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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짜 : 2020. 01. 27.(월)
* 장 소 :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5
# 허난설헌의 묘
설연휴 마지막 날 무갑산행을 마치고 하산하였는데 겨우 오후 3시를 넘긴 좀 이른 시간이었다.
집으로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여 근처에 있는 허난설헌의 묘를 찾아보기로 했다.
난설헌의 묘로 향하는 차 안에서 보니 차창에 가는 빗방울이 하나 둘씩 맺힌다.
오전 내내 우중충하던 날씨가 드디어 비를 뿌리게 되는 모양이다.
잠시 그냥 집으로 갈까하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냥 가기로 하였다.
차라리 이렇게 우중충하고 비를 뿌리는 날씨가 난설헌의 짧지만 고난(苦難)한 생애와 잘 어울린다!
내가 광주로 이사 오기로 결정을 하고 난 후 기분이 좋았었던 일 중 하나가 광주 땅에 허난설헌의 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름만 들어 봤을 뿐 특별히 난설헌에 대하여는 허균의 누이라는 것 외엔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몇 해 전 강릉을 여행하던 중 경포호 가까이에 있는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을 방문하고 나서야 난설헌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나 저제나 택일을 미뤄 오다가 이사 온지 3개월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찾게 된 것이다.
# 허초희와 신인선
이 두 여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많지 않은 조선시대 반가(班家)출신의 지식인 여성이다.
나의 짧은 지식 탓도 있겠거니와 조선시대 이름을 남긴 여류 중 양반들의 풍류 대상인 기생들을 빼고는 별로 기억나는 인물이 없다.
너무 유명한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한중록을 지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이름은 안 알려 졌다) 정도?
심지어 왕족들조차 여자들에게는 한글 외의 문자 가르치길 꺼려했다고 하니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사회 제도가 양반과 남성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데 여성들도 공부를 하여 머리가 무거워지면 남자들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천한 신분의 기생들이야 아무리 학식이 풍부한들 데리고 놀기엔 좋지만 저 아래 신분이니 감히 양반남자들에게 맞먹으러 들 생각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4사람을 꼽는데는 보통 화가이기도 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황진이, 이매창을 꼽는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사대부 가문 출신이며 오롯이 양반가의 남편을 맞이하여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재미있는
야사나 잡스런 얘기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누가 장난삼아 얘기를 재미있게 꾸며 퍼뜨렸다가는 반가의 후손들에 의하여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황진이와 이매창도 뛰어난 지식인이자 시인이지만 기녀(妓女)로 평생을 살다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뭇 호사가들의 맛있는
요깃거리가 되어 기록으로 보다는 야담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아마 소설가에 의하여 쓰여졌거나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얘기이거나를 막론하고 절반 이상은 가상의 꾸며진 얘기일 것이리라!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황진이와 이매창을 따로 구분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다.
-다 아는 얘기 하나-
옛날에 동네에 효자로 소문난 젊은이가 있었다. 반면 늘 부모로 부터 ‘불효막심한 놈’이라는 꾸중을 들으며 사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하루는 자기도 효자로 소문난 사람을 본받아 효자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 동네를 찾아갔다.
어떤 일을 해서 효자 소리를 듣나 궁금했는데 이런 소리를 들었다.
효자의 아버지가 아침에 나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은 효자여, 내가 아침에 입을 옷이 차지 않게 제가 입었다가 덥혀서 벗어주네!”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효도가 별것 아니구나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버지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어나셨다.
“이런, 불효막심한 놈 좀 보게! 이젠 제 아버지의 옷까지 제가 입고 있네 그려!”
하고 뭐라 변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더란 얘기가 있다.
우리의 옛 여인들(정확히는 조선시대)은 참으로 사람대접을 제대로 못 받았다.
요즘 산악회 등 친목단체 모임 같은데 가서보면 남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장악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까지는 여성들에게도 지금 못지않은 자유가 있었던 듯하다.
조선 건국 시 개국공신 중 누군가가 이런 여권이 강력한 부인을 모시고 바가지 긁히며 어렵게 살았던가 남성 우위의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자고 여론을 이끌어 낸 끝에 여권(女權)을 억눌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조상들의 묘비를 봐도 남성은 이름과 생전의 벼슬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여성은 이름조차 없이 다만 본관만 밝혀 전주이씨의 경우
‘配全州李氏之墓’라고만 써 있을 뿐이다.
신인선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사임당(1504~1551)의 이름으로 생각되고, 허초희는 허난설헌(1563-1589)의 이름이 확실하다.
처음 이글을 읽게 되었을 때 제목만 보고 ‘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말하는구나!’하고 알아차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두 여성은 운좋게 양반가문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시가와 그림에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후 결혼을 하여 운명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는데 위의 효자와 불효자 두 젊은이의 경우 비슷하게 둘이 보기 드문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결혼을 하였지만 시가(媤家)에서 이들을
대하는 방법은 크게 차이가 났다.
먼저 태어난 신사임당은 딸만 둔 가정에 태어나서 아들잡이이므로 시집의 배려로 결혼 후에도 친정에서 지낼 수 있었으며 그래서 아들
율곡도 강릉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남편도 부인의 재주를 훌륭하게 생각하여 그의 글이나 그림을 가지고 나가 친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기도 하였다 하며 부인의 충고를
잘 받아들여 화를 면한 적도 있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더욱이 훌륭한 아들을 두어 신사임당은 자식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어디 한결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으로 빛을 내게 된다.
세상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여성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여성이 있었다는 것 또한 큰 복이요 자랑이다.
허난설헌은 신사임당 사후 12년 뒤이긴 하지만 같은 강릉 땅에서 태어났다.
이 뛰어난 천재 시인은 대대로 글 잘쓰는 양반집 양천허씨 가문에서 태어나 일찌기 글을 배우고 재주를 세상에 떨친 것은 사임당과 같지만
불행하게도 15살 어린 나이에 안동김씨 성립(誠立)과 결혼 후 팔자가 세상에 없이 기구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남편은 자기보다 더 잘난 부인을 인정하기는커녕 결혼 초부터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기방에 출입하기를 밥 먹듯이 했으며,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글 잘 쓰고 똑똑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살림만 잘하는 뭇 아낙네와 다른 것에 대하여 사사건건 못살게 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남편이 무식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도 올랐고 문인들의 축에 끼이기도 한 내력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다.
난설헌이 지은 시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한다.
‘내가 지어준 새옷을 입고 딴 여자를 만나러 가네’
난설헌은 아들, 딸 둘을 두었었는데 전염병으로 한해 간격으로 모두 잃고 나중엔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을 하였다고 한다.
어디 재미 붙일 곳 한 군데 없는 난설헌은 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마 병을 얻어서 죽게 되자 고쳐 보고자 하는 의욕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일찌기 요절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대목이다.
거기다가 명문대가이던 친정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도 한 요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행이라면 진보적 가문에 태어났던 관계로 그 당시로는 드물게 여성이지만 ‘허초희’ 이름 석자는 확실하게 남기고 죽었다.
무진 고생을 하면서도 글과 그림을 한방 가득 남겼었다고 한다. 자신이 글을 배웠던 탓에 운명이 기구했었다고 생각을 했었는지
27살의 아까운 나이로 죽으면서 유언으로 자기 작품을 모두 태워 남기지 말라고 했다한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친정 동생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에 의해 친정에 남아있던 작품과 그가 외워두었던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었고,
작품의 일부를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의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보내 중국에서도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 받았다고 한다.
허균은 난설헌의 시를 일본에도 보내 칭송을 받았다 한다.
허균은 널리 알려진 대로 최초의 한글 소설이자 당시의 체제와 사회제도를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말년에는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하여 그의 묘에는 시신조차 없다한다. 천재가문은 허무하게 몰락하였다.)
# 청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 당시 38세의 젊은 표옹(瓢擁) 송영구(宋英耈)라는 분이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한다.
숙소에 머물게 되었는데 숙소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불목하니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보통 사람은 알기 어려운 문장을 중얼중얼 외우면서 불을 때고 있었다.
하도 신기하여 송영구가 물었다.
“너는 누군데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그 어려운 문장을 어떻게 암송하느냐?”
“예, 저는 남월(南越, 중국남부와 베트남 북부 지역) 출신이온데 몇 년 전 북경으로 과거보러 왔다가 몇 차례 낙방을 하고 노잣돈이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너, 그러면 그동안 과거 시험에 어떻게 답을 썼는지 종이에 써 보아라!”
그런 후 그 사람의 글을 살펴 보니 지식과 문장을 훌륭한데 과거시험에서 요구하는 격식에 크게 못 미치는 글이었다 한다.
이에 송영구가 과거 시험 답안 작성요령을 알려주고 몇권의 책과 함께 얼마의 돈을 쥐어 주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2년 후 이 젊은이 주지번은 과거에 급제하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다.
당시 청나라의 3문장가 중 으뜸이었다고하니 주지번의 문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고 이런 귀재를 알아본 송영구의 눈 또한 뛰어나다.
주지번은 평생을 송영구를 스승으로 마음에 두었다 한다.
더 자세한 주지번과 송영구, 또 허균과의 관계를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일독을 바란다. 천재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든 연결이 되도록 운명이 짜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http://cafe.daum.net/kimango/Tmu0/95?q=%EC%A3%BC%EC%A7%80%EB%B2%88
#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
동해안 북부 여행을 하고자 강릉을 지나자매 다른 곳은 생략하고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을 꼭 찾아보고 싶었다.
물론 신사임당의 오죽헌도 마음에 없는 것은 아니나 전에 몇번 가보았고 그보다는 요즘 관심사인 허난설헌에 대한 한 조각 금쪽같은 얘기라도
주을 수 있을 것이 없나 해서 없는 시간을 내어 다 저녁 때 잠시 들러본 것이다.
거기 기념공원에 가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은 경포호 옆 초당두부마을이 있는 그곳에서 난설헌이 태어났고 허균이 살았었다고한다.
허균이 태어나기도 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허엽(초당), 장남이자 이복형 성, 친형 봉, 친누이 난설헌, 균 다섯을
‘허씨 5문장’으로 칭송한다는 것과 초당두부로 유명한 초당마을이 허엽의 호 ‘초당’에서 유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당 두부는 초당 선생이 강릉의 맑은 물로 두부를 만들어 이미 그 당시에도 초당두부의 명성은 장안까지 이름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초당 허엽선생은 좋겠다. 자녀 여섯 중 넷이나 모두 천재적 시인으로 키워 냈으니.....!
행복한 사임당 보다는 슬픈 난설헌, 연민의 정으로 더 마음이 간다!
난설헌의 시 2편을 소개한다.
난설헌이 지은 시는 자신의 운명처럼 외롭고 슬픈 내용의 시가 많지만, 때로는 즐거운 정경이나 애틋한 사랑의 시도 많이 지었다.
진보적 가풍을 따라서 파격적이고 강한 기운의 시도 거침이 없이 썼다.
# 허난설헌의 시 2편
채련곡(采蓮曲)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해맑은 가을 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蓮花沈處繫蘭舟(연화심처계란주) 연꽃 우거진 곳에 난주배를 매었네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련자) 물 건너 님을 보고 연밥 따서 던지고는
或被人知半日羞(혹피인지반일수) 혹여 남이 알까봐 반나절이 부끄러웠네
곡자(哭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서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으스스한 바람이 일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이네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노라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기를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황대 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네
# 사족(蛇足)으로 마무리
역사에 가정(假定)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지만 한번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아니한가?
사임당과 난설헌의 성품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추측은 가능하다. 사임당을 가리켜 흔히 ‘현모양처’의 표본처럼
이야기들을 해오지만 남성들이여, 현혹되지 마시라! 절대 알맞은 신부감이 아니다.
사임당은 착하고 말 잘 듣는 남편을 얻어서 대접받고, 남편 이원수(이원수)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말도 잘들어 벼슬길에도 나갈 수가 있었다.
아내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할 생각이라면 신사임당도 틀림없는 좋은 아내이다.
그러나 아내가 지어주는 새 옷을 입고 기생집 출입을 하면서도 바가지를 긁히고 싶지 않은 사람은 사임당 보다는 난설헌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상황을 현재 상황에 맞게 각색을 해 보면,
마누라가 사준 새 옷을 입고도 당당하게 '나, 룸살롱을 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나올 수 있고 싶으면 난설헌을 택하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사임당을 택하면) 포근한 가정에서 속내의 바람으로 방출되던지 아니면 코피 터지지! -.-+;)
조선시대에 똑똑한 여자가 제 뜻을 펼치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했다.
첫째, 태어날 때 개방적 가문에 태어나 여성에게도 글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둘째, 결혼을 해서 남편과 시부모가 며느리의 재능을 인정하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바로 사임당이 그런 경우이고 난설헌은 결혼 후가 사임당과는 정반대였다.
난설헌의 시댁은 대대로 뼈대있는 안동김씨 가문으로 외형적인 면만 보아서는 신사임당 보다 못하지 않다.
만약 이 둘이 서로 가문을 바꿔서 결혼을 했더라면 사임당의 존재는 아마 난설헌보다도 더 이름 남기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현재의 한국은행권
5만 원짜리에는 사임당의 초상화 대신 난설헌의 초상화가 들어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러나 무식한 장삼이사(張三李四)이자 공상가인 나의 생각일 뿐!
# 허난설헌 묘 입구 - 우측 굴다리 위가 중부고속도로. 묘까지의 거리 약 100m
# 허난설헌묘와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묘역 안내석
# 허난설헌 묘 - 합장묘가 아니고 단독묘. 정면에서 촬영고자 하였으나 정면에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어 약간 옆으로 촬영
# 엄연히 이름이 '허초희'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묘에는 '정부인 양천허씨'로만.....
# 난설헌 시비 : 저 위 본문에 소개된 '곡자(哭子)'가 새겨져 있다. 남의 이야기이니 담담이 읽을 수 있지, 나의 이야기라면 다만 한 글자라도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고 읽을 수 있으랴? 이때 이미 뱃속의 아이가 유산될 수 있음을 예견을 했나보다!
#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묘 - 난설헌 사후 후처인 남양홍씨가 정부인(貞夫人)으로 합장되어있다. 첫째 정부인 난설헌과 합장하지 않고 후처 남양홍씨와 합장한 것은 난설헌은 결혼 후 불과 12년 만에 죽고 자녀도 모두 죽어 남기지 않았다. 남양홍씨가 후처이긴 하지만 결혼생활이 길었고 안동김씨의 자손을 두었을 것이므로 있을 수 있는 일임.
# 문인석 - 각 묘에 세워진 문인석을 제외하고 장명등, 망주석, 상석 등은 묘를 옮기고 새로 세운 것으로 보임.
# 위에서 내려다 본 난설헌의 묘 - 우측 작은 묘 두개는 어려서 일찍 죽은 난설헌의 두 자녀의 묘. 일반 서민들은 결혼전에 죽은 사람은 아예 봉분을 쓰지 못하고 산자락에 표 안나는 평장을 함.
# 난설헌의 두 자녀 묘와 묘비명
# 묘비명은 하곡(荷谷) 허봉(許篈, 난설헌의 오빠)이 썼다.
# 안동김씨 재실 안내문 - 묘역 좌측에 있다.
# 재실 정문
# 안동김씨 송덕비 - 본래 안동김씨 묘역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500m떨어진 곳에 있었다한다. 중부고속도로를 내면서 안동김씨 문중에서 묘를 옮기고 무려 2만 1천여평을 무상제공함으로서 시행자인 한국도로공사와 건설사인 쌍용건설사 이름으로 세운 것.
역시 대단한 안동김씨 가문!
# 강릉 '허초희, 허균 유적지' 안내책자에서 인용한 초당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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