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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안견론쟁을 회상하며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3)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안견 관(款)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에 관한 나의 고해성사
필자는 통일뉴스 2월 7일자 오피니언 기고 “『몽유도원도』의 숨겨진 이야기”의 말미에서 “필자는 1994년에 안 모 교수와 안견론쟁(安堅論爭)을 한 바 있다. 이제 안견론쟁 30년 만에 당시 필자가 주장하였던 안견론과 그 뒷이야기를 차츰 정리하여 재차 필자의 안견론을 피력해 나갈 것이다. 이번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관한 이상한 사람들의 언론 플레이가 필자에게 다시 계기를 주는 것 같다.”라고 독자분들에게 천명한 바 있다. 그 이상한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30년젼 안견론쟁을 회상하게 하여, 다시금 안견론을 쓰게하는 계기를 주었다. 30년전 초심으로 돌아오게 해 주어서 어떻든 고맙다.
1. 안견론쟁시 발표한 논고 11편
필자는 1993년부터 월간 『미술세계』에 ‘한국회화사의 재발견’을 기획 연재하면서 1994년 4월호 pp.106~111에 그 여덟 번째 글로 ①‘안〇〇 교수의 안견론에 대한 비판’을 기고한 바 있고, ②5월호(pp.110~115)와 ③6월호(pp.92~97)에 연이어 비판의 두 번째 세 번째 글을 기고하였다. 그리고 ④7월호(pp.108~113)에는 ‘안견신론을 위하여’를 ⑤8월호(pp.96~101)에는 ‘안견논쟁을 끝내며’를, ⑥9월호에는 ‘안견론쟁의 유감’을 기고하였다. 월간 미술세계에만 무려 6회에 걸쳐 글을 실은 것이다.
또한 같은 해 5월 20일자에 ‘한국미술연감사’에서 발행한 ⑦『안견재조명』(pp.171~238)에는 월간 『미술세계』에 연재하였던 ‘안〇〇 교수의 안견론에 대한 비판’ 3개월분을 재정리하여 요약 기고하였고, 1994년 6월 23일자에 한국애서가클럽에서 발행한 ⑧『비불리오필리』 제5호(pp.74~79)에는 ‘안견의 본관과 출신지에 대한 고찰’을 기고하였다.
당시 필자의 안견론쟁은 상당한 충격을 주었는지, 다른 매체에서도 원고 청탁을 하여 왔다. 이에 부응하기 위하여 같은 해에 발행된 ⑨월간 『서화정보』 7월호(pp.70~75)에는 ‘안견의 초기작품론을 위한 시론’을, ⑩8월호(pp.105~108)에는 ‘15세기의 다섯초상화와 초상화가에 대한 일 고찰’을, ⑪9월호(pp.100~104)에는 ‘여러 미술사학자들의 안견작품론관’을 기고하였다. 이렇게 나는 7개월여에 걸친 안견론쟁은 일차 마무리하였다.
2. 안견론쟁 이후에 현재까지 쓴 논고 8편
1993년 이후 4년이 넘어 5년이 되어 가면서 필자는 ⑫격월간 『한국고미술』 1998년 1·2월호(통권10호)에 ‘몽유도원도의 신해석’을 기고하며 몽유도원도의 본질을 논하였다. 이외에도 ⑬격월간 『한국고미술』 1997년 1·2월호(통권4호, pp.54~65)에 기고한 ‘이수문의 생애와 예술’과 ⑭3·4월호(통권5호, pp.50~60)dp 기고한 ‘문청, 그의 회화에 대한 이해’는 안〇〇 교수가 『안견과 몽유도원도』를 저술하면서 왜곡한 문청(文淸)과 이수문(李秀文, 1403~?)에 관한 관점을 바로잡은 글이니 안견론쟁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안견론쟁을 1994년 9월에 일차 마무리하였음에도 이렇게 간간이 안견에 관한 글을 몇 편 더 쓴 것은 안견론이 바로 잡히지 않고서는 조선전기의 우리 회화사가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안견과 고잔도 연구’, 이양재, 『안견고잔도장축도(安堅古棧道長軸圖)』에 수록. 2001년.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필자는 2000년 12월 15일 오후 6시경에 당시 『동아일보』의 이광표 기자에게서 16일자 『한국일보』에 “안견의 기명이 보이는 『안견고잔도장축도』가 출현하였다”라는 기사가 인터넷에 올랐다는 사실을 통지받았다. 이에 곧바로 『한국일보』 인터넷 사이트에서 접속하여 그 기사를 확인하였고, 16일 아침에 소장자에게 전화로 열람을 요구하여 시간을 잡아 한시간 동안 단독 관찰하였다.
그날 이후 2~3일간 원고를 작성하여 ⑮월간 『미술세계』 2021년 1월호(pp.84~88)에 ‘「안견신론」을 위하여 다시 쓴다 – 새로이 발견된 안견 작 「고잔도」에 대하여’를 기고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에 백선문화사가 편찬 발행한 ⑯『안견고잔도장축도(安堅古棧道長軸圖)』에 ‘안견과 고잔도 연구’(pp.113~140)를 기고하며 ‘고잔도’의 의미를 규명한다.
이후 2005년 9월 30일자에 김상엽씨와 황정수씨가 공동 저술한 『경매된 서화』를 시공아트에서 발행한다. 그 책에서는 안견론쟁시 회자하였던 『청산백운도』에 관한 그들의 부정적 관점을 다루고 있어, 필자는 ⑰2005년 월간 『미술세계』 11월호(pp.40~43)에 ‘이중섭과 박수근, 그리고 안견의 서화위작추문(書畵僞作醜聞)’을 기고하여 『경매된 서화』의 부정적 관점에 대응하며, 안 교수의 저서 『몽유도원도』 p.48에서 안평대군의 글씨로 소개하고 있는 「죽문사엄첩」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글씨가 아니라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안 교수의 오류를 밝힌다. 시공아트와 『경매된 서화』의 저자들이 안 교수를 편들려 한 것은 필자를 자극하여 오히려 안 교수의 이론을 더 깨지게 만든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⑱통일뉴스 2월 7일자 오피니언 기고 “『몽유도원도』의 숨겨진 이야기”는 『몽유도원도』의 구장처를 다룬 글이고, ⑲통일뉴스 2월 5일자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49) - ‘초상화가 최경(崔涇)과 신숙주(申叔舟) 초상화’라는 기고도 안 교수의 안견론에서는 안견과 최경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어 그들의 실체를 최경을 중심으로하여 규명한 논고이다.
3. 2005년에 발행한 『경매된 서화』에서의 『청산백운도』 해프닝
1994년 6월에 안견론쟁에 가세하였던 이건환(李健煥) 선생은 2022년 3월에, 우리의 안견론쟁을 철저히 이용하였던 이원기(李元基)씨는 10여년 전에 타계하였다. 지금 당시 논쟁의 당사자로 남은 분은 안 모 교수와 필자 두 사람이다.
이제는 이건환 선생과 이원기씨가 타계한 상황에서 나는 1994년 당시에 본의 아니게 이원기씨에게 말려 들어갔던 한 상황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안견론쟁에서 전도(顚倒)된 부분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나의 안견론을 피력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05년 9월 30일자로 시공아트는 『경매된 서화』를 발행한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를 “한편 이번 ‘경매된 서화’의 발간으로 지난 1994년 ‘안견 재조명’(미술연감사)과 ‘진짜가짜의 진실-안〇〇 교수와의 논쟁실록’까지 출간하며 논쟁을 불러일으킨 안견의 ‘청산백운도’ 그림 논쟁은 이제 종지부를 찍게 됐다.”고 자평한다. 이 책은 9월 30일자로 발행되었지만, 11월에 가서야 서점에 깔렸다. 우선 시공아트 측은 이 책의 발행을 서점에 깔기 전에 10월 11일자 연합뉴스를 통하여 매스컴 플레이를 하였다.
“(중략) 일제시대 미술품 매매기관인 경성미술구락부에서 펴낸 경매도록을 모아 시공아트가 펴낸 '경매된 서화’에 따르면 일부 고미술계 인사들이 안견 작품으로 주장한 '청산백운도'는 중국 그림에 안견의 가짜 도장과 글씨를 넣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그림은 1936년 경매에 원나라 조맹부의 ‘설색고사환금도’로 출품됐고 출품 당시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는데 경매후 안견의 호인 ‘주경’(朱耕)이라는 글씨가 삽입됐다는 것. 일부 고미술계 인사들은 화면의 여백에 쓰인 글씨가 안견의 글씨라며 이를 안견의 진작으로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매도록에 실린 사진을 통해 문제의 작품은 1936년 경매에 19번째 작품으로 출품된 것으로 안견의 작품이라는 수결과 낙관은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미술사가 황정수 씨는 "논쟁이 된 작품은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제 감정기때부터 전문가들의 눈에 오르내렸던 내력이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중략)”
시공아트는 이 매스컴 플레이가 있고 한 달 후인 11월에 이 책을 서점에 공급하였다. 서울신문은 연합뉴스의 보도를 확인 취재하면서 이건환 선생과 이원기 씨의 의견을 게재하였다. 즉 “한편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수집가 이원기씨는 이날 소장품을 직접 공개하면서 “그림에 쓰여진 글씨, 낙관은 이미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진품으로 판정났다.”고 주장했다. 재야 미술사학자 이건환씨도 “이 작품의 크기는 104×178㎝인데 반해 일제시대 경매도록에 나온 작품은 폭이 4척(120㎝)으로 차이가 나는 만큼 같은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중략) 다만 두 작품의 내용이 같은 점에 대해 이씨는 안견이 베껴 그린 모사작품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중국화풍의 영향권에 있던 조선 초기엔 중국 그림이 워낙 비싸 이를 베껴 그리는 임모(臨模)가 유행했다. (중략) 안견이 조맹부의 그림을 좋아했던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에게 조맹부의 그림을 보고 똑같이 그려 줬던 작품일 수 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중섭과 박수근, 그리고 안견의 서화위작추문(書畵僞作醜聞)’, 이양재, 월간 『미술세계』 2005년 11월호(pp.40~43). 사진 오른쪽 그림이 안견의 관지(款識)가 있는 이른바 『청산백운도』이다. 이 작품을 안견의 전칭작품으로 처음 소개한 이는 안 모 교수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 역시 모 언론사를 통하여 시공아트가 출판한 『경매된 서화』를 10월 중순쯤 보았다. 그리고 즉각 원고를 써서 월간 『미술세계』 2005년 11월호에 기고하였다. 그 글이 ⑰‘이중섭과 박수근, 그리고 안견의 서화위작추문(書畵僞作醜聞)’이다. 그 중요 부분을 아래에 전재한다.
“(중략)‥‥‥. 2. 안견 위작시비추문(僞作是非醜聞).
이중섭과 박수근의 위작시비에 이어 10월 10~11일에는 파이낸셜뉴스와 연합뉴스가, 최근 시공아트에서 일제시대 미술품 매매기관인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도록을 모아 간행한 『경매된 서화』란 단행본을 아주 특별히 소개하면서, 이 책에서 공동 편저자 황정수씨가 “94년 당시 일부 고미술계 인사들이 안견의 작품이라고 주장한 《청산백운도》는 원나라 조맹부의 《설색고사환금도(設色高士喚琴圖)》에 안견의 가짜 도장과 글씨를 넣은 것으로 위작”이라고 주장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일방적으로 기사화하였다. 그리고, 12~13일자 서울신문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에는 황씨의 주장에 대한 이건환씨의 반론, 즉 “그림의 크기가 다르고, 조맹부의 작품을 26점이나 갖고 있던 안평대군이 안견으로 하여금 자신의 소장품을 흉내 내 그리게 했던 점 등을 들어 청산백운도는 안견의 그림이 맞다”는 주장이 책의 소개와 함께 기사화되었다.
나는, 황씨의 글을 검토해 보면서, 시공아트에서 발행한 『경매된 서화』라는 책은 단 하나, 《청산백운도》를 위작으로 주장하기 위하여 무리하여 만든 책이라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왜냐하면, 그 책에 수록된 경매도록에는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의 고명(高名)한 안모(安某) 교수가 그토록 안견작이 절대로 아니라고 부정하였던 《적벽도》와 《설천도》가 안견작으로 명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설색고사환금도》의 폭이 4척(120cm)으로서 현재의 《청산백운도》의 크기가 104cm(폭)×178cm(길이)인데 그것은 “표구비단까지 포함한 크기로 재는 경우가 많으니 실제 크기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고 한 때문이다.
아마도 황씨는 자신의 키를 잴 때 구두를 신고 모자를 쓰고 재며 체중을 잴 때는 아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재는 사람인 것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더구나 그는 옛날의 명작들 가운데는 황공망(1296~1344)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의 경우처럼 완벽하도록 똑같은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더욱더 재미있는 사실은 황씨는 “먹의 농담의 차이, 채색한 부분의 일치 등으로 보아 조금의 차이도 없다”고 주장했는데, 인쇄되어 조악한 흑백사진에서 먹의 농담을 읽고 채색을 읽는다는 것은 대단한 신통력인거 같다. 다만 그 도력(道力)에 놀랄 뿐이다. 더군다나, 《청산백운도》를 살펴보면 청록색이 근대의 어느 시기인가 보채(補彩)된 그림으로 판독되는데, 즉, 설사 《설색고사환금도》와 《청산백운도》가 동일 그림이라고 해도, 채색한 부분이 일치한다는 것은 대단한 작문(作文)이다.
그런데, 문제는 1994년에 안견의 진작인가 검토를 요구하였던 《청산백운도》는 이건환씨가 처음 발굴한 것이 아니라, 고명한 안모 교수가 처음 발굴하여 자신의 저서 『몽유도원도(1987년)』에서 처음 도판으로 소개하였고, 이 책을 판(版)만 바꾸어 내어놓은 『안견과 몽유도원도』에서는 전(傳) 안견작이라며 주목한 바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이건환씨와 나는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의 고명한 안모 교수의 안견론에 대한 허구를 지적하며, 이 과정에서 안 교수가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저서에서 전(傳) 안견작이라고 소개한 작품이 《청산백운도》이므로 이 작품을 문제 삼아 소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작품을 안견의 수작으로 높이 평가한 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보의 기사에 의하면 “94년 당시 위작임을 강력히 주장했던 안〇〇 서울대 교수는 “청산백운도가 뒤늦게나마 위작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져 다행”이라면서 “그림 속 산수나 인물 모두 중국 작품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뿐더러, 글씨체도 안평대군, 신숙주 등이 쓴 15세기 조선의 양식과 다르고 그 격도 너무 떨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1994년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여간 촉발되었던 안견논쟁은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서 일어난 최초의 논리론쟁이다. 따라서, 내가 《청산백운도》가 《설색고사환금도》와 동일 작품이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고명한 안모 교수의 안견론이 허구임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를 황씨는 간파하지 못하고, 지엽적으로 인쇄된 흑백사진 한 장에 매달려, 아마도 문화재위원장으로 막강한 문화 권력을 가진 고명한 안 모 교수에게 잘 보여 무엇인가를 추구할 속셈으로, 무리한 논리를 추구한 것이 아닌지? (중략)‥‥‥, 이 책을 발행한 목적은 안 교수를 비호하는데 다분히 있‥‥‥ (중략)다.
만약, 내가 이 『경매된 서화』에 수록된 그림들에 대한 글을 썼다면, 『설색고사환금도』 부분에서는 황씨의 판단이 옳다고 해도 나는 논리를 달리 전개하였을 것이다. 나는 이번 황씨의 글을 통하여 아직까지도 안견논쟁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재확인하였고, 이는 나로 하여금 안견논쟁의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고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의 진안(眞贋) 문제를 떠나서 황씨의 논리는 허점투성이다. 이를 세부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시간 낭비일 뿐이라 그 비판은 이만 그치려한다. (중략)”
4. 오늘 미술사학계에 안견 관지(款識)의 『청산백운도』에 관하여 고해성사를 한다
2005년 시공아트의 발행한 『경매된 서화』는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한 논자(論者)는 한국의 고서화는 물론이고 중국의 고서화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썼다. 나는 발췌하여 위에 인용한 2005년도 월간 『미술세계』 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황공망(1296~1344)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의 경우처럼 완벽하도록 똑같은 작품들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또 하나의 유명한 예를 들자면 송나라의 장택단(張擇端, 1085~1145)이 그린 『청명상하도』도 진품이 북경의 고궁박물원과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에 각기 소장되어 있으며, 『청명상하도』는 구영(仇英, 1494경~1552) 등 여러 화가에 의하여 수 십 편의 유사한 모작이 그려진 예가 있다. 따라서 『경매된 서화』에서 소개하는 조맹부(趙孟頫) 작 『설색고사환금도』와 1994년 안견론쟁시에 회자된 이원기 소장의 이른바 『청산백운도』는 동일 작품이라 단정할 수가 없다.
이제 나는 이른바 『청산백운도』와 관련한 사실을 고해성사 같이 고백함으로써 나의 안견론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내가 이원기 소장의 『청산백운도』를 처음 본 것은 1993년 연말이다. 그 그림은 이미 안 모 교수의 『몽유도원도』와 『안견과 몽유도원도』(p.91)에서 도판으로 소개하고 있기에 그 실물을 보고 싶었던 작품이다. 당시 이원기씨는 그 작품을 어느 군 장성 출신에게서 매입하였다고 한다.
『경운회 회원소장전 – 한국서화명품선』, 1994년 6월 1일, 한국미술연감사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그 그림을 보던 1993년 연말쯤에 서울 종로구 경운동(慶雲洞)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던 문화재 애호가 몇 사람이 모여 경운회(慶雲會)라는 친목회를 만들었다. 당시 회장은 낙원표구사의 이효우 사장이었고 나를 포함한 10여 명이 회원이 되었다. 우리는 1994년 6월초를 목표로 하여 경운회원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하여 『한중서화명품선』이라는 전시를 기획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월간 『미술세계』 “1994년 4월호 pp.106~111에 「한국회화사의 재발견」 연재의 여덟 번째 글로 ①‘안 모 교수의 안견론에 대한 비판’을 기고한 바 있고, ②5월호(pp.110~115)와 ③6월호(pp.92~97)에 연이어 비판의 두 번째 세 번째 글을 기고하였다.” 매달 원고는 대체로 매달 15일 이전에 탈고되어 넘어간다. 1994년 5월 중순이면 이미 6월호 원고가 탈고되어 넘어간 시점이다. 그 5월 중순에 나는 경운회원 소장품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검토하였다. 당시 나의 연구실은 천도교 수운회관 1111호실에 있고, 이건환 선생의 사무실은 1109호실과 1110호실이었다.
나는 1110호실에서 경운회원 소장전에서 출품된 『청산백운도』를 세밀하게 검토하면서, 작품의 왼쪽 하단부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작은 글씨로 “〇〇〇‥‥‥恭繪”라는 글이 쓰여 있다. 나는 급히 이건환 선생에게 알리며 “좀 이상한 점이 있으니 〯밝은 데서 보아야 하겠어요. 곧 이원기 사장을 오라 하시고, 1층 주차장으로 가져가서 밝은 햇볕에서 함께 살펴 보도록 하시죠”라고 부탁하였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수운회관 주차장에서 나는 작품의 왼쪽 하단부를 가리켰다. 모두가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는 아무 말씀 마시고, 작품을 가지고 올라가서 말씀하시죠.”
당시 이원기씨의 사무실은 수운회관 601호로 기억한다. 601호로 올라 온 우리 세 명은 조용한 대화를 하였다. 우선 나는 “제가 보기에 이 작품 왼쪽 하단부 글씨는 오른쪽 상단부보다 먼저 쓰여진 것이에요. 오른쪽 상단부의 화재와 낙관은 후낙입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다. 이건환 선생은 나의 말을 곧바로 수긍(首肯)하였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이건환 선생은 “작품을 이대로 전시에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나는 “이 문제는 일단은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청산백운도』를 공개 전시하겠다고 호언한 것을 이제 어떻게 하죠?” 이건환 선생과 나는 내심으로는 『청산백운도』를 털고 갔으면 하였다.
그러나 이원기 사장은 곧바로 낙원표구사의 이효우 사장에게 전화하더니 이 사장을 불렀다. 결국 낙원표구사의 수정 표구 과정을 거쳐 내가 지적한 부분은 절삭(切削)되어 나갔다. 나는 며칠후 이효우 사장을 찾아가 “잘라낸 부분은 폐기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고 잘 보관하세요. 언젠가 필요할텐데, 잘 보관하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결국 이 그림은 약간을 수정 표구한 상태에서 덕성여대가 운영하던 당시의 운현미술관에 걸렸다.
그런데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1cm 정도 조금 넘게 세로로 그림 전체를 잘라냈는데도 작품의 가로 폭이 안 모 교수의 저서 『몽유도원도』에 명시된 크기와 똑 같았다. 매우 이상스러운 일이 아닌가? 더 재미있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건환 선생은 당시 “안 모 교수의 제자인 S대 박물관장 J씨가 전시에 오더니 『청산백운도』의 왼쪽 하단부를 20여 분간 살펴보더라”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마 “안 모 교수가 그 부분을 살펴보라 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요즘도 필자는 상경하여 낙원표구사를 지나칠 때마다 이효우 사장이 그립다. 건강상 이미 은퇴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근황이 궁금하다.
“〇〇〇‥‥‥恭繪”라고 적혀 있는 것은 중국 명청대(明淸代)에 왕에게 올리는 그림에 기명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원기 소장의 이른바 『청산백운도』는 명나라 초기의 작품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1936년에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경매에 올린 조맹부 작으로 전하던 『설색고사환금도』일 수가 없다.
필자의 견해로는 1936년 경매에 조맹부 작으로 올려진 『설색고사환금도(設色高士喚琴圖)』와 이원기 소장의 이른바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는 다른 작품이고, 두 점의 고서화 모두에 부쳐진 제목이 잘못된 것이다. 원제목이 무엇인가는 회화사학계의 연구 과제로 남겨 둔다. 나는 이원기 소장의 이른바 『청산백운도』 작품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주제로 하여 그린 작품으로 본다.
5. 맺음말 : 안견론쟁의 본질
1994년에 필자가 시도한 안견론쟁의 본질과 목적은 특정 작품에 관한 진위론쟁이 아니었다. 안견에 대한 틀린 관점을 바로 잡아야 조선전기 회화사가 바로 잡히기에 시도한 논리론쟁이었다. 그러나 이원기씨는 자신의 소장품의 가치를 확대하려 논리론쟁을 진위론쟁으로 변질시켰고, 안 모 교수는 자신의 이론이 깨어지는 논쟁에서 빠져나가려 논리론쟁을 진위론쟁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러한 점을 바로 잡아 놓은 상태에서만 제대로 된 안견론이 성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이른바 『청산백운도』에 관한 사실을 밝힌 것이다.
내가 밝힌 사실로 나를 비판하겠다면, 『청산백운도』를 자신의 저서에 안견의 전칭작으로 도판으로 올린 안 모 교수를 먼저 비판한 연후에 나를 비판하여야 할 것이다. 어떻든 간에 지금은 안견론을 다시금 정리하여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1994년 당시에 “이원기 소장의 그 작품을 안견의 진적이 아니라 중국 명초의 그림이라고 우리가 수정 발표했다”면 어떠했을까? 깊이 후회가 된다.
6. 안견론쟁 이후의 뒤끝 이야기
1994년 안견론쟁 이후 나의 국내 활동은 위축되었다. 지금도 그 여파가 크다. 1994년 안견론쟁의 와중에서 안 모 교수는 『중앙일보』 1994년 8월 1일자에 「공급자·수요자 모두 책임」이라는 기명 기고를 하여 우리를 모두 가짜 미술품 유통자로 몰았다. 그것은 안 교수의 제자들에게 안 교수가 내린 교시와 같은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와 고서화 시장은 안 교수와 조금의 인연이라도 있는 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나는 지금까지 개인을 상대로 문화재를 판 적이 없다. 더군다나 가짜 미술품을 판 적은 없다. 나는 주로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에 납품하였고, 경매에 출품하였다. 안 교수의 『중앙일보』 기고문을 본 나는 중앙일보의 윤 모 기자에게 반론을 쓰겠다고 전화하였다. 윤 모 기자는 곧바로 데스크에 묻겠다더니, 곧이어 “안 교수의 글은 논쟁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거절한다. 그래서 필자가 쓴 글이 월간 『미술세계』 1994년 9월호에 기고한 ‘안견론쟁의 유감’이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안 모 교수는 필자와 이건환 선생을 경제적으로 죽이려 하였고, 그 여파가 이건환 선생은 사망하는 날까지, 내게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원래 이원기씨와 안 모 교수는 동업자라 할 만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던 두 사람의 공생 관계가 언제부터인가 금이 갔다. 그리고 안견론쟁이 시작되었으니, 이원기씨는 쾌재를 부른 것이다. 이원기씨는 안견론쟁에 보태준 것이 없다. 그는 오히려 나의 론쟁에 걸리적 거렸다.
안견론쟁 이후 경제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나는 두 딸을 얻었다. 두 딸이 한창 커가던 2005년 이후에는 글을 적게 쓰게 되었다. 그것은 안견론쟁에서 12년이난 2006년부터는 의외로 이원기씨는 나를 매장하려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 고미술계에서 내가 자리를 굳건히 하면 자신의 컬렉션이 빛을 보는 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여긴 것 같다. 이원기씨의 변화를 감지한 나는 그를 다시는 대면하지 않았다.
후일 들으니 이건환 선생도 이원기씨에게 이용당한 것을 분하게 여긴 것 같다. 이원기씨 사후에 아들 이 모씨가 “형제와의 재산분쟁에서 도와달라”고 자신을 찾아 왔다고 한다. 이 선생은 “도와 주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1994년 안견론쟁 이후의 어려운 때에 나의 활동을 보장해 준 것은 중국의 메이저 경매사들과 미술품 상인들, 일본의 우호적인 고서적 상인들이다. 특히 북경의 메이저 경매사들은 내가 경매에 출품하는 것에 상당한 대우를 해 주었다. 지난 20여년간 북경이나 홍콩의 메이저 경매사들 사이에서 나의 위신은 상당히 높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7. 여적(餘滴)
2023년 년말과 2024년 년초에 들어와 『몽유도원도』 소동이 있었고, 그 소동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올해는 안견론쟁이 30년 되어가는 해이다. 이 해에 조선전기 미술사 정립을 위한 20~30년전의 노력이 떠올라졌고, 이제 다시 빈들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오늘 1994년의 안견론쟁과 2005년의 해프닝 등을 회상하며 안견에 관한 스무번째 글을 이렇게 남긴다.
이제 다음 글은 조선전기 회화사에 관한 첫 번째 글로 안견 이전 려말선초의 회화사적 관점으로 시작하여 틈틈이 개진하며 나갈 것이다. 그 새로운 논고의 서술에 앞서 과거의 문제를 고해성사하는 것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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