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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재견(再見)-1 이원(梨園)은 그 이름만큼 배나무가 가득한 동산이었다. 배 나무 사이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그 수가 무려 삼 백여 호가 넘었으니 제법 큰 부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 나 주민들의 대부분이 기예를 팔아 먹고사는 곡예단의 단원 들이라 천하를 떠돌아 다녀 부락에는 사람들이 많을 수 없었 다. 그러나 겨울철은 다른 계절과 달리 기예를 팔 수 없어 모두 모여 부락은 시끌벅적 했다. 아침준비 때문에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굴뚝의 수가 이원에 있는 집의 숫자와 차이가 없는 것을 봐서는 주민들이 모두 모였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또한 수입이 없는 겨울을 지내는 이원의 주민들 대다수가 아 침 준비를 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수입이 있다는 반증이기 도 했다. 그런데 이원에 있는 굴뚝 중에 가장 큰 굴뚝은 유 일한 도요(陶窯)에 있는 굴뚝이었다. 도자기를 굽는 중인지 도요의 굴뚝은 엄청난 양의 연기를 뿜 어내고 있었고 가마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는 외팔이가 있었다. 그는 오른 팔이 없는 외팔이였고 송 철방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송철방은 외팔이인데도 자기 를 굽는 실력만큼은 뛰어났다. "이제 다됐군." 송 철방은 불길을 보며 말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불 고르기의 끝이 보이 자 송 철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불꽃을 살피며 보낸 지루한 밤의 보상이 곧 나올 것이라 생 각하자 송 철방의 안색은 환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도요 주변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깍. 깍." 까치가 송 철방의 머리 위를 선회하며 울었다. "이른 아침부터 까치가 우는 것을 보니 반가운 손님이 오시 려나." 송 철방은 까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안면이 온통 흉터로 가득했지만 미소만큼은 더 없이 부드러웠다. "여보게. 철방이." 멀리서 한 노인이 송 철방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 었다. 송 철방은 달려오는 노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 렸다. "헉... 헉..." "희 어른, 왜 그러십니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송 철방 면전에서 걸음을 멈춘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세웠다. 노인은 역삼각형의 얼굴에 가느다란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러 외모가 쥐가 인간으로 환생한 것처럼 보였다. "무, 무슨... 일은... 급한 일은 아니라네." "그런데 그리 급히 움직이십니까! 연세도 적지 않으신 분이 건강을 생각을 하셔야 지요." "이런 염병할... 내 나이가 어때서 그런가. 이래봐도 이 몸은 이팔청춘 못지 않네." "어허!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송 철방의 어조는 정중했지만 그 속에 미묘하게 비꼬는 투가 숨겨져 있었다. 환갑이 넘은 고 노인의 연륜은 송 철방의 어투 속에 숨은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 허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송 철방의 어조는 정중했으니까. "아니, 희 어른 안색이 갑자기 안 좋습니다." 송 철방은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는 희 노인의 안색을 바라 보며 유들유들하게 대응했다. 고 노인은 송 철방의 어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심사가 꼬였다. "갑자기 몸이 불편해 졌네." "이런 벌써 노환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고 어른같이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어서 뜨끈 뜨끈한 화로가 있는 방으로 가시지요." "흐음~, 아직은 괜찮으이. 그것보다 자네에게 전해줄 말이 있 어서 달려 왔네." "무슨 일입니까?" 송 철방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굳어졌다. 희 노인은 송 철방의 안색이 변하자 가지고 온 소식을 쉽게 풀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좋은 소식을 알려 주려고 달려 온 자신을 늙다리취급을 한 송 철방에게 심통이 생긴 것이다. "뭐... 급한 일이고 좋은 일이네. 그런데 그런 소식을 가지고 온 나를 말일세. 누가 푸대접을 해서 말이야..." "하하하. 누가 희 어른을 무시하고 푸 대접했습니까? 내가 가 서 손을 좀 봐주겠습니다. 도대체 그 막되 먹은 놈이 누구입 니까?" 송 철방이 팔짱을 걷어올리고 되려 선수를 치자 희 노인은 어이가 없었다. "허!" 희 노인은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고 말았다. 이 정도 면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라 아 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희 어른 어서 말해 주시지요. 제가 가서 혼 구멍을 내주겠습 니다." "자네일세." "무슨 말씀입니까? 저처럼 성실하고 어른들께 공경하는 사람 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희 어른께서 모함을 하실 줄 몰랐 습니다." 송 철방의 얼굴에 섭섭하다는 감정이 가득 드러내 희 노인을 어이없게 했다. "에잇, 자네랑 두 번 다시 말을 한다면 내 성을 갈지. 에이 이~." "희 어른. 희 어른." 희 노인은 더 이상 심통을 참지 못하고 뒤돌아 섰다. "갈 때 가시더라도 하실 말씀은 하셔야 지요." "허어~, 내 참... 자네가 가서 직접 알아보게나." 희 노인은 송 철방의 행동이 괘씸한지 뒷짐을 지고 왔던 길 을 되돌아 갈려고 했다. "희 가야. 왔으면 목적을 완수해야 하지 않느냐." 가마 근처에 있는 움막에서 걸어나온 60대 중반의 노인이 희 노인을 향해 외쳤다. 희 노인과 달리 짙은 백염(白髥)이 가 슴팍까지 내려온 노인의 외모는 신선을 방불케 했다. 비록 거친 마의(麻衣)를 입었고 두 손은 흙투성이였지만 두 눈동자 는 어린 아이처럼 맑았다. 그 노인은 도요의 주인으로 송 철 방의 장인이었다. "엥! 어허 이 놈 송 가야! 무슨 헛소리냐. 자네의 보배 같은 사위가 내게 한 짓을 생각하고 그런 소리를 해라." 희 노인은 송 노인마저 송 철방에 못지 않게 심사(心思)를 긁 자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두 노인은 서로를 노려보며 누가 먼저 잘못했는데 오히려 성을 내냐며 으르릉거렸다. 그런데 희 노인이 왔던 길에서 7, 8세 정도 어린 여아가 도요 를 향해 달려오자 두 노인의 대립은 허망하게 끝이 나버렸다. "헥... 헥... 할아버지..." "채린아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냐?" 어린 여아는 송 철방의 무남독녀였다. 푸른 색 상단의 저고 리와 황색치마를 입은 소녀의 오밀조밀한 얼굴은 더없이 귀 여웠다. 특히 가지런한 숨을 내쉬며 상기한 얼굴로 송 노인 을 바라보는 시선은 깜찍했다. "할아버지. 엄마가 내게 동생을 선물해 줬어요." "엉! 뭐라고?" "채린아 정말이냐?" 송 노인과 송 철방은 어린 채린의 입에서 나온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버렸다. "쳇, 내가 올 필요도 없이 채린이가 알려 주는구먼." "희 가야. 송 서방에게 알려주려는 소식이 채린이가 가지고 온 것과 같은 것이냐?" "쳇! 그렇다네." 희 노인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심통이 가시기 는 고사하고 더 심해졌다. 송가 삼대가 들뜬 기분을 주체못 해 웃음이 얼굴에 가득한 것까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그럼 사내인가? 계집인가?" "허! 이제야 묻는군. 내가 넓은 마음을 가진 것을 고맙게 생 각하게."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빨리 알려주게나." "이런 번개 불에 콩을 볶아 먹을 노인네가 다 있나. 내 알려 줌세. 자네가 드디어..." 희 노인은 뜸을 들였다. 이런 소식은 약간의 시간을 가지고 알려줘야 듣는 사람의 심장이 벌렁벌렁 띄는 법을 알기 때문 이다. "남동생이에요. 할아버지. 엄마가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줬어 요." "채린아. 정말이냐!" 희 노인이 꿈꾸던 작은 복수는 송 채린의 선수(先手)로 산산 조각 나버렸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서있는 희 노 인과 달리 송가 삼대는 기쁨을 나누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대를 이을 남아가 태어났다는 낭보는 송 노인과 송 철방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런데 송 채린의 기쁨은 송 철방이나 송 노인이 느끼는 기 쁨과는 궤를 달리했다. 송 채린은 그동안 친구들이 형제자매 와 정답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무남독녀인 송 채린은 친구들이 부러워 어머니에게 동생을 만들어 달라 고 채근했었다. "이런 망할 꼬맹이가!" 희 노인은 송 채린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송가 삼 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니 희 노인에 대해 신경을 껐다 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들은 새로이 태어난 가족의 일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희 노인이 주위에 있다는 사실마저 잊 어버린 것이다. "철방아. 채린이랑 같이 어서 집에 가보거라." "아버님도 가셔 야죠." "아직 가마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도공에게 생명이나 다름없 는 가마가 아직 타오르고 있는데 어찌 자리를 비우겠느냐." 송 노인은 가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남아 있겠습니다. 아버님이 채린이랑..." "어허! 어멈은 아이를 낳느라 심히 고생했을 거다. 당연히 남 편인 네가 가야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지금 그 아이가 보고 싶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송 노인은 송 철방의 말허리를 자르고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 다. 송 철방이 난감해 하자 송 노인은 손녀에게 시선을 돌렸 다. "채린아."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부르자 송 채린은 만면에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랑 같이 네 동생을 보러 가거라." "알았어요. 할아버지." 송 채린은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빠. 어서 가요. 난 동생이 보고 싶단 말이야." 송 철방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는 송 채린의 눈동자는 반 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허! 채린아. 동생이 생긴 것이 그리도 좋으냐?" "응." 송 채린은 남동생이 생기자 엄청난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더 이상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슬픈 마음을 달래거나 부모님 께 애걸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송 채린에게 남동생이 생 긴 것은 인형을 선물 받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남동생이 생긴 것이 너무 기뻐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상대가 설령 아버지라 할지라도... 송 철방이 송 채린의 손에 이끌려 집을 향하자 송 노인과 희 노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나타났다. 특히 대를 이을 남 아가 태어난 기쁨은 송 노인에게 각별한 감회를 느끼게 했다. 송 노인의 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희 노인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송 가야! 그렇게 좋으냐?" "이놈 희 가야! 어른이 감회에 빠져 있는데 초를 치려고 하다 니..." "허! 어른... 어이구 내가 두 번 다시 자네랑 말을 하면 성을 갈겠네. 어이구 울화통 터져!" "그래 잘 생각했네. 이제 도자기를 빼내야 하니까 이만 가보 게." 송 노인의 야속한 응대는 고 노인은 어이없게 만들었다. "자네, 정말 이렇게 나올 건가!" "어허! 두 번 다시 말 안 한다면서... 이보게 나는 바쁘다네. 이번에 구운 자기들은 철방이가 고생해서 만든 것들이야." "엉! 철방이가 다시 도자기를 구운 건가?" "그렇다네." 송 노인은 바쁘다며 희 노인에게 대답하고는 가마를 향해 걸 어갔다. 고 노인은 가마를 향하는 송 노인은 외면하고 가마 를 탐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호~, 철방이가 드디어 도자기를 다시 구웠군. 가만 이게 근 3년 만에 다시 재개한 건가?" 희 노인의 눈에 탐욕의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다. 송 철방의 만든 도자기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뛰어난 수준의 명품이었다. 사실 외팔이가 도자기를 만든다는 것부터 보통 사람들이 놀랄 일이었다. 게다가 그 작품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만큼 뛰어난 명품들이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탄 성을 지르게 할 정도였다. 이원의 주민들뿐 아니라 북경의 고관대작들까지 송 철방이 만든 도자기는 눈을 부라리며 찾는 명품들이었다. 송 철방 의 도자기는 현금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 송 철방은 지난 3년 간 도요에서 잡일만 할 뿐 도자기를 만 들지는 않았다. "흐흐흐, 철방이가 만든 자기를 한 두어 개만 슬쩍해야겠군. 안 그래도 요새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해 고생을 했는데..."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말게." 희 노인의 독백을 들었는지 송 노인의 어투는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송 노인이 있는 장소는 가마 앞이었고 고 노 인과는 무려 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조용히 내뱉은 독 백이 들릴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젠장 늙은이가 귀도 밝지. 그 멀리서도 잘도 알아듣는구먼." "헛소리를 해대니 당연히 듣게되지." "뭐, 이렇게 됐으니 부탁 좀 하세." "철방이가 만든 도자기를 가져갈 꿈은 깨게." 송 노인의 응대는 어림도 없다는 듯 매섭기 그지없었다. 희 노인은 송 노인의 매서운 응대를 여러 번 경험해 일말의 흔 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만면에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 마를 향해 걸어갔다. 물론 늙은 서생원의 얼굴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뜰리는 만무하지만 희 노인은 그렇게 생각했 다. "송 가야. 그러지 말고 한 두어 개만 달라니까. 철방이가 만 든 도자기는 경덕진(景德鎭)에서 만든 도자기보다 훨씬 뛰어 나 큰돈이 된다네." "이런 썩을 놈아! 그걸 아는 놈이 돈으로 바꿀 생각이냐!" 송 노인은 버럭 성을 냈다. 송 철방이 만든 도자기가 경덕진 의 명품보다 뛰어나 돈이 된다는 고 노인의 경박함과 물욕에 화가 난 것이다. 송 노인은 젊은 시절 집안에 전승(傳承)되 는 무학을 수련하기 위해 경덕진에서 도자기 수업을 받은 적 이 있었다. 그래서 경덕진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었다. 송 노인은 무학 수련을 위해 도자기를 만들 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못해 도자기광(陶瓷器狂)이 되어 경덕진의 명품을 능가하는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꿈이 되었 다. 경덕진은 강서성에 있는 도자기 도시이다. 북송(北宋) 진종 (眞宗)의 경덕(景德) 연간에 군사기지인 진(鎭)을 설치하면서 경덕진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명나라 무종(武宗) 정덕(正德) 초년에 어기창(御器廠)이 들어서면서 중국을 대표하는 도자기 도시로 변모했다. 궁전에서 사용하는 병이나 항아리, 접시, 다완(茶碗)을 굽는 관요(官窯)가 가득한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경덕진의 이름은 천하를 울렸다. 그런 경덕진의 명품을 능가하는 도자기를 척박한 하북에서 만들어낸 송 철방은 송 노인에겐 자랑이요 보물이었다. 그런데 친구라고 생각하던 희 노인이 방정맞게 돈으로 가치를 논하자 분노를 느낀 것이다. "철방이가 만든 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잘 아네. 팔이 하나가 없는 고난 속에서도 그런 명품을 만들어내니 존경할 만 하네. 사실 그런 후계자가 있는 자네가 부럽다네." "어흠..." 누구든지 자식이나 후계자가 칭찬을 받으면 기꺼운 법이다. 희 노인의 칭찬은 송 노인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환갑이 되도록 살아온 연륜은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제법 눈치코 치가 있도록 만든다. 희 노인 또한 그 과정을 밟아온 사람 이었기에 송 노인의 안색만 보고도 이렇게 처신해야겠구나 하는 답 정도는 나왔다. 송 노인도 희 노인의 칭찬이 그런 속셈에서 나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칭찬의 바탕이 되는 송 철방의 도자기 는 자타가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좋은 소리를 듣고 싫어할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송 노인이 많이 누그러지자 희 노인 은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이보게. 그러니 말일세..." "한 가지 좀 묻겠네." 송 철방의 도자기를 얻으려고 아부로 도배를 한 뒤 목적을 드러내려는 희 노인의 의도는 송 노인이 중간에 질문을 던지 는 바람에 끝나버렸다. 희 노인은 서두를 꺼내기도 전에 송 노인이 말허리를 끊어버리자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송 철 방의 도자기를 얻으려는 열망이 희 노인의 노기를 자제시켰 다. "무엇을 묻겠다는 건가?" "꼭두새벽부터 철방이를 찾은 이유가 뭔가? 내 손자가 태어 난 것을 알려주려고 밤새도록 우리 집에 있었는가?" "헉! 이런..." 희 노인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며 탄식했다. 이른 새벽에 송 철방을 찾아간 이유를 그만 새로 태어난 송가의 남아와 도자기에 팔려 잊어먹어 어이가 없었다. "그만 자해하고 무슨 일인지 말이나 하게." "내참... 늙으면 죽어야 한다더니. 내가 그 꼴이구나. 좌장(左 長)어른의 부탁을 새까맣게 잊어버리다니..." "서문 어른이 무슨 일로 철방을 찾는 건가?" 송 노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희 노인에게 질문했다. "점심때 거처로 오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네. 그런데 내가 어 젯밤 그만 깜빡해서 새벽이 되자마자 자네 집으로 달려간 것 인데... 그만 자네 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서문 어른이 철방이랑 점심을 같이 한다... 이상하군." 송 노인은 의문은 당연했다. 이원에서 송씨 일가나 희 노인 은 이방인에 속했다. 그런데 이원의 촌장 격인 좌장이 송 철 방을 부를 이유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 아니네. 이번에 좌장 어른의 외손주 사위가 방 문한다네. 그래서..." "자은 선생이 오는데 일부로 서문 어른이 철방이를 불렀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송 노인은 희 노인의 말을 중간에 잘라 버렸다. "이 사람아. 말 좀 하게 해주게나. 제발 부탁이니 말허리 좀 자르지 말게." "미안하이." "됐네. 이 사람아. 나는 철방이에게 가보겠네." "갈데 가더라도 내 궁금증이나 풀어주고 가게." "내참. 알았네." 희 노인은 투덜대면서도 송 노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좌장 어른은 유생들을 좋아하지 않지. 비록 외손서(外孫壻)라 할지라도 말일세." "서문 어른은 유생들이 학문을 이용해 민초들의 삶을 핍박한 다고 말씀하시는 분이니 당연하지. 하지만 그분도 혈육 앞에 서 어쩌지 못하더군." "혈육이라? 그분의 유일한 혈육이라면 자은의 딸을 말하는 군." "그렇다네. 자은이 이번에 딸을 동행하고 북경에 올라왔네." "흠... 자은이 승부수를 던졌군." 송 노인은 손바닥으로 턱을 감싸더니 신음소리를 냈다. "맞네. 아주 약은 술수를 부린 거지. 하긴 좌장 어른이 자은 이 이원에 들어오도록 해준 것도 부족해 철방이를 부를 정도 이니 증손녀가 예쁘기는 예쁜가 보네." "실없는 소리. 자네는 철방에게 어서 가서 그 사실을 알려주 게나." 희 노인이 돌아가자 송 노인은 가마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 었다. "하아~, 드디어... 이원의 살인귀들이 움직일 때가 온 것인 가..." 송 노인의 독백은 처량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 악삼은 이른 새벽에 찾아온 척씨 부녀와 함께 운문상회 북경 지부를 나서기로 했다. 정문에는 먼저 일어난 갈씨 자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며 하품을 하던 갈 운지는 악삼을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왔다. "악 가가." "지매. 일찍 일어났구나." "네. 그런데 이른 새벽부터 잠을 깨워서 무척 졸려요." 갈 운지는 졸린 음성으로 악삼에게 응석을 부렸다. "내가 보기에도 무척 피곤해 보이는구나." "악 가가도 피곤해 보여요." "그렇게 보이니?" "네." "하하, 요 근래 너무 편하게 지내서 그런가 보다. 어째든 척 대인과 약속한 것을 지킬 때가 됐으니 어서 가보자." 갈 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삼은 척씨 부녀와 함께 정문 을 나섰다. 정문 앞에는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쌍두마차가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선두에 있는 쌍두마차의 마부석에 석진이 앉아 있었다. "어서 타시게. 악 동생." "아니, 석진 선배가 어째서 마부가 된 겁니까?" "껄껄껄, 술값이라도 챙길 요량으로 지원했네. 자자~, 어서 타 게나. 내 편히 모시겠네." 석진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악삼은 더 이상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나와 악 소협은 후미에 있는 마차를 탈 것이네. 자네가 모는 마차는 갈씨 자매와 내 딸이 탈 것이네. 잘 부탁하네." "알았습니다. 척 대인. 이 몸이 잘 모시겠으니 걱정하지 마세 요." 척 신명의 음성에는 냉대가 깔려있었지만 석진은 눈동자 하 나 깜빡하지 않고 싱글벙글 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갈씨 자매와 척 금방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활달하게 외쳤다. "아가씨들 이 몸이 모실 테니 어서 타시지요." "허!" 갈씨 자매와 척 금방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어이없어 하다 가 석진이 끄는 마차에 올라탔다. 척 신명과 악삼은 뒤에 있 는 마차에 단 둘이 탑승했다. 그 마차를 이끄는 마부는 차가 운 인상의 중년 인이었다. "악 소협. 선교장에서 내가 한 약속을 기억하는가?" 척 신명은 마차에 타자마자 악삼에게 질문했다. "북경까지 동행하면 오행도를 만든 인물을 가르쳐 준다는 약 속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네. 내가 악 소협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지. 첫 번째 는 악 소협이 이행했으니 지금 알려 주겠네." "고맙습니다. 척 대인." "고마워 할 필요는 없네. 신용은 상인의 생명이네. 나는 신용 을 지키려 하는 것이지. 척 신명의 안색은 필요 이상으로 굳어져 갔다. 마차가 출발 하자 주위를 한 두어 번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딸을 통해 용문석굴에서 오행도와 푸른 늑대 조각에 대한 정보를 자네가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악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문석굴에서 얻은 정보는 나 역시 모르던 사실이 가득했지. 하지만 오행도를 만든 인물이 누군 지는 나와 있지 않더군." "오행도를 만든 장인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까?" "천장별부를 열 생각이 없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네. 하지만 천장별부를 열 생각이라면 무척 중요한 내용이 되겠지." "그럼 들어야겠군요." 악삼의 눈동자에 섬광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사라졌다. "쿠빌라이는 제사(帝師)였던 파스파(八思巴)에게 천장별부를 만들도록 명령을 내렸지. 파스파는 쿠빌라이가 토번을 토벌하 면서 데려온 인물이네." "파스파라면 파스파 문자를 만든 라마가 아닙니까?" "그렇지. 천재 중에 천재라 할 수 있는 인물이네. 바로 그가 세조 쿠빌라이의 명령에 따라 천장별부를 만들면서 열쇠인 오행도를 만들었네." 악삼은 고서에 남아 있는 파스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파스파가 토목건축지학이나 기관지학에 대 해 정통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 고민할 필요는 없네. 파스파는 신비 속의 인물이네. 사 실 그가 밀종 무예의 전승자라는 사실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다른 비밀이라고 알려졌겠는가? 게다가 천장별부는 파스파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네." "뛰어난 장인이 있었군요." "물론이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인물들은 야율가의 인물들과 전진파의 도인들이었네. 그들이 천장별부에 엄청난 기관과 함 정을 깔아 두었지. 오직 오행도와 푸른 늑대 조각을 얻지 못 하는 한 누구도 천장별부의 보물들을 손 댈 수 없게 해놓았 네." "야율가의 인물들은 야율 초채의 후손들입니까?" 악삼의 질문을 척 신명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척 신명은 악삼에게 하나도 숨기지 않고 자신이 아는 내용 을 모두 밝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누구나 숨기고 싶어하는 천장별부의 비밀을 자세히 설명해 악삼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일까? 도대체 척 신명, 아니 무 객 척 소람은 이번에 무엇을 꾸미는 걸까?' 사람을 속이려면 열 중에 아홉은 진실을 말해줘야 성공하는 법이다. 척 신명이나 악삼 둘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척 신명이 풀어놓은 설명의 정확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척 신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악삼은 궁금 한 것이다. "자아~, 여기 까지가 내가 아는 내용일세. 이만하면 충분히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하네." "고맙습니다. 척 대인." "아닐세. 약속을 지킨 것에 불과하네. 특별히 고마워할 필요 는 없네. 이제 자네가 송 도공을 만나는 마지막 약속만 지키 면 환객에 대해 알려주겠네. 그렇게 되면 자네와 나 사이에 체결된 계약은 끝나는 것이네." 악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말로 표현하기가 내키지 않 았던 것이다. 또한 척 신명이 환객에 대한 정보를 들려줄 때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 때가 오면 척 신명이 나를 통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 아직은 척 신명의 손가락 사이로 춤추는 꼭두 각시놀음을 끝낼 때가 아니야...' 척 신명은 악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음 흉한 웃음을 지었다. 악삼 역시 척 신명의 웃음을 보고는 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 는 모습은 마치 너구리와 여우가 한판 두뇌 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 마차가 멈춘 것은 동구 밖으로 넘어가기 전에 있는 작은 반 점(飯店)이었다. 현판조차 없는 허름한 작은 반점이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희한하네. 이런 작은 반점에 사람들이 왜이리 많지." "그건 이 반점의 음식 맛이 뛰어나기 때문이라오."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갈 운지는 작은 반점에 사람이 꽉 찬 것이 이상해서 독백했고, 석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설 명해 주었다. "어떻게 아세요?" "이 반점에서 식사를 한 두어 번 한 적이 있었소." "오호! 그래요." 석진의 입맛을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노려보는 갈 운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시선을 분개하는 석진. 두 사람의 대 치는 하나의 희극이었다. "자자~, 그만하고 들어가서 아침이나 하세." 두 사람의 기묘한 대치는 척 신명의 한 마디에 끝나버렸다. 아침부터 법석을 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이름 없는 반점에 사두마차가 멈춰 섰다. 사두마차는 평민들이 몰 수 있는 마차가 아니었다. 한 마리나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탈 수 있을 뿐 사두마차는 아무나 몰수도 없고 탈수도 없었다. 사두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자은 선생이 걸어 나왔다. 마차에 서 내린 자은 선생의 시선은 동구 밖을 향했다. 걱정과 깊 은 감회가 교차하는 시선은 아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황 보영이 만감이 교차한 시선으로 동 구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자은 선생을 불렀다. "오... 이만 들어가자꾸나." "예, 아버지." 외 증조부를 만나자며 길을 떠난 부친이 시간이 지날수록 안 색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몇 번이나 교차하는 것을 목 격한 황 보영은 안 그래도 적은 말수가 더 적어졌다. "이 반점에 사람이 많은 것을 보아하니 음식 맛이 좋은 것 같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다. 보영 아가씨." "네..." 마부 석에 앉아 있던 곽 도성이 내려와 황 보영에게 말했다. 높은 관직에 있는 관원이 마부 석에서 앉은 것은 보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도찰원이라는 권력의 핵심기관의 경력이 마부 석에 앉아서 누구를 수행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곽 도성은 마부 석에 앉아 황씨 부녀를 모셨다. 이는 곽 도성이 황씨 부녀를 어떵 마음으로 대하는지 단적으로 드 러나는 것이다. 또한 곽 도성의 성품이 여타 관원들과 다르 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 보영에게 곽 도성은 부담스 런 존재이기만 했다. 자은 선생이 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뒤를 황 보영이 뒤따랐다. 두 사람이 들어간 뒤에 곽 도성과 조 집사가 반점 안으로 들어갔다. 반점 안에는 이십 여 개의 탁자가 가지런 히 있었다. 그리고 탁자마다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한 채 음 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빈자리가 없군." 곽 도성은 내부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반점은 만석 이었고 점소이는 음식을 나르는데 정신이 팔려 손님을 맞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세." 자은 선생은 한 마디하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자은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척 신명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선 자은 선생에게 인사말을 던진 것이다. "척 대인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이런 곳에서 선생님을 뵙게 되다니 참으로 놀랍 습니다. 이래서 세상은 넓고도 좁다고 하는가요." 척 신명은 깜짝 놀란 자은 선생을 넉살좋게 대했다. "그런가 보구려. 그런데 척 대인은 이 한적한 곳에 웬 일이 오?" "한적하다고요? 글쎄요." 척 신명은 일부로 주위를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반점에 사 람이 꽉 찼는데 이게 한적한 것이냐고 시위를 하는 듯 했다. "허허허." 자은 선생은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말꼬리를 잡아서 빈 정거리는 척 신명이 우습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것이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러나 황 보영은 달랐다. 그녀의 시선은 아무런 말없이 탁자에 앉아서 식사 를 하고 있는 악삼에게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황 보영의 심장은 악삼의 움직임에 따라 거세게 요동쳤다. 악삼을 다시 보는 순간 억지로 봉인했던 감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 갈 운영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은 황 보영의 눈동자에 투명한 물기가 번지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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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