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본절은 삽입구로서 반론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 반론이란 '모세 율법이 있기 전까지 과연 죄가 존재했던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비록 기록된 율법으로 죄를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한다.
즉 율법이 공포되지 않았을 때의 범죄자들 또한 결코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죄의 결과로 생기는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또한 이 같은 사실은 모세 율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사실,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은 사실 바벧탑 사건,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등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14절) 기간에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죄의 (1) 역사성과 (2) 보편성이 시사되어 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아니하느니라 - 모세 율법 전에도 각 나라마다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불문률과 법률 및 도덕적 관습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도 '죄에 대한 정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본절과 같은 진술을 하였는가 ?
바울은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죄'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죄, 곧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그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모세 율법이 공포되었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
[롬 5: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 아담과 범죄는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2)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교만이었다. 그리고 모세 이전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자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근본적인 죄임을 선포하고 있다.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호 다나토스' 는 '사망이 왕권을 잡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했다는 의미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죄악의 세력이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에 대조 되는 것으로 바울은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라고 표현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렇게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신분이나 인류에게 미친 영향면에서 판이하게 다르기 대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1) 아담이 옛 시대의 시조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시조이다. (2)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도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즉 아담이 범죄의 시조라면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이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튀포스)이 될 수 있다 (
[롬 5: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그러나- 이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되는 뜻의 내용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앞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의 유사점을 말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아담의 차이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은사 - 이는 언급된 사실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본절에 언급된 '은혜'와 관계된다.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그 범죄'라 함은 '아담의 범죄'와 '아담의 범죄외의 다른 범죄', 즉 '모든 범죄'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은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교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아담의 범죄'라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서 '범죄'(파랖토마)가 단수형이라는 사실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카리스마)와 아담에서 비롯된 '인간의 보편적인 범죄'를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시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죽었은즉 - 1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했으나, 본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표 단수를 사용하든지 단순히 복수를 사용하든지 헬라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도 이와 같다.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모든'이라는 총칭 형용사를 사용한 것과 비교할 때 전혀 근거가 없다. 더욱 - 이 단어는 9절에서와 같이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비교급 강조의 의미를 갖는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무너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앞에서 이미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언급했으나 지금은 '한 사람의 은혜'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범죄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은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상반절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여기서 '많은 사람'은 앞에 언급된 '많은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넘쳤으리라'는 동사는 14절의 '왕노릇하였나니'라는 동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넘쳤으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릿슈센'은 '물이 그릇에서 넘쳤다', '강물이 둑에서 넘쳤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넘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별없이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문맥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동사 '에페리스슈센'은 목적어로서 '에이스 투스 폴루스, 즉 4격을 취한다. 헬라어에 있어 4격은 3격과 같이 단순 목적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을 꿰둠고', '...을 관통하여'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가 개인의 전인격을 철저히 변화시키며 죄악을 씻고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롬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본절에서 바울은 범죄와 은혜의 기원 그 위력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즉 범죄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은혜는 사망이 왕노릇하는 데서, 또는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은혜'의 기원과 위력이 '범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선물 - 이는 15절에서 언급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을 가리킨다.
15절에서 '은사'가 '범죄'와 비교되었고 본절에서는 '은사'가 '심판' 과 비교되었다. 은사는 값없이 주는 용서이며 심판은 엄격한 공의로서 모두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본절은 바로 이 칭의의 선물이 심판의 효능보다 우월함을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 '의롭다 하심', 곧 칭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사면해 주시고 의로운 자들이라 칭하신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사이다.
또한 18절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를 보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사망의 세력 아래 놓인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회복되어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