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내고 서인 우위로 다시 뒤집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32]
재위 15년(1689년), (재위 16년차)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33]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이때를 기점으로 서인과 남인은 그냥 원수지간 정도를 넘어서서 서로 피튀기는 싸움을 하는 사이로 변질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당쟁은 사생결단 식으로 격화되었다.[34]
재위 27년(1701년), 신사의 옥으로 남인 잔존세력들마저도 모두 박살냈으며 소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곧 노론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으로 남인은 몰락을 넘어서서 재기불능 상태로 전락했다.[36] 이건 어찌보면 갑술환국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37]
재위 31~32년(1705년 ~ 1706년), 임부의 옥사와 이잠의 옥사로 이미 재기불능에 빠진 남인들을 정치에서 싸그리 소멸시켜버렸으며 이 사건들로 인하여 소론의 영향력 역시 더욱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은 제1세력을 넘어 1당 독재 수준으로 굳어진다.
재위 36년(1710년), 예기유편 편찬에서 불거진 논란이 확산되고 게다가 당시 편찬자였던 최석정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고 거기에 대해 당시 영의정이자 내의원 도제조였던 최석정이 임금의 병환에 시약을 잘못했다는 의혹까지 확산되면서 이에 분노한 숙종은 소론인 최석정에게 영의정 관직을 삭직하고 노론인 이여에게 영의정으로 제수를 하는데, 이로 인해 노론의 영향력은 계속 강화되고 소론의 영향력은 계속 약화되는데 일조함.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전자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중자로는 기사환국 이후로, 후자로는 갑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신사의 옥, 임부의 옥사, 이잠의 옥사 등 여러가지 옥사들이 일어난 이후로 노론을 점점 계속 등용하더니[38]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대거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환국 정치(換局政治)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더욱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왕을 향한 충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했다.[39]
숙종은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40]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5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너죽고 나죽자 하는 피비린내 싸움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서인→노론)의 일당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겨우겨우 밀어붙여야만 했다.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은 숙종이 균역법이란 이름으로 최초로 만들었다.
숙종은 또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儉弱, 검소하고 절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41] 그 내용을 다룬 만화, 송시열과 윤휴의 혼백이 숙종을 디스하는게 압권.
從古禍人國/莫如黨比酷/東西纔標榜/老少轉橫拆/公道時淪喪/私心日係着/須知殷鑑邇/終始竭忠力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힘은 붕당보다 혹독한 것이 없는데, 동서(동인과 서인)가 겨우 주장을 내세우자 노소(노론과 소론)가 바로 마구 헐뜯어대어 공도는 때로 아주 없어지고 사심이 날로 이어 붙어 있으니 모름지기 은감이 가까운 줄 알아서 끝내 충성의 힘 다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숙종은 피튀기는 환국을 일으킨 끝에, 세자 시절부터 미워했던 서인의 영수, 그 송시열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서 숙종의 증조부 인조, 조부 효종, 부친 현종까지 내리 3명의 선대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도 별 수 없이 끝내 목숨을 잃었다.[42]
숙종의 송시열 사사는 철저한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을 원자로 삼고, 더 나아가 세자로 삼는 것(세자 건저)을 송시열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43]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다고 추측된다. 숙종은 애초부터 송시열을 싫어했던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답게 경종의 원자책봉을 밀어붙였고, 송시열 역시 하던 버릇대로 원자책봉을 열렬히 반대하며 숙종과 각을 세우다[44]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이로 인해 송시열을 따르던 서인계 유생들과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마저 죄다 유배를 보내는 불같은 성질을 보여줬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이 난 숙종은 송시열을 국문(고문)하기 위해 그를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직접 불러들였다. 그때 송시열이 유배지에서 올라오는 길에[45] 그를 따르는 노론 추종자들이 몇백 명이었다고 하며, 점점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송시열을 졸졸 따르는 이가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결국 숙종은 사약을 든 선전관을 출동시켜서 결국 송시열을 사사시켜버렸다.
송시열은 할아버지인 효종을 둘째 아들[46]이라 못을 박고[47], 그 부인인 인선왕후에 대해서도 대공복 주장을 폈다.[48] 이는 적자 - 적손으로 이어지는 숙종의 정통성(역린)을 건들게 되는 일이니 좋아할리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는 단순 반대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다. 송시열 같은 정치 거물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다면 세자의 정통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했던 숙종이 정작 죽을 때 경종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해서 노론으로 하여금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게끔 만든 게 한편으로는 역사의 아이러니.
숙종과 송시열의 다툼은 야사에서는 숙종 탄생 시기까지 간다. 숙종의 회임 기간으로 볼 때 숙종을 임신한 시기가 하필이면 효종 초상기와 맞물린 것.[49] 야사에선 이때 송시열이 원자(숙종 이순) 축하를 대놓고 디스했다고 한다.[5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단행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학통이 교조화되는 데 한몫한 군주도 다름 아닌 숙종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이런 송시열에 대해 정치적 연륜이 너무 엄청나서 맞대결하기가 더욱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얻기도 전인 즉위 직후인 14살 시절부터 서인의 영수이자 원로인 송시열을 갈구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죄다 내쫓고 송시열을 귀양보낸 게 바로 숙종이었다.
국왕으로 재위했던 시절, 숙종은 비록 당쟁의 대립으로 인한 조정의 분열을 예방하지 못하고 사적인 애정관계 또한 잘 다스리지 못해 결국 조선 후기 당쟁의 극한 대립을 초래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학식과 온후한 성품으로 역대 조선조 국왕 중 치세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몇 안 되는 성군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 『肅宗春坊日記』에 나타난 숙종의 세자 생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章閣, Vol.33, pp. 21-40, 주기평)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 즉 화폐 제조를 실시했다.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숙종 즉위 초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해 전국의 중앙, 지방 관청에서 유통되었다.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조선 조정에 있어서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숙종의 의도가 적중해서 이후 조선 말까지 화폐 제조를 통한 이익으로 국가 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일본과의 은 무역에서 크게 번영했다.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국가 재정 역시 탄탄했다. 특히 숙종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서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대동법의 영남 / 황해 확대와 후술하는 을해정식을 통한 궁방전 억제 등이 대표적이다. #
조선의 국경도 숙종 연간 사실상 확정되었는데, 조정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널리 알려졌듯 1690년대 안용복이 울릉도는 우리 땅(덤으로 독도도)을 외치고 왔고, 앞서 말했듯 북쪽은 백두산에 청과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를 세워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壓綠 東爲土門)을 적어넣었다. 문제는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청나라 관리 목극 등의 문제로 근 170년쯤 뒤에 간도 떡밥이 시작되어 버린 것. 이는 조선 왕실에서도 알아챘기 때문에 숙종실록에 토문강을 치면 간도 떡밥을 분쇄하는 가장 큰 근거가 나온다. 다만 그 뒤에 대한 대응은 적혀있지 않다.
숙종연간인 1678년에 안남왕 희종은 안남(베트남)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은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그냥 표류한 것으로만 처리하였다.
조선 후기 숙종의 치적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19세기의 민담이 일률적으로 '숙종대왕 호시절에'라는 표현을 채용하는 것으로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는 긴 치세동안 큰 기근들도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환국정치가 있어 평화롭다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매우 긴 46년의 치세동안 조선의 회복과 중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정책을 펼쳤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의 수많은 왕이 평복으로 변장하고 민간에 다니면서 능력 있고 선량한 사람을 발천(發闡)하게 하는 내용의 설화인 조선 시대에서 왕미행설화에서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숙종이다. 정치와 궁중에서 매우 냉혹한 군주였으며, 인구의 감소까지 초래한 큰 기근이 두 번이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수많은 민담에서 백성에게 따뜻한 군주이며 호시절을 살게 한 성군으로 기억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군주라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숙종의 군주로서의 역할 수행에 대해 백성들의 평가가 높았다는 뜻이다.
조선 왕조의 과거사 정리[51]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을 왕으로 종묘에 신원을 회복(신주를 가져다가 모시는 일)시킨 후 깨끗이 복권시켰다.
정종은 본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이라는 짧은 시호만 있어 약칭 '공정왕'이라고 불리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에야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시호 또한 조선의 다른 왕과 동일한 글자 수(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를 갖추게 되었다.
'노산군(魯山君)'이라 불렸던 단종은 숙종 7년(1681년)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격상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의 묘호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의 시호를 받아 복위되었다. 이 때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복권되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이유는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므로,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물론 이때도 단종을 폐위, 사사한 실제 책임자가 세조였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았지만 명분상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52]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상왕(上王)으로 존봉(尊封)하신 뜻이 지극히 극진했었는데, 그 때의 대신들이 그 아름다움을 따르지 못하고 정청(庭請)하고 억지로 간쟁(間爭)하여, 세조대왕의 어지신 마음으로 하여금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神)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참으로 오래 되었습니다.
물론 한 번에 복위한 것은 아니고 이들에 대한 동정론을 배경을 바탕으로,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치기는 했다. 단종 복위 때는 그 기념으로 특별 과거까지 친히 특별히 열었다.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때였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의 역적[53]처럼 간주돼 그 후손들은 연좌제에 따라 족보상으로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다. 인조 때 그나마 군역과 세금을 면제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복권된 건 아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했던 신덕왕후의 아들들인 이방번과 이방석도 복권시켜서, 이때부터 이들은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이라는 정식 시호(왕자)로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기도 했다.[54]
숙종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忠)'을 강조하고[55]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56]
숙종 자신이 출생 배경과 성장 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이 여느 왕과 달리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왕권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쯤 폭넓게 들어줘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이 크게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왕권이 강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반대 의견을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의 왕권쯤은 있어야 복권도 할테니까 물론 설사 왕권이 허약했더라도 여론의 뒷받침이 있다면 복권쯤은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영조 때는 김종서, 황보인이 복권되었고 중종의 왕비였지만 즉위 이후 7일만에 폐위되었던 신수근의 딸이 단경왕후로 복권되었으며 정조 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이 복권되었고 순조 때에는 남이도 복권되었으며 철종 때에는 광해군의 사돈이자 소북의 영수인 박승종 또한 복권되었다. 고종 때는 정도전을 건국에 공이 있다고 완전히 복권시켰고[57] 인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 유효립도 복권되었고[58] 순종 대에 이르러선 김일경, 유자광, 윤원형, 정인홍 같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들의 대부분과, 심저어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이징옥조차 복권된다. 참고로 이완용이 건의하고 주도했다. 어차피 순종 조에는 이미 일본의 속국 신세(일단 고종이 강제 퇴위에 반발하는 중에 순종의 즉위가 권정례로 치러진 상황)라, 망하기 전에 역사를 정리한다는 차원이었을 뿐이다.
숙종은 방위 체계를 수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물갈이하듯 손 봤다.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오군영 제도가 확립된 것이 숙종 대로 평가되는데 방어 체계가 수도 중심으로 재편된 김에 북한산성을 축성한다. 상대적으로 한양도성은 성곽이 너무 길어 수비하기가 어렵고, 강화도는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못막으며, 남한산성은 한강을 도강하는 위험함이 있다는 이유였다.
실록에 보면 이 과정에서 신료 사이에 의견이 크게 갈려 싸우게 되는데 숙종은 이미 마음을 먹어놓고선 계속 논의토록 지시한다. 아마도 청나라의 간섭[59] 때문에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711년에 청에서 해구[60]의 준동이 있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와 도성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 험하디 험한 북한산에[61] 6개월 만에 성을 쌓아 올리고 행궁을 만든다.
이후에도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방비가 허술하다며 탕춘대성을 만들고, 크고 수비하기가 어렵다고 한 한양 성곽을 고치고,[62] 허술하고 멀다고 한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김포에 문수산성을 축성했다.
또한 추가로 개성 개풍군에 있는 대흥산성을 고쳐 쌓고, 평안도 남포에 황룡산성, 강화성, 경상북도 칠곡에 가산산성, 황해도 해주 수양산의 수양산성, 평안북도 염주의 용골산성, 충청북도 청주시의 상당산성을 증개축하고, 남한산성 행궁을 증축한다. 이래저래 성도 많이 짓고 북한산성 행궁과 남한산성 행궁에는 각각 행차하여 잠시 지내고 오는 등 재위 동안[63] 수도 방어에 각별한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이때 만들어진 수도 방어 체계는 영조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정조가 장용영을 만드는 등 약간의 변화를 거치긴 하지만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덕분에 이때의 산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손실된 내부 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 잘 남아있다.
또 한꺼번에 무과 합격자를 1만 8천여명이나 뽑아서 국방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 중 구관당상을 제도화 한 8도구관당상제(八道勾管堂上制)를 전면 도입하였다. 각 도에 1명의 구관 당상관이 임명되어 군무를 분담하여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처리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터지자 예의주시하며 북벌(北伐)을 준비하는 구절이 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결국 흐지부지 하긴 했지만...[64]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세자를 연잉군(영조)으로 바꾸려는 노론과 경종을 지키려는 소론이 끊임없이 싸웠다. 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자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숙종의 의중은 이미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넘어가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당시나 지금이나 주를 이룬다. 경종에게 후사(後嗣)가 없었고 그가 희빈 장씨의 친아들이라는 점도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자 교체는 그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 정작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경종의 정통성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고, 경종 본인도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경종이 한 발언은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가 거의 전부일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경종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딱히 거둔 성과는 없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실책을 저지른 일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폐세자가 곤란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숙종이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면 왕위 문제가 한동안은 조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기어코 분란의 씨앗을 남기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정유독대(丁酉獨對)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숙종은 노론 이이명을 불러 독대를 한다. 조선 시대에 사관도 없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것은 관례상 불법이었다. 더욱이 왕의 임종이 임박한 시점의 독대는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독대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후 이이명의 말과 행동, 노론이라는 그의 위치로 볼 때 세자 교체나 경종 즉위 후에라도 연잉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된다. 어쨌든 숙종의 정유독대라는 나비 효과는 경종 치세기간 끝 없는 정쟁의 씨앗을 제공했고 신임옥사(신축옥사와 임인옥사)로 이어져 결국, 당사자 이이명을 죽게 만든다.
어쨌든 재위 46년째인 1720년 6월 8일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숙종은 역대 조선 왕 중 사망할 때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된 왕인데 사망할 무렵에는 왼쪽 눈 시력을 잃었으며 오른쪽 눈 역시 잘 안 보이게 되었으며 복수(腹水)[65]가 차서 배가 불룩 나온 상태였다고 하며 사망하던 날에는 계비 인원왕후와 세자, 연잉군, 신하들이 와서 엎드리며 울면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하들과 연잉군이 서로 대화하던 사이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피를 토하고 끝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댓글 송시열이 마지막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당한 것도 숙종이 송시열을 싫어한 것과 함께 숙종의 그 변덕스러운 성격 탓. 그러고 보면 지도자 한 사람의 성향이나 자질이 국가 운명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지 알만하다. 다양한 교양이나 지식, 특히 역사나 철학을 접해보지 못한 지도자, 평생 검찰에만 있던 이력의 지도자가 어떤 정치를 펼칠지는 대강 짐작이 가기도 한다. 그의 언행을 종합해보면 평생 인문학 서적은 단 한 권도 아니 읽은 듯. 논어 맹자를 이야기하면 그게 뭐하는 책이냐라고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