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神弓). 5장
第 5 章.
귀향(歸鄕).
2.
문국환의 잠자리를 살펴준 문부인은 동생에게 달려갔다. 소운영의
거처는 어둠에 싸여 있었다. 어두워진 지가 한참인데 아직 불도 켜지
않은 모양이다. 문부인은 방으로 들어가 촛에 불을 붙였다. 소운영은
침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문부인은 동생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영아. 울지마라. 그는 절대 이번 혼사를 올리지 못할 것이다. 어떠
냐? 네가 말만 한다면 언니가 도와주겠다. 응?"
"언니. 난...어쩌면 좋아?"
소운영은 언니 품에 파고들어더욱 서럽게 울었다. 문부인이 자신있
게 말했다.
"됐다, 됐어. 그는 이번 혼사를 파하고 다시 이리로 돌아올 것이다.
언니가 방법을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 그러니 그만 울어라. 언
니가 되가지고 어찌 동생의 불행을 보고만 있겠느냐. 자, 계교를 일
러줄테니 잘 들어라."
소운영은 언니의 자신있는 말에 울움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문부
인의 계교란 것이 재미있는지 소운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킥킥!
웃기도 했다. 자매는 한동안 밀담을 나누더니 이내 밝은 표정이 되었
다. 소운영은 그때서야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런데...언니...언니는 그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어?"
문부인은 웃으며 동생의 볼을 꼬집었다.
"요것아. 네가 언니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니?"
"헤...."
다음날 아침.
도일봉은 문국환이 내준 한필의 말에 약간의 선물보따리를 싣고는
청운장을 떠나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문국환은 지금 한사람이 아쉬
운 판이지만 일이란 때가 있다고 판단하여 말없이 도일봉을 떠나 보
냈다.
도일봉이 떠나고 한참 후.
소운영도 가벼운 몸차림에 장군을 타고 청운장을 빠져 나갔다. 어
제, 언니가 일러준 계교를 직접 써 먹으려고 집을 나선 것이다. 언니
의 계획은 소운영이 나서지 않고 제 3 자를 내세우는 것이었으나, 소
운영 자신은 그 계교가 재미있고, 또 일이 되어지는 결과를 보기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문부인은, 동생이 없어진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아챘다. 동생의 경거
망동(輕擧妄動)에 걱정이 되긴 했으나 따라가 대려올 수도 없다. 문
부인은 할 수 없이 두명의 무사를 남 몰래 내보냈다. 동생을 따라가
되 큰 위험이 없는한 모습은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일러두었다. 마음
이 우울해 있는 소운영이 유람차 여행을 하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
각한 것이다.
청운장을 떠난 도일봉은 파양호에 이르러 강선에 올랐다. 물길을 거
슬러 오를 생각이다.
도일봉은 이번, 부모님이 정한 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 어
디를 찾아봐도 문부인 같은 여인은 다신 없을 것이다. 도일봉은 본
래, 여인들의 미모에 관해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꼭이 미인
이어야 장가를 들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문부인을 본 후. 생
각이 싹 바뀌고 말았다.
"여자라면 응당 이정도는 되어야지!"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는 것이다. 문부인은 또 얼굴만 예쁜게 아니
다. 정숙(貞淑)하고, 상냥하며, 위엄이 있는가 하면 요염하기 까지
하다. 이같은 여인이 망막(網膜)에 가득한데 어찌 다른 여인이 눈에
차겠는가! 도일봉은 세상을 온통 뒤져서라도 문부인 같은 여인을 찾
아 장가들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지닌 도일봉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로지 부모님
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서다. 이미 연로하신 두분의 마음을 편
하게 해드리고,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위로 두분 형
님이 있었지만 일찍 죽어버려 장남이 된 도일봉에게서 하루라도 빨리
손주를 보고 싶어 하시는건 부모님의 당연한 마음이리라. 하긴, 도일
봉도 이제 스물둘. 장가들 나이도 되었다.
커다란 돛은 순풍(順風)을 만나 장강을 빠르게 가슬러 올랐다. 하지
만 도일봉은 무산(巫山)인근에서 배를 내렸다. 앞으로는 험난한 협곡
(峽谷)이 가로놓여 있어 강선으론 항해가 어렵다. 차라리 육로가 편
하다. 도일봉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에 올라 여행을 계속했다. 그
런데.
무산자락에 들어서 한 마을을 지나려 할 때. 마을앞에 장창을 꼬나
든 군사들이 보였다. 인근에 군사 주둔지가 없는 바에야 군사들이 마
을을 파수할 이유가 없다. 혹, 무산에 강도떼라도 출몰하는 것일까?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기찰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도일봉이 접근했을 때도 군사들이 썩 나서서 몸과 보따리를 수색했
다. 도일봉은 여행증을 착실히 지니고 있었다. 기찰을 피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역시 이런 검문은 기분이 좋지 않다.
군사들은 도일봉의 몸에서 뜻 밖의 물건들이 나오자 잠시 머뭇거렸
다. 도일봉이 지닌 단도나 황룡궁은 실상 살상무기(殺傷武器)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값어치가 상당하여 아무나 지닐 수 있
는 물건이 아니다. 기찰 군사들은 도일봉이 혹 귀한집 자제이거나 심
부름 나온 사란인가 하여 행동을 조심했다.
"공자는 뉘댁 자제이며, 어디로 가는게요?"
"여행증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천 두성촌(斗星村)에 사는 도일봉이외
다. 외지에 나갔다가 이제 명절이 되어 집으로 가는 중이오."
"이 단도와 봉은 예삿 물건이 아닌데?"
도일봉은 순순히 말해주었다.
"단도는 전에 산적을 만난 이후 장만한 것이고, 그리고 이건 봉이
아니라 활이오.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라오."
"그게 활이라고? 헌데 이런 무기류의 물건들을 지니고 여행할 수 없
다는 걸 모르시나?"
도일봉은 짜증이 치솟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런 군사들에게 잘못
보여 좋을게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응당 가져가야 하지 않겠소?"
"활을 선물로 받았다고 했는데, 누가 선물한 것인가?"
"저 아래, 남창 청운장 장주 문국환이란 사람이외다. 의심나면 알아
보구려."
"청운장의 장주님이라고! 그와는 어떤 사이요?"
"친구요."
"친구? 그분에게 그대처럼 어린 친구도 있다던가?"
말하는 투로 보아 이 군사는 청운장의 문국환을 잘 알고 있는 듯 했
다. 도일봉은 다시 한 번 군사를 살폈다. 기골이 장대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힘 깨나 쓰게 생겼다.
사실 문국환은 한인들 사이에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더욱이 반원
(反元)의 인사들에게는 더욱 유명하다. 물론 글 잘하는 선비로 알려
졌다. 그리고 청운장 산하에는 세력들이 만만치 않아 전국에 연줄들
이 있다. 이 군사만 해도 청응방의 방도로써 일부로 관에 투항하여
소식을 전해주는 자였다. 문국환이 여러 방면에 친구가 많다는 것을
이 군사도 익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문국환과 왕래하는 친구들은
대개가 나이들이 많다. 5-6년은 어려보이는 도일봉이 친구라는 명함
을 내밀자 군사는 자연 믿기 힘들었다.
"뭐라고? 그대는 그럼, 내가 그 친구의 이름자를 팔고 있다고 의심
하는 거요? 내가 뭐하러 남의 이름을 판단 말이야. 그가 뭐 그리 대
단한 위인이라고! 이보시오 군사양반. 그대는 문국환을 아는 듯 한데
어찌 이 황룡궁을 몰라본단 말이오? 이 황룡궁은 대대로 청운장의 보
물인데?"
"잇! 그럼, 이것이 바로 그 황룡궁이란 말요? 나도 청운장에 황룡궁
이 있다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보았지. 하지만 소문오로만 들었
을 뿐이지, 직접 본 적은 없어. 듣기로 황룡궁은 대단히 강한 활로써
보통 사람은 쓸 수도 없다던데?"
도일봉은 아예 황룡궁과 시윗줄을 꺼내 군사에게 건네주었다.
"직접 시험해보면 알 것 아니겠소. 보아하니 군사양반은 보통 사람
이 아닌 것 같은데, 능히 쓸 수 있을 것이외다."
군사는 크게 기뻐하며 황룡궁을 받아들었다. 사실, 이러한 보물을
손으로 만져보는 것만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군사는 기뻐서
도일봉이 가르쳐 주는대로 시위를 걸어보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젖먹
던 힘까지 모조리 동원해 보지만 황룡궁은 반도 휘어지지 않았다. 군
사는 끝내 고개를 설래설래 젓고 말았다. 몇 명의 동료들이 신기해서
너도나도 시험해 보았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다른 군사들은 반도 휘
지 못했다.
도일봉은 빙긋 웃어가며 황룡궁을 건네받아 단숨에 시위를 걸고 장
군전까지 한 대 꺼내 시위에 걸어 날렸다. 씨잉! 하는 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얼마나 높이 날아 올랐는지 육안(肉
眼)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한참 후에야 장군전은 땅에 떨어졌다.
군사들은 장군전을 주워들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대단한 활이로군! 이제 신분을 믿을 수 있으니 가도 좋소이
다. 하지만, 근래 이 근방에 한떼의 무리들이 나타나 서로 죽고 죽이
는 살판이 벌어지고 있으니 길가면서 조심하시오. 아주 흉악무도(凶
惡無道)한 놈들이오."
"아니, 어떤 자들이 그런 끔찍한 짓을 벌인단 말이오? 이 근방에 산
대왕이 둥지를 틀었다는 소문도 못 들었는데요?"
"우리도 확실히는 모르오. 하지만 산적은 아니고, 다만 한떼의 무림
인들 같소이다."
"무림인들이오? 흐응. 거참. 여하튼 잘 알았소이다. 그럼 수고들 하
시오."
도일봉은 짐을 챙겨 말들에 단단히 묶고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
마을만 지나면 첩첩산중(疊疊山中), 몇일동안 산속을 걸어야 한다.
도일봉은 먹을것과 야숙할 물건들을 사들고 길에 올랐다. 황룡궁을
허리에 걸고 단도를 갈무리 했다. 돌발적인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다.
마을을 뜨자 곧 산으로 접어들었다. 길을 가면서 각별히 신경을 곰
지만 이틀을 가는동안 아무런 일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한떼의 무림
은들은커녕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도일봉은 어려서부터 산을
타며 사냥을 했으므로 산을 두려워 하지는 않는다. 두렵기는커녕 오
히려 산으로 들어서면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낀다. 하지만 한 번, 산에
서 산적들을 만나 그 모진 고생을 하고보니 만사가 조심스럽다. 도일
봉은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부지런히 길을 줄였다.
산 속의 해는 일찍 지기 마련이다. 곧 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도일
봉은 또 하루를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얼마를
더 가다보면 오래된 산신묘(山神廟)가 있는데 그곳에서 밤을 보낼 생
각이다.
산신묘에 거의 도달할 무렵. 주위엔 듬성듬성 커다란 바위들이 많은
곳을 지나게 되었다. 바위산 옆에는 울창한 송림(松林)이 우거져 있
다. 그런데 언 듯. 바위산 밑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거리
가 꽤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사람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니 한사람이 지금, 커다란 돌을 굴려 굴을 막는것처럼 보였
다. 무엇 때문에 커다란 돌을 굴려 굴을 막는지는 모르겠으나혹시
하는 마음에 덜컥 겁이났다. 군사들이 말한 그 흉악한들중 하나가 아
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일봉은 못본척 길을 재촉했다. 두려운 생
각에 자주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한참을 가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곧 산신묘에 도착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안심을 하고 막 한숨을 쉬려는 찰라. 갑자기 길가 나무위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리며 덮쳐왔다. 무엇인가 깨닫기도 전에 시퍼런 칼
빛이 들이닥쳤다.
"악!"
너무 놀란 도일봉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상체를 납작 엎드렸다. 시퍼
런 칼빛은 그대로 말의 목에 떨어졌다. 말은 울부짖을 겨를도 없이
그만 목이 잘리고 말았다. 목 없는 말과 사람이 한꺼번에 땅에 고꾸
라졌다.
"아이쿠!"
땅에 곤두박질친 도일봉은 경황중에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품 속
의 단도를 뽑아들어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이
번엔 사람의 발이 날아와 무지막지하게도 가슴 한복판을 걷어차 버렸
다. 가슴쏛이 단번에 허물어 질 듯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이번엔 손이 재차 날아들어 아랫배를
강타했다. 그 충격에 도일봉의 몸은 허공을 날아 저만치 가시밭에 처
박히고 말았다. 정신이 가물거리는 중에도 도일봉은 똑똑히 보았다.
소맷자락에 그려진 꽃송이들. 매화(梅花) 같았다.
"으악!"
도일봉은 크게 한 번 비명을 지르고는 이내 잠잠해 졌다. 꿈결인 듯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이다!"
그것을 끝으로 도일봉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꼼지락 꼼지락!
손발을 움직여 보려는데 자꾸만 날카로운 것들이 콕콕 찌른다. 그
따가움에 정신을 차렸다. 가슴이 허물어 지는 듯 아파왔다. 아랫배의
창자들이 전부 가닥가닥 끊어지기라도 한 듯 찢어지는 아픔이 전해졌
다.
"으윽!"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도일봉은 엉금엉금 기어서 겨우 가시밭을
빠져 나왔다. 온 몸이 온통 가시에 긁혀 있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
데 목구멍이 답답했다. 몇번 기침을 해대니 커다란 핏덩이가 울컥 목
구멍을 넘어왔다. 두모금의 핏덩이를 쨮고보니 차라리 쉬원했다. 가
슴이 진탕되고 내장이 흔들린 모양이다. 살아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도일봉은 만일을 대비해 단도를 뽑아들고 주위를 살폈다. 칠흙처럼
어둡다. 한동안이나 기절해 있었던 모양이다.통증과 함께 추위가 몰
려왔다. 말 등에 실린 물건들중 야영에 대비해 준비해둔 담요를 간신
히 꺼내 둘러쓰고는 몸을 쭈구리고 앉아 손으로 발 끝을 잡았다. 그
리고 피가 더워지기를 기다렸다.
퍼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해가 높이 떠 있다. 깜짝 놀라 단도를
움켜쥔체 주위부터 살폈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가슴과 배에는 아
직도 무거운 통증이 전해졌다. 욱신욱신 쑤시고 아프다. 얻어맞은 가
슴과 배를 살펴보니 시퍼런 손도장이 뚜렸하게도 찍혀있다. 도일봉은
흉수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욕을 해댔다.
"빌어먹을 강도놈 같으니라고! 사람 죽이는 것을 자랑으로 삼기라도
하는 놈인가 보다.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정신이 돈 미친
놈인지도 모르겠다. 에이 후레자식. 제명에 못죽을 놈! 네놈도 끝이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이고 아파라!"
도일봉은 마구 욕을 해대며 흩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긁어 모았다.
문부인이 선물한 비단 몇필은 말피가 뭏어 못쓰게 되었다. 쓸 수 있
는 물건들만 챙겨 보따리를 만들었다.
"개같은 강도놈이 애꿎은 짐승마져 죽여 나를 고생시키는구나! 아이
고 힘들어!"
가슴이 아직도 빠게지는 것 같아 도일봉은 겨우겨우 보따리를 짊어
지고 일어섰다. 먼저 이 무서운 곳으로부터 도망쳐야 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하지만 한걸음이 천근이다. 낑낑 끙끙! 겨우겨우 걸음을 옮
겨 울창한 나무숲으로 숨었다. 거기서 물과 마른음식으로 요기를 하
고 한동안 쉬었다. 그리고 숨 한 번 쉴 때마다 한 번씩 욕을 해댔다.
또 어떤 미친놈을 만날까 두려워 이젠 단도와 황룡궁을 챙겨 들고 다
시 걸었다.
산을 거의 벗어나고 있을 때.
"이크!"
또 다시 시퍼런 칼을 든 미친놈이 불쑥숲에서 뛰어나왔다. 도일봉
은 간이 단번에 콩알만 해져서 급히 뒤로 물러섰다. 어제 너무 놀랐
는지라 쿵쾅쿵쾅!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앞을 막아선 자가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도일봉은 단도를 단단히 움켜쥐고 막아선 자를 살폈다.
"잇!"
생각과는 달리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23-4세 가량의 헌출한 모
습. 손에는 푸른빛이 도는 청강검(淸剛劍)을 쥐고 있었다. 몸에는 백
포삼(白胞衫)을 걸쳤는데 그 시원한 모습이 문득 호감을 느낄 정도
다.
도일봉은 이같은 청년의 모습에 문득 경계심이 사라져 묻는말에 대
답을 하려했다. 그런데 힐끗! 청년의 소매를 보니 꽃이 수놓여 있다.
바로 매화문양(梅花紋樣)이다. 도일봉은 매화문양을 확인하고는 단번
에 불을 토하듯 화를 냈다.
"이 천하의 죽일놈. 바로 네놈이로구나! 이 흉악한 미친놈아. 어째
서 얌전하게 길을 가는 나를 두 번이나 모질게 두둘겨 패고, 말가지
죽였느냐! 네이놈. 사람을 죽이는데 밑천이 들지 않겠다 생각 했겠지
만 당장 빛을 갚게 될줄은 미처 몰랐을게다. 내 이제, 어제의 빚을
받아내야 겠다. 어제는 무심중에 얻어 맞았지만 또 당할줄 알았다면
개수작이다. 그래, 내가 너같은 놈 하나 당해내지 못할줄 알았더냐.
쥐새끼처럼 숨어서 남을 해치는 솜씨는 이미 보았으니 오늘은 정정당
당하게 해보자. 이 죽일놈아!"
도일봉이 마구 욕을 해대는데 그 소리가 워낙 쭭자르고 우뢰처럼 커
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도일봉은 한바탕 욕을 퍼부어 대고는 멍청히 서 있는 청년을 향해
단도를 마구 휘두르며 와락 덤벼들었다. 단도를 휘두르는 모습이 마
치 선불맞은 멧돼지 같았다. 욕하는 꼴은 더욱 무식했다.
도일봉은 한 번도 정식으로 무공에 입문하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
부터 유가의 기공을 기형적(畸形的])으러나마 익혀왔고, 또 온 산을
뛰어다니며 사냥을 해왔는지라 힘이 좋고 몸놀림이 빠르고 경쾌했다.
더욱이 어제 당한 분풀이를 해야 했으므로 더욱 막무가네로 덤벼들었
다. 얼마나 거세게 덤벼들었는지 청년이 오히려 정신이 없을 지경이
다.
청년의 몸놀림도 대단했다. 도일봉이 그토록 막무가네로 덤벼 드는
데도 시종 침착하게 피해낸다. 수비도 엄밀하고 두텁다. 그러나 상대
의 단도질이 워낙 무식하고 희안하여 어찌 막아내야 할지 정신이 없
다. 상대의 치명적인 요혈(要穴)은 훤히 비어있다. 그러나 기회를 잡
아 요혈을 공격 하려하면 상대는 막을 생각도 않고 단도를 찔러댄다.
오로지 함께 죽자고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감히 경거망동 할
수 없어 연신 피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도일봉의 그 무식한 공격
도 청년의 옷자락 한올 건드리지 못했다.
청년이 화가 나서 호통을 내질렀다.
"이놈아. 내가 언제 너를 암습(暗襲)했단 말이냐?"
"요 흉악한 도둑놈이 또 거짓말을 해대는구나! 네놈은 분명 나무 위
에 숨어서 나를 몰래 죽이려 해 놓고 이제와서 오리발을 내미느냐.
네 이놈! 내 다른 것은 몰라도 네놈의 소맷자락에 그려진 꽃은 똑똑
히 보았느니라. 그래, 계집애도 아닌 것이 꽃을 수놓고 다니는 놈이
너말고 세상천지에 또 있다더냐? 이놈아 죽어라!"
욕도 무식하고 공격도 무식하기 짝이 없다.
"뭐라고! 소매에 매화가 있더란 말이냐?"
"이놈아. 나쁜놈아. 발뺌해도 소용없는줄 알아라!"
청년은 다급해 졌다. 청년의 소매에 그려진 매화문양은 바로 무림문
파인 화산파(華山派)의 문파표기다. 그러니 당연 청년은 화산파의 문
인제자다. 이번에 일이 있어 화산제자들은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청년에게는 존경하는 사숙(師淑)이 한분 계시다. 이분이 어려움을
당했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도우려 온 것이다. 하지
만 몇일이 지나도록 그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은 어제까지 함
께 행동하다가 오늘에야 따로 흩어져 찾아 나섰다. 그러니 도일봉이
어제 보았다는 사람은 분명 사숙일 것이다. 손을 멈추고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일봉의 무식한 손길은 멈출줄을 모른다. 다급해지
자 청년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가늘고 긴 휘파람 소리가 산 속에
울려퍼졌다. 동료를 부르는 신호다. 곧 멀리서 같은 휘파람 소리가
호응하듯 들려왔다.
청년이 동료를 부르자 도일봉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뻗어 재빨리 왼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빼며 호통을 내질렀다.
"요 쥐새끼! 어제는 간덩이가 부은 듯 잘도 때리더니만 이제 급해지
니까 사람을 불러! 에라 이놈아, 이거나 처먹어라!"
도일봉은 욕을 해대며 단도를 휘두르는중에 왼손가락을 퉁겼다. 씨
익! 손 안에 있던 물건이 빗살처럼 청년을 향해 퉁겨나갔다. 단도를
피하려던 청년은 난데없이 날아드는 암기(暗器)에 그만 넓적다리를
얻어맞고 말았다. 급소(急所)는 아니었으나 살을 파고는 통증은 대단
했다.
도일봉은 이미 자신의 기습이 성공하자 펄쩍 뒤로 물러나 급히 물건
을 짊어지고는 줄행랑을 놓았다. 청년이 다급히 소리쳤다.
"이봐, 이봐. 잠깐 멈춰라! 할 말이 있어. 멈춰!"
청년은 절둑거리며 좇아갔지만 도일봉은 벌써 저만치 달리고 있었
다. 청년은 더욱 큰소리로 불렀다. 그런데.
도망치던 도일봉이 깁자기 한자리에 딱 멈추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손에는 어느새 황룡궁이 쥐어져 있었다.
피웅! 피웅!
어느새 허공을 찢어발기며 장군이 별빛처럼 날았다. 두발이었다. 청
년은 화살이 유성처럼 날아들자 검을 휘둘러 떨어뜨리려 했다. 그런
데 전연 뜻 밖에도 먼저 발사된 화살보다 늦게 발사된 화살이 먼저
도달하고 있었다. 청년은 크게 놀라서 막는 것을 그만두고 몸을 피해
냈다. 그러나 늦게 도착한 화살이 어느새 옆구를 파고 들었다.
"악!"
청년은 무심결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옆구리에 통증만 전
해질뿐 살을파고드는 아픔은 없었다. 살펴보니 촉이 없는 화살이다.
그때 도일봉이 소리쳤다.
"이 허여멀숙하게 샹겨먹은 녀석아! 그만한 실력이면 강도짓은 안해
도 먹고는 살겠다. 만약 더 좇아온다면 그땐 정말 촉있는 화살을 발
사할테다. 이놈아. 다음에 만나면 그땐 용서치 않겠다. 그러니 일찌
감치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착하게 살아라. 난 바빠서 먼저 간다.
하핫."
도일봉은 크게 웃어젖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어이가 없는 한편 다급했다. 그러나 더 이상 좇을 수가 없
다. 다리가 다쳐 뛰기도 힘들거니와 정말 촉있는 화살을 쏘면 당해내
기도 힘들겠기 때문이었다. 추적을 포기한 청년은땅에 떨어져 있는
촉없는 화살을 주워 살폈다. 한자 반 길이의 작은 화살이다. 깃털 아
래엔 '장군 도'라는 서명이 세겨져 있다. 허벅지에 박힌 암기를 뽑아
보니 호랑이의 발톱이다.
"호랑이 발톱을 암기로 쓰다니! 별 이상한 놈이구나. 하지만 활솜씨
만은 대단하던걸!"
화살을 쏘면서 힘을 조절하여 나중것이 먼저 도달하게 하는 수법은
과연 고명하다 아니할 수 없는 솜씨다. 이상한 녀석을 만나 한바탕
고생은 했지만 그토록 찾아다닌 사숙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먆
것만도 다행이다. 하지만 사숙같은 강호(江湖)의 명숙(名淑)이 길가
는 나그네를 해치려 했는지는 아리송 하기만 했다. 청년이 상처를 치
료하고 있을 때. 몇 명의 인영이 달려왔다.
도일봉은 한참 동안이나 달리고 나서야 뒤좇는 자가 없는 것을 확인
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천하의 도일봉이 이 무슨 막심한 창피란 말인가! 그깟 산 속의 강
도놈 하나를 당하지 못하다니. 빌어먹을 녀석. 다음에 만나면 필시
가만두지 않겠다. 흥!"
도일봉은 투덜거리면서도 길을 재촉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도
놈들이 떼거지로 달려들면 그것보다 곤란한 일이 또 있겠는가 말이
다. 삼십육계(三十六計)중 도망치는게 상책(上策)이라 하지 않던가!
오후 늦게서야 산을 벗어나 마을로 접어들었다. 이곳 마을도 분위기
가 심상치 않았다. 수 많은 강호의 험악한 호걸나리들이 두 눈을 시
퍼렇게 부릅뜨고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오래 머물러봐야 좋은 일이
없겠다 생각한 도일봉은 그날밤을 객점에서 쉬고 이른아침 말을 한필
구하자마자 마을을 떳다. 하늘에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가면서 계속 경계를 하고 조심을 했지만 무산인근을 벗어나자
그 흉악한 강호의 나으리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도일봉은 무사
히 고향땅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 앞.
고향땅이 보인다. 마을이라야 겨우 삼십여호 백수십명이 살고 있을
뿐이다. 척박한 땅, 높은 산을 등지고 있어 농사보다는 사냥이나 밭
작물, 혹은 약재채집으로 생활을 연명하는 그런 동네다. 그러나 사람
들은 모두 부지런하고 순박하다. 마을을 두르고 있는 높은 산.
어렸을 때부터 이 높은 산등성이를 넘나들며 사냥하던 생각들이 주
마등처럼 스쳐간다.
"하하.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다!"
일년만에 돌아온 고향이다. 그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나
고 보니 오히려 추억이 되었다.
도일봉은 성큼성큼 동네로 들어섰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합니다,
즐독입니다
잘밨어요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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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요
고향에 돌아오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