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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찰을 거닐면 종종 선계仙界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공기는 맑고, 풍광은 수려하며, 사방은 고요하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때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 이후 세워진 크고 작은 고찰의 건축물과 자연은 그윽함과 고졸함의 진수를 보여준다. 종교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 여기에 최고의 유산이 모여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도처에 봄기운이 가득한 5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 33곳이 자랑하는 ‘최고의 보물’을 소개한다.
나는 산중 절의 적막이 좋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절과 암자를 스님보다 더 많이 순례한 사람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반년에 걸쳐서 법정스님이 수행한 절과 암자를 모두 다녀온 바 있다. 그 결과 무소유의 삶이란 꽃피듯 물 흐르듯 자연의 순리대로 자기만의 꽃을 피우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다녀온 절과 암자는 수없이 많다. 특히 암자는 400군데 이상 들렀다. 예전에는 ‘암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모임도 있었는데, 내가 남도 산중으로 들어앉고 난 뒤부터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인연도 윤회하는 것이니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는 발걸음에는 자주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절이 내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온 첫 경험은 내 인생에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불어닥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십수 년 다니던 정든 직장을 떠났을 때였다. 사표를 던지고 난 며칠 뒤 나는 가방 속에 수건 한 장, 치약・칫솔 한 개만 달랑 넣고 경부선고속도로를 달렸다. 가는 도중에 행선지를 해인사 백련암으로 정했다. 소설을 집필하면서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제는 내가 나에게 성철스님의 화두 ‘산은 산 물은 물’의 의미를 묻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백련암 골방에서 첫 밤을 단 한순간의 꿈도 없이 아주 깊게 잤다. 내 생애 처음 맛보는 달콤한 잠인 것도 같았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의 말랑말랑한 젖을 만지며 자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 밤 나는 백련암의 관음전 관세음보살 젖을 만지며 잠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백련암에서 힘을 얻었던, 길이 끝난 자리에 또 다른 길이 있다는 나만의 자각自覺과 기운으로 지금까지 절을 순례하게 되었고 사찰문화 기행의 책들을 여러 권 발간하게 된 것 같다. 글 삼아, 밥 삼아 본격적으로 절과 암자를 순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절에 가는 즐거움도 SPECIAL나이에 따라 그 무게와 깊이가 달라진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젊은 20~30대에는 절의 역사나 문화, 주변 계곡과 산의 풍광에 반해서 갔고, 세월이 문득 허허로워지는 40~50대가 돼서는 내 삶이나 나만의 홀로 있는 시간을 갖고자 떠나기 때문이다.
요즘의 나는 절에 갈 때 주말이나 공휴일을 피해서 간다. 젊은 시절과 많이 달라진 습관이다. 가능하면 하룻밤 묵는다. 방에 누워 가랑잎이 뒹구는 소리, 물소리, 솔바람 소리도 듣고 온다. 세상의 소리는 소음에 가깝지만 절에서 듣는 자연의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절의 조각물이나 벽화를 절에 들어선 순간부터 보지만 나는 절을 떠날 때쯤 맨 나중에 본다. 정이 들어야만 아쉬움이 더하고 다음에 또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어려운 한자 용어들의 안내문은 가급적 보지 않는다. 전문가 수준(?)의 안내문은 순수하게 터져 나오는 ’아!’ 하는 느낌표를 사라지게 할 때가 많다. 우리들의 상상력을 무시하는 무례한 안내문인 것이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절 안의 유정물有情物이든 무정물無情物이든 정을 주고 나면 그것들이 어느 순간 입을 열기 때문이다.
낮에는 절의 표정만 보고 절의 내면까지 보려면 새벽까지 기다려야 한다. 노스님의 애절한 독경소리를 들으면 마음과 귀가 맑아지고, 풋풋한 수행자들이 싸리비로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의 잡된 생각까지 씻어지는 듯하다. 나는 사진 하는 후배들에게 절의 증명사진만 찍지 말고 마당에 난 비질 자국이나 석탑에 낀 이끼 무더기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요즘에는 절의 적막도 오래된 내 친구처럼 반갑게 다가온다. 어느 선사의 선시禪詩도 절로 읊조려진다.
왜 사람 없는 적막한 산중에 깃들여 사느냐고?
산속이 적막한 것은
그대 마음이 적막한 까닭일세.
피고 지고 또 피는 저 꽃들,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새들,
정다운 저것들을 두고 어찌 여길 떠날까.
그러고 보니 법정스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 중에 하나가 떠오른다. 스님께서 ‘홀로 마시는 차 맛은 적막을 마시는 최고의 맛’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 말씀의 의미를 나도 나이 들어 절감하고 있다. 적막은 우리를 외롭게 하고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산중의 맑은 적막은 우리의 헛된 꿈들을 걸러주는 거름막이 아닐까도 싶다. 나는 산중 절의 적막이 좋다. 내가 누구인지 드러나게 하니까. 나는 산중 절의 적막이 고맙다.
산중 사찰에 가는 즐거움을 들려준 소설가 정찬주는 법정스님의 재가제자在家弟子로 스님보다 더 스님 같은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다. 지난 10여 년간 둘러본 암자 400곳 중 43곳을 간추려 소개한 <절은 절하는 곳이다>를 읽으면 절의 아름다움이 소중하게 와 닿는다.
1 해인사의 세계문화유산, 장경판전
사찰의 보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중 하나가 바로 경남 합천에 있는 해인사海印寺다. 통도사,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 중 한 곳인 이곳에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藏經板殿이 있다. 천년 고찰의 건축미를 가장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 조선 숙종 21년(1695년)부터 고종 8년(1871년)까지 해인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겪었는데 이곳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고 한다. 산중 깊이 자리한 까닭에 임진왜란 때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아 해인사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지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앞면 15칸, 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한 형태. 상공에서 보면 기와로 이어진 거대한 직사각형 모습이다. 이곳은 기교나 화려한 멋은 없지만 보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낸다. 대장경판의 오랜 보전을 위해 남쪽과 북쪽 각 칸마다 크기가 다른 창을 냈고, 안쪽 흙바닥에는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어 습도를 조절했다고 한다. 올해는 팔만대장경이 제작에 착수한 지(1251년 완성) 1000년이 되는 해로 9월 23일부터 11월 6일까지 해인사 일대에서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이 열린다.
2 비천상이 아름다운 상원사의 동종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가는 길. 가볍게 스치는 바람결에 문득 떠오르는 시 하나. “천년 고찰 / 그 모습 무거운 나이테로 쌓인다 / 맑고 고운 음향 / 국보 상원사 동종 / 전란에 몸바쳐 / 큰 가람 지키신 / 탄허 큰스님 이야기 / 머언머언 정토 가는 길” 윤재문 시인의 ‘상원사 가는 길에’다.
시에는 상원사에서 꼭 보고 기억해야 할 것이 표현되어 있다. 맑고 고운 음향이라 표현한 상원사종은 상원사의 2대 상징물 중 하나다. 종각에 보호되어 있어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 없다. 포탄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나 구름 위에서 하늘을 날며 공후와 생황을 연주하는 비천상의 뛰어난 장식미가 모두 수려하다. 본래 안동루문에 있었으나, 조선 예종 원년(1469) 국명으로 상원사에 옮겨왔다. 불당에 모신 문수동자상도 빼놓을 수 없다. 문수동자상은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 부부가 아들 낳기를 기원하며 세조 12년(1466년)에 만든 불상이다.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 덕분에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의 중요한 상징물이 되었다.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종기와 부스럼으로 고생을 했는데 상원사 계곡길에 만난 동자승에게 등을 민 후 몸의 종기가 씻은 듯 나았다고 한다. 부스럼이 나은 후 동자승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3 선운사의 동백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사禪雲寺는 해마다 3~4월에 전국에서 상춘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그만큼 봄 풍광이 아름답다. 이들이 보러 오는 것은 동백숲이다. 대웅보전과 산신각, 팔상전 뒤쪽의 비스듬한 산자락 아래로 제법 큰 운동장만 한 너비로 자리하는데 동백나무의 평균 키가 6m에 이른다. 몸통도 굵어 평균 두께도 지름 30cm에 이른다. 그렇듯 큰 나무 3000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거대한 꽃무리에 취해 황홀하다.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로 시작하는 가수 송창식의 ‘선운사’는 그 황홀한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 아름다운 숲은 백제위덕왕 24년(577년) 선운사가 창건되면서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관광객들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높은 철조망을 설치한 것이 아쉽지만 꽃이 한창일 때는 그 ‘옥에 티’가 그리 신경 쓰이지 않는다.
동백숲도 좋지만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까지 이어지는 약 4km의 오솔길을 꼭 걸어보아야 한다. 왼쪽으로는 도솔천, 오른쪽으로는 숲을 끼고 있는데 졸졸 물소리가 경쾌하고 나뭇잎을 통과한 순한 빛이 황톳길과 계곡에 일렁인다. 계곡 너머로 울창한 숲이 펼쳐져 건너가보고 싶은 충동도 든다. 산행은 지루할 새가 없다. 오르막, 평지, 내리막, 돌길 등이 번갈아가며 이어져 다채로운 지형의 둘레길을 한번에 모두 경험하는 느낌이다. 꼭꼭 숨겨놓은 듯 작은 녹차밭도 있는데 자칫 무심코 지나칠 수 있으니 유심히 봐야 한다. 선운사에 가려면 입구를 지나 일주문까지 꽤 긴 길을 걸어야 하는데 이 길 역시 풍광이 뛰어나므로 여유를 갖고 걸으시길.
4 간결해서 더 아름다운, 무위사의 극락보전
전남 강진, 월출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무위사無爲寺는 소박해서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는 단출하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천왕문을 지나면서 경내가 시작되는데 아담한 돌계단과 각종 나무, 소박한 건축물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다. 미륵전과 산신각 등 건축물을 모두 작게 지어 푸근한 분위기다.
이 단아한 절에는 유명한 목조 건축물이 있다. 1430년(세종 12년)에 지은 극락보전이 그것으로, 재건이 한창인 숭례문에 이어 두 번째로 국보에 지정된 목조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에 사람 人자의 맞배지붕을 얹었는데 크기는 작지만 건축미가 빼어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짜 맞춘 장식적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의 절정을 보여준다는 평가. 이 양식으로 지으면 건축물 전체가 간결하게 보인다. <딸과 함께 떠나는 국보 건축 여행>의 저자 이용재 씨는 책에 이렇게 썼다. “아무 의도도, 의지도 없는 듯 단아한 자태. 고졸의 경지. 이거 설명하는 사람 바보. 가보시길.” 극락전과 극락보전을 설명하는 문구도 재치 있다. “전각 하나로 버티면 극락보전, 절이 부자가 되어 여러 전각이 들어서게 되면 극락전!” 극락보전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아미타여래삼존벽화다. 극락보전 불단 뒤편 벽면에 있는 조선 시대 그림으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여섯 구의 나한상 등을 묘사했는데 굵고 가는 선을 적절히 섞고, 화사한 색채를 능숙하게 사용해 고려 시대와 비교해 그 섬세함과 화려함이 한층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묵직한 율동미, 부석사의 무량수전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浮石寺는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성지에 들어 온 것 같은 신성함이 느껴진다. <월간미술> 이건수 편집장은 “아름다운 사찰 하면 봉정사의 영산암과 함께 무량수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경내로 바로 이어지지 않고 ㄱ자로 꺾이는 것이 포인트다”라고 했다. 무량수전은 경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고려 중기의 건축물로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힌다.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고 위아래로 갈수록 얇아지는 배흘림기둥은 율동감이 있고 그 위로 얹은 기와지붕은 배흘림기둥과 완벽한 비례미를 연출한다. 무량수전을 등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안양루 너머로 소백산 일대가 펼쳐진다. 온통 숲만 보여 중턱에 서 있는데 꽤 높은 곳에 서 있는 것 같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석등도 유심히 살펴보시길. 긴 받침돌 위에 탐스러운 연꽂 모양의 받침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올렸다. 화사석 위에는 팔각의 옥새석을 얹었는데 모서리 끝이 살짝 올라가 버선코 같다.
6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운주사의 와불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 인근에는 코가 깨지고, 목이 잘려 나가고, 눈매가 거의 보이지 않는 불상이 가득하다. 절 안은 물론이고 산자락까지 퍼져 있다. 크기가 맞는 돌 몇 개를 대충 쌓아올린 것 같은 석탑도 많다. 그렇게 여기저기 흩뿌린 돌부처가 100여 기, 석탑은 21기다. 그 많은 불상과 석탑이 왜 이런 시골 산중에 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원래 이곳에는 이보다 더 많은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천불산에 있는 운주사에는 절 좌우 산에 석불과 석탑이 각 1000기씩 있고 그중 두 석불은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란 구절이 나온다.
운주사는 미스터리투성이다. 정확한 창건 연도도, 불탑을 세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 가장 신기한 것은 운주사 정상부의 솔숲에 있는 와불臥佛.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독특한 형태와 미감의 부처로 2기가 있는데 하나는 12.7m, 다른 하나는 10.3m다. 이 와불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도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입담이 가장 좋다는 황 작가는 소설에서 이 와불을 민중들을 용화세상(미래에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해 한량 없는 중생을 해탈시키는 시대)으로 이끌 ‘메시아’로 묘사했다.
7 내소사의 꽃창살문
전북 부안에 있는 내소사來蘇寺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전前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가 부석사와 운문사, 무위사, 개심사와 함께 한국 사찰의 기품과 미학을 보여주는 5대 사찰로 꼽은 곳이다.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입구에서 천왕문 앞까지 약 4km에 걸쳐 전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전나무는 모두 수령 50~200년 이상 된 것들로 숲의 그늘이 깊어 낮에도 길이 다소 어둡게 보일 정도다. 전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서는 단풍나무와 벚꽃이 이어진다. 경내는 천년 고찰 특유의 고즈넉함이 묻어난다. 수령 1000년을 자랑하는 당산나무, 스님과 신도들의 수행 장소인 겹처마 양식의 설선당,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연꽃으로 장식하고 몸통에는 삼존상을 새긴 고려 시대의 동종 등은 모두 놓치지 말아야 할 ‘보물’이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보물은 대웅보전에 있는 꽃살창문. 원래는 단청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 볕과 비바람에 색이 모두 씻기면서 깊고 담담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안도현 시인은 “고색창연함의 절정이다”라고 했다. 정면 8칸의 전면에 가득 새겨 넣은 꽃살창문은 우리나라 장식 문양의 정수를 보여준다. 국화와 연꽃, 모란 등을 깎아 만들었는데 수백 개의 꽃과 꽃잎이 사방 연속 무늬로 부조돼 있어 나무를 깎아 만든 장식 중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나무 색 자체도 심연의 바다처럼 그윽해 영원永遠의 꽃밭을 보는 듯하다. 대웅보전 역시 꽃살창문 못지않게 인상적이다. 처마선은 허공을 가르듯 경쾌하고, 쇠못을 전혀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맞춘 ‘결구기법’을 이용해 넉넉함과 견고함이 느껴진다.
8 대흥사 편액의 힘
우리나라 최남단 해남에 있는 대흥사大興寺는 두륜산 국립공원 안에 있다. 공원 입구에서 절까지 숲길이 이어지는데 그 길이가 약 2km에 달한다. 아름드리 삼나무와 동백나무, 편백나무가 가득하고 청솔모도 심심찮게 보여 천천히 걷기에 좋다. 절 입구에 거의 도착해서는 영화 <서편제>, <장군의 아들> 등을 촬영한 100년 역사의 전통 여관, 유선관도 만날 수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는 가람 배치가 특별하다. 금당천을 기준으로 터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고 당우堂宇를 자유롭게 배치했다. 경내를 구경하다 보면 동선이 여느 절에서 걸었던 것과는 달라서 낯선 기분이 든다. 이곳의 ‘보물’은 편액. 조선 시대의 내로라하는 명필들이 쓴 글씨가 곳곳에 걸려 있어 ‘서화書畵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경내 ‘표충사表忠祠’의 편액은 정조 대왕이 직접 쓴 것이고, 무량수각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해탈문과 천불전, 침계루 편액은 원교 이광사, 가허루의 편액은 창암 이삼만, 용화당 편액은 성당 김돈의 글씨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경술문장 해동제일’로 꼽혔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 서체에 거침이 없고 자신감이 묻어 있다. 이 편액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이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정치적 격변에 휩싸여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도중 막역한 사이던 초의선사를 보러 갔다가 애초에 걸려 있던 동국진체의 대가 이광사의 편액 글씨를 못마땅하게 여겨 즉석에서 써준 것. 유배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 글씨에 기개가 묻어나는데 귀양살이는 9년간이나 이어졌다. 훗날 유배가 끝나 이곳에 다시 들른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저 편액을 원래 이광사의 것으로 바꿔 달게, 내가 잘못 봤네” 하고 요청했다고 한다. 귀양 생활을 보내며 겸손을 배운 것. 하지만 초의대사는 그의 편액을 귀히 여겨 끝내 바꿔 달지 않았다고. 공교롭게도 김정희의 편액과 이광사의 편액은 서로 마주 보고 걸려 있다.
9 백양사의 봄풍경
호남 지방에 ‘산은 내장산이요, 절은 백양사’, ‘봄 백양, 가을 내장’이란 말이 있다. 가을철 아기단풍으로 유명한 백양사白羊寺이기에 ‘봄 백양’이란 말이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봄 백양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즈음 백양사의 풍광이 가을 단풍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봄의 진경은 절로 향하는 진입로에서 마주하게 된다. 아기단풍나무와 굴참나무 등 활엽수가 신록의 향연을 펼친다. 붉은 단풍처럼 강렬하지 않아도 풋풋한 봄의 아름다움을 풍긴다. 봄 백양의 정수는 상왕봉을 타고내리는 물길을 가로막아 만든 연못을 내려다보기 좋은 위치에 세운 2층 누각 쌍계루에서 만끽할 수 있다. 나무와 숲이 뿜어내는 색과 향에 마음이 평안해지고 연못에 비친 하늘과 흰 바위 봉우리의 선경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과연 ‘봄 백양’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인다.
백양사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비자나무다. 제주도 비자림에 비견될 만큼 빽빽한 비자나무는 약 5000그루가 숲을 이룬다. 비자나무는 고려 고종 때 각진국사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당시 구충제로 썼던 비자나무 열매를 절 주변에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 스님들은 열매를 거두어 인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비자림은 천진안 부근이나 약사암으로 오르는 길목이 제대로 된 숲의 형태를 이룬다. 천진암 부근의 비자나무 숲에는 목책으로 산책로와 함께 멋진 휴식 공간도 마련해놓아 비자나무 숲의 향취를 느긋하게 즐기기 좋다. 약사암에 오르면 단아한 백양사의 가람 배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0 송광사의 진여문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松廣寺는 조계총림, 승보사찰이란 이름에 걸맞게 볼거리가 많은 절이다. 그중에서도 스님들의 수행처로 들어가는 입구인 진여문眞如門은 아는 이가 많지 않은 송광사의 ‘보물’이다. 투박하지만 자연스러운 모양의 기둥도 아름답고, 거북 모양의 손잡이와 주춧돌도 이채롭다. 이런 손잡이는 송광사에서만 볼 수 있다. 진여문은 대웅보전 뒤편 석축 위에 있는데 존재감이 대단하다. 큰 몸통의 나무와 기와로 만든 정문, 문 양쪽으로 크고 작은 돌무리를 이용해 만든 높은 담이 어우러지면서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위엄과 기품을 발산한다. 일주문을 지나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단칸짜리 건물 세월각洗月閣과 척주각滌珠閣도 눈여겨보시길. 일명 ‘죽은 영혼의 쉼터’라 불리는 곳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 저승으로 가는 가마인 영가가 하루를 머물며 속세의 때를 씻어내는 곳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뜻의 척주각에서, 여자의 혼은 ‘달을 씻는다’는 의미의 세월각에서 각각 속세의 더러움을 떨쳐낸다. 하지만 한 번의 ‘목욕’으로 부처가 있는 송광사 경내로 들어갈 수는 없다. 세상에 남아 있는 미련을 깨끗이 씻어내야 하는데, 그곳이 맑은 계류 위에 놓여 있는 우화각羽化閣이다. 우화각을 건너면서 계류에 속세와의 인연을 실어 보내고 불국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송광사는 최근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새벽 예불을 녹음한 음반을
11 수도사의 사찰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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