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북한 첫 전술핵잠수함(김군옥 영웅함) 건조
2022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망
재위 기간 70년으로 영국 최장 집권 군주이자 영연방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로 서거했다.
왕위 계승권자인 여왕의 큰아들 찰스 왕세자가 즉각 찰스 3세로서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영국 왕실은 8일(현지시간) 여왕이 이날 오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2019년 시속 300km 초강력 허리케인 도리안 바하마 초토화 사망 43명 이재민 7만명(총인구 39만명) 정부 마비
2019년 ‘고바우 영감’을 그린 화가 김성환 세상 떠남
김성환은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에 태어나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 만주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8.15 해방 이후 서울로 와 경복중학교에 진학했다. 이때부터 학교 미술부장을 지내는 등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1950년 12월 30일 전쟁 와중에 육군본부 '사병만화'에 '고바우 영감'을 처음 그렸으며 제대로 연재되지 못하다가 1955년 2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서 '고바우 영감'이라는 이름으로 첫 연재를 시작했다. <조선일보>를 거쳐 <문화일보>에서 옮겨가면서 2000년 9월까지 45년간 총 1만4139회를 연재한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등록되어 있다.
이 만화는 유신독재, 군사정권을 겪으며 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풍자로 여러 차례 탄압을 받았다.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자에 실린 일명 '경무대 똥통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이승만과 측근의 권력과 위세가 극에 달했을 때 가짜 이강석 사건이 터지자 김성환은 이를 풍자한 만화를 그렸다. 이로 인해 김성환은 경찰청에 연행되어 4일간 문초를 당했으며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승만과 자유당 시절, 박정희 및 전두환 권위주의 시절에도 날카로운 만화를 계속 그렸다.
근대 만화로는 최초로 김용환의 '토끼와 원숭이',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와 함께 총 1만 743매의 원화(原畵)가 2013년 2월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고바우 영감의 연재가 종료되고 나서 한국만화가협회의 회장을 지냈다. 5.16 군사쿠데타 이전에는 '현대만화가협회'라는 단체에서 회장직을 맡았는데, 군사쿠데타 이후 강제해산당했다. 1968년에 한국만화가협회가 창설된 후 회장을 맡았다. 김성환은 2002년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하였고, 2019년 사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9년 9월 8일에 작고하였고, 장례식은 만화인장으로 치러졌다.
2016년 야구해설가 하일성 스스로 목숨 끊음
2008년 탤런트 안재환 스스로 목숨 끊음
2004년 1909년 일본이 제작한 지도에서 ‘간도는 조선땅’ 증거 발견
‘제9도(第九圖)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水系) 답사도’에 명기된 지명들. 일본이 간도(間島)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됐다.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豆滿江)이 아닌 별개의 송화강 지류로 분명히 밝힌 이 지도는 1909년 ‘청·일 간도협약’ 당시 일본측이 만든 것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인 토문강은 두만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줄곧 주장해온 중국에 대한 중요한 반박자료일 뿐 아니라 간도가 조선 땅이었음을 밝히는 결정적 자료로 주목된다.
이상태(李相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이 최근 서지학자 고 이종학(李鍾學)씨의 소장자료 중에서 찾아내 8일 공개한 이 지도는 ‘제9도(第九圖)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水系) 답사도’라는 제목 아래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두만강·송화강(토문강)과 그 지류의 흐름을 상세히 그려 놓은 것이다.
지도에는 ‘메이지(明治) 42년(1909년) 10월, 축척 40만분 1’이라고 제작연도와 방식을 밝히고 있다. ‘조선총독부 도서’ 직인과 ‘아홉 번째 지도’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일제 통감부나 군부대가 전략적인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는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을 명기해 놓았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 적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의 다른 이름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1712년(숙종 38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삼는다’고 적었으나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토문강=두만강’설을 내세워 간도지역이 청나라 영토였다고 주장해 왔다.
2003년 독일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 사망
천재적인 재능과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협력자’란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아야했던 독일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2003년 9월 8일 101년의 삶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치 전당대회를 찍은 ‘의지의 승리’(1934)와 베를린올림픽을 담은 ‘올림피아’(1936),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로 리펜슈탈은 영화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젊은 시절 댄서와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1932년 산악영화 ‘푸른 빛’으로 감독에 데뷔했다. 이후 히틀러의 눈에 든 그는 뉘른베르크에서의 나치 전당대회를 담은 ‘의지의 승리’에서 원근법적 효과를 위해 다양한 렌즈를 동원하고, 히틀러의 영웅적 포즈를 앙각(仰角) 클로즈업으로 올려 찍어 부각시키는 등 혁신적 촬영술로 다큐멘터리의 신세기를 개척했다. 이어 ‘올림피아’에선 170명의 스태프들을 이끌고 빼어난 아이디어와 초인적 노력으로 손기정을 비롯한 베를린올림픽 선수들을 찍어내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그는 ‘올림피아’에서 사람의 몸이 얼마나 힘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독창적으로 입증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1945년 독일의 패망과 함께 끝났다. 나치 전범재판을 통해 4년간 수감생활을 한 뒤에도 ‘나치’라는 멍에를 평생 짊어져야 했다. 레니 리펜슈탈의 삶의 영욕은 그대로 위대한 전진의 시기인 동시에 저주받을 광기와 참혹한 수난의 시대이기도 했던 20세기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2002년 한국전력, `파워콤` 우선협상대상자로 하나로통신 컨소시엄 확정
2002년 완벽하게 보존된 미라상태의 436년전 사대부 부인 사체 발굴 공개
2002년9월8일 경기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에서 태아와 함께 미라가 된 사대부 부인의 사체가 발굴되었다
묘역 발굴을 담당한 고려대 박물관에 따르면 436년 전 출산 중 사망한 부인의 사체가 추운 날씨 때문에 거의 부패하지 않은 채 미라가 된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미라의 흉배가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백한무늬였으나 사대부의 아내에게 주어지는 숙부인 이라는 품계가 명정에 없어 첩으로 출가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2002년 ‘오아시스’ 이창동 감독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
2002년 9월 8일 세계 영화예술의 심장부인 유럽 최고영화제 베니스영화제에서 우리 영화 ‘오아시스’가 감독상(이창동)과 최우수 젊은 연기자상(문소리)을 받았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 수상으로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중요한 영화작가로 올라섰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한 리얼리즘 정신으로 한국 현실을 상대하며 탄탄한 이야기 솜씨로 영화를 만들어 온 끝에 영광을 안았다.
수상작 ‘오아시스’는 전과3범의 사내 종두(설경구)와 뇌성마비로 전신이 마비된 여성 공주(문소리) 등 한국사회에서 축복받지 못한 남녀의 남루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이 영화는 단순한 멜로를 넘어서 사랑의 본질, 나아가서는 한국이란 공간에서 우리는 얼마나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하기는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까지 던진다.
‘오아시스’는 지난 9월 6일 오후 베니스 리오 섬의 팔라 갈릴레오에서 열린 베니스 영화제 공식 시사회에서 각국 기자들과 팬들에게 “소외된 자들의 사랑이라는 영화의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력,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훌륭하다” “어려운 주제인데도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로 만들어냈다”는 좋은 평을 받았다.
2001년 러시아-중국 무역증진 등 7개 협약 조인
2001년 윤천주 전(前) 문교부 장관 별세
문교부 장관 등을 지낸 윤천주씨가 2001년 9월 8일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윤천주 옹은 학자·교육행정가·정치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해 온 ‘현실 참여파’ 정치학자였다. 한국의 정치·선거 풍토를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4자성어로 정리하는 등 많은 정치 조어를 만들어 냈다.
1947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윤 옹은 이듬해 고려대 법정대에서 처음 강단에 섰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공군에 입대, 1956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윤옹은 “정치학은 실천학문”이라며 5·16 이후 공화당 초대 사무총장으로 정계에 투신했다. 그는 1964~1965년 문교부 장관을 지내다 학원사태로 물러났다. 재임 당시 국장들이 셔츠 바람으로 장관실에 드나들게 할 만큼 수수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윤 옹은 1967년∼1971년엔 공화당 전국구 의원(7대)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1973년∼1975년 부산대 총장, 1975년∼1979년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윤 옹은 ‘한국정치체계서설’(1961) ‘우리나라의 선거실태’(1981) ‘한국정치체계’(1991) 등 저서를 냈으며, 1978년 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여론조사와 선거결과를 연계시켜 국민의식에 따른 정치행태를 규명했다는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왔다. 1983∼1995년 단국대·인천대·방송통신대에서 강의를 했으며, 최근까지 학술원 회지에 논문을 기고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선비와 관료는 검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40여년간 서울 삼선동 한옥을 지켰고, 3년 전엔 자신이 소장했던 책 1000여권을 고려대에 기증했다
1999년 KT, 포털서비스 `한미르(http://www.hanmir.com)` 오픈
1998년 ‘메조소프라노 대모’ 성악가 이정희씨 별세
1998년 9월 8일 한국 메조소프라노의 대모 이정희씨가 별세했다. 광복 후 외국유학을 다녀온 1세대 성악가로, 1950∼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로 활약했다.
1950년 현제명 오페라 ‘춘향전’을 시작으로 국립오페라단원 시절 한국초연 오페라 메조소프라노 배역 70% 정도를 그가 소화해냈다. 이씨가 출연한 주요 오페라는 ‘카르멘’ ‘춘향전’ ‘가면무도회’ ‘리골레토’ ‘파우스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등이다. 연간 20편씩 오페라 무대를 누비는 외에 베토벤 합창교향곡 솔리스트, 가곡 무대서도 이름을 날렸다.
이씨는 서울대 음대를 거쳐 미국 줄리아드음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 서울대 음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32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조소프라노 윤현주, 백남옥, 소프라노 박정원, 김인혜 등 제자를 길러냈다. 재미 소프라노 신영옥도 이씨에게 배웠다. 이씨는 타계를 앞두고 소장 악보와 음악서적 일체를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기증했다.
1997년 진로그룹 화의신청
1991년 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 농산물 국외수출 전면금지
1989년 전자파 반사 시설 준공
1988년 국방부 방위성금폐지 결정
1988 년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용의 표명
1986년 도이 다카코,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사회당)로 선출
일본 정당 최초의 여성당수가 1986년 9월 8일 탄생했다. 일본 사회당 위원장 선거에서 도이 다카코 후보가 상대 후보를 큰 표차로 이겨 당수로 선출됐다. 지난 7월 중-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사회당으로서는 기사회생의 선택이었다.
동지사대학 강사로 헌법학자였던 도이 위원장은 1969년 중의원에 첫 당선된 이래 국회활동에 전념해 왔다. 당내에 파벌이 없는 그녀가 초당적인 지지를 받아 제10대 위원장에 선출된 것도 부활을 기대하는 사회당이 `생활밀착형, 부인중시형 정당으로의 전환`을 꾀했기 때문이다.
1987년 2월 취임후 처음 치러진 당대회에서 도이 위원장은 서구형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기초한 `신선언` 강령으로 당의 체질개선을 지향한다고 표명했다. 노조중심에서 시민중심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여성과 시민과의 네트워크 구성에 주력했다
1984년 북한적십자 남한에 수재민 구호물자제공 제의
9.29에 한국적십자가 북한적십자의 수재물자를 판문점 인천 북평서 인수
1982년 부산대, 경남 합천군 쌍책면 사양리서 세계최대 이암(泥岩)자연동굴(길이260m) 발견
1981년 미국, 최초로 동물유전자 이식에 성공
1981년 리비아, 소련에 항만 개방
1974년 포드 미대통령 닉슨 전 대통령 사면
1973년 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가 기자회견을 통해 "다수의 반체제인사가 정신병원에 격리돼 약물투약으로 지적능력이 위험해지고 있다"고 폭로
1972년 주간지 별책에 북한찬양 기사 실은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 폐쇄
1972년 대한적십자혈액원 RH마이너스 혈액형 소유자 ‘서로돕기모임’ 발족
1972년 국립과학관 준공
1970년 잠비아서 제3회 비동맹제국 수뇌회의 개막
1966년 MRA(Moral Re-Armament) 아시아대회 서울서 개막
1960년 동독, 서독인의 동베를린 출입제한
1958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서 중공 제외를 발표
1955년 아데나워 서독 수상,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소련 방문
1955년 6월 7일 서독 정부는 소련 크렘린에서 온 암호 전문을 수신했다. 암호 해독결과, 외교관계 수립을 교섭하기 위해 서독 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서독 정부는 고민했지만 모스크바 행을 결정했다. 소련에 남아있는 독일군 포로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포로 문제는 당시 서독인들의 심경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때까지도 독일은 소련 땅에 얼마나 많은 포로들이 생존해 있는지 확인조차 못하고 있었다. 단지 수십만명에 달한다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수상이 전후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한 것은 1955년 9월 8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모스크바 인근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하자 독일 국가가 전후 처음으로 울려 퍼졌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회담에 임한 서독과 소련은 시작부터 충돌했다. 소련은 우선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요구했고, 독일은 전쟁포로 석방을 전제로 내걸었다. "소련에는 독일군 포로가 없다"는 소련 국무장관 불가닌의 반복되는 주장에 회담은 거의 결렬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양측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과 양보 끝에 회담은 결국 전쟁포로 석방과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회담결과 1955년 10월 9일, 10여년 이상이나 소련에 억류돼 있던 마지막 독일군 포로들이 풀려나 독일에 도착할 수 있었고, 국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1954년 동남아 반공군사동맹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발족
1954년 9월 8일 마닐라의 필리핀 상원의사당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를 비롯, 영국·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타이·파키스탄·필리핀 등 8개국 대표들이 동남아시아집단방위조약에 조인,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결성했다.
SEATO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지자 `도미노 이론`을 배경으로 공산세력의 확대저지를 주장한 덜레스의 주도로 반공군사동맹으로 탄생한 것으로 동남아시아의 지역적 집단안전보장을 목적으로 했다.
조약구역은 동남아시아의 일반구역으로 아시아 가맹 제국의 전영역을 포함하며, 북위 21°30` 이북의 태평양지역을 제외하는 서태평양의 일반구역이다. 따라서 타이완·일본·한국은 조약구역에서 제외되지만 베트남·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조약구역에 포함되며, 부속 의정서에서 이 3국을 조약구역으로 지정했다. 1960년대 이후 이 조약을 근거로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면서 개입여부로 내부분란이 발생해 사실상 소멸상태가 됐다.
1953년 천문학자 허블 사망
1953년 9월 8일 `우주팽창론`을 확립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파월 허블이 사망했다. 허블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했으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천문학으로의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천문학에 빠져들었다. 성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 1914년부터는 여키스천문대에서 천체관측에 몰두했다.
1919년부터는 지름이 252cm나 되는 초대형 반사망원경을 막 설치한 윌슨山천문대의 연구원이 되어 성운을 관찰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이곳에서 M31과 M33 성운을 연구한 결과, 우리 은하 밖에도 수많은 `섬 우주`가 있음을 밝혀냈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주장은 슬라이퍼 등의 천문학자들도 주장했으나, 허블은 은하들이 움직이는 속도와 거리를 집요하게 측정하여 우주의 어느 지점에서 보더라도 멀리 떨어진 천체일수록 더 빨리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른바 `허블의 법칙`을 도출하고, 우주가 팽창한다는 첫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또한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니며 단지 수백만 개의 이름 모를 은하의 하나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타임`의 표지인물로 장식되기도 한 허블은 1948년 팔로마산천문대에 지름 508cm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자, 본격적으로 우주탐사에 열중하다 이날 세상을 떠났다.
1951년 대일강화조약ㆍ미일안보조약 조인
1951년 9월 8일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수상이 대일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연합국 49개국과 일본과의 대일강화조약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서 조인됐다.
대일강화조약은 일본의 주권회복과 태평양전쟁의 공식적 종식을 승인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을 포함한 52개국이 참가해 4일부터 그 회의가 개최됐다. 중국은 국민당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간에 대표권을 둘러싼 싸움이 계속돼 이날 초청받지 못했고, 인도와 버마는 조약의 내용에 불만을 나타내며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은 체코, 폴란드와 함께 참가했지만, 이 조약이 ‘새로운 전쟁을 위한 조약’이라며 대일강화조약을 격렬히 비난, 조인을 거부했다.
회의는 조약의 초안을 정리한 미국ㆍ영국 양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요시다 수상은 “과거 평화조약은 패전국 대표의 힘겨운 절충 노력에도 불구하고 패전국의 주장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채 승전국측의 강압에 맺게 되는 것이었지만, 이번 조약은 이 난처한 절충 역할을 미 대통령 특사인 덜레스씨가 맡아주신다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이 정해놓은 룰에 하등의 불만없이 응하는 꼴이었다.
강화조약 조인 후 이어 요시다 수상은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위한 미일안전보장조약에도 서명했다. 1952년 4월 28일, 이 조약들이 정식 발효됨으로써 연합군의 일본점령도 끝이 났고, 일본은 자유주의 진영의 일원이자 주권국가로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1950년 미 국방부 인천상륙작전 승인
1949년 20세기 초 대표적인 독일의 작곡가 슈트라우스 사망
1949년 뇌염으로 각급학교 휴교
1948년 국회 연호를 단기로 결정(9월25일 시행)
1946년 불가리아 왕정 폐지 국민투표, 공화제 채택
1945년 미 제24군단 인천 도착
1945년 8월 11일.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에게 미국 태평양사령부로 부터 한통의 전문이 날아들었다. 한반도 38선 이남을 접수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8월 8일)를 하고 한반도를 향해 속전속결로 진군하던 긴박한 상황에서 한반도로부터 1600여㎞나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24군단에 이 임무가 떨어진 것은 단지 한반도로부터 가장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가 상륙을 준비하는 동안 한반도 주둔 일본군은 미군 상륙 전까지의 치안유지 권한을 맥아더로부터 위임받았고, 하지 역시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 이 지역의 경비를 일본군이 맡도록 지시했다.
9월 8일 아침, 마침내 하지가 이끄는 2개 사단이 인천 월미도에 도착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실로 40년 만에 맞는 해방군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이들을 환영할 대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질서유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으로부터 날아든 총탄세례만이 한국인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2명이 현장에서 사살된 것이다. 진정한 광복은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45년 서울역창고에서 일제가 압수한 한글학회 큰 사전 원고 발견
1945년 조선인민보 창간
1944년 불가리아 공산주의자 무장봉기 조국전선정부 수립
1944년 독일, V2 로켓 첫 발사
1944년 6월 12일부터 고성능의 폭탄이 무차별로 런던 곳곳을 파괴해도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도무지 발사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 독일어 ‘보복(vergeltung)’의 이니셜에서 이름을 딴 ‘V1’ 로켓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발사 추정지를 알아내 맹폭을 가하고 레이더와 방어장치 개선으로 요격률이 높아지면서 영국군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6200여명이 죽고 1만8000여명이나 부상한 뒤였다.
영국이 비로소 V1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발표한 이틀 뒤인 9월 8일 이번에는 요격할 틈도 없이 새로운 로켓이 런던으로 날아들었다. 영국인이 ‘악마의 사자’라고 부른 장거리 로켓 ‘V2’였다. 길이 14m·중량 13t에 항속거리도 300㎞나 되는 고성능의 신무기가 음속의 3배나 되는 빠른 속도로 발사 3∼4분 만에 런던에 떨어져 영국군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종전 때까지 1360발이 발사돼 1190발이나 목표물을 맞힐 정도로 명중률도 높았다. 런던에만 500발이 떨어져 2700여명이 죽고 6500여명이 부상했다. V2 발사에도 불구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는 “4년만 더 일렀더라면…” 이라며 발을 굴렀다고 한다.
1942년 일제, 금속 회수령 공포
1939년 독일군, 바르샤바에 침공
1934년 무장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 양세봉 친일파와 일본군에게 사살됨
1920년 한국 근.현대문학을 정립한 문학평론가 조연현 출생
1920년 뉴욕-샌프란시스코간 미대륙횡단 항공우편 개시
1904년 소설가 계용묵 출생
1904년 디어도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 당선
1900년 미국 텍사스주 켈버스턴 허리케인 강타 사망 1,000여명
1898년 경부철도 부설에 관한 한일조약을 체결하기로 일본에 통보함
1894년 독일 과학자 헬름홀츠 사망
1858년 인도, 영국 식민지 됨(무갈제국 멸망)
1841년 체코 작곡가 드보르작 출생
1841년 스웨덴의 시인 스노일스퀴 출생
1830년 프랑스 시인 미스트랄 출생
1809년 칠레의 대통령 몬트 출생
1804년 독일의 서정시인 뫼리케 출생
1783년 덴마크 신학자·시인 니콜라이 그룬트비 태어남
1474년 서사시 `성난 오를란도`로 유명한 이탈리아 시인 아리오스토 출생
1468년 조선 7대 임금 세조 사망
1055(고려 문종 9) 대각국사 의천 태어남
936년 왕건, 후삼국을 통일하다
신라·후백제·고려간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하지만 신라는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견훤과 궁예의 침략으로 인하여 영토가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고 지방에서 힘을 키운 호족들은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이미 나라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후삼국 통일은 고려와 후백제간의 싸움으로 결판나는 형국이었다.
궁예를 몰아낸 왕건의 고려는 신라에 대해 화친정책을 쓰고 후백제에 대해서는 화전 양면책을 썼다.
초반 고려는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견훤의 공격이 매우 맹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세는 전혀 뜻밖으로 두 나라의 국경선이 아니라 신라의 영역이었던 고창(지금의 안동)에서 결판나고 말았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고창 일대에 대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29년 12월 견훤은 군사·교통의 요지인 고창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건은 이곳을 구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에 들어가 그곳을 지키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정월 병산에서 견훤의 군대와 결전을 벌여 크게 무찌르고 인근 30여 성을 얻는 쾌거를 이루었다.
935년 후백제의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이 유폐지인 금산사를 빠져나와 고려의 영토인 금성(지금의 나주)로 달아나오자 그를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 경순왕이 항복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936년 태조는 견훤의 간절한 청에 따라 후백제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양군은 일선군(지금의 선산)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하지만 후백제는 더 이상 고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결국 변변한 접전도 해보지 못하고 후백제의 중군이 무너지자 신검은 항복을 하고 말았다.
반면 왕건은 한국사상 최대의 내란기였던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시작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