라의 국기가 걸려있습니다.
이 국기들은 이 동네의 여러나라의 대사관저가 있어 그 나라의 국기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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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변에는 고운 자태의 꽃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모양과 색깔이 다양하게 줄지어 상춘객의 눈길을 사로 잡는군요.
봄바람(?)든 여심이 지나칠 수는 없겠구요.
▲ 요거 예전에 많이들 하셨지요? 왕년의 추억을 떠올리며...
▲ 쉼,그리고 추억 더듬기.시선은 먼 고향?
▲ 이곳 성북동은 여러 문인들이 살았던 동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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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1920~1968) 시인 수필가
낙화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피었다 몰래 지는 고은 마음을
흰무리 쓴 촛불이 홀로 아노니
꽃 지는 소리 하도 하늘어
귀 기울여 듣기에도 조심 스러라
두견이도 흰 목청 틀고 지친 밤
나 혼자만 잠들기 못내 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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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셔널트러스트에서 관리 및 안내를 합니다.
봉사자 신참내기 대학생이 달변은 아니지만 가옥과 최순우선생의 생애를 설명합니다.
참 잘했어요^^ 박수~~~
▲ 杜門卽時深山(두문즉시심산)혜곡선생께서 직접쓴 편액이랍니다.
세속의 문을 닫고 방안에 있으면 바로 심산에 든것과 같다라는 뜻이겠지요.
집, 아니 혼자만의 방안에서 시름을 접고 고요히 명상에 잠기는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곧지 않아 더욱 눈이 가는 소나무. 그리고 좌우의 산수유꽃 진달래꽃담너머 개나리꽃의 하머니를 봅니다.
▲ 강한 햇빛이 드리운 집안의 분위기가 운치를 더합니다.
▲ 햇빛이 실내에도 들어와 작품을 만듭니다.
▲벽을 화선지로, 담쟁이가 작품을 만드는 군요.언제나 미완성의 작품이겠군요.
▲물방울이 느낌표를 찍으며 흘러내릴 듯합니다.
▲ 검정고무신 두 켤레가 하품을 하나 봅니다.. 주인은 어디에?
▲선잠단지 터
사적 제83호로 지정된 서울 선잠단지는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 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누에신(잠신 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이 단은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키우게 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누에를 키우는 일을 크게 장려했는데, 각 도마다 좋은 장소를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으며, 한 곳 이상의 잠실을 지어 누에를 키우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원년(1506년)에는 여러 도에 있는 잠실을 서울 근처로 모이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송파구 잠실이 바로 옛 잠실들이 모여 있던 곳입니다.
▲ 성북동성당
▲백목련이 활짝피었네요.
▲ 돌 틈에서도 풀이 돗아 납니다.
▲ 休(휴). 이른 아침 고된(?) 일과를 마친 빗자루 하나 벽에 기대어 쉽니다.
▲ 길상가의 대웅전인 극락전.
▲ 관세음보살상
▲ 담 아래 작은 석등 옆에 법정 스님의 유해가 뭍혀 있습니다.
▲ 수선화가 활짝~꽃말이 조건없는 사랑. 부활이라 하던가요.
법정스님께서 이승의 삶을 마감하신 진영각 길섶에 곱게 피었지요.
▲ 진영각
법정스님의 유품 일부가 전시 되어있습니다. 고결하신 스님의 체취를 느껴 봅니다.
▲ 복수초는 어느새 잎이 무성합니다.
▲ 길상화 공덕비
길상화는 법명으로 법정스님이 작명했다고 하지요. 세속명은 김영한이고
백석은 자야라고 불렀다지요.
공덕비 옆에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어 그녀의 유언을 담은 글을 봅니다.
법정스님께 서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첫눈 내리는 날 이곳에 뿌렸다는...
한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를 소리내어 읽으며
먹먹한 가슴을 쓸러 내렸지요.
-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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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 만해 한용운님의 동상이 심우장 입구 대로변에 있습니다.
명시 님의 침묵 시비와 함께.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
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
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
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
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
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
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
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심우장 마루에 앉아 만해 한용운의 삶을 돌아 봅니다. 문살에 향나무와 소나무의 실루엣도 함께합니다.
▲ 향나무 한그루.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기며 직접 심었다고 합니다.
집 주인은 없어도 굿굿이 지키고 서 있는 향나무에 시선을 오래 멈춥니다.
사적 제550호.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이 곳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의 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하였다.
총 112.99평의 대지 위에 17.8평의 건평규모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다. 집의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형태이다. 우측 서재로 쓰던 우측 방에는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한용운은 만해(萬海)라는 호(號) 외에 필명으로 오세인(五歲人), 성북학인(城北學人), 목부(牧夫), 실우(失牛) 등의 이름을 가끔 썼는데 목부란 ‘소를 키운다’는 뜻으로, 곧 내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왕생의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낸다 하겠다. 즉, 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이다. 2019년 사적 제550호로 지정되었으며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민족문화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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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섭 시인의 비둘기공원
시인 독립운동가(1904-1977)
김 시인의 성북동비둘기는 어쩌면 지금도 진행형이 아닐런지요.
이 시는 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 산업화에 따르는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현실 인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개발이라는 명목에 보금자리를 떠나야 하는 아픔을 표현한 명시이지요.
어디 그때만의 상황일까요. 지금도 아픈 '비둘기 군상'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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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의 명암을 봅니다. 길 건너의 저택과 대비되는 산동네의 모습입니다.
▲ 성북동의 역사문화나들이와 함께 도시의 빛과 그림자를 돌아 본 하루였습니다.
몇년전 보다는 적잖은 변화가 보입니다. 작은 공방과 커피숍도 있구요.
몇년후 이 마을의 모습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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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행은 소수의 인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도 더 기억에 남을 역사문화도보라고 느낍니다.
함께하신 님들~
안내가 좀 부실했다고 생각하며 다음 역사문화 나들이에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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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도보로 성북천 벚꽃길을 걸었습니다.
채동선님이 이곳 성북동에서 작곡 활동을 하신거는 이제 알았습니다.
전남 보성의 생가는 찾아봤지만요.
▼대표곡 중의 하나인 그리워를 다시 들어 봅니다.
https://youtu.be/nG5GC-t68Pg
첫댓글 세세한후기멋집니다!!
조은날님께서 함께하셨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뜻 깊은 역사문화길이지요.
다음 역사문화도보에 기회가 닿으면 꼭~함께하시어요.
봄꽃과 함께한 역사문화도보,
잘다녀왔습니다 ~^^
저도 이번 탐방길에서 새로운 것을 많이 느끼고 배웠습니다.
날씨도 걷기에 안성맞춤였고 더욱 단출한 인원이어서 좋았지요.
풍요로움이 가슴깊이 들어온 하루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탐방을 통해 큰 족적을 남기신 분들의 향기를 느꼈지요.
날씨도 쾌청했고 무엇보다 조촐한 인원이어도 좋았습니다.
글도 사진도 넘 좋습니다~~~♡
오랜만의 성북동 역사문화 탐방을 하다보니 얼떨떨... 방향감각도 깜빡했지요.
그럼에도 라야님을 비롯 열정님들 덕에 대과 없이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