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공정숙 교수가 자택 정원 담벼락에 있는 故 송영수 작가의 ‘문수보살’ ‘보현보살’ 부조작품 앞에 섰다. photo 허재성 영상미디어 기자 |
오세훈 서울시장의 장인으로 잘 알려진 조각가 故 송영수(1930~1970). 송영수는 한국 철조각의 선구자이자 추상 조각의 개척자이다. 마흔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이름은 한국 조각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1970년 추풍령에 세워진 높이 30m의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그의 비문에 이렇게 적었다. ‘피 없는 돌에 생명을 주고 거친 쇠붙이에 아름다운 영혼을 깃들이게 한 사람’.
그가 심장마비로 요절한 지 40년, 그의 작품이 새삼 조명을 받고 세상이 다시 그를 추억하고 있다. 경기도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송영수 작가의 작고 40주기를 기념하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 회고전은 송영수 작가의 부인 사공정숙(76) 고려대 명예교수의 역할이 컸다. 사공 교수가 지난 40년간 고인이 남긴 작품을 고스란히 지켜왔기 때문이다.
송 작가가 한국 조각사에서 이뤄낸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부족했다. 1971년 유작전을 비롯해서 서울 평창동 그로리치화랑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미술관에서 열린 3~4회의 회고전 이외에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도 없었다.
송 작가가 한국 조각에 남긴 족적 중 하나는 용접을 이용한 조각을 시도하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조각계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용접 조각’이 화두였다. 송 작가는 1957년 27세의 나이에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로 추대돼 국전 최초의 용접 철조각 작품을 출품했다. 고철이 불을 만나 새가 되고, 소녀가 되고, 예수가 됐다. 불꽃처럼 자신의 생을 조각을 위해 아낌없이 불사르고 떠난 자리엔 불꽃으로 완성한 작품만이 남았다. 그 작품을 지켜오고, 또 그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속속들이 지켜봐온 사공 교수를 만났다. 사공 교수와 송 작가는 1958년에 결혼, 2남 2녀를 두었다. 그중 큰딸인 송현옥씨가 오세훈 서울시장의 부인이다.
사공 교수는 송 작가와 함께 살았던 서울 종로구 성북동 자택에서 40년이 넘게 살고 있었다. 집안과 정원엔 조각 작품 등 송 작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쪽 방은 아예 송 작가 작품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회고전 때문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모두 나가 있어 지금은 비어있는 상태라고 했다. 한쪽 담벼락엔 송 작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다는 부조 작품 ‘피리 부는 천사’가 행복한 얼굴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사공 교수는 “송 선생은 누구보다 행복한 예술가로 살다 갔다”고 말했다.
예술가와 이학도의 만남
수학을 전공했던 사공 교수와 송영수 작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학도와 예술가를 엮어준 것은 탁구였다고 한다.
사공 교수는 초등학교 교감의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사공 교수는 “과학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고려대 수학과에 진학했다. 학기 말에 전체 학생 중에서 3명을 뽑는 ‘특대장학생’이 됐다. 당시 고려대 학교신문에도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제목은 ‘동양의 퀴리가 돼라’. 수학도에게 ‘퀴리’가 되라니 좀 앞뒤가 안 맞긴 하지만 어쨌든 사공 교수는 고려대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여학생이었다. 졸업 하자마자 수도여고 교사가 됐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송 작가는 성북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수도여고에도 강사로 출강을 했다. 송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 수도여고 방순경 교장이 작업실까지 내줘 그곳에서 작품 활동도 했다. 당시 송 작가는 국전에서 4년 연속 특선에 당선된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였다. 쉬는 시간 탁구장에서 가끔 마주친 두 사람은 함께 탁구를 치고는 했다. “송 선생이 탁구를 치면서 ‘이 여자하고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대요. 어느 날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거예요. 덥석 받아들이기도 뭐해서 핑계를 댔는데 ‘아 그러시냐’면서 순순히 믿더라고요. 그렇게 5~6개월을 계속 거짓 핑계를 대는데도 ‘아 그러시냐’ 하고 말아요. 순수한 그 모습에 넘어갔어요.”
“예술을 전혀 모른다”고 걱정을 하는 사공 교수에게 송 작가는 “추상 수학과 추상 조각은 아주 잘 통하니 걱정 말라”면서 큰소리를 쳤다. 사공 교수가 일종의 추상 수학인 위상 수학을 전공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사랑 앞에 수학과 예술의 차이쯤이야 무슨 문제였을까.
1958년은 송 작가에게 변화의 해였다. 결혼을 했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강사가 됐고, 추상 철조각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당시 붐이 일기 시작했던 조형물 제작 의뢰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높이 21m의 국기게양대도 그의 작품이다. 게양대를 계기로 육사에 송 작가의 작품이 세 개가 더 세워졌다. 싸우고 있는 사자상 모양의 분수대인 ‘화랑천’과 ‘승화대’, 1964년에 세워진 ‘통일상’이 그것이다. 태양을 형상화해 빛이 뻗어나가는 것처럼 만들어진 ‘통일상’은 한국 최초의 야외 추상조각이다.
육사 ‘국기 게양대’ ‘화랑천’등 작품 남겨
송 작가의 하루는 조각으로 시작해서 조각으로 끝났다고 한다. 조형물을 제작할 때도 설계도를 넘기는 것에 끝나지 않고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현장을 지켰다. “공군사관학교 기념탑인 ‘성무대(星武臺)’를 만들 때는 아예 학교 앞에 방을 얻어 제작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추상작품을 구상하고 만드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호주머니에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버스 안이든 전철이든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그렸어요. 하루 종일 조각만 생각하는지 아이디어가 샘솟는 사람이었어요. 머리맡에 늘 스케치북을 두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드로잉을 하곤 했어요.” 사공 교수의 말처럼 송 작가의 열정은 스케치북 102권에 그대로 남아있다. 2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그만큼의 드로잉을 남겼다는 것은 그의 추상작품이 얼마나 치열한 구상의 시간을 밑바탕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작품을 구상하면 ‘좋지! 좋지!’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내게 드로잉한 것을 보여줬어요. 구상적인 바탕이 있어야 진짜 추상이 되는 것이라면서 열심히 설명해주는데 난 만날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공 교수는 송 작가의 행동까지 흉내를 내며 설명했다. 사공 교수는 송 작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수학은 아무리 해도 저렇게 즐겁지 않은데 예술가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예술가가 아닌 남편으로서의 송 작가는 어땠을까.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어요. 퇴근할 땐 늘 웃으면서 ‘나 왔어’ 큰소리로 외치면서 들어왔어요. 내게 늘 결혼해줘 고맙다고 했어요. 가정을 이루는 것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면서. 작품을 완성하면 꼭 보여줘요. 제작하는 과정, 그날 스케줄도 시시콜콜 이야기해주고. ‘작품이 뭘 뜻하는 것이냐’고 물으면 묻지 말고 그냥 보래요. ‘자기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추상조각의 매력이다’라면서.”
“난 정말 행복한 조각가”
1970년, 송 작가는 서울대 조소과 교수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때였다. 조형물 주문도 쏟아졌다.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설계를 맡고서는 ‘드디어 추상조각을 알아주는 시대가 왔다’면서 너무 좋아했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엔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을 만나고 왔어요. 이병철 회장이 ‘예술계를 위해서 마음 맞는 일을 하자. 자주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다면서 기대에 차서 돌아왔어요.”
3월 31일, 송 작가는 원호처(현재의 국가보훈처)에서 조형물 주문을 받고 조감도를 완성하느라 새벽 2시에나 잠이 들었다. 2~3시간 잤을까. 사공 교수는 남편이 흥분해서 깨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여보! 여보! 일어나봐’ 하면서 날 깨우더니 ‘정말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면서 또 스케치북을 내밀어요. 내가 건강 좀 생각하라고 화를 냈어요. 고혈압으로 약을 먹고 있었거든요. 그게 마지막 드로잉 작품이었어요. 그때 그것을 안 봐준 것이 지금도 후회가 돼요.”
송 작가는 그날 아침 “난 너무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 “상기(막내)가 재롱도 피우고 집에 아틀리에도 있고 모든 사람이 내 조각을 좋아하니 난 참 행복해.” 그 말이 유언이 됐다. 송 작가는 친구와 저녁을 먹다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후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남편이 죽었다는 생각보다는 재주가 너무 아까웠어요. 옆에서 지켜본 송 선생은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쏟아졌어요. 아까운 재주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안타까워요. 그 많은 드로잉을 작품으로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재주가 아깝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사공 교수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재혼, 그리고 가슴에 묻은 추억
사공 교수는 고려대 이과대 최초의 여자 교수다. 수도여고 수학교사로 있으면서 고려대 대학원을 다녔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고려대는 강의를 맡기려고 했지만 학교의 일부 간부들이 “어떻게 어린 여자가 남자를 가르칠 수가 있느냐”면서 반대했다. 여교수는 상상하기 힘든 시대였다. 결혼하고 스물아홉살이 되어서야 고려대 강사로 들어갔고 고려대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사공교수뿐만 아니라 2남2녀 모두 고려대 출신이다. “고려대 교직자 자녀는 장학금을 준 덕분에 어려움 없이 아이들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킬 수 있었어요. 고려대에 큰 은혜를 입은 셈이지요. 고마운 마음에 송 선생 대표 작품인 ‘순교자’와 ‘새’를 고려대에 기증했어요.”
사공 교수가 혼자가 됐을 때 막내가 네 살이었다. 한창 크는 네 아이 돌보랴, 학교 나가랴, 슬픔을 수습할 새도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사공 교수가 줄곧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시어머니가 키웠다. 송 작가는 어머니가 두 분이다. 철도청 공무원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송 작가는 후사가 없는 큰 아버지에게 입양됐다. 큰 어머니가 송 작가를 키운 어머니다.
황망하게 송 작가를 보내고 7년. 스위스로 단기 연수를 갈 기회가 있었다.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구경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곳에서 한국인 물리학자를 만났다. 미국 동부의 명문 브라운대 출신인 정복근(70) 경희대 명예교수였다. 그곳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정 교수는 사공 교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한국인이 달랑 둘밖에 없었던 탓도 있지만 정 교수는 내심 ‘딴마음’이 있었다. 정 교수는 “사공 교수가 유달리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노총각이었다. 한국 사람이 그리웠던 정 교수는 사공 교수에게 푹 빠졌다.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한 정 교수는 사공 교수가 여섯 살 연상이라는 것도, 네 아이의 엄마라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공 교수는 모시고 사는 시어머니도 마음에 걸렸고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이었다. 뜻밖에도 큰딸인 현옥이 엄마의 재혼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부인인 현옥은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 문제는 시어머니였다. “아들 대신 며느리를 의지하고 살았는데 재혼한다고 하니 당연히 섭섭하셨겠죠. 당신 손으로 키운 손주들이 엄마 재혼을 찬성하고 나서는 것도 당황스러웠나봐요. 어머니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죠.”
사공 교수는 재혼을 하고서도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살았다. 정 교수는 부인의 전 남편 어머니를 모시고 산 것이다. 아이들을 유달리 좋아하는 정 교수를 아이들도 잘 따랐다. 사공 교수는 “아이들이 엄마 생일보다 정 교수 생일을 더 챙긴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누구보다 송 작가의 팬이다. 사공 교수는 “나보다 더 송 선생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서 “그래서 더 고맙다”고 말했다.
사공 교수가 송 작가의 작품 대부분을 지금까지 지켜온 것도 정 교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대기업 미술관에서 작품을 몽땅 사겠다고 했어요. 마지막 포장을 하고 보내려는데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그때 정 교수가 옆에서 적극적으로 말린 덕분에 포장한 것을 다시 풀었어요.”
이제 어렵게 지켜온 작품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다. 사공 교수는 “아버지가 남긴 작품이니 아이들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다들 너무 바빠서 얘기할 시간이 없다”면서 “오래도록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사위인 오세훈 시장은 공직자 재산등록을 할 때 장인의 작품이 재산 목록에 오르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공 교수는 “아이들도 아버지 작품을 보고 싶어해 복사품을 만들어 나누어줬는데 기자들이 그것을 보고 가격을 추정해서 보도했다”고 말했다. 사공 교수는 오 시장 결혼 당시 반대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공 교수는 “홀어머니의 외아들이라 걱정이 좀 됐는데 매일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놓고 전화할 정도로 성실해서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사공 교수는 인터뷰 내내 송 작가를 추억하는 것이 즐거워보였다. 40년이 지난 일들도 마치 며칠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말을 끊기가 어려웠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5시간쯤 지났을까, 정 교수가 직접 만든 커피를 내려놓고 가면서 말했다. “내 이야기는 쓰지 말아요. 주인공이 송 선생인데. 저 사람은 자다가도 일어나서 송 선생 이야기 하는 사람이에요.”
- [2133호] 2010.11.29 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