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장례식을 읽고
이헌 조미경
장례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음 문자를 받으면, 왜 기분이 살짝 다운되는 것일까
장례식은 글자 그대로 죽은 자의 가족인
산 사람들이 고인을 떠나보내는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엄숙한 의미의 파티다. 이날 산자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이 남아 있다. 즉 고인의 영정 사진 앞에서 헌화하고 묵념하고
상주와 함께 고인의 생전 이야기하는 과정이다.
소설 늦은 장례식에서 A는 B의 부고를 모바일로 받아 본다. A와 B는 고교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였다.
그들은 늘 함께하면서, 같이 교내 식당을 이용했고, 함께 사진을 찍고 많은 것들을 함께 했다. 그런데도 A 에게는 B의 부고에도 당장 달려가지도 않고, 직장이 모든 업무가 끝나는 시간을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달려간다.
A와 B가 서로 친구가 아니었던 적도 없는데, 그 두 사람은 왜 서로에게 무관심 했을까?
나중에 그렇게 된 이유가 있는데, 서로 다른 대학과 다른 과에 입학하면서
서로의 관심 밖이다 보니, 그들이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도
두 사람은 교집합이 없었다. A도 그런 면에서 인정한다.
문제는 고교 시절 사진 찍기 좋아하던 B가 자신의 영정 사진에 올라갈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단 이야기다. 그것은 B 오직 회사 면접하기 위해 이력서에 넣을 사진을 찍기 위해 남긴 증명사진 뿐이란 사실이다.
B는 자살로 자신 삶을 마무리 했다. 그래서 였을까,
나중 A는 B의 장례식장에서 나와서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고교 시절을 떠올리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친구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그러면, 왜 늦은 장례식 일까
이미 B는 고교 시절에 A나 다른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 즉 존재감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살아 있어도 생존하지 않은 아마 이미 존재하지 않은 채 세상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한 번 태어나서 죽는데 자신이 살아 있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미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소설에서 말한다.
이미 B는 죽은 존재였지만, 늦게나마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이라고
이 소설은 의미하는 바가 무척 많은 소설이다.
김초롱님의 늦은 장례식을 읽으며 오래전 읽은 박완서 원작의 [꽃잎 속의 가시] 글이 생각났다. 소설은 미국에 사는 언니의 부음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언니의 부음을 듣고 당장 장례식장으로 찾아갈 것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정작 부음을 정하는 질부는 '이모님 미국까지 가시게요' 하는 비웃음에 그만 머쓱해지는데
나는 두 달 전 언니를 떠밀다시피 미국으로 보내고 나서 언니의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언니는 60년대 이민을 떠난 후 30년 만에 손자 결혼식에 초청을 받아 온 것이었다.
미국에 사는 언니가 한국에 오게 되면서 한국을 떠나면서 30년 만에 한국땅을 밟는 언니를 바라보는 막내동생의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반면 늦은 장례식은 20대 젊은이의 자살이라는 청년의 죽음을 바라보는 친구 A의 감상이
아이러니를 일으킨다. 소설속 B는 대학 졸업 후 변변한 직장에 취업하지 못해 소외되고 외로운 청년이다. 그래서 가족에게, 친구에게 사회로부터 외면받은 청춘이다.
그러나 반대로 소설 꽃잎 속의 가시는 젊어서 온갖 고생을 해서 자식 성공시키고 집안을 일으키지만, 정작 자신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치매라는 병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신 희생을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희생 대가를 모른다.
자식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소설 소설을 통해서 여실히 느낀다.
박완서 소설 속 꽃잎 속의 가시를 통해서 앞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첫댓글
실존적 가치가 줄어들면
소외감을 받지요
존재의 이유
남이 나를 알아 주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알아 주는게
그리 쉬운일은 아니지요
왼손이 한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오드리햇번 어록에서
존재의 이유는 스스로가
인정하는 만족이 있어야
보람을 갖는다고
덕을 베풀고 살아야
쓸쓸하지 않고
남에게 신경을 쓰지않지요
매일 죽는 사람이
늦은 장례식에 와봅니다
글이 쓸쓸합니다
소설은 삶보다
더욱 아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