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6. 9(주일) -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 (2024년 22주)
제목; “영적 가족 공동체로의 초대”
성경; 막 3:20-35 (p.67) (시 130:7-8, 348<388>, 559<305>, 6)
<예배의 부름> (시 130:7-8)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국보훈의 달 6월 둘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 상륙 영상 보며(06:00)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1998년에 나온 “라이언 일병 구하기”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히는 프랑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서 27분간의 상륙작전의 일부 장면입니다.
지난 6일이 호국보훈의 달 6월의 꽃인 현충일(顯忠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승리의 극적 분수령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날입니다.(☞ 사진 보며)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두 개의 실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에 의해 감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입니다. 1944년 6월 6일 당시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휘 아래 연합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고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진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당시 상륙작전의 요충지였던 오마하 해변은 미군의 몫이었고 작전 수행 중 수많은 사상자가 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에 등장하는 27분간의 해안가 전투 장면은 바로 그것을 재현한 것입니다.
두 번째 실화는 전선에서 일반 병사를 구출해온다는 기본 줄거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뉴욕 출신으로 2차대전에 참여한 ‘닐란드’가의 4형제 중 3명이 노르망디와 미얀마 전선에서 사망하자 미군은 종군 목사 프란시스 샘슨을 파견하여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 ‘프리츠 닐란드’를 데리고 본국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해마다 호국보훈의 달 6월과 현충일을 맞이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빛바랜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1984년 해병 소위로 임관하고 곧바로 맞닥드렸던, 1984년 봄 한미 연합 팀스피리트 훈련으로 미군 헬기를 타고 강릉으로 상륙전을 나갔다가 악천후로 포항공항으로 귀환하다가 포한 내연산 향로봉 중턱에 추락하므로 미국 해병 15명과 한국 해병 11명이 몰사한 사건입니다. 그때 사망한 후임 소대장으로 부임해서 ‘11인의 해병탑’제막식을 할 때(☞ 사진 보며)제병 지휘관으로 지휘하는데, 제 뒤에서 불과 몇 달 전에 함께 훈련받고 뒹굴었던 전우를 얼굴을 떠올리며 흐느껴 우는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1986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준비하다가 사망한 사병의 부모님 얼굴입니다. 아들이 해병대 지원을 하고 훈련을 받고 빨간 명찰을 자랑스러워했던 부모님, 특별히 말없이 흐느끼던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말로만 하는 호국보훈이 아니라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존재하는데 피땀 흘린 애국선열들과 국군장병들의 충절(忠節)을 추모하고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짜 유공자들을 배척하고, 진짜 국가 유공자들을 폄훼하고 인정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배격하고, 유공자들을 존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막 3:20-35)은 열두 제자를 세우는 이야기(3:13-19)와 함께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는 이야기(4:1-12) 사이에 위치하면서 “누가 내 형제자매인가?”라는 새로운 영적 가족, 예수 공동체에 관한 정의를 바알세불 논쟁 이야기를 통하여 전개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는 기존 세계, 가정의 가치관과 옛 세계에 머물러있는 “집 밖에 있는 자들과 외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둘러앉은 사람들”로서,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영적 가족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1. 예수님의 대적자들 : 친족(가족)들과 서기관들(20-27)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친족(가족)들이 식사할 겨를조차 없는 예수님을 붙들러 나오는 것으로 시작하여(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르고 찾는 것으로 끝나는데(31-32), 그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과 논쟁이 삽입되어 있습니다(22-30). 마가는 예수님과 서기관들의 논쟁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예수님의 정체성뿐 아니라 그분의 사역의 본질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두 집단, 곧 예수님의 가족들과 서기관들은 모두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친척(가족)들은 아마도 그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문의 명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반응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그의 메시지를 거부하면서 적대감을 가지고 반응하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두 집단은 한 이야기를 또 다른 두 개의 이야기 안에 두고자 하는 마가복음 특유의 괄호 묶기 또는 샌드위치 방식에 의해서 밀접히 연결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친족(가족)들의 오해 :
먼저 갈릴리에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매일 바쁘게 지내셨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20)
예수님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굉장히 바쁘게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활동들 때문에, 특히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굉장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 감시하면서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잘 지켜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 전해 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에 대해 염려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고, 형제자매들은 자기들의 형이나 오빠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당시에는 잘못된 교리나 이단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귀신에 들렸다고 몰아서 백성들을 현혹한 죄에 대해 율법이 내리는 벌은 사형이라고 하며 죽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족들은 그런 위험이 닥치기 전에 빨리 붙들어 오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21)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이 누구입니까? “예수의 친족들”이라고 했는데, 직역하면 ‘그에게 속한 자들’, ‘그와 함께 한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1-32절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과 곧바로 연결되어지므로,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그 후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생활을 통해 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들을 보며 이 사람이 정말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예수가, 우리 형이, 오빠가, 조카가, 뭔가 대단히 잘못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붙들러 왔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들이 아는 자기들의 가족 예수인 줄만 알고 잡으러 온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들이 분명히 말합니다. “그가 미쳤다”(호이 엑세스테), 직역하면 ‘그가 제 정신을 잃었다’로, 즉 이 단어는 예수님이 현재의 상황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제 정신을 잃고 미치는 것은 귀신들린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어지는 30절에도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귀신의 조종을 받아 이적을 행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를 쫓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평가하지 않았고, 유대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권위의 소유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한 자들은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가족들뿐인 셈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가족이라도 그들은 진리에 무지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귀신들린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나온 것은 분명히 예수님을 생각하고 염려해서 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주님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었습니까?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거나 필요로 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모르고, 그가 미쳤다고 생각해서 자칫하면 큰일 날까봐 빨리 쫓아와서 데리고 가려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일을 걱정해서 한다고 하지만 정작 주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오히려 반대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가족들이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잡으러 왔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에 오래 다녔으니까, 직분이 있으니까, 교회에 대해 너무나 잘 아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주님의 뜻과는 전혀 동떨어진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22) 하고 말하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그냥 내 생각에 맞다고 하는 일, 내가 원하는 일인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을 원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인지, 아니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점검하지 않을 때 자칫 잘못하면 주님의 뜻과는 반대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 서기관(율법학자)들과의 논쟁 :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들러 온 그 자리에 예수님의 가족들뿐 아니라,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비난했습니다.“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22)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는 귀신의 왕 사탄에게 붙들렸다.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온 것이다.” “바알세불”(베엘제불, βεελζεβούλ)은 문자적으로 ‘파리의 주’, ‘똥의 주’란 뜻으로, 귀신들의 왕인‘사탄’(Satan)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귀신들이 예수님의 말에 순종하므로 그가 귀신들의 왕인 사탄(바알세불)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런 일들을 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바알세불, 곧 사탄의 힘을 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23-26) 이것을 정리해 보면, ①사탄이 사탄을 어찌 쫓아낼 수 있느냐(23), ②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24), ③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25), ④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26),
가족 간 다툼이 있고 이것이 밖으로 드러나면 그 집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말하는데, 사탄 역시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 나라나 집안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분쟁하면 제대로 설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사탄도 스스로를 대적해서 분쟁하면 사탄의 나라는 설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 안에 내전(內戰)이 일어나면 얼마나 힘들고 그 백성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이라크 전쟁이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힘듭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6.25 한국전쟁을 겪으셨지만, 남북이 싸우는데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은 지는 그런 게 아닙니다. 다 힘듭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월남전도 그렇고, 쿠데타가 일어난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그러한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무질서가 온 나라를 휩쓸게 됩니다. 치안이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지금 한 판 붙었다면, 그 집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기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부모와 자녀가 서로 싸웠다면, 싸늘한 공기가 그 집을 채우게 되고, 모두가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부부가 서로 싸운다고 그 집 아이가 ‘나는 안 싸웠으니 나는 행복하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싸우면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아빠 엄마가 이혼하면 나는 누구와 살아야 하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동심리학자들이 다 그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사탄의 세계도 똑같다는 겁니다. 그 안에 싸움이 일어나고 있으면 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망했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날뛰고 있고 큰 세력을 지니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의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라는 점을 예수님은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7)
어떤 강한 자가 있는데 그의 집안에는 그가 가진 것들이 있습니다. 그 집 물건을 탈취하길 원하는 사람은 그 주인을 결박하고 나서야 그렇게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두 번째 사람이 그 강한 집주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첫 번째 강한 자는 사탄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탄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고, 또 그렇게 강하다고 하는 사탄보다 예수님이 훨씬 더 강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어느 단체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스포츠 팀에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어느 팀에 몸값이 높은 스타들이 많아도 팀이 단결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모래알과 같은 조직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슈퍼스타는 없더라도 선수들이 서로 하나 되어 단결해서 우승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분열이 있는 팀이 우승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교회 내에서 서로 성도들끼리 미워하고 다툰다면 어떻게 교회가 바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쁘다면, 어떻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서로 다투면, 관계가 불편하고 냉전을 한다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서 전도를 막고 있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우리가 무슨 전도의 기술을 알지 못하고 훈련도 별로 안 받았더라도 서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전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새번역)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뜨겁게 부흥회를 하면”? “너희가 뜨겁게 찬양하고 눈물로 노래하고 기도하면”? 아닙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아, 이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의 제자이구나”라고 알아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용납하고 끌어안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 알듯이 ‘콩가루 집’치고 잘 되는 집이 있습니까? ‘안에서 새는 쪽박이 밖에서도 샙니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100% 옳고 완벽한 사람 없고 100% 잘못되고 엉망인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친족(가족)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딴지 걸고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탄의 손에 잡힌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악한 사탄의 세력과 싸워서 승리하고. 생명을 살리는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2.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 : 성령 모독죄(28-30)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답을 하신 다음, 매우 심각한 말씀을 하십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28-29)
먼저 여기서 번역상의 오류를 하나 수정하고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란 표현인데, 말 그대로 보면 ‘사람이 행한 모든 죄’란 의미로 들립니다. 그러나 원어를 통해 보면 잘못된 번역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토이스 휘오이스 톤 안드로폰 타 하마르테마타’를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들에게 대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을 보면 ‘사람의 아들들’이 범죄의 주체로 보이지만 원어로 보면 범죄를 당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본문은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죄는 하나님께 회개하여, 관계 회복을 통하여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범죄 행위를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표현은 아닙니다. 사람에 대해 행한 범죄 역시 하찮은 것일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사람에 대해 행하는 범죄를 성령에 대하여 범하는 죄와 비교해서 말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이것은 본문의‘사람의 아들’, ‘토이스 휘오이스 톤 안드로폰’이 ‘성령’ 에 해당하는 다음절의 ‘에이스 토 프뉴마 토 하기온’과 명징하게 대구를 이루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 행하는 죄에 비하면 사람에게 행한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대조 구조를 통해 성령 모독죄의 각성 또한 더욱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고 영원한 죄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여기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사탄의 활동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사탄의 활동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 활동을 멸시하는 죄로써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곧 사망에 이르는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요일 5:15-17).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사람에게 범한 죄든 하나님께 범한 죄든 용서의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거역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내가 혹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것은 아닌가?’하면서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뜻을 우리는 반드시 잘 알아둬야 합니다. 잘못 해석하니까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가 있습니까?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 못한다.’라고 하는 분이 하나님이실까요? 하나님은 누구나 용서하십니다. 최악의 죄인도 용서해주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 모독죄, 곧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에 내 안에 있으며 하나님 나라, 천국이 이미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미 천국이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 영원한 멸망인 지옥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 너는 죄인이니까 지옥에 빠져 죽어라! 하하하!’라고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3. 새로운 영적 가족 공동체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31-35)
예수님은 결국 가족으로부터도, 서기관들로부터도 이해와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두 부류 모두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아는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먼저 목수의 직업을 버리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다니며 여러 기적들을 일으키는 것들이 오히려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부친 요셉은 이미 죽었을 것이고 장남인 예수님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엉뚱하게 선생이 되어 유랑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다니는 것을 보면서, 혹시 이전에 있었던 정치적 세력처럼 사람들의 인기를 끌다가 결국엔 멸망당하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서기관들로부터 사탄의 힘을 입어 사역을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강하게 반박하셨는데, 그것을 본 가족들은 더욱 걱정이 되어 다시 찾아옵니다. 그냥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1-32)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는 서기관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좋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잡으러 왔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정이 있고 염려해주는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옳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공부를 안 하면 부모로서 야단치기도 하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는 것으로 야단치는 것은 드뭅니다. 그러나 부모로서 내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바른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토요일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주일 아침에 못 일어나고 힘들어한다고 해보십시오. 그럼 부모로서 얼마나 안쓰럽습니까? 그래서 좀 쉬게 하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쉬게 하는 것이 정말로 아이를 위한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힘들어하니까 쉬게 해주고 싶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는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래도 끌고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내 아이를 위한 일입니다.
* ‘부산서부교회’, 일명 ‘백파교회’,백영희 목사님 시무, 1980년대, 세계 최대인 1만 3,000명의 유년주일학생수를 기록했다. 부모보다 더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펴주던 교사
누군가가 와서 예수님에게 가족들이 왔다고 전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누가 자신의 가족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35)
“내 가족은 주변에 둘러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가리켜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가족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은 육신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새로운 선언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가족들을 ‘밖에 서 있는 이들’(31), 또는 ‘외인’(4:11)이라고 표현을 통해 지금까지 언급된 이들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밖에 서 있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서 예수님 ‘둘러앉은 자들’로 표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앉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수님의 제자 열두 명과도 함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4:10). “둘러앉은 자들”(34)이라고 표현된 이 사람들은 ‘밖에 서서’(31)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자신을 불러내어 붙들려 했던 예수님의 친족들과 자신을 모함하려 했던 서기관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밖에 서 있는’ 예수의 친족들, 즉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르자 예수님을 둘러앉았던 이들은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라고 예수님께 전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인가?”(33)라고 자문한 후, 다른 이가 아닌예수님을 둘러앉은 이들이야말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과 형제들”(34)이라고 말함으로써, 기존 친족관계가 아닌 ‘새로운 영적 가족 공동체’를 소개합니다. 즉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가 ‘밖에 서 있는’ 가족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이제 새로운 영적 가족 공동체를 소개하였는데, 이 새로운 가족 공동체는 ‘밖에 서 있는’ 이들이 아닌 예수님을 ‘둘러앉은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번 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야말로 내 형제, 자매, 어머니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와 같이 마가는 소위 ‘밖에 있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둘러앉은 사람들’을 구별함으로써 예수님의 혈연으로 묶인 가족과 달리 예수에게 새로운 영적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는 영적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또 하난 주목할 한 낱말은 “누구든지”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는데 출신 성분이나 혈통 같은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요한복음에서 설명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물론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믿음이 행위로써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동의 가장 분명한 표현은 바로 주님께 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가족인가? 혹시 겉으로는 예수님의 가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뜻을 대적하는 사람은 아닌가? 우리가 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녀가 자동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손자, 손녀가 없으시고 자녀만 있으십니다. 나는 진정 주님을 믿으며 그분에게 와서 그의 말씀을 듣는 데 힘쓰는 자인가? 나는 혹시 나의 직위에 속아 살지는 않는가? 이것을 늘 돌아보며,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행하여, 주님의 참 가족으로서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II.
*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예고편 영상 보며(2: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병사의 말처럼 1명을 구하기 위해서 8명이 총알이 빗발치는 사지(死地)로 가는 것이 옳습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4명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는 아들을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 또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은 명령이 떨어지면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12제자를 부르시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는 등 식사할 겨를도 없이 사역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가족들이 “미쳤다”고 말하고, 서기관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곧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가족들의 오해와 서기관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유를 통하여 자기가 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이 사탄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 모독죄’, 곧 예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밖에 있는 가족들과 외인들인 서기관들과 같이 기존 혈통적인 인종적인 가족이 아니라, 예수님 곁에 둘러앉아 있는 자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내 형제요 자매,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새로운 영적 공동체 가정과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았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기뻐하시는 예수님,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주고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역시 내 주변에 있는 아직도 믿지 않는 가족들, 집 밖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하나님 품으로 이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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