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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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가 동요하는 기색 한 번 내비치지 않은 채 그 험난한 여행을 감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난에서 비롯되는 그런 불공정한 처지를 어쩌면 그렇게 빨리, 그토록 탁월하게 수용할 수 있는지 가끔 자문해 보기도 했다.
어머니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는 데는 그 지독한 밤만 한 것도 없었다.
잔혹한 모기들, 찌는 듯한 더위, 배가 운하를 통과하면서 휘저어 놓은 진흙에서 풍기는 구역질 나는 악취, 북새통 속에서 편히 쉴 만한 자리조차 제대로 차지하지 못해 어수선하게 왔다 갔다 하는 승객들. 이 모든 것들은 어머니의 침착한 성격을 교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조작된 것처럼 보였다.
사내처럼 변장하거나 마드리드 하층 계급 여자처럼 차려입은 임대용 아가씨들이 옆 선실에서 사육제의 수확을 거두는 동안,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을 참아 내고 있었다.
아가씨 한 명이 어머니가 앉아 있는 곳 바로 옆 선실을 매번 다른 손님을 대동한 채 뺀질나게 드나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 아가씨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을 시간 동안 네 차례나 선실을 드나들던 아가씨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측은지심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
"불쌍한 아가씨들 같으니."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보겠다고 저런 짓을 하는 모양인데,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더 낫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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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란다." 외할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그 광경에 취해 있다 깨어난 내가 그 반대편 기슭에는 무엇이 있는지 외할아버지에게 묻자 외할아버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반대편에는 기슭이 없단다."
그동안 수많은 바다를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아 온 나는 당시 외할아버지가 내게 해 준 그 대답이 외할아버지가 평생 내게 해 준 위대한 대답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내가 당시까지 바다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그 어떤 이미지도 그 더럽고 광활한 바다의 모습과는 일치될 수 없었다.
질산이 함유된 모래가 뒤덮인 해변은 썩은 홍수 나뭇가지 더미들과 날카로운 달팽이 껍질들이 사방에 깔려 있어 도저히 걸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마차 왼쪽으로 바다가 나타나자마자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으로 보아, 어머니 역시 시에나가 바다를 보고 같은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리오아차 바다처럼 넓은 바다는 세상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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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봐라. 저기가 바로 세상이 끝나는 곳이었단다."
나는 어머니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좇았다.
역사였다.
'X' 자 형태의 양철 지붕에 일렬로 발코니들이 달린, 껍질 벗긴 통나무로 지은 건물이 있고, 건물 앞에 작고 황량한 광장이 있었다.
200명도 채 수용하지 못할 것 같은 광장이었다.
그날 어머니가 내게 정확히 알려 준 바에 따르면, 그곳은 1928년에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나나 농장 일용 노동자들이 군대에 의해 학살된 곳이었다.
나에게 기억력이란 것이 생긴 후 외할아버지는 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런 일은 그 뒤로도 천 번 정도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나는 마치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범죄 집단으로 선포하는 법규를 읽고 있는 군 장교, 5분 이내에 광장을 떠나라는 장교의 명령을 받고도 무시무시한 뙤약볕 아래 꿈쩍도 하지 않는 성인 남녀와 어린이 3,000명, 발사 명령, 이글이글 타오르는 침 같은 섬광들을 토해 내는 기관총 소리, 지칠줄 모르는 기관총이 군중 숫자를 싹둑싹둑 가지런히 잘라 내는 사이 공포에 질려 한쪽으로 휩쓸리는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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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가문은 가장 존경받는 가문들 가운데 하나였으나 그에 비해 힘은 없었다.
그래도 바나나 회사에 근무하는 내국인 고위층조차도 인정해 주는 품위 때문에 다른 가문과 차별되었다.
바나나 농장은 시민전쟁에 참가했던 자유파 베테랑들이 마지막 두 개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 머물러 있게 된 곳이었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사가 벤하민 에레라 장군으로, 오후가 되면 네에를란디아에 있는 장군 소유 농장 저택에서는 장군이 평화를 상징하는 클라리넷으로 연주하는 왈츠 음악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어머니는 그런 불쾌한 곳에서 여자로 성장했고, 마르가리따 마리아 미니아따가 티푸스로 사망한 뒤부터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머니 역시 병약했다.
삼일열 때문에 불안정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으나, 마지막으로 앓았던 병이 낫고 나서부터는 평생병치레 한 번 없이 건강하게 살아 97세를 누렸고, 적자 열하나에 남편이 데리고 온 자식 넷, 손 예순다섯, 증손 여든여덟, 고손 열넷을 두었다.
어머니는 2002년 6월 9일 밤 8시 30분에 자연사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어머니의 첫 번째 1세기를 축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각에 나는 이 자서전에 마지막 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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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올리고 두 달이 지나, 후안 데 디오스는 내 아버지로부터 루이사 산띠아가가 임신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 소식은 미나가 여전히 비통한 마음을 떨어내지 못한 채 살고 있던 아라까따까의 집 주춧돌까지 흔들어 버렸고, 미나는 물론 대령까지도 신혼부부가 자신들에게 돌아와 살 수 있도록 무기를 버렸다.
하지만 일이 쉽사리 이루어지 지는 않았다.
가브리엘 엘리히오는 몇 개월 동안 자존심과 명분을 내 세우며 잠시 저항을 한 끝에 아내가 친정에서 해산하는 데 동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는 기차역에서 사위를 맞이하면서 가족의 비망록에 금 두른 문장으로 남아 있는 이 말을 했다.
"나는 자 네가 원하는 만큼 자네를 만족시킬 준비가 되어 있네."
외할머니는 그 때까지 자신이 쓰던 방을 개조해 내 부모가 기거하도록 했다.
1년이 지났을 무렵, 가브리엘 엘리히오는 전신 기사라는 좋은 일자리를 그만두고, 예의 그 독학하는 재능을 발휘해 당시에 쇠퇴해가던 과학, 즉 동종 요법을 공부했다.
외할아버지는 감사 또는 번민의 표시로 우리가 살던 아라까따까의 거리 이름을 ‘몬세뇨르 에스베호로'라 명명 해 달라고 당국에 청원했고, 그 거리는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렇게 그곳에서, 1927년 3월 6일 아침 9시, 하늘에 떠 있던 황소자리가 사라지고 날이 밝아 있을 때, 시절에 맞지 않게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7남 4녀의 맏아들이 태어났다.
외갓집 산파 산또스 비예로가 최악의 순간에 기술적인 통제력을 상실하는 바람에 아이가 탯줄에 감겨 질식사할 지경에 처했다.
하지만, 오히려 통제력을 상실한 사람은 바로 프란시스까 이모였다.
그녀는 불이 났을 때처럼 소리를 지르며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아들이에요! 아들이라니까요!"
그리고 곧이어 경보기를 울리듯 소리쳤다.
"럼주 어딨어요, 얘가 숨을 안 쉬어요!"
현재도 우리 가족은 럼주를 갓난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갓난아이의 몸에 발라 문지름으로써 아기의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당시 천우신조로 산모 방에 들어갔던 미시아 후아나 데 프레이떼스는, 아이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탯줄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좋지 않은 자세였다고 내게 여러 번에 걸쳐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는 자세를 교정했으나 내 숨을 되돌려 놓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프란시스까 이모가 비상용으로 성수를 내게 뿌렸다.
내가 태어난 날 태어난 성인 올레가리오가 내 이름이 될 뻔 했으나 성도열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급한 대로 내 아버지의 이름인 가브리엘을 내 첫 번째 이름으로 붙이고, 그 이름 뒤에 아라까따까의 수호성인이자 3월의 성인인 목수 호세의 이름을 붙였다.
미시아 후아나 데 프레이떼스는 내가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 이루어진 총체적 화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내게 세 번째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했으나, 3년 뒤에 이루어진 정식 영세 증명서에는 '가브리엘 호세 델 라 꼰꼬르디아'의 마지막 이름을 잊고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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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들이 멀리서부터 외할아버지를 알아보고는 아주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대령님 들어가세요."
그제야 비로소 나는 벨기에 출신 노인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을 각색한 레비스 마일스톤 감독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보고 난 뒤, 자신의 개와 함께 청산칼리를 마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중의 직감은 밝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진실까지 찾아내는 법인지, 사람들은 벨기에 출신 노인이 노르망디 늪지대에서 만신창이가 된 순찰대와 함께 패배당한 자신의 모습을 영화에서 본 뒤 충격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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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체스를 두지 않겠네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외할아버지는 마치 독특한 생각이나 되는 것처럼 가족에게 그 말을 전했다.
집안 여자들이 어찌나 열을 내며 그 얘기를 했던지, 얼마 동안 나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 그 얘기를 하거나 나더러 그 얘기를 되풀이하라 시킬까봐 두려워 손님들을 피해 다녔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런 것들을 통해 작가로서 나에게 아주 유용했음에 틀림없는 어른들의 특성에 관해 알게 되었다.
어른들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항목들을 덧붙여 얘기함으로써 각각의 얘기는 결국 원래 얘기와 다른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자신들의 부모에 의해 천재로 인정받아 손님이 찾아오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부르고, 새 울음소리를 흉내 내고, 심지어는 어른들을 웃기려고 거짓말까지 꾸며내는 아이들에게 그때부터 내가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문장 하나가 내가 문학적으로 이룬 첫 번째 성취였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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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가 눈이 떨고 노망이 들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죽기 전까지라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외할머니를 그녀들과 함께 보살폈다.
처녀로 죽을 때까지 깊은 신앙심을 유지했던 프란시스까 이모는 계속해서 예의 그 특이한 자신감을 유지하고 구구절절 이치에 맞는 경구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신이 자신의 뜻에 따라 자기를 불렀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맡고 있던 공동묘지 열쇠와 성체 공장 열쇠를 내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티 없이 깨끗한 침대 시트 여러 장을 들고 방문턱에 앉아 자기 몸에 맞는 수의를 짓기 시작했다.
어찌나 정성 들여 예쁘게 만들었던지, 죽음은 수의 짓는 일을 다 끝마칠 때 까지 2주 동안이나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수의가 완성되던 날 밤, 병이 나지도 않고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그 누구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어 아주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뒤에야 비로소 식구들은 전날 밤 그녀가 자기 사망 증명서를 작성해 놓았으며 장례식까지 준비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역시 남자를 모르고 지냈던 엘비라 까리요는 집의 끝없는 고독 속에 홀로 남았다.
자정 무렵이면 옆 침실들에서 항상 들려오는 귀신들의 기침 소리가 그녀를 깨웠으나 초자연적인 삶의 고통을 공유하는 데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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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외조부모가 자주 사용하던 단어 가운데 하나가 '가난' 이었다는 것을 그 몇 개월 동안의 실제 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바나나 회사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외조부모 집에서 살고 있던 우리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들 항상 가난에 대해 불평했다.
예전과 달리 식사를 두세 번 차리는 일은 없고 단 한 번에 끝났다.
예전처럼 식객들에게 점심을 대접할 재원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조차, 점심 시간에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의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결국은 시장 싸구려 음식점에서 음식을 샀다.
그 음식은 질이 좋고 값도 훨씬 더 싸고 놀랍게도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하지만 외할머니 미나가, 자주 찾아오던 식객들 가운데 몇이 음식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로 찾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재원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바랑끼야에 살고 있던 부모님은 찢어지게 가난했으나, 그 가난은 오히려 내가 어머니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행운이 되었다.
어머니는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역경 앞에서는 사나운 암사자 같은 면모를 드러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순종적이기라기보다는 오히려 투쟁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어머니에게 의당 지녀야 할 혈육의 사랑 이상으로 경탄할 만한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순종과 투쟁은 확고한 믿음 하나와 더불어 어머니의 삶에 부여되었던 두 가지 대표적인 덕목이었다.
최악의 순간에 처하게 되면 어머니는 하늘이 당신에게 부여해 준 그런 자산들을 무시했다.
매일 먹는 수프를 만들기 위해 황소족 하나를 사서, 국물이 물어지다 못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매일같이 끓인 것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전기가 나가자, 헝겊으로 횃불 몇 개를 만들어 한 달 내내 쓸 돼지기름을 새벽녘까지 소비하고, 어린 자식들이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도록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일부러 심어 준 것도 그런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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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강에서 서식하는 동물들을 계속해서 죽인다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을 내게 처음으로 들려준 사람은 바로 꼰데 아베요 선장이었다.
그는 자기 배에서는 총 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집 식구를 죽일 수도 있어요!" 선장이 소리쳤다.
"내 배에서는 절대 안 돼요."
그런 일이 있은 지 17년 뒤, 그러니까 친구 하나가 멕시코로 전화를 걸어 다빗 아랑고 호가 마강게 항구에서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온 1961년 1월 19일을 나는 몹시 불쾌한 날로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날 내 젊음이 끝나 버렸던 것이다.
우리의 추억이 서려 있는 강 덕택에 우리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던 약간의 젊음마저 끝장나 버렸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 전화를 끊었다.
현재 마그달레나 강은 물이 오염되고 서식하던 동물들도 사라져 죽은 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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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주 수요일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아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자존심이 상한 내 라이벌이 첨대 발치에서 말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역시 알몸이 던 그녀가 중재를 하려고 애썼으나, 남편이 권총 부리로 그녀를 밀쳐 내며 말했다.
"당신은 끼어들지 마. 침대에서 일어난 부정한 짓은 총알로 해결해야 하는 법이야."
권총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그가 사탕수수로 만든 럼주 병마개를 땄다.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으나, 만약 그가 날 죽일 생각이라면 그렇게 뜸을 들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후, 침대 시트로 몸을 가린 니그로만따가 안심이 되었는지 파티에 참석하는 것 같은 태도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가 다시 권총 부리로 그녀를 밀쳐 내며 말했다.
"이건 남자들 문제야.”
그녀는 팔짝 뛰어 칸막이 뒤로 숨었다.
첫 병을 다 비울 때쯤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병을 딴 그가 권총 부리를 자기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서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소리만 날 뿐이었다.
내가 벌벌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있을 때 그가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
"자네 차례야."
권총을 잡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놀랍게도 꽤 무겁고 따뜻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 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뱃속은 뜨거운 거품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권총을 발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권총을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왜 그래? 똥 지렸어?"
그는 재미있다는 듯 경멸하는 투로 내게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에 이런 건 미리 예상했어야지."
나는 사나이들 역시 똥을 싼다는 말을 그에게 해 줄 수도 있었으나, 그런 치명적인 농담을 하기에는 내 배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가 권총의 탄창을 열어 카트리지를 빼내 탁자에 던졌다.
비어 있었다. 안
도감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굴욕감이 밀려왔다.
새벽 4시가 되기 전 비의 기세가 꺾였다.
우리 둘은 긴장 때문에 탈 진 상태에 있었다.
그가 내게 옷을 입으라고 명령한 것이 언젠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당시 나는 비장하게 그의 말을 따랐다.
그가 다시 자 리에 앉은 바로 그 순간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펑펑 울었는데, 흡사 자신의 눈물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손가락으로 코를 풀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자넬 이렇게 살려 두는지 알겠는가?"
이렇게 물은 그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었던 3년 묵은 내 악성 임질을 고쳐 준 사람이 바로 자네 아버지이기 때문이야."
그는 남자답게 손으로 내 등을 한 번 턱 치더니 나를 거리로 밀어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마을은 물벼락을 맞은 것 같은 상태였다.
나는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고 걸으며 살아 있다는 황홀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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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시위대와 함께 까삐똘리오 나시오날을 향해 8번가를 헤쳐 나갔다.
시위대의 선두가 볼리바르 광장에 다가가고 있을 때 한 차례 발사된 기관총 탄환들이 선두에 선 사람들을 휩쓸어 버렸다.
순식간에 죽거나 부상당해 거리 한복판에 쌓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우리의 온 몸이 얼어붙었다.
피범벅이 되어 죽어 가던 남자 하나가 사망자와 부상자 더미를 헤치고 기어 나와 내 바짓가랑이
를 부여잡더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부탁을 했다.
"젊은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날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 주오!"
공포에 휩싸인 나는 그를 내팽개쳐 두고 도망쳐 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내 것이 되었건 다른 사람 것이 되었건, 웬만한 공포는 잊어버리는 법을 배웠으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본 그 두 눈에 서린 절망감만은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나와 내 동생이 그 무자비한 지옥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내가 단 한 순간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요즘도 놀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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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모든 꿈들은 가이딴의 죽음으로 인해 그 도시의 연기 나는 잔해 더미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보고타 거리에 깔려 있던 사망자들과 그 후 몇 년 동안 지속된 정부의 억압으로 죽은 사람들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빈자들과 무수한 망명객들은 제외하고도 100만 명이 족히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고위직에 있던 자유파 지도자들이 그 사건으로 자신들이 역사의 공범자로 기록될 위험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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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안 동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정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떼스까의 드넓은 해변에 위치한 노천 성매매 업소들은 해변을 따라 늘어선 관광 호텔들보다 더 친절했다.
나를 포함한 대학생 예닐곱은 초저녁부터 엘 시스네에 자리를 잡고 앉아 댄스파티가 벌어지는 업소 마당의 침침한 조명 아래서 기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새벽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요란스럽게 들리는 뱃고동 소리는 카리브 브라스 밴드의 시끌벅적한 음악과, 바닷바람이 불어오면 치마 밑단이 허리춤까지 올라가는 통이 아주 넓은 치마를 속옷도 없이 입고 춤을 추는 아가씨들의 도발은, 지쳐 있던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새벽녘이면 가끔씩 자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느 나이 어린 창녀가 우리를 초대해 약간 부족하다 싶은 사랑을 나누고 잠을 재워 주었다.
나는 한 아가 씨의 이름과 몸의 사이즈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는 내가 잠 결에 들려주는 환상적인 얘기들을 아주 좋아했다.
나는 그녀 덕분에 술수를 쓰지 않고서도 로마법 과목을 통과할 수 있었으며, 경찰이 공원에서 잠자는 것을 금지했을 때 경찰의 그물망을 여러 번 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침대에서도 그랬지만, 그녀가 단 몇 시간이라도 더 잘 수 있도록 내가 새벽에 그녀의 잡다한 일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부부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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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래뼈로 이루 어진 거대한 돔 아래 위치한 세상의 모든 바다에서 풍랑을 이겨 낸 포경선들을 위해 요나에 관해 위대한 설교를 담은 『모비딕」이라는 문학적 쾌거를 이룬 멜빌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너대니얼 호손의 『일곱 박공의 집」을 빌려 주었는데, 그 책은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율리시스 오디세우스의 방랑에 내포되어 있는 향수의 숙명에 관한 이론 하나를 정립하려 시도했다가 결국 그 이론 안에 갇혀 길을 잃었고, 출구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반세기가 지난 뒤 나는 밀란 쿤데라의 어느 명저에서 그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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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에 질린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 망연자실 앉아 있는 극도의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담배를 피우지 않고서는 독서를 하지도, 음악을 듣지도, 친구나 원수들과 대화를 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언제라고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바르셀로나에서 가끔씩 만나는 지인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정신과 의사 친구가 함께 식사를 하던 사람들에게 흡연이 끊기 어려운 중독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고, 그의 대답은 오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단순했다.
"담배를 끊는다는 건 사랑하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같거든."
그 말을 듣자 통찰력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왜 내가 그렇게 했는지 절대 알 수 없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으나, 막 불을 붙였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고, 그 후로는 평생 초조함도 후회도 없이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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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고 있던 서사시의 모델은 바로, 어떤 것의 주인공도 아니고 희생자는 더더욱 아닌, 모든 것의 무의미한 증인이자 희생자였던 내 자신의 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인 수단에 의거해 글을 쓰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소용없다는 것이 드러난 마당에, 그동안 잘 알지도 못한 채 나를 질질 끌고 다녔고 외할아버지 집에 고스란히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감정적 부담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서사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장 올바른 글쓰기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는 해도, 그 마을의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를 처음으로 밟고 지나간 때부터, 내 방법이 쓸쓸하고 향수 어린 그 지상 낙원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가장 행복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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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몇 개월 동안은 매일매일 다룰 주제를 선택하는 일만도 고통스러웠다.
도무지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다른 신문들을 샅샅이 뒤지느라 시간을 보내고, 개인적인 화담을 통해 정보를 얻고, 환상에 빠져 잠까지 설칠 지경에 이르러, 결국 생활을 제대로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은 어느 날 오후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어느 집 대문에 씌어 있는 단순한 문구 하나를 본 것 이었다.
"장례용 종려나무 팝니다."
순간 그 집 대문을 두드려 그 문구가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나 소심한 성격 탓에 그만두었다.
글을 쓰는 데 가장 유용한 비결들 가운데 하나는 어느 문을 두드려 직접 뭔가를 물어보지 않고서도 실제의 상형 문자들을 읽어 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내 삶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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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꼬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한 번 실리고 난 뒤 모 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초꼬는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잊힌 장소가 되어 버림으로써 아무런 결실도 없게 되었다.
나는 그 이유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즉, 콜롬비아는 항상 파나마라는 탯줄을 통해 세상에 열린, 카리브적 정체성을 지닌 국가였다.
이렇듯 우리 콜롬비아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팔다리가 잘림으로써 오늘 같은 처지에 이르도록 선 고받았다.
다시 말하면, 콜롬비아는 두 대양 사이에 놓인 운하가 우리 것이 아니라 미국 것이 되도록 하는 데 호의적인 조건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안데스적 정신을 소유한 나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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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당국의 폭압적인 정책 때문에 군경의 총부리에 떠밀려 자신들의 땅에서 축출된 농부들에게는 그 어떤 가혹한 운명이라도 그보다 더 못할 수 없을 때, 마구잡이로 징발된 4,000명이 넘는 용사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농촌에서 밀려든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룬 도시들은 그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신문 사설들에서, 거리에서, 카페들에서, 가족 간의 대화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콜 롬비아는 활기 없는 공화국이었다.
농토를 떠난 수많은 농부들과 희망을 잃은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한국전쟁은 개인적인 해결책이었다.
온갖 사람들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경황도 없이, 자신들의 신체적 조건도 고려하지 않은 채 서로 뒤섞여 한국으로 떠났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러 왔던 것과 유사했다.
이전에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이질적이었던 그 사람들이 드문드문 콜롬비아로 돌아왔을 때는 결국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참전 용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말다툼이라도 한 번 벌이게 되면 그 잘못이 그들 모두에게 덮어씌워지기에 충분했다.
정신적인 평정을 잃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직업을 구할 권리가 없다는 간단한 이유로 그들에게는 취업문이 닫혀 있었다.
2,000파운드의 재로 변해 돌아온 무수한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 참전 용사의 훈장들이 저당 잡혔다는 소식은, 열 달 전 마지막 참전 용사들이 거의 100만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가지고 콜롬비아로 돌아와서는 그 많은 달러를 뻬소로 바꾸는 바람에 1달러 가치가 3뻬소 30센따보에서 2뻬소 90센따보로 하락해 버렸다는 신문 기사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하지만 참전 용사들이 조국의 현실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들의 명성은 더 낮아져 갔다.
귀국하기 전만 해도, 생산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특별 장학금을 받게 될 거라는 둥, 평생 먹고
살 연금을 받게 될 거라는 등, 미국에서 살 수 있는 편의를 제공받게 될 거라는 등 다양한 기사들
이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그들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를 했고, 그들 가운데 대다수의 호주머니에 남게 된 것이라고는 전쟁이 끝난 뒤 휴식 차 들른 일본 병영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일본인 애인들 사진뿐이었다.
그 국가적 드라마로 인해 나는 역전의 용사들에게 지급되기로 한 연금을 한없이 기다리던 외할아버지 마르케스 대령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인색한 정책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던 보수파에 대항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참여한 반란군 대령에 대한 보복이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었다.
반면에,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고국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신문의 유명 인사 동정 기사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범죄 보고서에 등장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무고한 사람 둘을 사살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그가 담당 판사들에게 물었다.
"내가 한국전쟁에서 100명을 죽였다면, 보고타에서 열 명을 못 죽일 이유가 뭡니까?"
이 사람은, 다른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난 뒤에 전쟁터에 도착했다. 그 같은 사람들 다수가 콜롬비아식 마치스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마치스모는 한국인 용사 하나를 죽이고도 의기양양해한 사건에서 드러났다.
일차로 파견된 군인들이 귀국한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처참하게 살해된 참전 용사 숫자는 이미 열두 명을 넘겼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사람이 아주 다양한 이유 때문에 괜한 말다툼에 연루되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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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차가운 바람이 부는 3월이었다.
먼지 섞인 보슬비가 비애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패배감에 사로잡힌 나는 편집국으로 가기 전 옆에 있는 꼰띠넨딸 호텔로 숨어 한가한 바에서 위스키 더블을 주문했다.
성직자 같은 두꺼운 외투를 벗지 않은 채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던 나는 내 귀에 입술이 닿는 것처럼 가까이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를 느꼈다.
"혼자 술 마시면 혼자 죽는 법이야."
"당신 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길 빌겠소, 아름다운 여인."
목소리의 주인공이 마르띠나 폰세까라 생각한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대답했다.
목소리는 공중에 은은한 치자꽃 향기 같은 흔적을 남겼으나, 그녀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회전문을 나가 보슬비 흩뿌리는 대로에서 노란 우산을 펼쳐든 채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 노란 우산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술 두 잔을 마신 뒤 나 역시 대로를 건너 방금 전에 마신 술기운에 의지해 편집국에 당도했다.
기예르모 까노가 편집국으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들뜬 목소리로 모두에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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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찍, 오후 2시에 파리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육로를 통해 바랑끼야로 갔다. 까르따헤나 버스 터미널에서 그 잊을 수 없는 '마천루' 모텔 수위 라시데스를 만났다.
'마천루'를 떠나온 이후 나는 그를 보지 못하고 지냈었다.
그는 와락 나를 껴안더니 눈물을 흘렸고, 내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가 탈 버스가 도착했고 내가 타고 갈 버스가 떠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작별 인사를 교환했다.
그가 내 영혼에 남을 만큼 뜨겁게 말했다.
"가브리엘, 당신이 누구라는 사실을 왜 내게 한 번도 얘기해 주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아이, 라시데스 아저씨." 나는 그보다 더 가슴 아파하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오늘날까지 내가 누구인지 나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아저씨에게 말할 수 없었던 거예요.”
몇 시간 뒤, 세상 그 어느 곳보다 투명하고 무심한 하늘 아래서 바랑 끼야로 가는 택시 안에 앉아 있던 나는 베인 데 홀리오가를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내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메르세데스 바르차 집 쪽을 바라보았다.
늘씬한 몸매에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금박 레이스 달린 초록 색 드레스 차림에, 머리를 제비 날개처럼 자른 채, 도착하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차분하게 현관 그 자리에 상처럼 앉아 있었다.
7월 어느 목요일 이른 시각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나는, 택시를 세워 놓고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으나, 내 운명처럼 불확실하고 집요한 그 운명에게 다시 한 번 더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도 후회감에 배가 뒤틀리는 벌을 계속해서 받아야 했다.
당시에는 앞 좌석 뒷부분에 요즘에도 '편지지 한 벌' 이라는 쉬운 말로 불리는 뭔가를 장치해 놓는 좋은 풍습이 있었다.
가장 자리에 금박을 입힌 편지지 한 장과, 같은 재질의 장미색, 크림색 또는 파란색 종이로 만든, 가끔씩은 향기나 나는 봉투 하나가 준비되어 있었다.
전에 몇 번 비행기를 타고 여행했을 때, 그 종이에 이별의 시들을 썼다가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비행기에서 내릴 때 날려 보기도 했다.
하늘색 종이 하나를 선택한 나는, 그 이른 새벽녘에 누구를 위해 그렇게 단장했는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아침 7시에 신랑 없는 신부처럼 초록색 결혼식 드레스를 입고 하늘을 나는 제비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현관에 앉아 있던 메르세데스에게 정식으로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썼다.
과거에 나는 아무 때나 생각나는 대로 적은 장난스러운 쪽지를 그녀에게 보낸 적이 있었고, 우리가 우연히 얼굴을 마주칠 때면 그녀는 항상 편지 대신 알쏭달쏭한 말로 답장을 했었다.
이번에 쓴 편지는 내 여행에 관해 공식적으로 그녀에게 알리는 다섯 줄이 넘지 않은 것에 불과했
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서명을 하려는 순간, 나는 정오에 내리 치는 번개처럼 나를 눈멀게 만든 추신을 첨가했다.
"한 달 이내에 답장 을 받지 못하면 영영 유럽에 머물겠소."
새벽 2시, 몬테고 바이의 쓸쓸한 공항 편지통에 그 편지를 집어넣기 전, 나는 그 추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을 일부러 내지는 않았다.
금요일이 되었다. 그다음 주 목요일, 나라 간의 불일치를 확인한 또 한 차례의 성과 없는 회의가 끝나고 제네바의 호텔에 도착한 나는, 그녀가 보낸 답장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