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의 아들 정호씨, 딸 구생씨 모두 사망… 손녀 은숙씨는 충남 아산에 정착
⊙ 은숙씨 “아버지 필체에 놀라. 소월 할아버지 육필과 유사해”
⊙ “소월을 기념하는 장학회나 학생들 위한 백일장 열고 싶어”
[편집자 주]
20세기 한국의 문인만큼 치열하게 산 이들도 드물다. 나라를 잃었고 문자를 빼앗겼으며 이념의 소용돌이와 전쟁의 極限을 모두 체험했다. 더러는 親日로, 더러는 붓을 꺾고 순수와 이념문학의 길로 흩어졌지만 이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국 근대 문인가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 생존한 가족의 입을 통해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일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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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金素月·1902~1934·본명 金廷湜). ‘국민시인’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시인이다. 민요풍의 7·5조 자수율로 20세기 한국의 기념비적인 서정시 〈진달래꽃〉을 비롯해 〈엄마야 누나야〉 〈초혼〉 〈산유화〉 〈먼 후일〉 〈못 잊어〉 〈금잔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로 시작하는 〈부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문학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1920년대에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라고 소월을 평가했다.
서른두 해를 보낸 짧은 생애 동안 시인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1888~1968)의 딸 실단(實丹)씨와 결혼해 딸 구생(龜生)·구원(龜源)을 낳은 뒤 내리 아들 넷을 더 낳았다. 준호(俊鎬)·은호(殷鎬)·정호(正鎬)와 소월이 죽은 후 유복자로 태어난 낙호(洛鎬) 등이다.
6남매 중 맏딸 구생씨와 3남(男) 정호씨만이 6·25를 거쳐 남한에 정착했고 나머지는 북에 남아 생사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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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초상. |
구생씨는 1957년 천안에서 사망했다. 정호씨는 슬하에 은숙(55)과 영돈(53) 남매를 두었으나 200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정호씨의 아내 염경자(簾慶子)씨는 보다 앞서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정호씨는 6·25 당시 북에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생포돼 반공포로로 풀려난 뒤 국군에 재입대하는 곡절을 겪었다. 소월의 친자(親子)임을 숨겨오다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내력을 처음 공개했다. 1957년인가 58년 무렵의 일이다.
이후 몇몇 출판사로부터 받은 《소월시집》 인세(印稅)로 사업을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소월의 시를 사랑하는 월탄(月灘 朴鍾和)과 미당(未堂 徐廷柱), 시인 구상(具常),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 등의 추천으로 1967년 국회도서관 경비실에서 근무한 일도 있다.
정호씨의 맏딸 은숙씨는 “어린 시절, 미당 선생님을 ‘서정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손녀처럼 대하셨다”고 했다. 그녀가 결혼할 때 미당 선생이 직접 주례를 섰다.
은숙씨는 현재 충남 아산에 살고 있다. 몇 년 전 온양의 송악저수지 부근에서 닭백숙·닭볶음탕·보신탕·붕어찜 같은 음식을 팔았다. 그러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식당을 날려버렸다. 그녀의 남편 김원배씨는 절치부심하다 작년 7월 아산 장존동에서 배터리 판매업을 시작했다.
충남 아산에 정착한 소월의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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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김정호씨. |
은숙씨는 할아버지 소월로 인해 평범하게 살 수 없었다. 소월을 둘러싼 확인이 어려운 설(說)과 소문, 오류와 과장에 가슴 아파해야 했다. ‘소월이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대표적인 예다. 생전에 김정호씨는 “돈 벌겠다고 글 쓰는 사람들을 상대로 고소를 한다거나 싸우고 싶지 않다”고 했으나 가족들은 오래 상처를 앓았다. 그녀는 기자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 안 해. 나오면 뭘 해. 그 얘기가 그 얘기지. 기자들이 덧붙이는 경향이 많아요. 그래서 저나 동생이나 기자를 안 만나려 해요. 보이는 그대로 글을 써줘야 하는데 동정심 유발하는 글을 쓰고. 우린 이만큼 살고 있는데, 물론 아버지 대는 가난했지요. 어렸을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사는 게 중산층이잖아요. 그런데도 초라한 모습으로, 유명한 할아버지의 자손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그래서 어쩌라고요? 가난하게 살 때 누가 쌀 한 가마니 갖다준 적이 있나요? 어쩌라고요.”
기자도 오래전 ‘소월의 친자가 봉천동 언덕배기 단칸방에서 산다’거나 ‘소월의 아들이 레코드판 외판원으로 산다’ ‘소월 손녀의 고교시절 학비를 서정주가 댔다’는 문단 이면사를 들은 적이 있다. 은숙씨의 말이다.
“(주위 사람들이) 소월 할아버지를 위해 해주는 것도 없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거야. 사람들이 제가 소월의 손녀라고 (돈)봉투라도 받는 줄 알아요.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인 1981년 문화훈장 ‘금관(金冠)’을 받았을 때 ‘몇천만원 받았느냐’고 그러고. 기가 막힌 거지.
소월 시를 사랑해 주는 일이야 감사하지만 나를 이용하려 접근하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세상살이가 힘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아버지도 할아버지 때문에 오만 군데 끌려다니고, 할아버지에게 누(累)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신 분입니다.”
은숙씨는 ‘소월의 아들’로 살아야 했던 아버지 정호씨의 삶을 이렇게 그렸다.
“서울 가면 김소월을 알리는 ‘소월로’도 있고 소월시비도 있어요. 시는 즐겨도 시인의 발자취나 후손에 대한 배려는 너무 무심한 게 세상인심입니다. 아버지는 혈혈단신이셨으니 의지할 곳 하나 없었어요. 월남한 누님(金龜生)이 계셨지만 일찍 돌아가셔서 거의 왕래가 없었어요. 어머니(簾慶子)는 항상 병치레가 잦았어요. 아버지는 누굴 짓밟고 올라가거나 하는 건 꿈에도 못 꿀 분이었어요. 아코디언, 그림, 서예, 글 등 재능이 많았어요. 아버진 평생 일기를 쓰셨고 때로 시도 쓰셨어요. 아버지 필체를 볼 때마다 전 깜짝 놀라요. 할아버지 육필과 너무 유사해서요.”
“서울 가면 ‘소월로’도 있고, 소월시비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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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발행하는 《문학신문》이 소개한 김소월의 생가. |
이번에는 은숙씨의 남편 김원배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이 올해 대학 4학년입니다. 문과는 아니고, 컴퓨터IT학과에 다녀요. 문과는 적성에 안 맞는다고 해서 취업 잘되는 과를 택했어요. 인근 배제대에 ‘소월대학’이 있어서 보낼 생각도 있었는데 원서만 내고 진학은 안 했습니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요?
“서른아홉이 되어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뭘 또 낳아요?”
―시인의 명성에 비해 기념관이나 문학관 같은 게 없네요.
소월의 고향이 평북 정주군이란 점이 걸림돌이다. 정지용문학관(충북 옥천)이나 박인환문학관(강원도 인제), 이육사문학관(경북 안동) 등은 시인 생가가 있는 고향의 자치단체가 발 벗고 나서 세웠다.
그래도 정호씨가 생존했던 1990년대 소월 기념사업이 활발히 진행된 적이 있다. 10억여 원의 큰돈까지 모았으나 끝내 사업이 무산됐다. 이후 인계자가 나타나지 않아 기탁금은 모두 반환됐고 기념사업마저 유야무야됐다고 한다. 원배씨의 계속된 말이다.
“몇 년 전 경북 상주에 사시는 분이 자기 땅을 희사해 소월기념관을 짓겠다고 해서 가봤더니 속셈은 영리 목적이더군요. 거절하고 그냥 올라왔어요. 쉽지 않은 일이에요. 장인어른(김정호)도 무척 바라고 원하셨는데 생전에 이루지 못하셨어요.
제가 식당 할 때 초가집 같은 공간이나 조그맣게 마련할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소월의 육필원고 복사본을 액자에 넣어 식당 한쪽에 걸어보았어요. 소월 시인에게 내린 문화훈장 ‘금관’도 걸어두었죠. 충남교육청 장학사분들도 다 찾아오시고 문인들도 전국에서 많이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시골이라 그런지 ‘이것 다 뭐야. 낙서나 해놓고. 조상 팔아 장사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낯 뜨거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다시 은숙씨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래도 진짜 멀리서도 찾아오시고, 어떤 분은 소월 시인을 만난 것 같다며 제 손을 잡고 우시는 분도 계셨어요. 물론 개중에는 ‘소월의 손녀면 손녀지’ 하는 분도 있었고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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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 소월로에 있는 소월시비. |
―소월이 할아버지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아셨죠?
“그럼요.”
―느낌이 어떻던가요.
“자부심이나 책임감이 있고, 또 할아버지만큼 못하는 것에 대한 위축되는 점도 있었어요. 중고교 때 선생님도 다 아시니까 어쩔 수 없이 학교 문예반에 들어가야 했고….
―소월의 시는 곡으로 많이 불렸는데 노래는 잘하시나요?
“노래는 좀 하죠.”
―글이나 시는?
“나이가 먹으니까 뭔가 글을 쓰고는 싶은데, 잘 안 돼요. 아버지는 하셨어요. 아버지는 소질이 있으셔서 슬픈 감정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실 줄 아셨어요. 아코디언이나 기타도 잘 치셨고요.”
―기타도요?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독학으로 띵동띵동 하시다… 그런 재능으로 아버지가 공부를 하셨더라면….”
―다 가난한 시절이었잖아요. 소월의 후손이라 해서 더 나을 것도 없었고.
“아버지는 열심히 사셨지만 독하지 못했어요. 자린고비처럼 줄 것 안 주고 살았더라면 이 정도로 안 살았을 텐데….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잘 베푸셨어요. 누굴 만나도 주머니에 몇 푼 있으면 당신이 술값 내려 하시고.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제게 술을 가르쳤어요. 제사지낼 때 음복(飮福)하잖아요. 아버지는 ‘은숙아! 한잔하자’고 권하셨어요. 아버지 친구분이 오셔도 ‘숙아! 한잔하자’ 이러시고… 지금 생각하면 가엾고 왜 독하지 못했을까, 남들처럼 야비하게 사셨다면 자식도 이렇게 어렵지 않게 살았을 텐데. 나쁘게 말해 할아버지를 충분히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저 고왔어요.”
“나이 먹으니까 뭔가 글로 쓰고 싶어져”
그녀는 또 “그때만 인세가 있던 시절이어서 덕을 보았다. 그러나 그걸 관리 못하시고 독하지 못하고 야물 차지도 못하고…”라고 덧붙였다.
―따님은 좀 독한가요?
“(강한 톤으로) 아버지보다 좀 나은 것 같아요. 근성이 있죠.”
은숙씨의 남편 김원배씨의 말이다.
“북한에도 김소월 시인이 유명하잖아요. 생가가 있는 ‘평안북도 곽산’을 성역화했다는 소식도 있고, 소월 후손들도 많이 있을 테니 시인의 흔적을 북을 통해 수집하려 했어요. 북한 브로커를 통해 알아보니 그 사람들이 ‘돈만 주면 뭐든지 갖다주겠다’는 겁니다. 유품이든 사진이든 시 원고든 안 가리고요. 그런데 돈을 엄청나게 달라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요구해요?
“1000만~2000만원 요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어요.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데 설사 가져와도 그게 소월의 유품인지 모르잖아요. 지금 알려진 소월의 사진도 진짜 사진이 아닙니다. 장인어른(김정호)과 처남(김영돈)의 사진을 합성해 만든 거예요. 진짜 시인의 얼굴은 누구도 몰라요. 그래도 북한에는 소월의 진짜 사진이 있을 거라 생각돼 한참동안 북한 브로커와 이야기가 오가고 했어요. 그런데 워낙 저기 하니까, 금액을 많이 얘기해서….”
―기념관을 만든다 해도 소월과 관련된 자료가 별로 없겠네요.
“장인어른께서 생전에 소월 관련 기사 스크랩과 시집류를 한 가방 가득 담아주셨는데 지금은 인천 부평에 사는 처남에게 다 줬어요. 언젠가 소월기념관을 세운다고 해서 어떤 분에게 그나마 있던 자료마저 다 갖다줬는데 되돌려받지 못했어요.”
―북한에 있는 소월 후손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나요?
다시 은숙씨가 말했다.
“아버지는 인민군으로 잡힌 반공포로였잖아요.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남쪽을 택한 이들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도 북한 측이 거부해 버린대요. 아버지도 북한 소식이 너무 궁금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니 알 턱이 없죠.”
몇 년 전 북한의 《문학신문》에 연재된 〈소월 생가 탐방기〉에 따르면 소월의 장남 준호는 목수, 둘째 은호는 평북 경공업국총국 상급지도원, 막내 낙호는 평양 설계연구기관 연구사로 살았다고 한다.
“소월 死因이 뇌일혈이란 말 듣고 뭔가 풀리는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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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간행된 김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꽃》을 소개하는 잡지광고. |
국내 소월 연구가들은 소월의 사인(死因)을 음독 혹은 아편 복용으로 인한 자살로 단정 짓는 경우가 많다. 다분히 흥밋거리로 죽음을 다룬다. 다만 소월이 사망하고 이틀 뒤 생가를 직접 찾은 《조선일보》 기자는 소월이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부음기사를 썼다(1934년 12월 27일자).
또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소월이 ‘저다병(楮多病)’으로 죽었다고 주장한다. 저다병은 다름 아닌 각기병. “‘저다(楮多)’라는 병명은 일종의 수족병(手足病)을 일컫는 우리말 ‘저다’에서 왔다. 수족병이란 요샛말로 팔다리가 퉁퉁 붓는 일종의 각기병 증세”라는 것이다. 은숙씨의 말이다.
“할아버지가 자살했다고 써놓고 아편 먹고 숨졌다는 얘기도 들려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뇌일혈 같은 고혈압으로 돌아가셨거든요. 원래 문진(問診)을 해보면 집안내력이 다 나오잖아요. 솔직히 뇌일혈이란 말을 듣고 뭔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소월의 시를 좋아하고 연구하는 분들이 그런 사실을 밝힐 순 없나요? 북한에 후손이 살고 있고 그곳에 생가도 있으니 학문교류 목적으로 북쪽 연구 성과물을 공유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은 남쪽에 없는 것 같아요.”
은숙씨의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갔다.
“(학자라는 분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할아버지를 만난 적조차 없지만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왈가왈부하고… 한마디로 자기들끼리 찧고 까부는 것이죠. 죽은 자만이 알지, 알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생전에 소월의 저작물과 관련된 인세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일부 성의 있는 출판사들이 인사로 사례비를 준 적은 있었다”고 기억했다.
김소월이 생전에 펴낸 시집은 1925년 12월 매문사(賣文社)가 펴낸 234쪽 《진달래꽃》이 유일하다. 소월 연구가인 구자룡씨에 따르면 “최근까지 발행된 김소월 시집은 이본(異本) 600여 종에 이른다”고 했다. 또 《가요로 듣는 소월시집》 LP판, 소월 시가 적혀 있는 그림과 공중전화 카드 등 소월과 관련된 잡기류가 수백 종에 이르며 우리나라 최초로 영어로 번역된 영문 시집도 소월시집이고, 프랑스어판·중국어판·일본어판·러시아어판 등 외국인이 직접 자국어로 번역한 소월시집도 있다고 한다. 은숙씨의 말이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 가면 벽에다 〈진달래꽃〉을 큼지막하게 써놓았다고, 가수 마야가 ‘진달래꽃’을 불러 인기가 올라 좋겠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소월 가족들이 얼마나 받느냐’고 물어요. 오래전 소월 시구(詩句)를 넣은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라는 피자 광고가 나왔을 때 그 회사 사장이 봉투를 가져온 게 전부입니다. 노랫말로 만든 소월 시들이 많잖아요. 한번도 쓰겠다고 찾아오거나 노래 부르겠다고 허락받아 간 이가 없어요. 함부로 소월 시인을 들쑤셔놓아도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 많은 분이 소월 시를 좋아하는 것은 기쁜 일이잖아요.
“맞아요. 기쁜 일이죠. 짠하죠. 괜찮은 자리에서 ‘소월의 손녀냐’고 물으면 으쓱해지고 자랑스러워지죠. 초췌하게 식당 할 때도 비록 할아버지 위하는 일은 못했고 북한에 사는 후손들이 어떻게 사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자부심만은 잊지 않았어요.”
―당당해지세요. 저마다의 삶이 다른 걸요.
“맞아요. 누가 ‘손녀딸은 시 잘 쓰느냐’고 물으면 저는 ‘음식으로 시를 씁니다’ 그래요. 소월의 손녀가 하는 식당이라며 찾아와 ‘피가 흐르지 않느냐’고 하면… 감사하죠. 그런 분들을 위해 떳떳하게 뭔가를 남겼으면 하는데….”
그러면서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선은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사는 것이겠죠. 그리고 돈을 벌면 할아버지 이름을 붙인 ‘소월장학회’나 봄가을로 백일장을 열어 학생들에게 상을 주고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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