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이씨(星山李氏)의 시조와 인주공파 고령지역 세거내역
고령읍-관동(館洞)은 원래 고령 관동면(館洞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관동리 옥산동을 병합하였고 관동면의 본마을이라 하여 본관동이라 부른다. 1988년 洞이 里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조선초 사징(士澄, 號-松塢, 통훈대부, 사간원 헌납 지제교)께서 약560여 년 전에 성주(星州)에서 고령(高靈) 관동 마을에 입향하여, 마을 사람들이 벼슬을 많이 하라는 뜻으로 관동방(館洞坊)을 세웠다. 이것이 관동면의 소재지가 되므로 관동, 관곡, 관골이라 하였다. 관동 마을에는 仁州公 李汝忠과 入鄕祖 松塢公 李士澄을 향사(享祀)하는 경덕사(景德祠)와 의재(義齋)가 있고 마당에는 六賢(송오-사징, 옥산-기춘, 근재-동례, 죽포-현룡, 국포-문룡, 매포-택룡)의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담장 밖에는 홍와-두훈 선생의 사적비가 있으며 마을에는 竹圃書堂(죽포-현룡)과 미산정 국포재(薇山亭-菊圃齋)가 있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사징(士澄-사간원좌헌납지제교), 사청(士淸-牧使), 극용(克勇-牧使), 옹(옹-翰林), 함(涵-僉使), 몽식(夢植-縣監), 동빈(東賓-僉正) 등과 근대 인물로는 청담(靑潭-조계종 총무원장), 헌주(憲柱-한학자), 헌식(憲寔-영대영문학교수), 헌승(憲升-조흥은행장) 상연(相淵-전 내무부장관), 진환(震桓-전 고령군 민선 초대군수), 태근(泰根-전 고령군수), 동원(東遠-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도 이 마을 후손이다.
1.성산이씨(星山李氏)의 연원(淵源)
성산이씨(星山李氏)는 신라(新羅) 말엽부터 지방호족(地方豪族)으로 그때의 성향(姓鄕)도 성산(星山)이라 했다. 후에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자 정조(正祖 1776-1800)때 조령(朝令)으로“모든 공적(公的 기록에는 일체(一切) 구호관향(舊號貫鄕)을 쓰지 못한다.”는 국령(國令)이 내려 星州의 육이(六李) 즉 星山李氏 星州李氏 碧珍李氏 京山李氏 廣平李氏 加利李氏 등도 한때 관향을 통일하여 星州李氏로 불리어진 때가 있었으나 오늘 날에 이르러서는 각자의 정확한 본관을 다시 부르게 되어 오기(誤記) 혼동(混同)이 여러 번 있기도 했다. 1914년에 이르러 대종회 회의(大宗會 會議)에서 관향(貫鄕)은 시조(始祖)의 성향(姓鄕)을 따른다 하여 신라(新羅) 때의 지명인 성산(星山)으로 정했다.
시조공(始祖公) 능일(能一)은 신라 말기 본피현(本彼縣) 지금의 성주(星州)를 지배 해온 지방호족(地方豪族)으로 고려 태조18년(935년) 겨울 왕이 후백제 견훤을 징벌하기 위하여 병마(兵馬)를 이끌고 조물군에 이르러 능일(能一)을 본부장으로 삼아 최언(崔彦)과 더불어 민병(民兵) 600명을 거느리고 신검(神劍)의 진지(陣地)를 몰아치니 패주하는 신검을 탄현(炭峴)을 넘어 황산에서 사로잡고 항복을 받았다. 태조(太祖)가 능일(能一)의 공(功)을 높이 사시어 초명(初名) 능자(能字)에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상징하는 일자(一字)를 더하여 사명(賜名)하여 능일(能一)로 부르게 하고 정일품(正一品) 사공(司空) 벼슬을 내려 태조(太祖)의 딸 정순대장궁주(淨順大長宮主)와 혼인하게 하여 부마(駙馬)로 삼고 고려의 최고 작위인 벽상삼한삼중대광사공성산군(壁上三韓三重大匡司空星山君)에 추증(追增)하였다. 시조공이 살던 터에 시대가 바뀌어 사창(司倉)이 세워졌으나 세태(世態)의 변천으로 유허지(遺虛地)가 되었다.
조선(朝鮮) 고종(高宗) 26년(1900) 후손들이 옛 사창(司倉)터에 설단(設壇)하여 매년 단향(壇享)을 지내오다 1980년에 시조묘(始祖廟)에 경원사(景源祠)를 지어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춘향(春享)을 지내고 음력 10월 1일에는 단소(壇所)에서 추향(秋享)을 지낸다. 시조공의 세거지(世居地) 성주에는 성산재(星山齋) 삼오당(三五堂) 대동각(大同閣) 흥경문(興敬門) 장진각(藏珍閣) 저존당(著存堂) 이공신정(李公神井) 등이 잘 정비 되어 있다.
시조공으로부터 五世 견수(堅守)에 이르러 정곡(鼎谷)에 이거(移居)하여 부자오인(父子五人)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작이 대경(大卿)에 이르고 영화가 세상에 울연(蔚然-성한 모양)하였으니 당시의 아침저녁 마을 입구에 여러 대의 수레가 나란히 하고 춤추는 자리에는 여러 사람의 소매가 이어지네라는 (晨昏巷口三초幷, 歌舞연中四袖聯) 詩가 있으며 지금도 시조공(始祖公) 춘추(春秋) 享祀日에 함께 享祀 드린다.
연원(淵源)이 멀면 유파(流波)가 길고 뿌리가 깊으면 지엽(枝葉)이 무성한 법, 시조공(始祖公)과 대경공(大卿公)의 유덕(遺德)이 심원(深遠)하니 여택(餘澤)이 무궁(無窮)하고 자손(子孫)이 번연(蕃衍)하니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 되고 있다.
2. 시조공(始祖公)의 위훈(偉勳)
시조공은 신라가 후백제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영천) 장군으로 파견 되었다가 고려 태조(太祖) 8년 (925) 고려와 후백제가 조물성(曹勿城)에서 크게 접전하고 있을 때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지원하여 라려(羅麗)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였으며 태조(太祖 935) 신라가 고려에 합병 되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후백제 신검(神劍을 사로 잡아 항복을 받았다. 이에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고려 태조가 공신들에게 대상을 내릴 때에 능일의 공적을 높여 휘(諱) 能字 에 一字 를 加 하여 능일(能一)로 사명(賜名)하고 벼슬을 정일품(正一品) 사공(司空)으로 높였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개경의 신흥사에 공신당을 짓고 동서벽상에 삼국통일(三國統一)에 공(功)이 큰 공신(功臣)들의 화상을 그려 붙이고 일주일 동안 무차대회(無遮大會) 를 열었으며 시조공의 화상도 함께 모셔졌으며 개성의 종(鍾)에 이름을 새기도록 하였다. 태조가 전국의 주군(州郡) 제도(制度)를 설치 할때 가리현(加利縣 -지금의 고령 성산면) 수동현(壽同縣) 계자현(谿子縣-칠곡 약목) 도산현(都山縣-성주 가천) 신안현(新安縣) 오현(五縣)을 통합하여 경산부(京山府)로 승격(昇格)시키고 公에게 성산군(星山君)의 작호(爵號)를 내리고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시조공의 거주하던 옛터가 시대에 따라 성주목(星州牧)의 사창(司倉)이 건립 되었다 창리(倉吏)가 능일(能一)의 위덕(威德)을 추모(追慕)하는 성황사(城隍祠)를 짓고 매월(每月) 삭일(朔日) 제사(祭祀)를 지냈으며 인근 주민들도 질병이나 재난이 있으면 정성을 드리고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숙종 5년(己未)에 목사(牧使) 신학(申학)의 꿈에 신령스런 위장부(偉丈夫)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곳 사창의 땅은 나의 옛거주지로 음정(飮井)이 있었는데 허다한 우마차가 짓밟힘으로 더러운 웅덩이가 되었으니 원컨대 목사(牧使)는 다시 준정(浚井)하여 깨끗하게 해주시오 하였다 이에 목사가 옛관리에게 물어 잘정비하여 이공신정(李公神井)이라 현판하니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다. 시조공의 생몰연대(生沒年代)는 미상(未詳)이지만 여러 문헌에 나타난 활동상을 고찰해 보면 서기 900-980년으로 추정되며 배위는 태조(太祖)의 딸 정순대장궁주호국개경부인(淨順大長宮主護國介景夫人)이시다.
성산이씨는 시조공으로부터 일천여년이 흐른 지금 2011년 11월 통계청 연보에 의하면 성산이씨는 전국 3000여 성씨중(姓氏中) 100번 째 해당하는 23,729 가구(家口), 75,210名으로 대벌족(大閥族)이며 인주공파(仁州公派) 김산공파(金山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봉익공파(奉翊公派) 기국공파(杞菊公派)의 5개 대파(大派)로 편의상 쓰고 있으며 고령 성주 영천 상주 칠곡 김천 의성 합천 등지에 많이 분포하여 거주하고 있다.
3. 인주공파(仁州公派)
인주공(仁州公)은 봉상대부(奉常大夫) 평양소윤(平壤少尹) 문광(文廣)의 장자(長子) 14世 인주공 여충(仁州公 汝忠)으로 고려 말엽 잠영세가(簪纓世家)의 후예(後裔)로 세거지(世居地) 성주(星州)에서 생장(生長)하여 고려(高麗) 우왕(禑王) 3년(1337)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인주사(知仁州事)가 되었다. 인주(仁州)는 인천(仁川)의 구호(舊號)이고 지인주사(知仁州事)는 당시 인천(仁川) 지방을 통치 했던 지방 장관(地方 長官)이다. 인주공파(仁州公派)는 성산이씨(星山李氏)의 맏집으로 고령(高靈) 관동(館洞) 예동(禮洞) 내곡(乃谷) 합천(陜川) 항곡(項谷) 성주(星州) 견동(堅洞) 경주(慶州) 육통(六通) 영천(永川) 완산(完山) 거곡(巨谷) 용전(龍田) 김천(金泉) 고평(高坪)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어 거주(居住)하고 있으며 성산이씨(星山李氏) 전체의 약30%가 된다.
현조(顯祖)로는 파조(派祖)인 인주공(仁州公) 여충(汝忠)은 물론 15世 송오공(松塢公) 사징(士澄)은 세종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역임하고 지금부터 560여년전 성주(星州)에서 고령(高靈) 관동(館洞)에 이거(移居)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득춘(得春)은 선조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의병창기하고 전비(戰費)로 수천석의 가산을 헌납하였으며 무계대첩 등에서 크게 공을 세웠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옥산공(玉山公) 기춘(起春)은 문장행의(文章行義)가 탁월(卓越)한 학자(學者)로서 정한강(鄭寒岡) 김송암(金松菴) 이청휘당(李晴暉堂) 이육일헌(李六一軒) 박대암(朴大菴) 이모제(李茅薺) 등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낙강칠현범주분운시(洛江七賢泛舟分韻詩)에 이기춘 詩가 萬字 운(韻)으로 첫 번째 실려있다. 관동에서 바라보면 작은 언덕에 시내를 따라 옥산(玉山)에 옥산정사(玉山精舍)를 짓고 학문에 전념 하였으니 학자들이 옥산선생(玉山先生)이라 불렀으며 후인(後人)들이 도암서원(道巖書院)에 송암선생(松菴先生)과 옥산선생(玉山先生)을 배향(配享)하였으나 지금은 고령 덕곡 양산리 옥산재(玉山齋)에서 모시고 있다.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제수 받은 근재공(謹齋公) 동례(東禮)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를 지내신 죽포공(竹圃公) 현룡(見龍), 그리고 정한강선생(鄭寒岡先生)의 문하생(門下生)이며 정묘(丁卯) 병자(丙子) 양난(兩亂)에 창의(倡義)하여 나라가 위급할 때 분연히 일어난 국포(菊圃) 문룡(文龍), 광해군 9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이 된 매포(梅圃) 택룡(澤龍)은 도학(道學)과 학문(學問)을 겸비하여 관동 삼포(館洞 三圃)라 불리었다. 삼포공의 어린 시절 임진왜란이 일어난 때 아버지 근재공이 돌아 가셨다 부친상을 당한 어린 세 상주는 전란 중이라 어머니를 산으로 피신 시켰으나 끼니를 이을 양식도 없고 빈소에 올릴 상식(上食)조차 없어서 아직 보호 받아야 할 어린 꼬마 세 상주는 하는 수 없이 더벅머리를 한 채 밥을 얻으러 진영(陣營)에 나갔다. 예를 갖춘 어린 꼬마들의 행렬을 본 고을 사람들은 어린 세 꼬마 지극한 효심(孝心)을 보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가엽게 여겨 아침 저녁으로 꼬마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밥을 주기도 하고 쌀과 미역까지도 주었다 한다. 삼포공의 효심(孝心)은 지극 하였다.
경학(經學)으로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을 제수 받고 영천(永川)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신 방(芳),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권응수(權應銖) 등과 영양성(永陽城)을 탈환 하는데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된 국빈(國賓) 군빈(君賓) 형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전라도사(全羅道事) 안주판관(安州判官) 영암군수(靈岩郡守)를 역임한 매헌(梅軒-惟碩), 불교계의 정화운동의 기수로서 한국 불교계의 거목(巨木) 청담(靑潭) 큰 스님, 성리학의 대가(大家)이신 홍와(弘窩-斗勳), 고령중학교, 고령고등학교, 고령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직하신 남계(南溪-仁), 문필을 겸비하여 영남 일대에 2500餘首의 상량, 기문 서문 갈명 등을 찬한 진와(進窩-憲柱), 후학 양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영문학 교수인 헌식(憲寔), 한국은행(韓國銀行)을 거처 조흥은행장(朝興銀行長)을 역임한 청완(靑完-憲升),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대구시장(大邱市長),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을 역임한 상연(相淵), 종사(宗事)에 헌신(獻身)하고 한학(漢學)에 해박한 동원(東園-震基), 칠곡, 영천, 청도군수를 역임하고 포은선생(圃隱先生) 숭모사업회장직(崇慕事業會長職)을 맡아 임고서원 성역화사업에 전념하였고 한주선생(寒州先生) 기념사업회장직(記念事業會長職)을 맡고 있는 해암(海菴-南澈), 영진 에너지(株) 회장과 고령군 명예군수인 壯煥, 고령군(高靈郡) 민선 초대 군수 진환(震桓) 고령군 산림조합장 雲埴 等도 인주공파(仁州公派) 후예(後裔)들이다.
4.김산공파(金山公派)
김산공(金山公)은 봉상대부(奉常大夫) 평양소윤(平壤少尹) 문광(文廣)의 차자(次子) 14世 김산공 여신(汝信)으로 어릴때부터 지략이 뛰어나고 문무(文武)와 육예(六藝)를 겸하여 익히니 감히 따를자가 없었다. 목은(穆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배우니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 하였다. 고려(高麗) 우왕(禑王) 경신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김산군사(知金山郡事)에 나아가니 당시 고려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져 곧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 吉再 冶隱先生, 松隱 張安世先生과 不事二君의 節義를 지키다 세상을 마치니 고고한 忠節을 지킨 분이다.
김산공파(金山公派)는 의성신례(義城新禮), 星州, 澤亭, 鳳山, 竹谷, 金泉知禮, 漆谷若木, 咸安, 漆原 등지에 분포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현조(顯祖)로는 파조(派祖) 金山公 여신(汝信)은 勿論 만송공(晩松公) 삼성(三省)은 인조때 司馬試에 급제하여 영산군수(靈山郡守) 하동군수(河東郡守) 등을 역임하고 善治로서 觀察使에 발탁되었다. 둔암공(遯庵公) 언부(彦富)는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을 역임하였고 죽곡파 입향조이다. 의사공(義士公) 사룡(士龍)은 仁祖 18년(1640) 淸이 조선에 대하여 明나라 침공을 위한 원병을 요청하자 공이 포사(砲士)로 징발되어 금주(錦州) 싸움에 참전하여 明나라 조대수(祖大壽)의 군대와 접전하였을 때 공포(空砲)로 응전하다가 청군(淸軍)에 발각되었다. 그 일로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공은 임진왜란 때에 明으로부터 입은 은덕을 상기시키며 자기행동의 정당성을 역설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에 明나라 장수 조대수가 공을 대명충신조선의사(大明忠臣朝鮮義士)로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그 후 仁祖는 공을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증직하고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향사(享祀)토록 하였다.
完永은 高靈, 星州, 漆谷지역 제19대 국회의원(國會議員)이며, 초선(初選)이지만 새누리당 前 국회원내부대표를 역임했다. 국회환경노동위원으로 자원 순환사회구현에 앞장, 정년 60세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켜 근로자의 꿈을 실현시켰다. 특히 한국인터넷기자협회에서 수여하는 ‘우수 의정상’과 시민단체에서 주는 NGO상을 2013년 7개에 이어 2014년에도 5개를 수상했다.
5.정언공파(正言公派)
정언공(正言公)은 봉상대부(奉常大夫) 평양소윤(平壤少尹) 문광(文廣)의 삼자(三子) 14世 汝良으로 고려 우왕(禑王) 6년(1380)에 文科에 급제하여 예무좌랑(禮務佐郞)을 거쳐 좌정언(左正言)이되고 그 후 강원도 안렴사(江原道按廉使)가 되었으나 麗末 나라의 패망을 한탄하여 開寧 大鳥洞으로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과 함께 은거(隱居) 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는 벼슬을 하지 않고 兄 인주공(仁州公) 汝忠과 함께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한 효성으로 하였고 友愛가 돈독 하였다.
正言公派는 星州龜淵, 陜川所沙, 外谷, 高靈良田, 昌寧靈山, 淸道三坪, 星州吾道, 한개(大浦), 中浦, 下村, 文浦, 尙州洛東, 迎日, 義城, 金陵開寧,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성산이씨 후손 75,210名 중 32,260餘名으로 가장 번창하다.
18世 세인(世仁 號 蓮潭)은 성종(成宗) 17년(148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검교(檢校) 지평(持平)을 역임하였으며 연산군 4년(1498)에 장령(掌令)이 되고 연산군 6년(1500)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있을 때 유자광(柳子光)을 탄핵(彈劾)하다가 나주(羅州)에 유배되었다 이듬 해 풀려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이 되었으나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금산(金山)으로 다시 유배 되었으며 후에 사간원 전적(典籍)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중종(中宗) 6년(1510)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어 호조참의(戶曹參議),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9世 항(沆 號 洛西軒)은 연산군 4년(1498)에 文科에 급제하여 중종 1년(1506)에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중종14년(1519)까지 이조(吏曹) 예조(禮曹) 병조판서(兵曹判書)르 지내고 좌찬성(左贊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이사(貳師)가 되었다. 중종 19년(1524)에 김안로(金安老)의 죄상을 논죄하다가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적소(謫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신원(伸寃)으로 관작(官爵)이 복구(復舊)되었다.
20世.운(雲)은,정언공(正言公)의 6대손이고, 자헌공(資憲公) 휘 이규(李珪)의 손자이다. 합천군 합천읍 소사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대암(大庵) 박성(朴惺),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과 교유하고, 자(字)는 여우(汝雨), 호(號)는 삼계(三溪)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도들이 중심이 된 사람들의 의병창의 격문에 따라 합천에서 李雲, 제 李春亨, 李需, 종제 李霙, 아들 李永源, 李永淳, 李永淸, 李永澤 조카 李永海, 李永沆, 조카 李永淑, 종질 李種仁, 등 12종숙질이 家僮 100여명을 거느리고 壬亂倡義하는데 선창(先唱)을 하였다.
임란창의 격문에 의하여 12종숙질이 함께 창의 의진(義陣)에 참여키로 하고 합천 의병의 본거지인 야로 주학정(住鶴亭)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부대를 편성 각 전투지에 배치되었다.
그 해 6월 6일 1차 고령 무계전투에서 합천 의병장 정인홍군사와 고령 의병장 송암(松菴) 김면(金沔)군사가 연합하여 싸울 때 공의 12종숙질과 400여 의병이 왜군과 격전 끝에 크게 공을 세웠다.
성주성 탈환 작전 안언(安彦)전투 등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곽망우당(郭忘憂堂) 휘하(麾下)에서는 낙동강 연안 전투지에서도 참전하였다.왜적과의 싸움에 있어 사재를 털어 군량과 병기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28世 원조(源祚 號 凝窩)는 순조9년 9(1809) 증광별시(增廣別試)에 응시하여 최연소(最年少)로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를 시작하여 성균관의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대사간(大司諫) 병조참판(兵曹參判) 한성판윤(漢城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지금도 불천위(不遷位)로 받들고 있다.
29世 진상(震相 號 寒洲)는 世人들이 포상선생(浦上先生) 주상선생(洲上先生)이라 호칭 하였으며 18세에 성명도설(性命圖說)을 시작으로 이학종요(理學綜要) 등 85책의 저술을 남겼으며 대부분 목판으로 간행 되었다. 정사(精舍)에 조운헌도(祖雲憲陶)의 편액을 걸어 주자(朱子)와 퇴계(退溪)의 학문을 사숙함을 표방하였고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과 함께 근세유학 삼대가(近世儒學 三大家)로 불리워지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율곡 이이(栗谷 李珥)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녹문 임성주(鹿門 任聖周) 등과 함께 조선 이학육대가(理學六大家)로 꼽힌다.
30世.승희(李承熙)는 자는계도(啓道)이고, 호는 대계(大溪)·한계(韓溪)이다. 유신(儒臣)의 천(薦)으로 원구단참봉(圓丘壇參奉)·장릉참봉(章陵參奉)·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 등에 제수되었으며, 1908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밀산부(密山府)에 한흥동(韓興洞)을 세우고 이후 중국에서 동포의 교육과 광복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다가 봉천(奉天) 여사(旅舍)에서 병사하였다.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현세의 인물로는 국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규석(葵錫) 대구대학교 총장을 지낸 태영(泰榮) 삼성그룹 회장직 과 삼성생명 회장 및 삼성라이온즈 야구 구단주를 지낸 수빈(洙彬), 전 고령군수 태근(泰根) 등도 정언공파(正言公派) 후예(後裔)들이다.
6.봉익공파(奉翊公派)
파조(派祖)로는 13세 문성(文成)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한성보익공신(翰誠輔翊功臣)이며 현손(玄孫) 유전(由傳 號 茅亭)은 수의교위(修義校尉)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문성(文成)이하 7代를 독자(獨子)로 이어 오고 그후에도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는 가계(家系)가 많아 자손(子孫)이 번연(蕃衍) 하지 못하고 성산이씨(星山李氏) 5개파(派) 중(中)에서 후손(後孫)이 가장 적다.
봉익공파(奉翊公派)는 성주(星州)-신정(新亭), 상주(尙州)-화서(化西)에 분포하여 집성촌(集性村)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현조(顯祖)로는 파조(派祖) 유전(由傳)을 비롯하여 응진(應軫)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고 원구(元구 號 竹齋)는 중추참의(中樞參議)에 추증(追贈)되고 신연(新硯)의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7.기국공파(杞菊公派)
파조(派祖)는 6세 직(直)의 9代孫 15세 중화(中華 號 杞菊)은 구기자에서 장생(長生)하는 이치를 얻었고 국화에서 대은(大隱)하는 뜻을 취하여 일생을 마감하였다. 公은 벼슬하는 가문(家門)에 태어나 영리(榮利)에 그 마음이 끌리지 않았고 예종릉(睿宗陵) 침랑(寢郞)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제수(除授)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책을 안고 도(道)를 지키며 후학 지도에 힘썼다. 세거지(世居地)는 성주(星州-예산(禮山), 구룡(九龍), 연포(蓮浦) 율포(栗浦), 달성-인흥(達城-仁興), 고령-노곡,벌지(高靈-魯谷,伐知) 등지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현조(顯祖)로는 파조(派祖) 15세 기국공(杞菊公)을 위시하여 18세 경(瓊 號 鶴山)은 선조(宣祖)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음보(蔭補)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 기용(起用)되었고 문장(文章)도 뛰어난 학자(學者)이다. 의소(義沼 1746-1796)는 법명(法名)이 인악(仁岳)으로 18歲에 승려가 되어 벽봉(碧峰) 서악(西岳) 추파(秋波) 等에게서 수학(受學)하고 영조(英祖) 44년 벽봉(碧峰)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후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주지가 되고 수원 용주사 창건을 주도하였다. 저서로는 화엄사기(華嚴私記) 원각사기(圓覺私記) 등이 있다. 26세 기태(基泰 號 後知)는 낙선(樂善) 호의(好義) 애예(愛禮)하고 인륜(人倫)을 돈독히 하여 향당(鄕黨)에서 후학(後學)을 양성(養成)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효상(孝祥 號 한솔)은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경북대 교수 참의원의원 국회의원 국회의장 영남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문화(文化)와 종교(宗敎), 교육의 근본문제 등의 있으며 子는 이문희(李文熙) 천주교 대구교구장 등은 기국공파(杞菊公派)의 후예(後裔)들이다.
세상을 떨치는 대현자(大顯者)는 없으나 선조(先祖) 대대로 傳해 온 유훈(遺訓)인 忠과 孝를 항상 마음속에 침잠궁행(沈潛躬行)하려는 의지(意志)와 선조(先祖)께서 정한 이름 있는 관동방(館洞坊) 터에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면서 양반가문(兩班家門)으로서의 전통(傳統)을 유지강화(維持强化)하고, 화목(和睦)한 가정(家庭)과 서로 인애(仁愛)하고 효우(孝友)하는 따뜻한 情이 있어 관동(館洞)의 명성(名聲)이 영원하리라 여겨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장환회장님은 고령출신으로 고령에서는 모르시는분이 없으며 재경고령향우회 명예회장님이시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