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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7일 오늘의 역사
2019년 태풍 제 13호 링링 한반도 관통
2015년 서울 경전철 신림선 착공
2013년 김조광수, 청계천 광통교서 동성 연인과 결혼
영화 제작자 겸 감독 김조광수가 19살 연하의 동성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7일 서울 청계천 광통교에서 '당연한 결혼식,
어느 멋진 날'이라는 이름으로 영화감독 김조광수와 레인보우팩토리 김승환 대표가 결혼식을 진행했다.
이날 김조광수는 동성결혼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정되는 제도라며 "'우리 오늘 결혼해요!' 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상할 것도 부자연스러울 것도 없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동성애자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갑자기 이성애자가 동성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저희 결혼을 방해하기보다는 다른 기회에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남의 축제를 찾아와 굳이 방해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고 소견을 밝혔다.
김조광수와 김승환은 2004년 게이 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처음 만난 후 9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2013년 2020하계올림픽 일본도쿄로 결정
2010년 스페인 남동부 산불 2,500ha 피해
2010년 국립극장 노사갈등으로 극장창립 60년 만에 처음으로 공연 중단
2010년 '희극 연기 40년' 배우 서희승씨 별세
제9회 이해랑연극상을 받은 배우 서희승(58)씨가 2010년 9월 7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전남 영광서 태어난 고인은 40년 가까이 국립극단에 몸담으며 연극 '수전노' '맹진사댁 경사', 뮤지컬 '댄싱 섀도우' 등 200편의 무대에 오르며 희극적 인물을 빚어냈다. 장민호·백성희 등 선배들을 연구하고 탈춤·판소리·사물놀이를 배우며 장점을 키웠다. 서울연극제 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다.
2009년 경북 군위에서 세계 최대 익룡 발자국 발견
2009년 9월 7일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익룡(翼龍·Pterosaur) 발자국 화석이 경북 군위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연기념물센터는 군위군 군위읍의 약 9000만년 전~1억1000만년 전 지층에서 지금까지 보고된 것 중 가장 큰 익룡 발자국 화석을 찾아냈다고 7일 밝혔다. 길이 35.4㎝, 폭 17.3㎝인 이 발자국은 익룡의 오른쪽 앞발로 찍은 것으로, 전형적인 익룡 앞발자국의 특징인 비대칭형 세 발가락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지난 1996년 전남 해남군 우항리에서 발견돼 세계 최대 익룡 발자국으로 보고된 ‘해남이크누스’의 앞발자국(길이 33㎝, 폭 11㎝)이나 뒷발자국(길이 35㎝, 폭 10.5㎝)보다 크다.
익룡과 공룡 발자국에 대한 세계적 전문가인 마틴 로클리 미국 콜로라도대 교수는 “익룡 발자국이 틀림없고, 이렇게 크고 잘 보존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백악기 익룡 발자국이 발견된 지역은 9개국에 불과하며, 그중에서도 한국과 스페인이 가장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남 이외에 경남 하동군 금성면과 사천시 서포면,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등지에서 발견됐다.
‘날개를 가진 도마뱀’이란 뜻의 익룡은 공룡은 아니며, 공룡이 살았던 시대인 중생대에 하늘을 지배했던 파충류다.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후기(약 2억2000만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가 공룡이 멸종했던 백악기 후기(약 6500만년 전)에 공룡과 함께 멸종됐다.
임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그동안 거대 익룡 화석들은 모두 백악기 후기(약 6500만년 전)의 것이었는데, 이번 발견으로 약 1억년 전인 백악기 전기에도 거대 익룡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에 함께 발견된 작은 공룡 발자국 화석들은 익룡의 먹잇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 발견 결과를 이달 말 영국 브리스톨에서 개최되는 제69차 세계척추고생물학회에서 발표하고, 세계 최대 크기의 익룡 발자국 화석으로 공인받을 예정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청와대서 영수회담
2005년 증시 11년 만에 사상 최고치 경신
주가가 10년10개월 만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7일 유가증권시장에서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20.34포인트(1.81%) 급등한 1142.99를 기록, 1994년 11월 8일에 기록했던 1138.75의 최고치 기록을 경신했다.
이날 코스닥지수도 6.13포인트(1.17 %) 오른 530.53을 기록, 한 달만에 530대에 올라섰고, 도쿄 증시의 닛케이 평균이 0.06% 상승하는 등 아시아 증시도 일제히 상승세를 기록했다.
그러나 최근의 주가 상승은 ‘경기침체 속의 주가 상승세’라는 이상 패턴을 보이고 있으며, 기업들이 설비투자 대신 주식시장에서 자사주(自社株)를 사들인 데도 기인하는 ‘건강하지 못한 주가 상승’이라는 일부 평가도 나왔다.
2004년 비제이 싱, 세계 1위 타이거 우즈(264주) 제치고 골프황제에 등극
2004년 9월 7일 무표정한 비제이 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17번홀(파4) 7m 버디퍼트로 이 홀에서 파를 기록한 2위 타이거 우즈에게 3타차로 앞서며 승리에 쐐기를 박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싱은 새로운 골프황제로 등극했고, 264주 동안 세계랭킹 1위를 달리던 우즈의 독주도 막을 내렸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TPC에서 열린 도이체방크챔피언십 최종라운드. 싱은 2언더파를 치며 최종합계 16언더파 268타로 공동 2위(13언더파) 우즈를 3타차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세계랭킹 포인트도 48점을 보태며 평균평점 12.72점으로 12.27점에 머문 우즈를 밀어내고 세계 1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싱은 13번홀(파4)에서 보기로 우즈에게 동타를 허용하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은 14번홀(파4)에서 우즈가 보기를 범했고 15번홀(파4)에선 싱이 버디퍼트를 성공시키며 2타차로 벌린 뒤 내달려 승리했다. 시즌 6승째를 챙긴 싱은 우승컵과 상금 90만달러(10억여원)도 받았다. 이미 지난해 우즈의 상금왕 6연패를 저지했던 싱은 세계랭킹에서마저 정상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세계 1인자가 됐다.
2002년 12년 만의 남북대결, 남북통일축구경기 개최
2002년 9월7일 3박4일간의 남북 축구경기대회가 열렸다
90년 10월 이후 12년 만에 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경기가 열렸다
경기는 0대0 무승부로 끝났다. 6만여석의 경기장이 꽉 찬 가운데 ‘아리랑’ 가락 속에 입장한 남북대표팀은 경기 전 함께 사진촬영을 하며 선전을 다짐했다.
한국은 당초 한수 위의 전력으로 평가받았으나 이동국과 김은중, 이천수 등 최전방 공격수 트리오의 호흡이 맞지 않아 고전했다. 전반전은 오히려 북한이 날카로운 역습을 선보이며 경기 주도권을 쥐었다. 북한은 전반 4분 전영철의 슈팅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득점 기회를 만드는 등 잘 짜여진 조직력을 선보였다. 한국은 후반 들어 체력이 떨어진 북한을 압도했으나 골 결정력 부족으로 득점에 실패했다. 아시안게임 우승이 목표인 한국으로선 미드필드와 공격의 짜임새에서 문제점을 확인한 경기였다.
그러나 당시 경기장에는 승부를 가리기 위한 치열함 보다 넘어진 상대선수에게 손을 내미는 정겨운 모습이 가득했다
남북 선수들은 경기 후 대형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그라운드를 돌아 관중의 환호를 받았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클린턴 미대통령 뉴욕 한미정상회담
1999년 골프선수 김미현, 미국 LPGA 스테이트팜레일클래식에서 우승. 미국 진출후 첫 승
미국 진출후 첫 승 김미현 선수가 1999년 9월 7일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첫 승을 땄다.
김미현은 이날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레일GC(파72)에서 끝난 스테이트팜레일클래식 최종 3라운드에서 2언더파를 쳐 합계 12언더파 204타로 우승, 상금 11만6250달러(약 1억4천만원)를 받았다.
이로써 김미현은 99년 시즌 신인왕도 확정됐다.
미국으로 떠난 후 7개월만의 쾌거였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골프를 시작한 '슈퍼 땅콩' 김미현은 153cm 키의 단신선수다.
1996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에 뛰어들자마자 그해 3승을 거둬 프로동기생인 박세리(4승)와 단숨에 국내 그린을 양분해 버렸다.
1999년 재일교포 무기수 권희로씨, 복역 31년 7개월 만에 가석방-귀국
일본내 최장기 복역수였던 재일동포 권희로(·71)씨가 1999년 9월 7일 부산 김해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권씨가 1998년 작고한 어머니 박득숙씨의 유골을 안고 후견인 박삼중 스님과 함께 오후 1시40분 JAL기 957편으로 공항에 도착하자, 100여명의 취재진과 500여명의 시민들로 공항은 북새통을 이뤘다.
이에 앞서 일본 정부는 우익단체들의 테러에 대비, 권씨가 수감중이던 형무소에서 4일 그를 출감시켜 모처에서 보호하다 이날 가석방과 동시에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그를 추방했다.
권씨는 지난 1968년 2월20일 일본 폭력단 간부 2명을 살해한 뒤 재일 한국인 차별에 울분을 토로하며, 13명의 여관투숙객을 상대로 88시간동안 인질극을 벌인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31년 7개월간을 일본 교도소에서 복역해 왔다.
권씨는 1979년 옥중결혼한 부인과 고국에 정착하는 듯 했으나 부인이 권씨의 전 재산을 갖고 도주한 뒤 한때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더구나 자신의 후원자 박모 여인과 가깝게 지내던 중 박여인의 남편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2000년 9월5일 구속됨으로써 고국에의 정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97년 모부투 前 자이르 대통령 사망
모부투 세세 세코 前 자이르 대통령(66)이 1997년 9월 7일 밤 망명지인 모로코에서 최후를 마쳤다. 전립선 암을 앓아온 모부투는 6월말부터 입원해있던 라바트의 한 군병원에서 숨을 거뒀으며, 사망 당시 체중은 40kg에 불과했다.
그는 32년 간 재임 중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했던 나라를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아프리카 지도자 중 모로코 국왕 하산 2세 다음으로 장기 집권한 그는 로랑 카빌라 후임 대통령 측 반군이 자이르 전역을 점령한 1997년 5월 모로코로 피신했다. 지난 1965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재임 중 아프리카 내 반공산 거점에 대한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의 지원을 악용, 정적을 공개 교수형에 처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인플레 7백%의 국가 경제는 방치하면서도, 풍부한 광물 자원과 서방 원조는 친구들과 독식했다. 덕분에 지난 1986년에는 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프랑스에서 초음속 콩코드기를 전세냈고, 일년 중 상당기간을 프랑스 남부의 1천만달러짜리 개인 별장과 벨기에의 고성 등지에서 보냈다. 첫 부인의 시신 보관을 위해 1천4백만 달러 규모의 기념당을 만들기도 했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그가 남긴 재산은 자이르 전체 외채의 70%에 해당하는 70억 달러라고 전해진다.
1995년 러시아, 북한에 조소동맹조약 폐기 통보
1994년 ‘007 시리즈’의 테렌스 영 감독 사망
숀 코너리가 주연한 60년대의 오락첩보영화 ‘007 시리즈’ 중 1-2편과 4편을 감독, 유례 없는 흥행을 기록한 테렌스 영 감독이 7일 프랑스 남부 칸의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8일 런던에서 발표했다. 향년 79세.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에서 동양학을 공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아른험 전투에 탱크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1940년 영화 ‘On the Night of the Fire’의 각본을 쓰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1940년대와 1050년대에는 주로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1948년 ‘당신과의 하룻밤’이란 영화를 처음으로 감독했고 1962년 숀 코네리(Sean Connery)를 주연배우로 기용하여 찍은 007 시리즈의 첫 작품 ‘007 살인번호’로 큰 성공을 거둔 후, 1963년 ‘007 위기일발’, 1965년 ‘007 썬더볼’을 연달아 연출했다. 이후 몇 편의 액션영화들을 만들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1981년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대작 ‘오, 인천’을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대표작으로 007 시리즈 3편 외에 ‘블랙 타이츠’(1960) ‘어두워질 때까지’(1967) ‘배신자’(1970) ‘살인 영장’(1972) ‘비극의 마라톤’(1988) 등이 있다
1993년 사상 첫 공직자 재산공개
헌법 사상 처음으로 입법 사법 행정부와 헌법재판소 중앙선관위의 1급 이상 고위 공직자, 국영기업체 상근임원 등 1167명의 재산이 공개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국무회의에서 자신의 재산을 공개한 뒤 ‘분위기’를 몰고 갔다.
군부독재의 잔존 세력과 민정당 출신 정치인들을 몰아내는 방편으로 공직자 재산 등록 공개 제도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구세력을 축출하는 데는 일정 부분 성공했고 공직 사회를 맑게 하는 데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
경제 관료들의 업무상 정보를 이용한 주식 투자는 물론 고위 공직을 꿈꾸는 이들의 부적절한 재산 증식에 제동이 걸렸다.
1992년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 제2회 서울평화상 수상
미국의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이 제2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평화상 심사위는 1992년 9월 7일 수상자 선정발표에서 1980년대 후반 레이건 대통령을 보좌, 미-소 정상회담과 군축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동서냉전의 종식으로 세계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선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슐츠는 지난 1982년부터 1989년까지 레이건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소련 등과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중동, 아프가니스탄, 남아프리카 등 분쟁다발 지역의 평화구축에 적극 기여했다. 유럽지역에서의 재래식 무기 감축협상서 괄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슐츠는 또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동서양 진영의 폭넓은 참가를 호소했으며 서울올림픽 기간중의 테러에는 몇배 더 큰 보복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진행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뉴욕출신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거쳐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시카고 대학서 경영학 강의를 하는 등 교수생활을 하다 1969년 노동부장관에 임명돼 정계에 발을 디딘 후 경제계로 진출해 미국 최대규모의 건설회사인 벡텔사 사장-회장을 역임한 후 국무장관에 발탁됐었다.
1991년 외무차관 단장으로 한 대표단 평양 77그룹 아주그룹 각료회의 참석
1991년 넵투늄(초우라늄원소)을 발견한 미국의 핵물리학자 맥밀런 사망
1990년 20세기 최고의 마술사 데이비드 커퍼필드 한국방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리장성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유리벽 통과, 여자 조수를 9등분한 후 다시 결합시켰으며, 대형 카메라와 여자 조수를 삽시간에 사라지게 함
자유의 여신상, 비행중인 제트기 등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하고, 중국의 만리장성 벽을 뚫고 지나감. 1987년부터 대형톱날로 자신의 몸을 절단해 상체와 하체가 따로따로 무대 위를 돌아다니게 하는 ‘죽음의 톱날’이란 목숨을 건 마술 시도
자폐증환자였던 그는 장애인들에게 삶의 의지 심어주려 재활프로그램으로 마술을 활용한 ‘프로젝트 매직’ 개발, 30여 나라 1천여 병원에서 실시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장애인에게 손놀림이나 인식능력 높이는 등 효과
1987년 호네커 동독공산당 서기장, 분단후 첫 서독 방문
1986년 전국승려 2천 여 명 해인사서 불교악법철폐대회 열고 시위
1984년 교황청, 해방신학의 기수 보프신부 사문
1980년 연세대, 충북 단양서 6~10만년전의 인류 유골 발견
1977년 미국-파나마 신파나마운하조약 조인
1975년 레바논 내전상태로 돌입
레바논에 거주하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시가전이 1975년 9월 7일부터 더욱 격화되어 내전상태로 돌입했다. 1975년 2월 레바논 남부의 한 항구에서 기독교계 회사가 독점 어업권을 획득하자 이에 반발한 이슬람교도 어민들이 군대와 충돌, 20여명이 사망한 것이 내전 재발의 시작이었다.
이슬람교도의 폭동에 격분한 우파 기독교도의 한 사병이 팔레스타인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폭격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사태는 종교적 대립으로까지 발전, 기독교도-이슬람교도-팔레스타인 게릴라-정부군이 충돌, 서로를 적대시했다. 연말까지 20여 차례의 휴전협정이 반복되었지만 사망자는 7,000여명에 달했다.
1969년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 당 해산을 결의하고 동시에 신당 발기위원회 구성
1966년 간첩 장세준 사건
1962년 일본의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 사망
1962년 서울 한남동서 나룻배 뒤집혀 37명 익사
1961년 흐루시초프-네루 회담
1959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 10개국 군축위 설치에 합의
1956년 노예제도 폐지 국제조약, 제네바에서 31개국 조인
1950년 필리핀, 미곡 만톤 의료약품 등 송한(送韓)
1949년 멕시코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사망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성립(서독)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국회통과
1945년 야간통행금지 실시
1945년 미국 극동사령부 남한에 군정 포고
맥아더 미 극동사령부가 1945년 9월 7일 일본 동경에서 남한의 모든 통치권을 미 군정하에 두는 미군정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포고문1호`를 발표했다. 이에 앞선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육군 제24군단(군단장 하지중장)은 이튿날인 9월 9일 일본군 대표와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를 접수받았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전문과 6개조로 구성된 `포고문 1호`는 1.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권은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부가 행사한다. 2.점령군에 대한 반항 행위나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는 엄벌에 처한다. 3.공용어는 영어로 한다.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어 9월11일 하지중장은 남한 군정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아놀드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했다. 9월18일에는 모든 집회-시위에 대해 허가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 발족할 때까지 3년간 계속됐다.
1940년 독일기, 영국 본토 폭격. 독일공군, 영국 런던 대공습
1929년 안익태, 첼로독주회를 경성공회당에서 가짐
1924년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 사망
1921년 제1회 미스아메리카 선발대회 개최
1921년 9월 7일, 미국 동부 애틀랜틱 시티에서는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질 행사가 하나 열렸다.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 바닷가 관광도시인 애틀랜틱 시티의 한 지방신문사 간부는 피서객들을 좀 더 오랫동안 붙잡아 둘 심산으로 `수영복 미인대회`를 생각해냈다. 신문사와 상공회가 해변가에서 공동 주최한 제1회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는 주변 시에서 선발돼온 젊은 여성 8명이 출전했다. 영예의 1위를 차지한 마거릿 고먼은 키 155cm에 몸무게 49kg, 가슴둘레76cm 허리둘레 63cm 히프81cm의 자그마한 체구였다.
젊은 여성들이 자극적인 수영복 차림으로 퍼레이드를 한다는 데 비난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듬해에는 57개 도시가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미녀들을 뽑아 보냈다. 당시 막 일기 시작한 영화-사진 붐과 맞물려 1920, 1930년대 미국 전역에서는 수천개 미인대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미인대회 입상은 성공을 약속하는 마술 열쇠였다.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어 영화나 연극에 출연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수영복 심사와 출전자들의 교양 미달은 끊임없는 논란거리로 남았다.
때문에 1927년 중단됐던 원조 애틀랜틱 시티의 미인대회는 1935년 부활하면서 출전자들의 갖가지 재능을 겨루는 탤런트 분야를 추가했다. 1940년대 들어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자 장학 기금까지 내놓았다. 첫 수혜자는 최초의 대학 졸업생이었던 베스 미에르슨(1945년)으로 5000달러를 장학금으로 받았다. 현재 미스 아메리카 조직위원회는 여성만을 위한 세계 최대 장학재단으로 연간 5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1954년 이래 TV 최고 인기 연례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미스 아메리카는 1960년대 후반 여권운동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1902년 2차 단발령
대한제국 선포 이후 스스로 본격적인 서양풍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양 풍속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줄고, 다른 한편에서는 박은식 등 유학의 개신을 주장하는 청년 유림들이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1902년 근대화의 일환으로 2차 단발령이 시행됐다. 민중들도 스스로 근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을 뿐더러 청년 유림들이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널리 퍼뜨리며 별 탈 없이 단발령이 시행됐다. 즉, 정책의 뒷배경에 의도가 의심스러운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첫 단발령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고, 스스로의 필요성을 자각한 상태에서 두 번째로 진행한 단발령은 성공적으로 정착한 셈이다.
물론 국가 단위의 큰 사회에서 진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성공적이었던 2차 단발령도 예외는 아니어서, 보수주의자 중 1930년대까지 단발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노년층 중에서는 여전히 기존의 상투 차림으로 생활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1901년 청, 의화단사건 후 열강 11개국과 최종의정서 12조에 조인(신축조약)
베이징 의정서[北京議定書]라고도 한다. 청 정부측 대표인 이쾅[奕劻]·이홍장(李鴻章)과 영국·독일·일본·미국·러시아·오스트리아·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스페인·벨기에 등의 11개국 대표가 베이징에서 체결했다. 신축조약은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통치를 강화시켰으며, 청 정부는 이에 반대할 힘이 없었다.
총 12조이고 부칙은 19항이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건을 일으킨 관리를 처벌하고 각국에게 사과한다. 백은 4억 5,000만 냥을 1940년까지 39년간 연 이자율 4리로 원리 합계 9억 8,000만 냥을 배상한다. 이를 위해 해관세·상관세(常關稅)·염세(鹽稅) 등을 차압한다. 베이징 동쪽 교외에 있는 민간거주지를 외교관 지역으로 설정하고 각국에서 군대를 주둔시켜 관리한다. 다구[大沽]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포대(砲臺)를 파괴하며, 베이징에서 산하이관[山海關] 사이의 철도 옆 주요지점 12곳에 각국의 군대를 주둔시킨다.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외무부로 고치고 6부(六部)보다 위에 두어 대외업무를 담당하게 한다. 중국인이 조약 체결국을 적대시하는 조직을 결성하거나 그 조직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성(省)의 관리자는 관할지역에서 조약 체결국 국민이 상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하면 곧 이를 진압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그 관직을 박탈하고 다시는 임용하지 않는다.
1901년 고종 황제 탄신 50년 기념 축하, 독일인 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 국가 처음 연주
1887(조선 고종 24)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이름 고침
1887년 시의 입체주의 주장한 영국 시인 시트웰(-1964) 태어남
1822년 브라질,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808년에 나폴레옹에게 쫓겨 도망 온 포르투갈의 돈 페드로 황태자가 페드로 1세라 칭하고 독립선언 1888년에 노예제도 폐지하자 지방의 세력가들이 왕을 쫓아내고 공화제 채택
1500년에 포르투갈인 카브랄이 브라질에 도착해 알려짐. 브라질이란 이름은 붉은 색 염료의 원료로 쓰이는 브라질 나무에서 따온 것 1531년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삼음. 원주민을 죽이거나 대륙 한가운데로 내쫓고 아프리카노예 수입해 사탕수수 재배 시작
1533년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 출생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1533년 9월 7일 영국 그리니치에서 튜더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블린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궁정내 세력 다툼으로 왕위계승권이 박탈되는가 하면 반란가담의 혐의로 런던탑에 유폐되는 등 파란만장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메리 1세가 사망한 1558년 25세로 즉위해 1603년 사망으로 폐위할 때까지 영국을 통치하며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메리 1세 때부터 있어 왔던 종교갈등을 가톨릭과 퓨리턴을 억압하고 전 국민에게 국교회의 의식과 기도서를 강제로 지키게 함으로써 해결했다.
여왕의 치세 중 영국은 섬나라에서 대해상제국으로 성장했으며 문화적인 면에서도 영국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해 셰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의 문인과 학자가 배출돼 여왕은 모든 영광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1522년 마젤란 최초로 세계일주하고 에스파냐로 돌아옴
1191년 제3차 십자군 원정서 잉글랜드 리처드 1세가 아르수프 전투서 살라딘 패배시킴
70년 로마 제국 티투스 장군 군단 예루살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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