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애자
1944년 충북 중원(현 충주지역)에서 출생했다.
월간 수필문학으로 1991년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작가회 수필문학진흥회, 충북수필가협회와 충북여성문협 회원이다.
1997년 월간수필 문학상, 1998년 충북수필문학상, 2004년 신곡문학상,
2006년 제1회 충북여성문학상, 2009년 현대수 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달의 서곡』, 『숨은 촉』, 『미완의 집』, 『수렛골에 띄우는 편지』,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될 때』
고요하다
올해 들어와 남편의 몸무게가 부쩍 줄어들었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마른 나무에 좀 먹듯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다. 오늘도 병원에서 몸이 마르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며 이런저런 검사로 하루가 꼬박 걸렸으나 협착증 외에는 이렇다 할 병명은 찾아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옷을 갈아입고 이내 잠들었다. 근력이 떨어지고부터는 코골이도 사라졌다. 앙상한 몰골로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모습이 꼭 플러그를 빼놓은 낡은 TV와 같다. 동적인 화면이 정지된, 무의식의 상태, 죽음과 닮아있다.
노년의 시간은 고요하다. 지나온 시간의 흔적들마저 수성펜으로 메모지에 써 놓았던 일정표가 지워지듯, 생존의 이유와 그에 따르던 스토리가 성취감으로 울려 퍼지던 칸타타 선율이 기억의 파일에서 거반 지워졌다. 때론 세 끼니의 밥 먹는 일조차도 무작위다.
실존에 의미를 잃어버린 시간은 무료하다. 직함과 미래를 지향하던 꿈이 몸을 떠난 지 오래다.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지워지고, 의욕의 씨앗들이 더 이상 자라날 수 없는 불모지에선 밤과 낮도 말짱 공회전일 뿐이다.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유리창으로 번지는 저녁놀이 추상적이다. 일몰의 시간에 쫓기는 해가 새털구름을 붙잡고 색 놀이를 벌이고 있다. 색채의 형상은 구름의 이동 속도와 부피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검붉기도 하고, 주홍으로 번지기도 하고, 핏빛으로 타오르고, 진보라와 울금으로 뭉쳤다 흩어지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녁놀은 빛에너지를 무화시킨다. 에너지가 사그라지는 허망한 빛의 유희, 그 아쉬움의 틈새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맨드라미 꽃빛과 흡사한 놀 한 자락에 시선이 꽂힌다(...)
기차는 오지 않고
요양병원은 생의 유통기한이 다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다. 갈등의 길항작용이 멈추고, 개인의 인적 네트워크 기능이 차단 된 곳. 삶의 서사가 사라지고 식욕이란 무의식적인 본능만이 생존이란 명분을 유지하는 곳. 하여 나는 이곳을 죽음의 대합실이라고 부른다. 죽을 수도 죽어지지도 않는 목숨들이 생로병사란 절차에 갇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죽음의 열차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건강할 땐 늙고 병들어도 자신은 절대로 요양시설론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나이 들어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수족이 말을 듣지 않아 남의 손을 빌려야 할 상황에 이르면 가족이란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결국 요양시설이란 마지막 기착지에 편입되고 만다.
도시 근교의 요양병원은 대체로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환자들 안색은 하나 같이 침울하다. 환자들 반수 이상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못해 그러하다 쳐도 의식이 온전한 사람들조차 종일 눈을 감고 있거나 말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곳으로 밀려난 것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일종의 배신감과 소외감이 말문을 닫게 했을 터이다. 더구나 한 번 들어오면 죽어서야 나가는 곳이다. 현대판 고려장이라 불리는 이곳엔 오늘도 이성적 사고가 제 구실을 못하는 노구들이 차고 넘치는데, 죽음의 기차표는 매진 상태다.
창순 여사는 휠체어 바퀴를 밀어보려고 용을 쓰지만, 당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말을 듣지 않는다. 화장실 출입만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기를 원하지만 굳어가는 육신은 도무지 주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추사 선생과 불광(佛光)
「추사 명품서첩」을 꺼내 놓았다. 이 책은 1976년 지식산업사에서 발간한 것으로 장정에 상당이 공을 들였다. 책의 너비 38cm, 길이 52cm이며, 상하권의 무게가 15킬로그램이다. 표지는 황금색 비단으로 쌌고, 책을 넣어두는 궤의 꽂이는 상아를 뾰족하게 깎아 아래위로 꽂도록 제작되었다.
이렇게 궁중에서 사용하던 장황형식을 빌어 만들게 된 것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 석학들을 불러 놓고 논의한 끝에 조선회화와 추사명품서첩을 만들어 해외로 나갈 적마다 국가원수들에게 주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었는지는 내가 직접 출판사를 통해 알아본 것이 아니므로 장담할 수는 없으나 조선회화 두 권도 똑같은 형식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작품마다 배접을 했고 각 장마다 미농지를 끼웠으며, 언제 건 마음만 먹으면 한 점 빼내어 벽에 걸어 놓고 볼 수 있도록 공들이고 배려했다.
이 책을 나는 들꽃 사진작가 조유성 선생에게서 물려받았다. 80년대 중반에 의사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병원과 집을 정리한 후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책의 주인은 당신이 맞을 것 같다”며 주고 갔던 것이다. 그 즈음 나는 동양과 서양 미술사에 무던히 빠져 있을 때였는데 선생은 그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고 해마다 봄이 오면 창문을 열어 거풍을 시키고 좀이 슬지 않도록 단속한다. 그중에서도 추사 선생의 서첩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여름이면 더위에 갇혀 외출도 할 수 없을 땐 서재로 들어가 서첩을 꺼내어 날카롭고도 거침없는 필체와 시문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기꺼움을 나는 귀하게 여긴다. 더러는 마음에 드는 글자를 집자해 편액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서재 북창 위에 걸어 놓은 황화주실(黃花朱實)은 전서체인데 궁굴리고 휘어진 어울림이 모란이 핀 듯 소담하다(...)
눈사람을 보내고
산간에 눈이 내렸다. 한나절 내린 적설의 깊이는 6센티미터.
넉가래로 눈을 치던 할아범이 병석에 누워있는 아내를 위해 눈사람을 만들었다. 솔방울로 눈동자를 박고, 숯으로 눈썹과 콧날을 세웠으며, 아침 식탁에서 먹고 남은 토마토를 썰어 입술도 도톰하게 오려붙였다.
척추수술로 두 달 동안 병석에 누웠던 아내가 남편의 부름을 받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나갔다. 할멈은 눈사람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쓰고 있던 모자와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 목에 감아주고 모자도 씌워주었다.
그러나 더운 피의 유전자를 지니지 못한 눈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녹아내렸다. 입술이 떨어지고 눈썹과 콧날이 뭉개졌으며 목은 황새처럼 길어졌다. 가늘게 야위는 몸통 위로 소나무에서 갈비가 떨어져 박혔고, 부서진 가랑잎도 날아와 붙었다. 10여일 후에는 민망할 정도로 추해진 모습으로 늙어가던 눈사람은 기어이 형체를 지웠다. 생의 질곡이 죽음으로 완성됨을 보여주고 떠난 잔디밭 위로 밤이면 서리가 납덩이처럼 얼어붙었고, 사위는 적막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커튼을 내리며 일찍 자리에 들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그렇게 적막한 어둠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 삶이란 여정에서 물리적인 상태로 머물던 하나의 형상을 무화시키는 길 앞에선 누구나 혼자다(...)
봄꿈
우수 경칩이 지나면 개울물 소리가 높아진다. 눈 녹은 물이 불어나 면서 차고 맑은 물소리가 방안까지 찰랑찰랑 밀려온다. 이건 개울 가 까이 터를 잡고 살면서 얻은 특별 보너스다.
나의 봄은 언제나 우수경칩보다 앞당겨 온다. 음력 정월 중순경에 장 담그는 날이 바로 봄맞이하는 첫날이기 때문이다. 물론 입춘이 앞 장섰다지만 동장군이 버티고 앉아 가끔씩 몸살을 앓듯 눈보라를 일 으키거나 북풍을 불러들여 전선줄을 붙잡고 귀곡성을 낸다. 하지만 두 번째 말(午)날이 들면 나는 어김없이 장 담글 채비를 갖춘다. 말날 에 장 담그는 길일로 지켜온 것은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이다.
장을 담그기 전 미리 겨울동안 항아리에 쌓인 먼지를 닦아낸다. 터 줏대감에게 봄맞이 신고식을 치르듯 장독대 청소부터 말끔히 해 놓 은 다음 소금물을 풀어 정수시킨다. 아직은 개울 가장자리로 살얼음 이 녹지 않은 때이지만 장은 일찍 담글수록 간장이 맑고 달다. 올해 도 미리 풀어놓은 소금물을 항아리에 퍼다 붓고 메주를 넣은 다음 마 른 고추와 숯과 대추를 띄워 놓았다.
장 담그는 일로 첫 봄을 맞는 연중행사는 시집온 다음해 봄부터 시 작되었다. 마흔 일곱 해를 치렀으니 우리 집 씨간장도 중년을 훌쩍 넘긴 셈이다. 속도와 새로운 모방과 패러디와 퓨전의 시대에 아직도 화덕에 솥을 걸어 콩을 삶고 메주를 만들어 띄웠다가 첫 정월에 장을 담는 일은 분명 미련한 짓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우리 집의 내력이고 나만의 고전이다(...)
사실적 유미주의자
김애자 ―『봄, 기다리다』를 중심으로
김종완(문학평론가, 격월간 에세이스트 발행인)
유미주의자
『에세이문학』 계간 평을 쓸 때 한번은 박연구 선생이 김애자는 어때? 하고 물었다. 나는 유미주의자라고 잘라 말했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문장이 좋잖아! 글쎄… 그게 그냥 좋기만 할까. 문학이 되는 건 구성과 구조의 문제지 단어 하나 구(句) 하나 멋 부린다고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닌데. 전에 실천적 유미주의자를 만난 적이 있다. 남편이 집필실을 야산 봉우리에 마련해주고는 출근할 때 차로 데려다주고 퇴근길에 들러 함께 퇴근을 하니 하루에 꼬박 8~10시간을 글은 쓴다고, 자기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이 진리라고 확신하는데 딱 맞는 단어 하나를 찾느라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고, 어떤 단어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 경건하게 말하는 거였다. 아, 저쯤이면 글쓰기가 도(道) 닦는 거구나. 행선(行禪)도 있고 좌선(坐禪)도 있으니 문선(文禪)이 왜 없겠나! 난 나의 수업이 그의 문학에 대한 신앙심에 행여 흠집낼까 극히 조심하며 말했다. “문학은 성스러운 게 아녜요, 세속적인 거예요. 삶 자체가 세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삶을 그리는 문학은 세속적이어야 해요.” 유미주의자는 대개 문학경건주의자다. 그에게 문학의 출발은 문학경건주의를 깨는 것으로부터여야 할 것 같았다.
난 김애자를 유미주의자로 지목하고 글을 시작했는데, 독자들은 그 근거 제시를 기다리다가 이젠 잔뜩 짜증이 났을 것이다. 우선 그의 글에서 유미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문장을 한번 보자.
1969년 늦가을에 우리는 산동네에 있는 등나무 집 문간방에다 신접살 림을 차렸었다. 대문 옆 작은 화단엔 서리 맞아 목 꺾인 맨드라미 몇 포기 가 새댁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 연장이란 부엌에서 쓰는 식칼뿐이었 다. 살림 나와 고작 저녁과 아침 두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새 칼을 꺼내다 후물거리는 대궁을 꽃과 분리했다. 소담한 것 여섯 송이만 골라 작은 대나 무 바구니에 담았다. 그렇게 건사된 맨드라미는 신혼 방 화장대 위에서 겨 울을 넘겼다. 그리곤 봄이 돌아오자 화단으로 다시 돌아가 우주 한 귀퉁이 에서 수탉의 관모로 환하게 피었을 때, 우린 첫아기를 품에 안았다. — 「고요하다」 중에서. 밑줄은 필자가 그렸다
작가는 1969년 늦가을에 결혼해서 산동네 문간방에다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이듬해 봄 첫아이를 낳았다. 이 단순한 사실을 장황하게도 설명했다. 몰라서 그렇지, 아이의 탄생이 어디 하찮은 일인가. 한 아이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신비한 기운이 총망라되어 한 생명을 낳은 일인 것이다. 모든 탄생은 우주적 사건인 것이다. 맨드라미가 그날을 축하하기 위해 화단에 만발했고, 엄마는 그 축하연을 위해서 지난 늦가을부터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 그래서 그 화단이 산동네의 허름한 문간방에 붙어있는 궁색한 장소가 아니라 우주 한 귀퉁이로 확대된 것이다. 왜? 한 생명의 탄생은 우주적 사건이니까.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김애자의 유미주의가 예쁜 단어나 구(句)의 차원이 아닌 구조적이라는 점이다. 이점이 예사 유미주의와 구별되는 점이고 리얼리즘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