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9월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청주] 여러분은 등불입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에즈 1, 1 - 6
† 복음 : 루카 8, 16 - 18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 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을 점령한 뒤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칙서를 반포한다. 유배 생활 5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 사건을 에즈라기는 하느님의 섭리로
고백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당신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 등불을 켜서 감추지 않듯이, 당신 말씀을 듣는
이도 그 말씀의 빛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에는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死海)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요르단 강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호수입니다. 이곳에는 물고기가 많고, 그 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하는 젖줄입니다. 그래서 그 호수 주위로는 마을도
많습니다. 그 반면,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염분이
무척 높은 짠물이기 때문에 물고기가 전혀 살 수 없을뿐더러 식수로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해 주위에는 황폐한 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호수가 되었고, 사해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을까요?
갈릴래아 호수는 물을 받은 만큼 그것을 요르단 강을 통하여 사해로
보내 줍니다. 받은 만큼 나누어 주는 호수이기 때문에 물이 썩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반면, 사해는 물을 받기만 하지 나가는 곳이 없습니다.
곧, 그 어떤 곳에도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분 농도가 높아
물고기를 포함한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빛을 우리 마음속에 가두어 놓기만 한 채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아무 쓸모없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참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등불은 밝혀
두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비추라고 있는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여러분은 등불입니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 8,16-18
여러분은 등불입니다.
신앙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가슴에 담고 가슴에 담은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생활화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요, 죽은 믿음(야고 2,17)
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합니다”(루카8,16).
당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으로 봉사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합니다.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영적성장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의 지식을 생활화 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살지
않으면 이미 받은 믿음의 은총도 시들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간수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가지 않습니다”(로마11,29).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시기 바랍니다”(1베드4,10).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 주셨고”(2고린4,7) 당신의
빛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의 관심사와 모든
행동이 주님을 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면
할수록 더 견고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오늘은 사랑으로 살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라.”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년) 송열섭 가시미로
1. 2002년 6월 16일,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년)이 시성되셨다.
내겐 지나칠 수 없는 날이었고, 1999년 5월 2일 시복식에 이어 3년
만에 찾아온 기쁨의 날이었다. 1987년에 처음으로 "마리아"지에서
비오 신부님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리
시대에 이토록 놀라운 분이 사셨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토록 놀라운
분의 이야기를 이제서야 접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출신의 비오 신부님은 1968년 9월 23일에
81세로, 이탈리아 동부에 위치한 산조반니 로톤도(S. Giovanni Rotondo)
의 수도원에서 돌아가셨다. 비오 신부님은 카푸친회 수도사제로서 반세기
동안 어떠한 의학적 치료나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한 오상(五傷)을
지니고 사셨다. 손바닥에 난 작은 동전 크기의 구멍에서, 그리고 발과
가슴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수많은 기적적인 병치유가 이 수도사제의 간구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예언, 신비한 향내,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공중 부상 등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증언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었던 소녀 젬마 양이 보게 된 것이라든지,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실명한 오른쪽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조반니 사비노의 기적적
치유는 과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2.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의 순례자들이, 어려운 여행에도 아랑곳없이
비오 신부님을 뵙고자 산조반니 로톤도를 찾아온 것은, 단지 기적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근본적으로 영성적
동기 때문에 비오 신부님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부분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 지도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분을 찾는 첫번째 이유는 그분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분의 삶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단순히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현재에 살아계심을 놀랍게
증거하였다.
그러하기에 역대 교황님들도 큰 사랑으로 비오 신부님을 대하셨는데,
1921년 교황 베네딕토 15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성인이셨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우리 주님의 오상을 뚜렷이
잘 나타내신 분"이라고 했는데, 그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같은 증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3.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다.
선종하기 직전인 1967년에는 만오천 명의 여자와 만 명의 남자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사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며칠씩 차례를 기다려야 했고 참다운
회개와 통회가 선행되어야 했기에 적어도 편안하고 친절한 만남은
아니었다.
비오 신부님은 신중하지 않은 이에게는 엄격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을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대개는 몇 달 또는 며칠 뒤에 되돌아와
진정으로 뉘우치며 고해성사를 보았고, 그로 인하여 삶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이러한 영성 지도에서 그분의 모든 위대함이 드러나는데,
그는 독특한 지도 방법과 영혼들의 고뇌에 그 자신이 함께함으로써
삶을 변화시켰다.
다음의 말씀이 그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4. 또한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하여 1시간 반 정도 집전하는 미사는,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려는 그의 영성의 절정이었다.
밤 1시부터 사람들은 성당 문이 열릴 때까지 서서 기도하며 기다린다.
멀리서 온 그들은 하룻밤을 설치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비오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제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성당 문이 열리면 성당은 이내 신자들로
꽉 차고, 신부님의 열정 어린 미사는 때론 두 세 시간씩 계속되곤
하였다.
비오 신부님의 눈에는 자주 눈물이 고여있었고, "왜요?"라는 물음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는 미사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오."
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미사 때마다 양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대포에 떨어지곤 하였는데, 온몸으로 십자가의 제사를 재현하는
미사에 대한 그분의 열정은 다음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은 태양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 성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대 건너편에는 자주, 멀리서 온 순례자들이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 제가 하느님을 이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다니." 하며 회개하곤 했다.
5. 비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긴 소송은 1969년에 시작되어
1999년 5월 2일 시복식을 거쳐 2002년 6월 16일로 막을 내렸으나
그분의 사도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되었다.
나는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그리고 타종교인과
믿지 않는 이들이 비오 신부님을 통하여 열성을 회복하고 예수님을
이 시대에 새롭게 만나는 일이 확산되리라 믿는다.
"나는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뒤에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하신 비오 신부님이 그 약속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시리라
믿는다. 성인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심으로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심으로
이 땅의 더 많은 영혼들을 특히 북녘 땅의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나는 고통을 사랑합니다.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께
고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청했고, 그 고통에서 생겨나는 열매 때문에,
또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 때문에 고통을 열망합니다.
내 고통을 통하여 우리 형제들이 구원되고, 불쌍한 연옥영혼들의
고통이 단축될 것입니다."
- 경향잡지, 2002년 11월호에서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게서 원하시는 것을 생활안에서
이제까지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감명을
받고 또한 기억에 많이 남는 곳을 고르라고 하면 단연 이스라엘을
들게 됩니다. 물론 출입국이 힘들어서 항상 망설여지지만, 그 안에서는
뜨겁게 주님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어서 성지순례의 최고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몇 년 전에 동창신부들과 함께 했던 이스라엘 성지순례
사진을 보다가 우연히 인상 깊은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문이 찍혀 있는 사진으로, 베들레헴의 예수님탄생성당 입구입니다.
여러분들도 성지순례를 다니시다보면 느끼셨겠지만 대부분 성지의
성당 입구는 항상 크고 화려합니다. 많은 순례객들을 위해서라도
입구의 문이 커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이곳이 귀하고
거룩한 곳이라는 표시로 문이 화려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성지의 성당 입구와 달리 예수님 탄생 성당 입구는 아주
초라합니다. 입구의 높이는 120Cm, 폭은 80Cm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당에 들어가는 쪽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다른 입구는 찾을 수
없습니다.
원래는 세 개의 문으로 크고 화려했지만, 십자군 시대에 양쪽 문을
막아 버리고 중앙의 문은 오늘날과 같이 작게 만들었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군인들이 말을 타고 교회 내부로 들어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을 통과하려면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올 수 있어, ‘겸손의 문’이라고 불리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크고 화려한 문으로만 들어가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문 자체가 아니라, 그 문 너머에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인데 말이지요. 따라서 주님을 만나는데 최선을 다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먼 훗날에 필요한 지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계속해서 필요한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활 속의 한 지혜를 말씀하시지요.
등불을 켜서 그릇에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고요. 당연합니다.
등경 위에 올려놓아야 환하게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이 세상 안에서부터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만의 욕심을 채우는
것?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
돈과 세상의 높은 지위만을 탐내며 사는 것?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요구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사랑’
뿐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우리 생활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더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생활 안에서 적극적으로 또 계속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좁은 문 안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작고 미미한 방식으로 베푼 관대함이 누군가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 놓을 수 있다(마가릿 조).
예수탄생 성당의 작고 좁은 문.
둘만 남는다(‘앰블러’ 중에서)
“사람들이 과연 우리 가게에 올까?”
1978년 일본 도쿄, 모스버거 직원들이 중얼거렸다. 맞은편에는 맥도날드
직원들이 무료 쿠폰을 나눠 주고 있었다. 구멍가게 수준인 모스버거
앞에 미국의 거대 패스트푸드가 등장한 것이다. 주위에서는 둘의 대결에
주목했고, 대부분 맥도날드가 승리할 거라 예견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많은 사람이 모스버거에 찾아와 말했다.
“이 맛을 잊지 못해 찾아왔습니다.”
모스버거 최고 경영자 사쿠라다 아쓰시는 가능한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고
주문이 들어오면 햄버거를 만들기 시작했다. 햄버거의 장점이 ‘빠름’에
있다는 편견을 깬 것이다. 그렇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모스버거만의
맛을 만들어 냈다. 그는 성공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전한 길로 가면 경쟁자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하지만 그와 다른 길로 가면 오로지 둘만 남죠. ‘고객’ 그리고 ‘최선’
이라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생명의 말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생명의 말씀이기에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013년9월23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루카8,16)
등불의 이유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러니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 것은 등불의
존재 이유에 반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어리석다 한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다.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빛의 자녀라 한다면, 우리를 숨겨서는 안
된다. 가장 환하게 비출 수 있는 곳에 내놓고 모든 이들이 그
빛으로 행복해져야 한다.
그것이 빛도 빛의 자녀도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자신 있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신자들 아닌 곳에서 성호 긋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루카8,17)
무덤에까지 비밀로 가지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보통 숨기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부끄러움이다.
사실, 무덤까지 비밀로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드러나고 말고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과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죄로 인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은 숨겨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믿고, 용서를 청하는 용기를 낼 수 있을 때 해결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루카8,18)
이 말씀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떠오르는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이
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태오19,30 / 마르코10,31 / 루카13,30)
어떻게 보면 상반된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셨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한들, 참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다면 사실 가진 것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빛에 대한 동경이나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신앙이라는
보물마저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진정 필요한 것을 가지기 위해 꼴찌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신앙의
원리인지도 모르겠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2013년 다해 9월23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비교적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났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도, 다른
해에 비해서 덜 막혔다고 합니다. 저도 편안하게 다녀 올 수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는 것들 중에는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성능이 좋아서 실시간 교통정보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막히는 곳을 피해서 가장 빠른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어떤
분들은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스마트 폰에 의지하면서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내비게이션에 너무 의존하면 공간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스마트 폰, 내비게이션에 익숙해 져 있어서 그것들을 포기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 폰이 우리를 편하게 가족들에게 안내를 해 줄
수는 있어도,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말과
행동입니다. 가족들이라고해도 모처럼 만난 자리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있다고 합니다. ‘너 언제 결혼할 거니? 너 취직은 했니?
올해 몇 살이니?’ 이런 질문은 걱정을 하는 질문이지만 당사자들은
모처럼 가족들과 만나면서 심리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좋은 덕담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 잘 될 거야, 너를 믿는다. 너를 위해서 기도 하고 있다.’ 이런 말들은
젊은이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줄 것입니다.
저는 운동을 잘 못하는 편입니다. 그러면서도 연습을 하거나, 레슨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그런 저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합니다.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운동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어떤 친구들은 제게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하면서 저의 자세에 대해서
충고를 해 주기도 하고, 연습을 하라고 하고, 레슨을 받으라고 말을
합니다. 분명히 좋은 말이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제가 소심해서 그런지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 폰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해 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작동하면 과속 방지턱도 알려주고, 과속 단속구간도 알려주고, 막히지
않는 길로 가도록 알려기 때문입니다. 스마트 폰은 많은 보물이 있는
창고와 같습니다. 많은 어플리케이션들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줍니다. 저도 일기예보, 지하철 노선, 버스 노선, 신문과
같은 어플리케이션을 자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등경위의 등불과 같은 신앙인으로 이끌어 줄까요?
어릴 때 읽었던 ‘햇님가 바람’의 이야기가 하나의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햇님은 따뜻함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
바람은 거센 힘이 있었지만 결국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남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해주고, 진리의 빛을 환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오늘 만나는 이웃들에게 희망의
등불, 사랑의 빛, 믿음의 씨앗을 함께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2013년 다해 9월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마술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자주 보기도 했지만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배우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니 결국 속임수였습니다.
결국 마술은 관객을 멋지게 속이는 노력과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삶은 어린 아기들에게 마술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사람들의 생활은 세상에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게 많다고 생각 안 합니까?
하늘나라에선 감추었던 모든 것이 훤히 들어난다니 거 신경 쓰이네요?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루카 8,17)”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진 자의 여유
2013년 다해 9월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복음 : 루카 8,16-18
< 가진 자의 여유 >
정신분석학 이무석 교수가 겪은 이야기입니다. 교수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때 철학, 논리학, 수학의 대가이며
195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버트런드 러셀의 주장 때문에 혼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 뺨을 돌려대라고 했다. 이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자학적인 요구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런 요구를 하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
러셀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던 차에 이무석 교수의 은사인 김성희
교수를 만나게 된 후에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김성희
교수는 한국 최초의 정신분석학자였고 전남의대에 정신과를 창설한
분이랍니다.
군복무 휴가 때 김성희 교수를 찾아간 이무석씨는 김 교수의 집 마루
밑 햇볕이 드는 곳이 있는 개를 가리키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어디선가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서 큰 개를 귀찮게 했지.
강아지는 ‘캉캉’거리면서 큰 개의 오른쪽 뺨을 물었어. 큰 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버렸지. 강아지는 왼쪽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쪽 뺨도 물었어.
‘컹!’하고 겁을 줄만도 한데, 큰 개는 상대하지 않고 부스스 일어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떠 버렸어.”
사람은 대부분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으면 대번 맞받아칩니다.
이는 내가 가진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모함했다면 내 명예가 회손 되기 때문에 크게 화를 내거나 소송을 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쪽 뺨도 그냥 내어 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늘
것일까요? 바로 자신 안에 더 중요한 것을 지니고 있기에 그 정도 잃어도
티도 안 나기 때문입니다. 오른 뺨을 맞았을 때 왼 뺨을 돌려 댈 수 없는
이유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그 자존심마저 무너지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성희 교수는 또 평양대학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도
들려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공산당원 한 명이 병원에서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어.
그는 막 크리스천 간호사들을 끌어다 총살하고 돌아온 길이었어.
증오하던 크리스천들을 죽여 버렸으니 시원할 법도 한데,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지. 얘기인즉 이랬어. 총살 장소로 실려 가는
트럭에서 간호사들이 기도를 하더라는 거야. 그 기도의 내용을 들어
보니 자신들을 총살하려는 공산당원인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어.
크리스천 간호사들이 살려 달라 애원하며 그의 발목을 붙들고
매달렸으면 강자로서의 쾌감이 있었을 텐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오히려 그녀들은 죽음 앞에서도 태연했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던 거야. 마치 그녀들이 강자이고 그가 철없는 짓을 하는 약자처럼
느껴졌던 거지. 그래서 공산당원은 간호사들을 총살시키고도 패배감을
느꼈던 거야.”
오늘 예수님은 가진 자들은 더 가지고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그
가졌다고 믿는 것조차 빼앗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감추어진 것은
드러날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큰 개는 작은 개에게 모욕을 당하고
얼굴을 물려도 크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낼 만큼 잃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무언가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간호사들을 총살시킨 사람은 자신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를 위해 기도 해 주는 간호원들이
자신보다 무언가 더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빼앗을
수 없는 무엇을 지니고 있기에 목숨을 잃어도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들을 총살시킨 그 사람은 아주 작은 죽음의 위협에도
벌벌 떨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숨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지만,
간호원들은 목숨을 잃어도 크게 잃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세상 것들을 다 잃어도 여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물이나 명예, 생명 등을 잃지 않으려고 크게
저항한다면 이는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누가 남을 모욕하거나
때리거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해도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사례 참조: 이무석, 30년만의 휴식, 215-218]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이 간수들의 신임을 얻어 간수들
방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어 모든 죄수들에게 음악을 틀어주었습니다.
결국 매를 맞고 독방에 갇힐 것을 알았지만 그는 여유로웠습니다.
왜냐하면 독방에서 나오면 이제 자신이 파놓은 땅굴로 탈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가집시다. 먼저 영원한 생명의
보증을 가집시다. 탈출구가 있다면 감옥에 있어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가져야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평온할 수
있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