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소포를 열며
가슴은 내 속 깊숙이 묻어 두었다. 고단한 삶 속에서 거추장스러워서다. 겉으로는 머리만 가지고 동가식서가숙하며 지냈다. 어느 날 집에 와보니 문 앞에 도톰한 소포가 와 있다. 볼록볼록한 뽁뽁이로 곱게 두르고 예쁜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끈을 풀고 뽁뽁이를 벗기자, 내 얼굴이 담긴 사진과 풀꽃 시인의 시집이다. 지난날의 기억이 아련하다. 손때 묻은 풍금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여서 가슴이 뭉클하다. 시인이 건네주던 따듯한 차 한잔, 다정한 미소와 나직한 목소리. 문학관 담장에 아름다운 시화, 봉황산자락에 오래된 조그만 목조건물이 떠오른다.
보내온 사진에 눈길이 간다. 그간 내 얼굴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신문 잡지에 실린 사진이나 영상 속의 내 모습은 꾸며서 어색하다. 소포로 보내온 사진은 살아서 숨 쉬는듯한 자연스러운 표정이다. 까만 승용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시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하얀 이를 내보이며 밝게 웃는 모습은 꾸밈이 없다. 따뜻한 목도리를 두른 걸 보니 겨울인듯하다. 삭풍이 불어오는 추운 겨울에도 움츠리지 않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자연 그대로인 풀꽃 시구처럼 사랑스럽다.
신문이나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이 오면 부담스럽다. 사진을 보내라고 해서다. 때마다 부딪는다. 속에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생긴 대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내자고 하는데, 머리는 잘난척하며 이름난 사진관을 찾는다. 그곳에 가면 가관이다. 사진 한 장 찍는데, 한나절이나 걸린다. 카메라 앞에 세워놓고 의자에 앉혔다가 벽에 세우기를 수없이 반복이다. 사진사는 겉모습에서부터 속마음까지 마구 고쳐대서 마뜩잖다. 시인은 아무런 말 없이, 찰칵 찍었는데 머리 모양에서부터 표정까지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담았다. 사진사는 겉을 속과 다르게 꾸미고 치장했으나 시인은 시를 쓰듯 자연 그대로 표현 해주었다.
시에 대하여 문외한이다. 하나 시집은 한 권 정도 옆구리에 끼고 있다. 맘에 드는 소절을 외워두었다가 뽐내곤 했다. 백제 문화제 때 일화다. 아시아를 호령하던 백제의 기상을 재현하기 위하여 주한 중국대사를 초청하고 싶었다. 인맥이 닿지 않아서 고민하던 중에 한중 우호 교류협회장이 대사와의 만남을 주선 해주었다. 첫 만남이라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풀꽃 시 몇 소절을 읊으며 뜻을 전했다. 즉답은 얻지 못했으나 성공이다. 그들은 따듯한 마음을 내밀었다. 대사와 중국의 쿤밍시, 난징시, 홍콩 등의 당 간부, 한국 주재 중국 언론인이 대거 참여하여 도와주었다. 특히 백제의 유적과 유물을 샅샅이 살피고 소박한 풀꽃문학관에 들려서 시인의 풍금 소리에 맞추어 떼창을 하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때 시인의 곁에 머물면서 눈여겨보았다. 그는 아침 햇살이 퍼지면 길섶에 이름 모를 풀꽃을 찾아다니며 안부를 묻는다. 온종일 이곳저곳을 누비며 보석 같은 시어를 구해다가 비밀창고에 보관한다. 시구의 한 소절 한 소절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누에의 고운 실이 오랜 숙성 과정을 거쳐서 나오듯 주옥같은 시어가 탄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어 한 소절을 다듬느라 하늘에 있는 초승달에 물어보고 별빛에 물으며 영감을 얻는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다. 시는 삶의 이야기를 미화하지 않고 옷을 입히지 않은 알몸 그대로다.
돌이켜 본다. 나는 내 속 모습과 겉모습이 다르게 살았다. 청년 시절 한때는 용기를 주 무기로 살았으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객기를 부렸다. 장년이 되면서 세상과 소통하며 신념으로 살았으나 머릿속은 나만의 높은 성을 쌓아놓고 서늘한 그늘에서 지냈다. 명함 인생으로 산 탓이 크다. 본래의 따듯한 가슴은 가위눌려서 보이지 않고 차가운 머리로 타인의 눈에 평가받고 사랑받느라 꾸미고 치장하는데 낯익었다. 지금도 머릿속에 의식이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에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욕심이 남아서 부질없이 따지고 있다. 너그러운 자연과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풀꽃 시구를 보면 나의 부족함은 자존심에 큰 상처로 남는다.
이제 지혜롭게 살아야 할 나이다. 내 삶을 꾸미고 치장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살아야겠다. 가슴 속 깊숙이 묻어 두었던 따뜻한 마음을 찾아서 정착하고 싶은데 오늘도 길섶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하루빨리 시인의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