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중국 쓰촨 강도 6.8지진 66명 사망
이번 지진으로 66명이 숨지고 15명이 실종됐다. 부상자는 235명이다.
진원인 하이뤄거우 빙하삼림공원에 머물던 200여명은 산사태로 외부와 연결된 도로가 끊기면서 고립된 상태다.
쓰촨성은 6천500명의 구조대를 현지에 보내 피해자 구조에 나섰으나 통신이 끊기고, 도로가 막혀 구조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루딩현에서만 주택 등 건물 249채가 무너지고, 주택 1만3천500채가 파손됐다.
이재민이 1만1천명 발생했다. 4만여 가구는 통신과 전기가 끊겼다.
또 수력 발전소 7곳이 훼손된 것으로 파악됐다.
유역 면적 166만㎢인 완둥허(灣東河)의 물길이 막혀 수위가 상승하자 홍수 발생을 우려한 현지 당국은 하류 주민 5만명을 긴급 대피시켰다.
2021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의 최종 단계인 잠수함 시험발사에 성공
국방과학연구소(ADD)는 3000t급 잠수함 1번함인 도산안창호함에서 SLBM을 발사하는 두 차례 비공개 시험에 성공했다. 특히 발사관에서 공기 압력으로 미사일을 물 밖으로 밀어낸 뒤 미사일 엔진을 점화시키는 SLBM 핵심 기술인 ‘콜드론치(cold launch)’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관계자는 “이달 중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험발사를 마치면 양산, 실전배치 단계에 돌입할 것”이라고 전했다.
통상 SLBM 기술 개발은 지상 시험발사, 수중 시험발사, 잠수함 시험발사 등 3단계로 진행된다. 지난해 말 지상 시험발사에 성공한 군은 잠수함 대신 바지선을 이용해 얕은 물속에서 SLBM을 발사하는 2단계 수중 시험발사를 올해 마쳤다. SLBM 6기를 탑재할 수 있는 우리 군의 첫 3000t급 잠수함인 도산안창호함이 지난달 13일 취역하면서 관련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SLBM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인도, 중국, 북한 등이다.
2019년 흑인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이 별세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이 향년 88세로 타계했다 모리슨은 수많은 소설과 비평, 에세이를 통해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과 성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NBC는 부고를 전하며 ”모리슨은 미국의 정치적, 인종적, 문화적 변화에 대해 날카롭게 비평하는 양심의 목소리였다”고 평가했다.
대표작 ‘빌러비드’(Beloved)는 모리슨에게 1987년 퓰리처상과 1993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소설이다. 모리슨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소설 속에서 통찰력 있고 시적으로 묘사된 캐릭터들은 모두 미국 현실의 본질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흑인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두 여성의 우정을 주제로 한 소설 ‘술라’(Sula)는 흑인 여성들을 전형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독특하고 개성적인 인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8년 일본 홋카이도 진도 6.7 강진 사망 9명 행불 31명 발전소 공항 철도 정지 295만 가구 전체 블랙아웃
2017년 허리케인 어마(시속 295㎞) 카리브해 강타 사망 69명 피해액 490억$(약 55조3455억원) 푸에르토리코 100만 가구 정전
2017년 한국남자축구대표팀 월드컵 본선 9회 연속 진출 확정(아시아 첫 번째, 세계 6번째)
2013년 북한 평양에서 태극기 게양·애국가 연주 첫 허용
2012년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2012 세계자연보전총회(WCC) 열림
2010년 소설가 겸 언론인 김성한씨 별세
동인문학상 제1회(1956) 수상자이자 동아일보 편집국장·논설주간·편집인을 지낸 원로 언론인 겸 소설가 김성한(91)씨가 2010년 9월 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9년 함경남도 풍산에서 태어난 김씨는 일본 도쿄대(東京大) 법과를 중퇴한 뒤 1950년 단편 '무명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단편 '바비도', '암야행', '오분간' 등을 통해 운명이나 종교에 순응하지 않고 실존을 추구하는 적극적 인간형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역사소설 창작에 전념해 '이성계', '요하', '왕건', '임진왜란', '진시황제' 등을 발표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인촌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2009년 북한 황강댐 방류 야영객 6명 물에 휩쓸려 숨짐
2009년 9월 6일 새벽 북한의 느닷없는 댐 방류로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하류 수위가 갑자기 올라가면서 강변에서 잠자던 야영객 등 6명이 실종됐다.
이날 오전 5시쯤 갑자기 불어난 물로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 임진교 3㎞ 하류 모래섬에서 서모(40)씨 등 7명이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서씨 등 5명이 실종됐다. 회사 동료와 가족들인 이들은 전날 오후 4시쯤 야유회를 왔으며, 텐트를 치고 잠을 자다 변을 당했다. 또 오전 7시20분쯤에는 임진교에서 15㎞ 하류 지점인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비룡대교 아래에서 낚시를 하던 김모(41)씨도 강물에 휩쓸려 실종됐다.
국토부와 한국수자원공사는 이날 새벽 2시부터 11시간 동안 "북한에서 4000만t의 물이 일시 방류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북한이 휴전선 북쪽 42.3㎞ 지점의 황강댐(황해북도 토산군) 일부 수문을 열어 사고가 난 것으로 본다"고 했다.
북한은 방류 전 우리측에 아무런 통보를 하지 않았고 사후 해명도 없는 상태다. 정부는 7일 중 북측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재발 방지 협력을 촉구하는 내용의 전통문을 발송할 예정이다.
임진강 수위가 높아질 때 주민 대피를 위해 설치된 자동 경보시스템이 사고 당시 작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강홍수통제소와 연천군에 따르면 최근 임진강 필승교 수위는 2.3m 안팎을 유지했으나 이날 오전 2시부터 강물이 급격히 불어나 오전 3시 3.08m, 오전 4시 4.11m를 기록한 데 이어 오전 6시10분에는 최고수위인 4.69m까지 높아졌다
2009년 한국,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 종합우승
캐나다 캘거리에서 2009년 9월 6일(현지 시각) 폐막한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금메달 13개와 은메달 5개, 동메달 5개를 획득, 2위 스위스(금7)와 3위 일본(금6) 등 기술 선진국들을 큰 격차로 제쳤다.
한국은 1967년 16회 스페인 대회를 시작으로 모두 25차례 출전해 16번째 패권을 거머쥐며 '기능 강국'의 면모를 다시 한번 세계에 각인시켰다. 예년과 달리 독일·프랑스·스위스 등 유럽 선진국들이 대대적으로 지원하며 '한국 타도'를 외쳤지만 정상을 지켜낸 것이다. 역대 우승횟수에서 우리는 2위 일본(6회), 3위 스위스(3회)와의 격차를 더 벌렸다.
이번 40회 기능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총 45개 종목 중 40개 종목에 출전, 이 가운데 35개에서 입상하는 고른 기량을 선보였다. 자동차 차체수리금형, 통합제조 등 우리의 전통적 강세종목에서 1위를 지켰고, 요리(박성훈)와 타일(김정구) 종목에선 대회 참가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공업전자기기(허영환) 종목은 1979년 대회 이후 30년 공백 끝에 정상을 재탈환했다.
2007년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 세상 떠남
2002 제6회 서울평화상에 구호단체 '옥스팜(Oxfam) 선정
2001년 IPI-WAN, 한국을 언론탄압 감시국에 선정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로는 처음으로 ‘IPI 언론자유탄압 감시대상국 (Watch List)’으로 선정됐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일부 신문사 대주주 구속과 관련, 한국 언론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내한한 국제언론인협회(IPI)·세계신문협회(WAN) 합동조사단은 6일 서울 조선호텔 오키드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는 만장일치로 이같이 결정했다”며, “언론사 세무조사와 신문사 대주주 구속은 한국언론 문제의 시작에 불과하며, 한국 정부는 언론개혁 법안을 통해 신문사 소유 지분을 제한, 경영권 박탈을 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 IPI 워치 리스트에는 러시아, 스리랑카, 베네수엘라가 올라가 있다.
요한 프리츠 IPI 사무총장은 “IPI 워치 리스트에는 겉으로는 개방된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언론자유가 억압당하고 있는 국가를 올린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덴마크·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5개국 140여명의 언론회원들로 구성된 ‘IPI노르딕위원회’(위원장 미하엘 에렌라이히·덴마크 IPI위원회)도 이날 결의문을 공개하고, 한국 내 언론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IPI이사회가 국제 언론들에 한국 내 언론상황의 진행상황을 더 깊이 주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한국을 IPI 언론탄압 감시대상국에 포함시키는 것을 만장일치로 찬성한다”며, “(한국의) 3개 신문 사주들이 공식재판 없이 보석허가도 받지 못한 채 구속된 것에 대해 특별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말했다.
2001년 한국화가 황창배 별세
한국화가 황창배(黃昌培·53)씨가 6일 오후 1시 서울 이대목동병원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끝없는 전통 파괴와 실험으로 ‘한국화단의 테러리스트’로까지 불렸던 그는 전통과 격식에 얽매여 있던 한국화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거침없는 기세로 화단의 새 영역을 개척, 한 시대 젊은 화가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한때 화가로는 드물게 TV에 포도주 광고 모델로 발탁될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를 갖춘 ‘스타 작가’이기도 했다.
서울대 회화과·대학원을 나와 1978년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한 황씨는 1980년대 들어 재료와 기법의 파괴를 시도하면서 선풍을 일으켰다. 그는 한국화가이면서 화선지와 먹을 고집하지 않고 캔버스에 먹, 아크릴물감, 오일스틱 등을 쓰고 추상을 도입하는 실험을 거듭했다. 이런 작품 경향은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일각에선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제공하기도 했다. 재료와 기법은 전통을 파괴했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한국적 정서와 이미지를 새로운 틀에 담아보려는 것이었다. 작품 사인에 서기(西紀)가 아닌 단기(檀紀)를 고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형식과 구속을 싫어하는 황씨는 1991년 전업작가를 선언하며 이화여대 교수직을 미련없이 던져 또 한번 화제가 됐다.
2001년 머리카락 굵기의 25만분의1인 극초미세 나노선(線) 국내개발
국내 연구진이 세계에서 가장 가늘고 집적도(集積度)가 높은 나노선(NANO線)을 개발해 세계 나노기술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포항공대 김광수(52) 교수 연구팀은 2001년 9월 6일 지름이 0.4나노미터인 은(銀) 나노선 배열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나노기술은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크기의 물질을 제어하는 기술로 세계적으로 개발 경쟁이 치열한 분야. 이번에 개발한 나노선 배열은 작년 미국에서 개발한 세계 최고 수준의 나노선 배열보다 집적도가 200배 높은 것이다.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미국 사이언스(Science)는 이 연구결과를 10월 12일자 표지 논문으로 실었다. 사이언스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연구결과가 사실임을 확인하자, 7일 이례적으로 속보를 싣는 `익스프레스`를 통해 논문내용을 미리 소개했다. 세계 과학계는 특히 이 연구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홍병희(30)씨가 포항공대에서 아직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젊은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분위기였다.
2000년 사상최대의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 개막(~9.8)
2000년 오가타 사다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제5회 서울평화상 수상
제5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일본인인 오가타 사다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이 선정됐다. 오가타 사다코씨의 일생은 `난민의 대모` 혹은 `난민의 큰 할머니`란 별칭에 함축돼 있다.
국제 난민문제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인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을 10년째 맡으면서 2700만명에 달하는 난민문제해결에 놀라운 열정을 쏟아왔다. 이라크, 르완다, 브룬디, 콩고, 아프가니스탄, 체첸, 소말리아, 수단, 코소보, 캄보디아, 동티모르 등 난민이 있는 곳에는 으레 그의 모습을 목격할 정도로 `현장주의`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일본 성심여대에서 일본의 정치외교사를 전공한 오가타 여사는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석사(국제관계학)를, 버클리대에서 박사(정치학)학위를 땄다. 귀국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유엔 주재 공사로 스카우트되면서 `코스모폴리탄`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유엔에선 유니세프 집행이사회 의장과 유엔 인권위 일본대표 등을 거쳤다. 그 실적을 인정받아 63세때 제8대 난민고등판무관으로 선출됐다.
1999년 한국-리비아 문화협정 체결
1999년 환경부 자연환경조사에서 국내 미기록생물 82종 첫 발견 발표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옆길게류, 꼬마딱촐새우류, 대추귀고동류 등 82개의 미기록종이 1999년 9월 6일 환경부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이 생물들은 아직 국내에 보고된 적이 없는 새로운 종(種)이다.
자연환경조사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146개 권역으로 나눠 각 권역마다의 생태환경 조사를 실시했다. 이날 발표된 1998년 자연환경조사는 강원도 고성 등 육지 30개 권역과 전남 순천만 등 해안선 30개 권역을 대상으로 대학교수 등 전문가 384명을 동원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조사작업이었다.
이날 발표된 82개의 미기록 종은 절지동물 45종, 극피동물 1종, 태형동물 5종, 연체동물 27종, 해조류 2종 등으로 구성됐다. 발견된 미생물 중 가장 눈에 띈 옆길게류는 몸길이 1cm 미만의 갈색생물로 모래성분이 강한 갯벌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한국영화로는 12년 만에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거짓말`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됐던 장선우 감독의 영화 `거짓말`이 `씨받이`에 이어 한국영화로는 12년 만에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1999년 9월 6일 저녁 제56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됐다.
30대 후반의 조각가와 여고생의 섹스 행각을 그린 이 영화에 현지 언론과 관객들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디-마조히즘`을 다룬 과격한 내용 탓인지 도중에 퇴장하는 관객도 눈에 띄었다. 영화 상영후 장선우 감독과 출연배우들의 기자회견에서는 주로 저자 구속사태를 부른 원작과의 관계, 한국내 상영여부에 질문이 집중됐다.
포르노가 아니라 엄연한 예술작품으로 감동적이며 완성도가 뛰어나고, 진보적이고 독창적 영화를 용인하지 않는 한국사회에 용기있게 저항한 작품이라고 소개된 반면 장면이 반복돼 지루하고 예술적 독창성이 적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거짓말`은 영화 상영후 1999년 베니스에서 가장 논쟁적인 영화중 하나가 됐다.
1998년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별세
일본 영화사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가 1998년 9월 6일 오후 0시 45분 향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10년 3월 23일 일본 도쿄 오모리에서 태어난 그는 문학과 미술에 관심을 보이며 자라났다.
구로사와는 1943년 33살의 나이에 `스카타 산시로`란 작품으로 일본영화계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스가타 산시로`(1943)로 데뷔한 뒤 1951년 연출한 `라쇼몽`(羅生門)이 베니스 영화제 대상을 받았으며 서구적인 화술에 동양적인 색채나 일본의 전통극을 절묘하게 섞은 `거미의 성`(1957)은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일본식으로 옮긴 작품으로 당시 헐리우드 영화를 능가하는 스펙타클, 뛰어난 색채와 예술성으로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해주었다. 미국과 일본 합작품 `가게무샤`(影武者)(1980)는 1980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97년 경주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 입적
경주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이 1997년 9월 6일 토함산 불국선원에서 입적했다. 세수 85세, 법랍 54세였다. 1912년 함남 신흥에서 태어난 스님은 1943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래 조계종 총무원장, 신흥사, 동화사, 법주사, 불국사 주지를 거쳐 원로회의 의장을 지냈다.
월산 스님은 경허 만공 금오 스님으로 이어지는 선맥(禪脈)을 계승한 대표적 선승이었다. 월산 스님은 관광사찰이던 불국사에 1974년 선원을 열어 제자들에게 쇠락해가는 선맥을 전수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1994년 전 문교부장관 박일경씨 별세
전 문교부장관 박일경씨(74)가 1994년 9월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박 전 장관은 헌법학자로 현민 유진오와 함께 광복 후 한국 헌법학 연구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1920년 경북 경주 출신으로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박 전 장관은 현민의 뒤를 이어 광복이후 우리나라 초창기 헌법학의 체계를 세우고 다음세대인 김철수, 권영성 교수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았다. 그는 특히 약관의 나이로 1948년 첫 헌법제정 당시 현민이 위원장으로 있던 `30인 헌법 기초위원회`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리의 거의 모든 헌법개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1984년까지는 헌법위원회 위원을 역임해 우리나라 헌법사의 산증인으로 평가된다.
한편 그는 1947년 대구대에서 조교수로 교수생활을 시작, 서울대 교수를 거쳐 중간에 법제처장, 문교부장관 등을 지낸 후 강단에 복귀, 경희대 교수와 대학원장, 명지대 총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행정가로서의 수완도 인정받아 1984년에는 대한교련 회장에 당선돼 교권확립에도 애썼다.
1994년 소설 `쇼군`의 작가 제임스 클라벨 사망
1994년 PKO 국군의료지원단 서부사하라 파견
1992년 남북한과 일본 여성대표 종군위안부문제 공동대처 결의
1991년 소련의 고르바초프-옐친 TV회견서 모든 정치범 석방약속
1991년 라트비아 독립
1991년 에스토니아 독립
1991년 리투아니아 독립
1988년 소련 리투아니아 공화국 이글날리나 원전 화재
1988년 호남선 복선화 완공
대전에서 목포에 이르는 국토의 동맥 호남선 철도 !
1988년 9월6일 이리에서 송정리구간의 철도복선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 구간의 완공으로 전북 이리에서 전남 송정리간의 102km에 달하는 호남선 복선화 공사는 착공 7년 6개월만에 모두 끝났다.
이로써 호남선의 하루 철도운행능력은 35회에서 70회로 늘어났다.
1987년 영국의 언론인 헤일리 사망
1984년 전두환 대통령 방일. 한일 정상회담 - 일황(日皇), 유감의 뜻 표명
1982년 아랍연맹, 모로코서 정상회담 개막 (~9.8)
1982년 8차 한국-벨기에 통상장관회담 개막
1982년 제37차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IMF(국제통화기금) 연차총회 개막(토론토)
1981년 폴란드, 동구 첫 자유노조대회
1981년 경남 통영 근해서 제1영산호가 화물선과 충돌 침몰 선원 18명 실종
1980년 폴란드 키에레크 당제1서기 실각. 후임에 카니아 선출
1979년 소련 지하핵실험으로 시베리아 진도 7.1 지진
1977년 박동선, 로비 사건으로 미 법무부에 기소
미국 법무부는 1977년 9월 6일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을 `미국 정계에 뇌물 증여` 등의 혐의로 기소한다고 발표했다. 기소장에는 `박동선은 1967년부터 7년간 미국인 리처드 해너와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이후락 등과 공모,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 유리한 결정을 내리도록 미국 의원에 뇌물을 주었다`고 써 있었다.
이 사건은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지가 ‘한국정부, 미국관리들에게 수백만달러를 뇌물로 제공’이라고 폭로하면서 표면화됐다. 한국 정부의 기관요원인 박동선씨가 1970년대에 연간 50만 내지 1백만달러 상당의 뇌물로 90여명의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는 내용이었다. 박동선씨가 주한미군감축 반대 로비에 사용한 자금은 조달청 쌀 수입 대리인으로 축적해 놓은 자금 중 일부인 것으로 알려졌다. 1968년 정일권씨의 도움으로 조달청의 쌀수입 대리인이 된 박씨가 50센트이던 커미션을 10달러이상으로 올려받아 1976년 코리아게이트가 표면화될 때까지 축적한 자금은 1천4백만 달러에 달했다.
미국 정부는 한국으로 출국한 박동선씨의 송환을 한국정부에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송환요청을 거부했지만 대한 식량차관을 삭감하는 등의 미국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해 면책특권을 조건으로 박동선씨를 미국의 사법부와 의회증언에 세우게 했다.
1979년 8월 이른바 ‘코리아게이트’라고 불리운 박동선 사건이 종결될 때 워싱턴의 연방지방법원은 박동선씨에 대한 36개 항목에 걸친 기소를 취하했지만, 미 국세청은 박동선씨가 쌀거래로 올린 수입에 대한 세금을 냈어야 했다면서 1천5백만달러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1977년 일본-북한, 민간어업협정 체결
1976년 소련 빅토르 이바노비치 벨렝코 중위, MIG 25A형 신예기 몰고 일본 북해도 하코다데에 비상착륙. 미국에 망명 요청
‘스크램블(scramble)!’ 긴급발진 명령을 받은 자위대의 팬텀기 두 대가 급히 떠올랐다.
일본 영공을 침범한 국적 불명의 비행물체를 요격하기 위해서다. 초저공 비행으로 추적을 따돌린 비행물체는 홋카이도 하코다테공항 상공에 나타났다.
관제탑의 경고를 무시한 채 착륙을 강행한 기체는 활주로를 185m나 벗어난 뒤 가까스로 멈춰섰다.
소련 극동공군 소속 벨렌코 중위 망명사건의 개요다. 사건 발생 일시 1976년 9월6일 오후1시57분.
소련은 즉각 기체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불응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에 아랑곳없이 미국과 일본은 기체를 뜯었다.
순간속도 마하 3.2를 기록한 ‘환상의 전투기’, 서방진영의 어떤 전투기로도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공포의 존재’를 해부한 미국과 일본의 기술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엇보다 진공관이 나왔다.
가볍고 강한 티타늄 특수합금이라고 추정했던 기체의 재질은 강철이 대부분이었고 고속비행에서 선회 기동시 휘어지기 쉬운 알루미늄 합금도 섞여 있었다.
소련의 기술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미국제 무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소련제 전투기를 사려는 국가도 줄어들었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 된 일본은 방공망의 취약성을 부각시키며 군비 증강에 수백조원을 퍼부었다.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분할관리 합의서 교환
북한의 판문점 도끼 살인 북한 경비병 30여명이 8월 18일 오전 9시45분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 안에서 미류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군 장병과 한국인 노무자 들을 도끼와 몽둥이로 집단 구타하여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했다.
주한미군은 이 사건이 터지자 美 7함대와 최신예기들의 무력시위 아래 미류 나무 절단작업을 벌이는 등 단호한 응징 결의를 보여줬다.
이 사건은 金日成의 遺憾표명 메시지와 판문점 분할 경비 합의로 일단락됐다.
1975년 `보이스 오브 코리아` 잡지를 창간한 독립운동가 김용중 사망
1974년 최두선 전(前) 총재 별세
1970년 아랍게릴라, 여객기 4대 잇따라 하이재킹
1970년 9월 6일 유럽 각 도시를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던 여객기 4대가 잇달아 납치되는 세계항공 역사상 최대의 연속 하이재킹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7일,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이 범행에 대한 성명을 발표, 구류중인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석방과 함께 사건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동평화협상을 와해시키는데 있다고 밝혔다.
하이재킹된 여객기 4대 가운데 이스라엘의 엘-알(EL-AL) 항공기는 기내에서 범인이 사살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팬아메리칸 항공의 보잉747점보여객기는 7일 아침 카이로로 강제 착륙돼 하이재킹된 여객기 중 최초로 폭파됐다. 불행 중 다행히도 승객들은 폭파전 게릴라들에 의해 비행기 밖으로 내보내진 후였고 폭발 후 범인들도 체포되었다. 이에 국제안보리 이사회가 9일, 만장일치로 인질의 즉각석방 요구를 결의하며 각국의 적십자국제위원회가 교섭을 시작했지만, 하이재킹된 스위스 항공 707기와 TWA사의 707기가 12일 요르단 사막의 한 비행장에서 또 폭파됐다. 이에 게릴라들은 이 비행기폭파가 서방 3국(미국ㆍ이스라엘ㆍ영국)정부가 그들의 요구에 수긍하지 않고 지연시킨데 대한 1단계 경고조처였다고 말했다.
이후 9월 26일ㆍ27일 양일간에 걸쳐 피납됐던 나머지 인질들이 전원 석방됨으로써 20일간에 걸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사상최대 공중납치 사건이 마무리됐다.
1969년 신민당, 박정희대통령 탄핵소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
1968년 스와질란드,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7년 드골, 서방지도자로서는 전후 처음으로 폴란드 방문
1967년 청양 구봉광산 광부 양창선씨 16일 만에 구출
1967년 8월 22일 낮 12시40분 경 충남 청양군 사양면 구봉 광산서 광부 양창선씨가 수갱을 수리하는 중 갱도가 무너져 매몰당했다. 구조작업을 시작한지 나흘 만에 지하 1백25m지점에 갇힌 양씨와 지하 2백50m지점의 제2배수장을 전화로 연결하고 26일 오후 1시부터 본격 굴진작업에 나섰다. 양씨는 집에서 가져간 도시락과 지하수로 연명했다.
이때부터 전국의 신문과 방송이 양씨 매몰사건을 대서특필, 전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매몰 열흘째인 31일에는 민병규 박사 등 의료진의 도움으로 지상에서 지하에 갇혀있는 양씨와 전화진단까지 했다. 이같은 전국민의 관심 속에서 양씨는 매몰당한지 15일 8시간35분 만인 9월 6일 밤 9시15분에 극적으로 살아나왔으며, 건강은 대체로 양호했다.
1966년 남아공 페르뵈르트 수상, 의회서 백인자객에 피살
1965년 파키스탄 인도와의 전쟁상태 선포
1964년 콩고반란군 스탠리빌에서 콩고인민공화국 수립 선언
1958년 중부에 13년만의 폭우
1956년 화가 대향 이중섭 정신분열증세 보이다가 간염으로 적십자병원에서 사망
1952년 세계저작권조약(UCC) 발족
1951년 한국전쟁 중 리지웨이 장군 정전회담 개최지로 판문점 제의
1950년 한국군에 여군 창설
6·25전쟁으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던 때,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가 따로 있냐며 구국의 일념으로 여성들이 스스로 자원입대하여 결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 ‘여자의용군’.
6·25전쟁의 발발로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하였을 때 제 1기 여자 배속장교 출신 11명이 대전에 모여 여자의용군 창설을 결의하고 의용군 모병에 들어갔다. 이들은 대구와 부산으로 이동하여 모집을 재개하고 2000여명의 지원자를 모집하였다.
1950년 9월 1일 여자의용군 교육대(교장 김현숙 소령)가 창설되었습니다.
대구와 부산에서 구두시험과 필기시험을 실시하여 각기 250명씩을 합격시켜 총 500명을 여자의용군 1기생을 선발하였고 이들은 부산 성남초등학교 교정에서 9월 4일 입소식을 거행하고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문에 여군은 9월 1일을 창설기념일로 삼고 있답니다.
여자의용군 교육대의 편성은 대대본부와 권총중대 100명, M1소총중대 200명, 칼빈소총중대 200명이었으며, 교육과목은 주로 전투에 필요한 화기학 및 전술학 과목으로 실탄사격, 독도법, 야간훈련 등 보병으로서의 기초훈련 과정으로 편성되었습니다.
1950년 9월 26일 여자의용군은 4주간의 교육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입소 인원 500명 중에서 중도에서 9명만이 탈락한 491명이 수료하였습니다. 이들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 ‘여자의용군’입니다.
1기생은 수료 후 즉시 전방 배치되지 못하다가 2기 수료 후인 1951년 1월 10일 1기, 2기생이 합쳐져 전방에 배치되었습니다.
여자의용군 교육대는 1950년 11월 12일부로 여자의용군 훈련소로 개칭되어 12월 8일 2기생 384명이 입소하여 훈련을 받던 중 9·28수복으로 서울 일신초등학교(현 극동빌딩자리)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 18일 다시 부산의 서대신동에 위치한 경남상업중고교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들은 12월 27일에 약 3주간의 교육훈련을 마치고, 단 1명만이 중도에서 탈락한 383명이 수료하였습니다. 이들 1, 2기생 중 우수자 12명을 선발 장교로 임명하고, 1950년 1월 12일부로 전방 12개 군단 및 사단에 배치하였습니다.
이들은 행정요원으로 G1-G5와 사단장실에 각각 배치되어 문서연락과 필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중공군 여자 포로병의 심문 시에는 통역의 임무도 담당하였습니다.
당시 여군들의 숙소는 부대 내에 제대로 구비되지 못해 일부는 피난지 민가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51년 11월 여자의용군교육대가 해체되면서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여군과로 편입되었고, 1955년 7월 여군훈련소가 설치되어 여군의 훈련을 전담했다.
1959년 1월 여군과가 육군본부 여군처로 개편되었으며, 1970년 12월 여군단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른다.
1945년 장덕수. 조병옥. 김병로씨 등 한국민주당 발기 선언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주석 이승만)
1937년 일제, 수피아. 숭일 등 4개교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처분
1926년 독일, 국제연맹 가입
1923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출생
1915년 아동문학가 강소천 태어남
1914년 독일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대패한 마른 전투 개시(-11일)
1909년 미국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북극 발견
1901년 윌리엄 매킨리 미국 제25대 대통령 피습사건 발생
1901년 9월 6일 미국 대통령 매킨리가 버펄로에서 열린 범미국박람회에서 무정부주의자인 레온 촐고츠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매킨리 집권 당시 미국은 1895년에 일어난 쿠바 독립운동과 그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가혹행위에 대한 소문들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매킨리는 이 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1898년 2월 15일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스페인과 전쟁(미국-스페인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협상에서 매킨리는 패전국 스페인의 해외식민지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둘 것을 주장했고, 이로써 미국은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그 결과 매킨리는 1900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미루었던 국정 운영에 박차를 가하던 중 총격 테러를 당해 그로부터 8일 후 사망했다.
당시 부통령으로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1903년 동요작곡가 윤극영 출생
1899년 천연두 예방규칙 반포
1899년 존 헤이 선언. 미국, 열강에 청국(淸國)의 문호개방 및 기회균등을 제의
1890년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 원하경(언더우드) 출생
1872년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의 3제(帝) 베를린서 회담(3제동맹 체결)
1766년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돌턴 출생
1597년 소사대첩(素砂大捷) 발발
정유재란 때 북상(北上)하는 왜군과 수원(水原) 북방의 소사평(素砂坪)에서 일대 야전(野戰)을 전개, 적을 대파하여 북상을 좌절시켰다.
1420년 충청도, 수재(水災)로 3,560여결(結) 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