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그룹 회장
송무현(금속공69) 교우
모교와 교우회 위해
꾸준한 기부와 산학협력 이어갈 계획
송무현 교우는 1991년 서진공업을 창업해 현재 연매출 1조원을 상회하는 송현그룹으로 성장시켰다. 2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송현그룹은 국내외 선박·해양용 케이블 시장을 석권했으며, 세계적 기술력을 갖춘 부품 제조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송 교우는 1997년 기부를 시작으로 공과대학 발전기금, 신공학관 건립기금, 자연대 학생회관 리모델링 기금 등 27년간 48억 원을 기부하며 후배들을 위한 지원을 이어 왔다.
교우회는 송 교우가 보여준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하는 도전정신’, ‘꾸준한 모교 사랑의 실천’을 인정해 송 교우에게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여했다. 송현그룹 본사를 방문해 고대인 송 교우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재학 시절엔 어떤 학생이셨나요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은 편이어서 의대를 지망했었는데 입시에 실패하면서 방황을 좀 했죠. 금속공학과에서 어떤 것을 배우는 지도 모른 채 입학을 했기 때문에 학업은 뒷전이고 놀기 바빴어요. 당시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딘가에 얽매여서라도 나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원입대했습니다.
제대를 하고 보니 까마득한 후배들과 같이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때부터는 공부에만 집중하느라 특별한 기억은 없습니다. 동기들과는 10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여행을 하며 추억을 쌓고 있습니다.
졸업 후 회사 생활을 거쳐 서진공업을 창업하셨는데요. 사업가를 꿈꾸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직장생활을 해보니 ‘이거는 내가 기계의 부품 하나밖에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해진 테두리 속에서 생활을 하는 것이 답답했어요.
스스로 학자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사업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젊은 시절을 떠올려보면 요즘 말하는 ‘근자감’이라는 게 있었어요.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대학 졸업과 동시에 집에서 받는 지원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제 힘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사업가의 꿈은 1991년에서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업가로서 후배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업가는 본인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경영자의 그릇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게 되면 사업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개척정신을 갖고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니 시야를 넓게 갖고 본인의 역량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우회와는 어떤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신지요
재학 당시에는 고려대라는 의미가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졸업 후에 학교에 대한 애착이 강해졌어요. 사회에 나와 보니 곳곳에 모교 선배들이 포진해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더군요. 제가 받은 도움을 후배들에게 나누고 싶었고, 기업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돌려주는 것이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라 생각했기에 1997년부터 조금씩 기부를 하게 됐습니다. 제 이름을 딴 강의실이 있다는 건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이죠. 공과대학 교우회와도 꾸준히 교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부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제가 일반 회사원에 비해서는 급여가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가 않아요. 죽을 때 지고 갈 것도 아닌데 최대한 사회에 환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게 딸이 한 명 있는데 ‘딸에게 재산을 더 많이 물려주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들도 제가 기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화된 계획은 없지만 시간을 두고 차차 기부를 늘려나가려고 합니다.
자랑스러운 고대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부탁드립니다
살아오면서 여러 종류의 상을 받았지만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이야말로 이제껏 받은 상 중에 가장 값지고 의미 있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을 계기로 몇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고려대와 교우회를 위해 미약하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꾸준한 기부와 산학협력을 통해 보탬이 되려 합니다. 두 번째는 송현그룹을 이제 국내 선두를 넘어서 세계 선두로 도약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고대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 닦아 나가겠습니다.
개교기념식에서 송무현 교우가 상패를 들고 가족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지원 편집장
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
강석희(농경제71) 교우
한인 정치력 신장 위한
든든한 뒷배 될 것
1992년 미국 LA, 한인 사업체들은 흑인들의 폭동으로 아비규환이었다. 경찰은 한인타운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한국인이 미국 사회에서 목소리가 약해서, 곧 정치력이 없어서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개인과 가정에 충실하던 이민 1세대 세일즈맨은 LA 폭동을 계기로 한인 사회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강석희 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의 이야기다. 한국 방문을 앞두고 화상 인터뷰로 만난 강 교우는 ‘자유, 정의, 진리’를 강조하며 녹슬지 않은 고대 사랑을 내비쳤다.
자유, 정의, 진리로 미국에 서다
1977년에 모교를 졸업한 강 교우는 같은 해 6월, 아내 최원희(식품공73) 교우와 함께 캘리포니아 땅을 밟았다. 전자제품 유통 기업 ‘서킷시티’의 아시아계 최초 총매니저, 2008년 어바인 시장 당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강 교우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도전정신의 원천을 묻자,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려대’라고 답했다. “원래부터 리더십이 있다거나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반장을 해본 적도 없죠. 그런 제가 고려대를 만나 제 안의 잠재력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는 모교의 가르침을 평생토록 가슴에 품었다. “비록 조국을 떠나 있지만 미국에서 공직 생활을 할 때도 늘 ‘자유, 정의, 진리’를 기준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모교의 교훈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인 이민 1세 최초 직선 시장 당선
강 교우는 1993년부터 한인사회에 봉사하기 시작했다. 한미장학재단 이사로 활동하며 ‘한인사회를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있도록 힘쓴 사람’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장학 사업이 제가 한인사회를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발로 뛰어 모금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 주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죠.”
강 교우가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활동 저변을 넓혀가자, 주변에서 먼저 정치 입문을 권하기 시작했다. 성실함 하나는 자신하던 강 교우는 5개월 동안 하루 4시간 이상씩 발로 뛰어 어바인 시의 2만 가구를 직접 방문했다. “한 주민은 ‘20년 넘게 이곳에 사는 동안 내 집 문을 두드린 후보는 당신이 처음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찍겠다’라며 호응해 주셨어요. 유색인종의 이민자도 열심히 하면 뭔가를 이룰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어바인 시에서 2004년 시의원 당선, 2006년 재선을 거쳐 2008년 한인 최초 미주 지역 시장으로 당선됐다.
순수한 봉사 정신으로 시작돼야
2004년 중앙일보 칼럼에서 한 변호사는 강 교우의 정치 입문기에 대해 ‘정치 지망생들이 본받아야 할 정석’이라고 표현했다. 강 교우가 미국 사회에서 인종, 국적을 불문하고 지지를 받은 비결은 무엇일까. 정치인 강석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에 관해 묻자 일순 ‘순수함’이라고 답했다. “절대 개인을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발적으로 봉사하고자 시작했기에 모든 일에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행합니다. 간혹 ‘정치를 위한 선행 아니냐’라는 말을 들어도 떳떳할 수 있었죠. 그런 마음가짐이 지역사회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해요.”
경청하는 태도 또한 강 교우의 포용적 리더십을 뒷받침했다. “서킷시티의 영업 사원 시절부터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며 답을 찾았어요. 세일즈맨 강석희, 시장 강석희 모두 일관된 태도로 경청한 자세가 지역사회에 신뢰를 쌓는 바탕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I never give up!”
신뢰와 성실을 바탕으로 이민자의 유리천장을 극복한 강 교우에게도 좌절은 있었다. 현직인 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 면접에서 세 번의 거절을 당하자 강 교우의 딸은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그만하라고 말렸다. 강 교우는 당시 딸에게 한 대답을 또렷이 기억했다. “You know your dad better. I never give up! (네가 날 더 잘 알잖니. 아빠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렇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붙잡아 대통령으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은 것에 더해 올해 1월에는 4명의 조달청장을 대표하는 선임 지역청장으로 승진했다.
강 교우의 꿈은 여전히 미주 한인들의 발전으로 향해 있다. 그에게 앞으로의 소망을 묻자 ‘한인 출신 미국 대통령 배출’이라고 답했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할 수 있다면 우리 한인 2세, 3세들을 도와 미국의 연방 상원의원, 주지사, 나아가 한인 출신의 미국 대통령이 배출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강 교우는 한인회, 상공회의소 등 한인 정치 단체들이 한 마음으로 동참하면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대통령 배출이 가능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강석희 교우(앞줄 네 번째)는 이달 7일 김양현홀에서 재학생 약 280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박지호 기자
엘엔피코스메틱㈜ 대표
권오섭(지질78) 교우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250억원 이상 기부
평생을 바쳐 기부하는 문화가 모교에 이어지길
“더 열심히 벌어 사회와 어려운 곳에 계속 기부하겠습니다.”
올해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상한 권오섭 교우(지질78)는 수상 소감에서도 나눔을 강조했다.
30여 년간 화장품 외길인생을 걸어온 권 교우는 실패와 역경을 딛고 성공 가도에 들어섰다. 엘엔피코스메틱 대표로서 화장품 브랜드 ‘메디힐’을 세계 45개국에 성공적으로 진출시키며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유니콘 기업으로 이끌었다.
그의 가장 큰 덕목은 자신의 성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나눔과 봉사를 통해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특히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모교와 교우회 발전을 위해 250억원 이상을 기부하는 등 모교 사랑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면서 모든 고대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며 “앞으로 사회와 학교를 위해 봉사하라는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겸손한 마음을 드러냈다.
맘 편히 공부할 곳 세워주고파
무엇이든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기부를 먼저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사업에 뛰어든 권 교우도 마찬가지였다. 부채를 감당하면서도 기부를 시작했다.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모교 기부도 그런 취지로 진행됐다.
“11년 반을 지질학 관련 공부를 하고 관련 일을 하다가 화장품 업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선후배들은 전공을 살려 연구소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전공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죠. 그들이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기부를 하게 됐습니다.” 미국 유학으로 선진국의 교육 환경을 경험한 것도 도움이 됐다. “전공 공부를 하며 미국 유학을 갔는데 학과마다 건물이 있더라고요. 성공한다면 내가 이런 건물을 하나 지어주는 것이 내 보람이 아닐까 생각했죠. 우리 후배들도 넉넉한 공간이, 교수님들도 연구실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지난 2020년 7월 준공식을 가진 메디힐지구환경관은 지하 1층, 지상 7층, 연면적 7041㎡(약 2130평) 규모로 권 교우가 나온 지질학과의 후신인 지구환경과학과가 들어섰다. “건축 자금으로 120억원을 냈는데 사실 건물 안에 연구 기자재들이 필요하잖아요. 과 후배였던 안성호(지질87‧에이스침대 대표) 교우와 논의해 각자 20억씩 더 기부했습니다.”
훌륭한 선배들 본받아 교우활동
권오섭 교우는 자신과 교우회와의 인연도 나눔을 실천하는 교우들과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은 것이라 말한다. 권 교우는 현재 고대경제인회 회장 등 교우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구자열 회장님, 문규영 회장님, 승명호 회장님 등 본받고 싶은 선배님들을 따라 함께 하다 보니 교우회와 인연이 깊어졌습니다. 교우들과의 끈끈한 친목뿐만 아니라 현재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교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죠.”
비단 교우회와 모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회에 여러 기부를 진행하고 있다. 강서구 장학회, 법무부 청소년 범죄예방위원 서울남부지역협의회, 서울 남부지역 법사랑장학재단 등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메디힐 장학재단을 설립해 국내 대학생들과 교육 복지기관 등에도 지원하고 있다. 상생과 사회적 책임을 완수한다는 그의 경영이념이다.
“꿈 포기 말고 항상 도전하길”
이런 권오섭 교우의 행보는 다른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특히 성공을 꿈꾸는 학생들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거든요. 꿈꾸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항상 도전하기 바랍니다.”
평범한 말 같지만, 실패와 성공을 모두 경험한 그의 말에는 울림이 있다. 1990년대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이후 겪었던 여러 좌절은 2009년 엘엔피코스메틱의 시작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홈케어 시장을 예견해 전문성을 강조한 마스크팩 브랜드 메디힐도 수많은 노력 끝에 탄생했다. 2015년 판매를 시작한 메디힐 마스크팩은 현재 누적판매량 30억장을 돌파했다. 중국, 일본, 미국 등 세계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현재 45여개국에 진출했다. 2018년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경영이념을 인정받아 2018년 대한민국 일자리 으뜸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 메디힐이 저에게 세 번째입니다. 한번은 완전히 망했고, 두 번째는 절반의 성공이었죠. 이제 조금 성공한 듯합니다. ‘남들이 하는 것이 좋아 보이니 나도 해볼까’해서는 성공하기 쉽지 않아요.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실패하지 않는 것이 더 좋잖아요? 실패하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두 번 실패하면서 몸으로 느낀 겁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청하자 그는 다시 기부를 강조했다. “한 번하고 끝나는 기부는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평생을 바쳐서 기부하는 문화, 그런 문화가 우리 고려대학교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래야 또 채워집니다. 기부하고 채우고 기부하고 채우는 그런 고려대학교의 선후배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재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