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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즐겨 쓰시는 숫자
四 는 희망의 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四)라는 수를 죽을 사(死자)와 연관시켜 싫어한다. 사(四)와 사(死)는 분명 뜻이 다른데도 발음이 같다하여 한국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은 신경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병에 걸린 사람들은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아예 4층 표시를 하지 않는 곳이 부지기수로 많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4를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선호한다. 일례로 야구선수의 4번 타자는 팀 중에서 가장 공을 잘 치는 사람에게 준다.
중국 사람들은 흰 봉투에 돈을 넣어 주거나 하얀 종이로 포장한 선물을 주면 화를 내는데 흰색은 소복(죽음을 연상)을 뜻 한다고 해서 죽음과 연관시켜 대단히 싫어한다. 이들은 노란봉투나 빨간 봉투에 넣어 주는 것을 좋아하고 이것을 전통으로 지켜 내려오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 때도 보면 모두가 빨강과 노랑 일색이었다. 또한 이들은 복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화장실 문에도 복 복(福)자를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이다. 대부분 가난한 나라나 가난한 자들이 복을 선호하고 재수있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동질성이 있거나 연관성이 있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인데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4 라는 숫자는 희망의 숫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성경적으로 보면 분명 넷이라는 숫자는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숫자이며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도 四 자를 싫어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4자는 희망의 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넷이라는 숫자를 자신을 믿든 안 믿든 모든 인간에게 사용하신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4 라는 숫자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세상 살기가 힘든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하시려고 하였으나 가나안에 들어가 전쟁을 하면 전쟁을 해보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패하여 죽거나 아니면 살려고 도망 할 것이기에 이런저런 것을 염려하신 나머지 광야에서 연단시켜 능력을 키운 후에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기로 하셨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13:1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들여보내 1년 정도 적당하게 훈련을 시켜 가나안 땅으로 보내려하셨다. 그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며 옷과 신발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며 이들에게 훈련을 시켰다. 어느 정도 됐다 싶어 열두지파에서 두령 한 사람씩을 뽑아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냈다.
정탐을 하고 돌아온 열두 명의 두령들이 보고를 하는데 열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족속에 비해 이스라엘민족은 메뚜기 같아 도저히 싸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뿐더러 절대로 정복할 수 없다고 보고를 한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3)
그러나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밥이라 하며 충분히 이길 수 있고 정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을 들었음에도 온 이스라엘이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을 치며 난리를 피우자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이 백성들이 연단이 부족하다 여기시고 탐지한 날 수 40일을 40년으로 환산하여 훈련을 시키기로 하셨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4자의 연단이 시작된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연단을 마치려고 하셨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한 것만 찾는 불평불만에 빠져 약해짐으로 인하여 강도를 높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방법은 지금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전혀 없었다. 홍해 물을 가르고 바다를 건너와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신령한 음식을 먹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저 자신들에게 무조건 잘해주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부모는 자식에게 무조건 잘해주어야만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인정 못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그런 마음으로 인하여 자신들을 과소평가하며 불안해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들인가?
전지전능하신 아버지하나님과 함께 하면서도 그 부모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못난이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누가 그들을 인정해 주겠는가?
천국은 어디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다.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살면서도 즐거워하지 못하고 행복해하지 못하고 늘 불평불만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나를 인정한다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자신감이 없으면 언제나 자신을 메뚜기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남에게 인정을 받고 싸워서 이기려면 오직 반복으로 연습하여 실력을 갖추는 길 밖에 없다.
세상에 출세하는 자들이 그렇고, 모든 운동선수들이 반복된 것을 열심히 연습하여야만 좋은 실력을 가질 수 있고 1등을 하고 출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스스로 메뚜기라고 자처하는 그들에게 염탐한 40일의 날 수를 40년으로 늘려 잡아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였다. 40년 동안 연단하시겠다는 것이다.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14:33-34)
연단을 받는 중에 악하게 불평하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싸울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낙담한 1세대들은 모두 자신들이 불평불만한대로 광야에서 죽음으로 불러들였는데 이들을 어디로 보내셨을까? 스스로 답을 내리시라.
연단의 순종으로 이겨낸 2 세대들, 하나님은 이들을 선택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스라엘의 2세대들은 4(40년)의 연단을 이겨냄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야말로 고진감래(苦盡甘來)다.
내 몸에 병이 왔다는 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다. 이 아픔을 이기고 일어서면 몸에 면역이 생겨 또다시 같은 병균이 내 몸에 침투했을 때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보유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이유다.
한번 전쟁을 해보면 요령이 생겨 다음전쟁에서는 좀더 수월하게 이길 수 있는 힘을 보유하게 된다. 우리가 사단을 피하여 무사안일만 찾아 인생을 살아간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다.
무사안일(無事安逸)과 화평(和平)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무사안일은 내가 아무 힘없이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것이고 화평의 나날은 내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 만들어지는 안식이다. 만약에 예수 말씀처럼 무사안일 주의자와 평화주의자에게 창수가 부딪쳐 왔을 때의 결과는 180도로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5-27)
무사인일은 게으르다는 것이고 화평은 부지런함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쪽에 힘을 주시겠는가? 무사안일하게 지낸다는 자체가 사단에게 매였다는 증거다. 사단은 믿음의 어느 인간 하나라도 그냥두지 않는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고 넘어뜨리려 한다. 그래서 믿음이 자식에게는 아버지하나님이 연단(四)을 시키시는 것이다.
이 연단은 사단을 이기게 하기 위한 연단이다. 그리고 이길 수 있나를 시험하신다. 이 시험에 합격하여야 하나님께 인 치심을 받을 수 있고 사단에게 승리할 수 있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전쟁의 영웅들이 배수진(4를 사용하는 것)을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연단 속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의 ‘벗’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됐다. 당신은 지금 자신들의 자식을 하나님께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단 한마디의 불평불만도 없이 속전속결로 순종할 수 있겠는가?(창22:12)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응답을 알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면 당신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당신의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자는 절대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
그가 넘어져도 완전히 쓰러지지 아니함은 주께서 그의 손으로 그를 붙드심이라.(시37:24)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당신은 무엇이 두려워 4의 연단을 피하는가?
무엇이 두려워 몸을 연단에 내놓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받는 분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았다. 이것은 대화할 때마다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四의 주사위가 던져진다. 다만 다른 것은 강약과 때와 장소이고 각자 각자의 환경과 능력을 고려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연단이 시작됐다.
연단이 편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학교 공부하는 것도 연단이고 군인들이 훈련받는 것도 연단이고 운동선수들이 피나게 연습하는 것도 연단이다. 이들이 왜 힘들게 연단을 받는가? 학생은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이고, 군인들은 나라와 백성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이고, 운동선수들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축구나 배구 등 모든 운동선수들이 엄청난 연습을 한 후에 시험을 거쳐 국가대표로 선발 되는데 게으른 자는 시험도 쳐보지 못하고 도중하차해야 되고 연습을 열심히 했어도 시험관이 요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합격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독 신앙인들도 연단을 받은 후에 시험을 거쳐(창22:1, 창42:16, 출15:25, 출16:4, 출20:20)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만 예수를 만나 중보기도를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잡아 바치라는 것은 마지막 시험이었다. 이 시험에 순종하므로 모든 연단을 끝 마쳤다. 욥도 4의 시험으로 가정이 파탄 나고 재물을 잃으며 육체가 병들었어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 인내를 가지고 있어 시험에 합격 할 수 있었다. 모세는 많은 연단 속에서도 사십일 동안 두 번씩이나 금식의 연단을 받았다.(출24:18, 출34:28)
모세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사십 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케 했다. 간첩활동을 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영화 실미도에서 간첩교육을 받는 것을 보면 그 연단은 목숨하고 바꾸는 연단이었다.
엘리야를 사십 일 동안 걷게 하시어 호렙산으로 부르셨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8)
예수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시며 사단과 싸워 승리하셨다.(마4:2-10) 필자도 사십 일 금식을 했습니다만 참으로 힘들었다.
신학공부 도중 중국으로 선교 가야할 일이 생겨 일년 정도 선교생활을 하고 돌아왔다. 선교라는 것이 영적으로 주는 것만 있지 받는 것이 없으므로 영적으로 침체되기가 십중팔구이다. 선교학이라는 책을 보면 역대 선교사들이 선교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타락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침체된 자신의 영적 능력을 재충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국으로 돌아온 후 새롭게 충전을 해야 했기에 한 주간 금식 하고자 성산으로 올라갔다. 일주일 금식 중에 삼일은 절식(絶食 물도 먹지 않는 것)을 했다. 보호식을 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주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2)
적막 가운데서 조용하게 울리는 말씀이었다.
“너는 사십 일을 금식하라.”
하나님의 목소리라도 솔직히 말해서 금식 명령이 떨어졌을 때 기쁜 것이 아니라 걱정이 앞섰고 근심이 태산 같았었다. 금식을 여러 번 하긴 해봤는데 짧게는 3일 길면 한 주간 최고로 긴 것이 10일 이었다. 장기금식의 경험은 고작 열흘인데 어떻게 사십 일을 금식 할 수 있는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일단 한주간의 보호 식을 마치고 귀가 하여 생각하고 기도하고 또 생각하고 기도해 보았는데 내게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같이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어쩐다?”
근 이십 일 정도를 근심과 걱정 속에 망설이고 있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든다.
누가 내리신 명인데 그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구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금식을 내 힘으로 하는 건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겠지, 성공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고 실패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만드는 것이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시작하자고 마음을 결정했다. 마음을 정리하고 결심을 하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다. 옷 몇 가지와 책 몇 권을 가방에 넣고 양평 금식 기도원으로 올라갔다.
기도원 담임 목사님(당시 이준동 목사님)이 장기 금식하는 분들은 하루에 한 차례씩 등산을 해야 성공 할 수 있다는 권유가 있어 하루에 한번씩은 A 코스나 B 코스를 등산했다. 등산 코스가 A, B C 코스가 있는데 C 코스는 좀 멀어서 몇 번 가지 못하고 주로 A와 B 코스를 택했다.
삼십 일 까지는 힘은 들지만 그런대로 무난하게 등산을 했다. 그런데 삼십 일 일째부터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위장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등산만큼은 빼 놓지 않고 계속했다.
삼십 육 일째 되는 날 등산을 가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현기증이 일어나 걸을 수가 없다. 올라가가지를 못하고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오후부터는 예배도 드리러 갈수 없을 만큼 힘이 없고 위가 고통스러워 잠도 오지 않는다.
물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기도도 할 수없고 성경도 볼 수 없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모양 그냥 누워 고통과 싸울 뿐이다. 하는 일 이라고는 하루에 두세 번 화장실을 갔다 왔다 하는 것이 전부고 온 종일 중환자처럼 고통 속에 누워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삼십 구 일째 되는 날 속이 메스껍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구토가 나오기 시작한다.
급히 화장실로 가 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탄색깔 같은 새까만 미역 부스러기 같은 것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점차로 검붉게 변하다가 나중에는 새빨간 피가 나온다. 보통 사발로 치자면 삼분의 이 정도는 토해낸 것 같다. 토하는 것도 아주 고통스러웠고 괴로웠다.
처음 새까만 것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내 몸속에 있는 더럽고 추한 귀신들이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더욱 실감나게 느껴진 것은 나중에 새빨간 피가 나올 때는 예수가 흘리신 보혈의 피가 몸 밑바닥부터 밀고 올라와 모든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내 몰아 주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람의 몸속에는 많은 귀신들이 들어갈 수 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나도 귀신하고 살았으니 많은 귀신들이 있었을 것이다. (눅11:24-26) 한 사람의 몸속에 최대한도로 들어갈 수 있는 귀신의 수는 약 일천 정도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고 그 예로 군대귀신 들린 두 사람을 기록해 놓고 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마8:28)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막5:13)
보편적으로 동물에게는 귀신이 들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물에게 들어가 봤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악한 상황에서는 동물에게도 들어갈 수 있는데 귀신들도 급박한 상황으로 쫓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쫓긴 군대귀신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동물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사단에게 이익이나 즐거움을 줄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의 부속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이들은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에 아무런 방해나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벧후2:12)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理性)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1:10)
이성(理性)은“영(靈)”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과 연관이 되어 있고 사단의 일을 방해하므로 사단이 손해를 많이 본다. 따라서 사단은 하나님을 믿는 인간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우는 사자 같이 덤빈다고 할까?
마지막 환난 날에는 적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이다. 이 고통을 그냥 두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살아남을 자가 없다고 했다. 살아남을 자가 없다는 것은 천국으로 들일 성도들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권한으로 환난 날을 반으로 줄여 주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마24:21-22)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더욱이 사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크게 사용하시려는 계획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을 죽이므로(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더군다나 사단은 예수와 하늘에서 한 번 싸워 패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육신을 입었다고 만만히 보고 세 번씩이나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다.
또한 성령께서는 동물은 보호하시지 않기 때문에 사단은 동물의 몸속에 들어가려고 하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성령께서 보호하시므로 성령이 보호하시는 인간의 육신에게는 사단이 들어오고 싶어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삼십 구일을 굶은 위속에 어떻게 이런 무시무시한 것이 남아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양도 적지 않은데 그것이 위 어느 곳에 있었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궁금하다. 아직도 답을 얻지 못했다.
정말 궁금하고 지금도 궁금하고 앞으로도 궁금할 것이다. 이것이 의학적으로 밝혀지면 이보다 좋을 수 없으련만....
구토를 하고나니 위에 통증도 사라졌고 속이 아주 편해졌다. 내 몸속에 있던 귀신들이 다 빠져나온 것 같은 마음이고 기분이 너무너무 상쾌하다.
귀신들도 계급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졸병귀신들은 힘이 약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나타내는 모습들이 모두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 미혹하는 방법을 쓴다. 미혹하고 유혹하여 영혼을 타락시키며 그들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귀신이 몸속에 들어오면 모두 미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귀신이 우리 몸속에 들어와도 귀신이 조용히 있으면 별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대로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무당에게 귀신이 들어와 있지만 그들이 미쳐 날뛰지는 않는다.
우리가 가끔 어떤 사람들을 보거나 친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보기 힘든 행동을 할 때 ‘어 너 미쳤냐?’ 라고 말한다. 실질적으로는 미치지 않았는데도 그런 말을 한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미치면 행동이 이상해진다는 것이다.
특별한 경우에 귀신은 사람을 미치게 하고 병을 유발시키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 이것이 귀신의 힘에 의하여 인간의 영혼이 사단의 꼭두각시가 되는 경우다.
알기 쉬운 예로 누구에게나 암 세포는 존재하는데 그것이 발병을 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병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귀신들린 자가 모두 미쳐야 된다면 귀신에게 붙들려 일하는 무당들은 모두 미쳐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무당들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귀신은 잠복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귀신이 들어오고자 할 때 막을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이것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귀신이 잠복해 있을 수 있지만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귀신이 들어올 수도 없고 잠복해 있을 수도 없다.
귀신의 졸개들은 사람 모습으로 변장을 해서 나타나지만 대장 쯤 되면 자신의 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만큼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나타낸 사람에게는 이길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귀신 대장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와 같을 것이다.
살인 청부업자들이 살인을 청부받아 상대를 죽이러 가는데 베테랑들은 일부러 상대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것은 네가 내 얼굴을 봐도 괜찮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죽을 사람이니까 봐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야간 같은 경우에는 일부러 담배를 피우며 성냥불이나 라이터 불로 얼굴을 비춰준단다. 너는 곧 죽을 것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란다.
귀신의 대장급쯤 되면 이렇게 당당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장 대부분은 연체동물 모양 흐물거리면서도 서 있다. 그런데도 몸을 자유자제로 날쌔게 움직인다. 어찌 보면 날아다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상한 것은 대장이 됐건 졸병이 됐건 귀신들은 절대로 발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그들의 발을 보지 못했다. 이 궁금증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다.
귀신대장급들은 보통 사람의 3 배 정도로 키가 크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과 싸울 때에는 흐물흐믈 하는 주먹으로 먼저 입을 틀어막는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만약에 당신이 그들과 싸우다가 귀신의 주먹에 입이 틀어 막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입을 틀어막은 주먹을 빼내어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만 한다. 주님의 이름을 가지지 않고는 그들과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뭐든지 구하면 다 주시겠다 하셨다.(요14:13-14)
구하라고 했더니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구하려고 한다. 우리가 정말 구해야 할 것은 영적인 힘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영적인 힘을 구하면 성령은 즉각 개입하신다. 사단의 세력과 싸울 때 예수 이름이 필요하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 성령께서 도와주신다. 때문에 그 이름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틀어 막힌 입에서 귀신의 손을 빼내지 못할 때는 하나님과 아담이 교통했던 텔레파시를 사용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교통하는 능력은 사람을 만드실 때 넣어주신 것인데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상당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개발하려고 노력하면 발달하는 것이 텔레파시다.
하나님은 아담을 죽이시고 갈비뼈를 뽑았다. 그리고 몸에 상처하나 없이 원상복귀를 시켜 놓으신 다음 다시 살려 놓으셨다. 그리고 아담이 볼 수 없는 곳에서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다. 이때 하나님은“아담아 내가 네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고 알려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담은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하와가 자신의 뼈와 살로 만들어 진 것도 알 수 있었다.(창2:21-23)
이 텔레파시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 뇌 속에 어느 정도 남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직감이나 예감 같은 것이 모두 텔레파시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초능력을 쓰는 사람들은 염력이라고 한다. 텔레파시는 내가 원하는 마음을 뇌파에 담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교신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텔레파시를 실험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텔레파시가 강한 두 사람을 선발하여 한 사람은 비행기를 태워 공중으로 보냈고 한 사람은 잠수함을 태워 물속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물론 옆에는 전파를 이용하여 무선 통신을 하는 시험하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에게 열 문제를 주어 어떤 말을 하거나 동그라미나 세모 사각형 등등 이런 것을 그리고 적게 하였는데 10개 중 9개가 같았다고 한다.
하나님과 아담이 교통하던 텔레파시의 잔재가 아직은 우리 뇌파에 남아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만든 것으로서 사도들은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주님과 교통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기 위하여 묵상을 한다. 그런데 텔레파시를 이용하지 않는 묵상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냥 눈만 감고 있는 것은 묵상이 아니다.
이삭은 묵상의 대가였다고 한다. 그때는 율법도 없었고 책도 없었다. 그래서 묵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여 그때그때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여야만했다. 때로는 꿈으로 지시하시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창24:63)
혹시나 귀신과 싸우게 될 때는 꼭 승리하시고 힘이 모자랄 때라도 귀신에게 눌려 죽지 마시고 죽기 싫어 발버둥치는 그 힘을 뇌파에 담아 예수에게 구원을 청하면 성령께서 속히 도와주실 것이다.
마지막 금식 사십 일째 되는 날은 눈이 사팔뜨기처럼 돌아갔고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아 물체가 둘로 보이며 어지러워 서 있기 조차 힘들었다. 보호식을 시작한 후에도 2~3 일 정도까지는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고 어지러움이 지속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금식하는 것을 보면 쉽게 하는 것 같은데 나만 힘들게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사실은 모두가 힘이 들 텐데 말이다. 정말로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四 자의 연단이 아닐 수 없다.
“4”자의 연단은 심할 때 목숨도 내 놓아야 하는 연단이기 때문에 사람은 가능한 한 모두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연단을 피하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종살이를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천국에 가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연단은 천국에 침노할 능력을 갖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마11:12) 연단이 얼마나 힘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 종살이 하는 것이 났다고 했겠는가?
장기금식을 해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장기금식을 할 때 여섯 사람의 장기금식 하는 목사가 있었다. 하루에서 일주일 차이로 같이 금식을 시작 하였는데 몸이 약한 한분은 삼십 칠 일째부터 물도 넘기기 어려웠고 눈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었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기도원 담임목사님이 금식을 중단하라 했지만 3일 남았기에 끝마치겠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이 상태가 너무 위험한 것 같아 금식을 중단하라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그 분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인내하여 며칠 남지 않은 금식을 마치겠다고 고집하며 버티어 끝내 사십 일 금식을 마쳤다.
그러나 문제는 끝난 다음부터다.
금식은 끝이 났는데 물도 먹지도 못하고 눈이 보이지 않아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결국은 병원으로 실려가 이틀을 치료받은 후에야 보호식을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을 때 맞는 링거는 순수한 소금물이어야 하지 다른 것을 맞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꼭 의사와 상의하여야 할 것이다.
기도원에서 차분하게 보호식(保護食)을 하고 내려갔으면 좋으련만 집에 가서 좋은 음식 먹으면서 빨리 회복시키겠다고 하면서 보호식(保護食) 10일 만에 집으로 가고 말았다. 그 후 몇 번 전화연락을 해 보았는데 2년이 넘도록 걷지를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어떤 목사님은 금식을 잘하시고 보호식 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김치가 먹고 싶다고 했지만 가족들이 극구 말렸다. 그런데 가족들이 출타하고 없는 사이 김치를 배불리 드시고 아주 잠을 자고 말았다는 말도 들었다.
또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33일의 금식 기간을 주셔서 33일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금식을 끝냈다고 한다. 그런데 끝나는 날 성도들이 와서 보니 목사님이 별로 금식하신 분 같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목사님에게 7일 만 더하면 40일인데 채우시면 좋을 것 같다고 했더니 목사님에게 교만한 마음이 들어갔는지 좋다고 하면서 7일을 더 하시어 40일을 채우셨는데 채우시는 그날 소천 했다고 하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장기금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간만 해야지 인간의 의지대로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 없이는 숙고해 볼일이다. 그리고 보호 식은 기도원에서 금식한 만큼의 날수를 하고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똑똑한 지혜 보다 났다고 하지 않던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이와 같이 그 사람의 능력과 환경을 살펴 연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내 마음으로 하는 것은 마귀가 참견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연단은 마귀를 대적하며 영혼을 강건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순종은 복 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욥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의 길을 택하였기에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23:10)
四 의 연단을 받은 후에는 언제나“축복”이 뒤를 따른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것은 여호와 이레로 복을 준비해 두시고 연단하시고 시험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8:16)
욥과 아브라함, 요셉과 형제들, 모세, 다윗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연단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았다.
성경말씀을 알면서도 연단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적당하게 피하고 적당하게 교회생활 하고 적당하게 말씀 붙들고 지내시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다. 연단을 피하는 길에는 마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4 의 연단 후에는 반드시 은혜를 주시나 그 다음에 꼭 시험을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험으로 보아 이때 가장 조심해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하고 정말 조심해야 할 때가 바로 이때다.
여기서 은혜 받았다고 까불거나 교만하거나 우쭐대면 오히려 더 나빠지게 된다.
정말 말 한마디, 행동하나하나 조심할 때가 이때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때 조심하지 않아 시험에 걸려들면 지금가지 연단 받은 것이 무효가 돼버린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도 조심해야 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다. 좋은 일에 마귀가 방해한다는 뜻이다. 한 귀신이 나갔다가 일곱 귀신 끌고 오는 것과 같아진다. 쉽게 말해서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면 나쁜 곳에 쓸 우려가 아주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선은 악을 먹고 자랄 수 없지만 악은 선을 먹고 자란다. 이 이치를 잘 깨달아야 한다.
은혜를 까먹는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하게 되고 행동이 거칠어지고 교만해지는데 자신은 이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험받는 자들은 말조심에서부터 행동 하나하나에 까지 조심하고 슬기롭게 대처해서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점검하여 마지막 시험에 꼭 합격하기 바란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사도바울의 경험적인 이 말을 꼭 기억하자.
연단 받아 시험에 합격하면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는다. 고로 연단의 수 4는 희망의 수가 되는 것이다. 연단을 끝낸 아브라함은 복된 생활 속에서 살았다.
(창24:1)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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