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앙 (Giuliano)
1520년 메디치가의 일원인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요청으로 메디치가의 묘지를 포함한 성 로렌초 성당 시체 안치소 건립을 계약했는데. 이 계획은 바로 전에 사망한 울비노(Urbino)의 공작 로렌쪼(Lorenzo)와 네무르스(Nemours)의 공작 쥴리아노(Giuliano)의 안치소 건설부터 시작되었다. 미켈란젤론는 14년 동안 이일에 종사했으며, 건축물과 로렌초 및 쥴리아노의 묘소를 완성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신상 안치실은 건축과 조각이 조화된 효과를 보이도록 고려되었으며, 특히 조각이 계획된 대로 제위치에 놓여있는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작품이다.
이두 묘소의 디자인은 비명이없고 망자의 덕을 칭송하는 조상이 두 개의 우의적인 조각상으로 대치되어 있다. 예배당 전체의 상징은 천국, 지상, 저승이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3개의 세계를 나타내며, 두사람의 상은 지상의 중앙부에 놓여 있다. 저승은 영혼이 깃드는 무덤의 위쪽벽감속으로, 그속에서 이두사람은 해방이냐 속박이냐에 대한 신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두사람 사이의 벽면에 놓인 성모자상 쪽으로 머리를 돌려 승천을 허락하는 표시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표시는 둥근 천장밑의 예배당 창문에서 스며드는 빛에 의해 암시되고 있다.
쥴리아노의 석관위에는 밤과 낮이라고 불리우는 한쌍의 남녀좌상이 좌우에 기대어 누워, 그 위 감실속에 쥴리아노의 좌상이 고상한 품위를 지닌 장군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맞은편에 위치한 로렌쵸의 석관위에는 "새벽"을 의미하는 여성상과 "황혼"을 의미하는 남성상이 불편한 자세로 기대어 있고 그위에 로렌초공의 좌상이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앉아있다. 쥴리아노 무덤의 밤과낮, 로렌쪼 무덤의 새벽과 황혼은 하루사시의 상징일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의 강 신과도 비슷한 것을 보면 저승의 네 개의 강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로렌초와 쥴리아노는 지켜보는 사람들과 더불어 죽음과 영원한 생명의 중간에서 영혼의 운명에 대해 생각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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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narroti Simoni)
미켈란젤로는 이태리 르네상스가 처음 시작한 다혈질적인 도시 피렌체에서 이 지방의 명문 부호인 아버지 로도비코(Lodovico Buonarroti Simoni)와어머니, 프란체스카(Francesca)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켈란젤로가 살고 있던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탄생시킬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미켈란젤로가 활동할 무렵에는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기베르티(Lorenzo Ghiberti:1378-1455),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베르키오(Verrocchio:1435-1488)등과 같은 뛰어난 조각가들이 이미 사망한 후였기 때문에 이러한 조각가의 공백기가 만들어 준 피렌체의 시대적 환경은 곧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더욱 더 천재로서의 독보적 위치를 굳히게 해준 또다른 요인이 된셈이다.
그는 1489년부터 피렌체의 권력가인 메디치가(Medici)가 세운 조각학교에서 도나텔로의 제자인 베르톨도(Bertoldo)로부터 조각을 배우게 되는데, 그런던 중 우연히 "위대한"로렌 쪼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the Magnificent)의 눈에 들어 공동품들로 장식된 메디치가의 정원에서 작업을 하며 마치 한집안 식구처럼 생활하게 된다. 베르톨도 아래서 시작된 이중요한 첫걸음은 그에게 마르실리오 피시노(Marsilio Ficino)와 시인 폴리탄 (Politan)과 같은 메디치가의 후견인들과 알게 하였는데, 여기서 신플라톤 주의자들과 접하게 되며, 이들의 사상은 그의 후기 미술과 시에 반영되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성시스틴 벽화인 "천지창조"와 조각으로 처녀작인 "박쿠스와 어린 세티루스", "피에타", "다비드", "줄리앙"등 르네상스 조각의 명작을 생산해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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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카라 (Caracalla)
아프리카의 후예답게 찰싹 달라붙은 곱슬머리, 왼쪽을 향해 힘껏 돌린 고개, 성내는 듯 V자로 긴장된 이마와 그밑에 움푹파인 두눈 무엇인가를 쏘아보고 있는 듯한 시선, 짧고 오똑한 코, 굳게 다문 입과 중심이 파여갈라진 야성적인 턱, 머리에서 턱까지 거칠게 흘러내린 구렛나루 등 불만에 가득찬 카라카라의 표정에서 강인함과 잔혹하고 포악한 그의 성격을 느낄수 있다. 카라카라 흉상은 우리에게 낯익은 석고상과 같은 원작이 실제로 여러개 있는데, 그중 로마 바티칸 미술관과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흉상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석고상과 비슷한 모습이고, 베를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오른쪽어깨를 드러낸 모습으로 흉대를 두르고 있다. 그밖에 카라카라의 두상으로는 로마 바르소 디콘세르 밧드리노에 소장되어 있는 것과 뉴욕미술관(Courtesy Metropolitan Museum of Art NY)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세베루스조의 초상조각가의 작품으로 황제이기 때문에 미화시키거나 이상화시키지 않고 철저하게 사실 그대로 만들어졌다고 볼수 있다. 냉철한 사실적 묘사를 통해 갈등어린 인간의 내면을 표출해내는 로마 초상조각의 사실주의 기법이 잘 나타난 작품이라 할수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동생 게다(Geta)의 흉상역시 로마시대 초상 조각의 사실적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카라카라와는 대조되는 개성을 표현하고 있다. 차분하고 양순한 이 조각은 곱슬머리와 눈, 입등 형제의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로마초상 조각이 단순히 외모에만 치우치는데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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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 (Seneca, Lucius Annaeus)
마른 듯 양 입언저리에 흐르는 깊은 라인과 우수에 찬 깊은 눈빛의 날카로움이 준엄하고 금욕적인 스토아철학자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잇는 세네카상은 현재 이태리의 나폴리 국립미술관, 튀니지의 바르도 미술관, 독일의 베를린 미술관 등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나폴리 미술관의 청동흉상은 헬레니즘 시대의 것을 로마시대에 모각한 것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석고상이 바로 이것이다. 바르도 미술관의 대리석 두상또한 원작에 가까운 모습이나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손상되어 있고, 목 아래 부분은 떨어져 나간 상태로 되어있다. 그밖에 베를린에 소장된 대리석 흉상은 3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가 석고상으로 보아온 세네카의 깡마른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대머리에 살이찐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흉상의 오른쪽 가슴에는 세네카라는 명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일명 세네카 더 영거(Seneca the younger)로 불리우는 그는 스페인의 코르도바(Cordoba)에서 출생하였다.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정치가, 저술가, 법률가, 웅변가, 비극작가로서 A.D1세기 중반 로마의 선도적인 지성인이었으며, 네로황제(제위: A.D 54-68년) 통치기간의 첫단계라 할수 있는 A.D54년부터 62년 까지 로마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세네카는 부유한 가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루시우스 에이 세네카(Lucius A Seneca 일명 Seneca the elder)는 로마에서 수사학 교사로 유명했으며, 어머니 헬비드(Helvid) 는 교육을 많이받은 사람으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며, 그곳에서 변론술을 공부하면서 웅변가 훈련을 받았다. 또한 섹티(Sextii)학교에서 소티온 앗타로스로부터 철학을 배웠는데, 이학교는 바로 스토아철학(Stocism) 과 신피타고라스 철학파의 금욕주의가 융합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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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타멜라타 (Gattamelata)
도나텔로가 메디치가의 성당 성물안치소의 청동문 조각을 막시작하려고 할 때인 1443년 그는 파두바(Padua)지방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갓타멜라타(Gattamelata) 기마상을 제작하기 위해 초청되어 간다. 갓타멜라타는 본명이 에라스모 다 나르미(Erasmo da Narmi)인 베니스의 용병대장으로, 아주 중요한 지위인 군사령관을 지냈으며, 이 도시의 부와 명성을 외부로부터 지켜온 충실한 군인이었다. 그 당시는 용병대장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허약한 군주를 몰아내고 성을 수중에 넣기도 하던 때로 어떤시대보다도 타산적이고 사악함에 물들어 있던 치열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장군은 다른 용병대장들과는 달리 베니스를 위해 충성을 바치고 전투에서 공을 많이세운 모범적인 인물이었지만 외교적인 면에서는 교활한 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가 갖고 있는 "달콤한 고양이"라는 뜻의 갓타멜라타라는 이름이 그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용병대장으로는 드물게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갓타멜라타는 1441년 1월 16일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베니스의 총독의 명으로 공화국 장으로 치루어진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성 안토니오 성당에 묻혔으며, 광장에는 말 안장 위에서 의젓하게 앉아 있는 장군의 모습이 오늘날까지 높은 대좌에서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작품은 군주가 자신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만든 종전의 조상들과는 달리 충성스러운 장군의 봉사정신을 기리기 위해, 베니스 공화국에 의해서 인정된 위대한 장군의 기념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나텔로는 이러한 목적에 따라서 이상과 현실이 완전히 결합된 이미지를 창조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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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의 성죠르조 (Seint Giorgio)
도나텔로의 작품중 완전한 힘이 발휘된 것은 그의 초기 걸작인 성죠르쥬상을 손꼽고 있는데 이작품은 피렌체의 무구(갑옷)제조업자 조합에 종사하는 길드가 돈을 내어 만들게된 것으로 그들의 교회 외벽에 안치되었다(현재는 복사품으로 대체되었으며, 원작은 피렌체의 바젤로(Bargello)미술관에 있다 당시 피렌체의 부자들은 미술품 뿐만아니라 창작 과정에도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재력과 아울러서 취미의 고상함도 높이 평가받고 싶었던 것 같다. 도나텔로의 성죠르죠상도 이러한 극소수 사람들의 높은 취미의 반영이라 할수 있다. 1415년부터 3년간에 걸쳐 완성된 이 셩조르쥬상은 높이 209cm의 등신대 이상의 크기로, 고전시대 이후 처음으로 중세 미술과 강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데, 인간의 육체를 자체 기능을 가진 조직으로 표현하고 있고 인간의 모습과 동적, 정적상태, 균형에 대한 깊은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당외벽에 안치된 성죠르쥬상은 고딕형 첨형 아치의 벽감속에 놓여졌는데, 양쪽기둥은 고대풍의 화려한 아칸더스(Acanthus)로 장식된 주두를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조각(도나텔로의 성마르크상)은 벽감 속에 완전히 들어가 있는데 비해, 이벽감은 깊이가 훨씬 얇아 젋은 전사인 이 성인은 실제로 거기에서도 약간 밖으로 나와 있다. 기독교의 수호자로, 갑옷을 입고 있기는 하나 그의 동체와 사지는 딱딱하지 않고 매우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에 큼직한 십자가가 새겨진 방패에 왼손을 얹고(오른손에는 원래 창이나 칼을 쥐고 있었다.)발을 넓게 벌려 앞으로 내디딘 다리에 중심을 둔 자세에서 즉각 전투에 임할 것 같은 태세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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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파 (Agrippa, Marcus Vipsanius)
얇고 의지적인 입술, 억세게 보이는 턱, 균형잡힌 머리를 약간 왼편으로 돌리게 하여 좌우 대칭을 정중동으로 깨뜨리고 있는 근육형의 굵은 목, 그리고 목줄기를 가로질러 과 의지의 경륜을 웅변하는 듯한 가볍게 파인 서너줄의 목주름 등은 2천년전의 사나이인 아그립파에 대한 호쾌한 인상과 성격을 오늘날까지도 실감있게 전해주고 있다. 로마 초상조각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는 아그립파는 신념에 찬 장년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그의 성격과 감정까지 느낄수 있게 한다.
아그리파의 대리석 흉상은 그원형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로마 카피톨리노박물관, 피렌체의 우지치 미술관에 각각1점씩, 소장되어 있으며, B.C 13년-9년까지 아우구스투스의 개선을 기념하고자 로마 원로원이 주관하여 제작한 아우구스투스의 무덤인 평화의 제단벽면에는 아그리파의 가족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우지치 미술관의 아그리파는 귀족적인 의상을 걸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루브르 박물관의 흉상이 바로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낯익은 아그리파 석고상이다. 높이 50cm정도의 아그리파 흉상은 로마의 장군다운 억세고 강인한 남성미와 개성을 한눈에 느끼게 한다. 아그리파는 최초의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영향력 있는 부관이었다. 그는 B.C 31년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동안 반란을 진압하고 식민지를 확보했으며 로마 제국의 여러지역을 통치했던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군인이었다. 또한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정치가로서 한 시대의 영웅이요, 풍운아였다.
가난하고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낫으나 결코 겸손한 사람은 아니엇던 아그리파는 로마의 귀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치밀하게 아우구스투스와 우정을 맺음으로써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시작하게 된다. 강하고 총명하고 충직한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절대적인 신임속에서 그를 위한 충실한 심복이며, 보좌관으로서 평생을바쳤다. B.C44년 율리우스 시이저의 피살시 아일리리아(Illyr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친구로 등장하기까지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없다. 시이저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시이저의 정치적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선언하기 위해 아그리파와 함께 이태리로 돌아갔으며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의 정계 진출에 큰도움을주게 된다. B.C 43에년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지휘관중의 한사람으로 근무했으며, B.C42에는 안토니우스와 합세한 옥타비아누스를 도아 마케도니아의 필립피(Phillipi)에서 브루터스 일파를 격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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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터스 (Brutus, Marcus Junius)
육중한 가슴의 볼륨, 좌측으로 크게 돌린 얼굴을 이어주는 목의 근육, 미완성으로 처리한 머리카락 등, 장엄하고도의지에 찬 장년 브루터스의 내면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부프터스 흉상은 결단을 앞둔 인간의 고뇌가 무거운 침묵으로 암시되고 있어 더욱 강한 느낌을 준다. 또한 중앙부분에 표현된 옷주름은 오른쪽 끝에 있는 단추 밑부분에 의도 되어진 주름 위로 모아져서 다시 한번 시선 방향을 옮아가게 하는 순환 운동을 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각적인 역동감을 느끼게 한다.
피렌체 국립 바로셀로미술관에 있는 높이 74cm의 대리석 작품인 브루터스 흉상은 미켈란젤로가 62세가 되던 해인 1537년에 착수하여 1539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지방(피렌체) 출신의 절친한 친구인 신부 리돌피(Niccolo Ridolfi)추기경의 제작의뢰로이 흉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539년에 환성된 이작품은 그의 친구인 역사학자 단테 지아노띠(Donte Gianntti)에게 주었으며 1574년 이후에 다시 메디치가의 프란체스코 대공의 수중으로 들어가 현재의 청동 받침대(21cm)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쓰여 있다.
"범죄와 체념사이의 갈등에 빠져있는 브루터스의 모습을 대리석 조각으로 옮긴 것이다. (Dum Bruti effigien Sculptor de marmore Ducit-m mentem sceleris venit et abstinuit)" 로마의 전통적인 명문가 출신인 브루터스 B.C 44년 3월 로마의 독재 군주 율리우스 시이저를 암살한 음모자들의 지도자 였다. 마르쿠스 쥬?臼肄? 브루터스(Marcus Junius Brutus:B.C 77년 사망)의 아들인 그는 학자적이며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그의 숙부 퀸투스 세르비리우스 캐피오(Quintus Servilius Caepio)에게 입양되어 퀸투스 캐피오 브루터스(Quintus Caepio Brutus)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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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 (Cicero, Marcus Tullius) - 칸트
사물을 꿰뚫을 듯한 예리한 눈길, 넓고 튀어나온 이마와 주름살, 물결처럼 흔들리는 머리칼등에서 인생의 많은 경험을 통한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이는 키케로상은 굳게 다문 입술과 입주위의 강한 근육표현에서 웅변을 토해내기 직전의 침묵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키케로 마르쿠스 율리우스란 긴이름을 가진 그는 일명 툴리(Tully)라고도 하며, B.C106년 시골 소읍인 라티움의 알피니움(Arpinium)에서 태어나 B.C43년 12월7일 라티움의 케에타(Caieta)근교에 있는 포미아(Formmia)에서 사망했다. 로마의 정치가, 법률가, 학자, 철학자 및 작가로서 그는 로마 공화국이 시민전쟁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공화국의 원칙을 고수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공화정 초기의 로마에는 라틴어로 된 시가 눈부신 진보를 이룩한 반면 산문은 실용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특히 원로원, 법정 등에서는 말을 훌륭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런말의 구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바로 키케로 였다. 키케로는 당시의 신흥계급인 기사 가문의 출신으로 알피니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와 그리이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B.C89년에 폼페이우스 스트라보(Pompeius Strabo:폼페이의 아버지)아래서 군복무를 했으며, B.C80 년 섹투스 로시우스(Sextus Roscius)의 살해 혐의에 대해 뛰어난 변호를 하여 법정에서 그의 명성을 입증했다. 만일 로마문학에 있어서 최고의 작가를 든다면 키케로 이외에 달리 내세울 작가가 없을 정도다. 그의 격조높은 웅변은 로마 변론술의 최고봉을 이루었고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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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III 세 (Antiochus III) - 시이저
움푹패인 두불과 무엇인가를 주시하는 듯한 눈, 그리고 굳게 다문입술, 신경질적이리만큼 날카로운 얼굴의 윤곽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는 안티오코스 3세는 시리아 제국을 36년간 통치한 황제로,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비통함과 고뇌에 찬 양미간의 주름에서 끝없이 자신의 욕망만을 쫓던 한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감마저 느끼게 한다.
안티오코스 3세(Antiochus III:B.C 242-187)는 헬레니아 시리아 제국의 세레우시드(Seleucid) 왕으로, B.C 233년부터 B.C 187년 까지 제국을 통치했으며 동부지역에 제국을 재건했으나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로마의 지배권에 대한 도전 실패로 쇠퇴하였다. 세레우쿠스 2세(Seleucus II)의 차남인 안티오코스는 부왕이 죽은후, 그의 형 세레우쿠스3세 (Seleucus III)의 왕위를 계승하여 혼란한 시리아 왕국을 통일하려고 애썼다. 그는 지방의 영토를 축소하여 제국의 행정을 개편하였으며 그의 딸들을 이웃국가들의 왕자와 혼인시킴으로써 주변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였고, 귀족으로 부터의 영향력을 제거하였다.
그후 안티오코스는 제4차 시리아 전쟁(B.C 219-216)을 지휘할 수 있었으며 이 기간동안 그는 매우 중요한 동부 지중해 항구(Seleucia-In-Pieria, Type, Ptolemais)를 장악할수 있었다. B.C 218년에는 실레 시리아 (Coele Syria:레바논), 팔레스타인(Palestine), 그리고 패니키아 (Phoenicia)를 얻었으며, B.C 217년에는 라피아(Raphia:시리아의 최남단도시)에 있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그리이스 왕조의 통치자(Pharaoh)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터의 군대7만5천명을 얻었다. 이는 이집트 군대의 왼쪽날개격인 막강한 군대로 이때 안티오코스의군대는 그보다 적은 6만 8천명에 불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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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스 (Mars)
독수리로 상징되고 있는 전쟁의 신인 마르스는 그의 건장한 체구에서 느껴지는 당당함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왠지 무력감에 쌓여 있는 듯 하다.
죽음과 피를 동반하고 다니는 그는 용맹스러움과 잔임함을 함께 지니고있는 싸움의 신이다. B.C 425년 그리이스의 조각가 크레실라스(Kresilas:아마존의 작가)의 작품을 로마시대에 모각한 것으로 높이 212cm 의 청동제로 된 이군신상은 보르게제(Borghese)의 집에 있었던 것으로 일명 보르게제의 마르스(Mars De Borghese)라고도 불리운다. 이군신상은 다시 제작되어 프랑스로 팔려 갔으며, 원형의 전신상은 현재 루브르에 있다. 마르스는 고대 로마의 신으로 그중요성에 있어서는 쥬피터다음이다. 로마의 신화에서 마르스는 성장과 수확을 관장하는 계절의 전령인데, 그계절이 전쟁의 계절이기도 하므로 전쟁의 신으로 발전된 것이 분명하다. 또 문학에 있어서 그는 로마의 수호자였으며, 그로 인해 그의 신조는 용맹을 상징하는 독수리로 통했다.
(일리아드)는 전쟁에 관한 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레스를 혐오스러운 존재로 묘사한다. 호머에 의하면, 그는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로 그들 양친 모두 그를 매우싫어했다고 하였다. 또 그는 피투성이의 살인을 즐기는 신으로서 육신을 갖춘인간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신이라고 하였다. 그는 전쟁터에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수행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공포, 전율, 그리고 낭패 따위의 수행자들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일때면 뒤에서는 신음소리가 나고 대지는 피로 시내를 이룰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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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 (Ariadne) - 아리아스
아리아드네는 부드러운 곡선의 머리띠와 그위에 양감있는 굵은 머리가 어깨위까지 흘러 내리며 날카롭지 않은 얼굴과 풍만한 가슴을 연상할수 있도록 여유있게 잘리워진 가슴은 보는 사람마다 우아함을 느끼게 하는 로마의 카피톨리노 미술관에 있는 아리아스의 대리석 흉상의 복제이다. 이것은 그리이스 헬레니즘 중기 정도의 양식으로 제작된 원작을 로마 제국시대에 모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작가가 밝혀지지 않은 이흉상은 76cm의 높이로, 머리의 양감이 가장 강한 석고상이다.
아리아스의 미간에서 비골로 흐르는 거의 직선에 가까운 선은 비너스, 헤르메스, 아폴로 등에서도 느낄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러한 형태가 신과 인간의 차이를 두기 위한 표현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헬레니즘기의 조각양식이 그러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시대에는 하인의 모습도 같은 양식을 갖고 표현된 것을 볼수 있다.(이 아리아스는 그리이스신화에 원래 아리아드네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하 아리아드네라고 한다.) 좌측아래를 바라보며 잔잔하면서도 의미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가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미노스섬에 왔을 때, 단상위에서 아버지 곁에앉아 있다가 젊고 용맹스러운 테세우스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껴 미소짓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란 추측이다.
또 바티칸의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에는 잠자는 아리아드네라는 높이 161cm 정도의 대리석 와상이 있는데, 역시 그리이스 원작을 1,2세기경 로마인이 모각한 것으로, 바위처럼 육중한 침대위에 반쯤 기대어 누운 아리아드네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클레오파트라로 오인되었던 이상은 팔을 머리에 두르고 뒤틀어 누운 자세로, 미켈란젤로의 밤과 낮의 형태와 무관하지 않은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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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콘 (Laocoon)
아래쪽으로 경사진 양눈썹, 수그러드는듯한 눈, 찡그린이마, 벌려진 입, 거대한 뱀에 감겨 고통스럽게 질식되어 가고 있는 모습의 라오콘은 격렬한 움직임과 풍부한 양감에서 느껴지는 초인갅거인 힘과 내면 깊숙이 채워져 있는 격렬한 감정이 함께 어우러져 숭고한 장엄미마저 느끼게 해주는 군상이다. 고통의 표정은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육체의 모든 근육과 힘주에 까지 나타나 있어 더욱 강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고통속에 허덕이는 동적인 움직임과 심리표현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B.C 50년경, 로도스(Rhodes)섬의 하게산드로스(Hagesandros), 폴리도로스(Polydoros), 그리고 아타나도로스(Athanodoros)의 합작인 라오콘은 높이 240cm 의 대리석 군상으로,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폴로상이 바티칸의 벨베데레로 옮겨진 몇 년후인 1506년에 로마 성베드로 사원의 티투스의 욕탕벽에서 발견되었다. 이미 아폴로상의 발굴로 개가를 올렸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교황청의 건축가 쥴리아노 산갈로에게 이 군상의 발굴작업을 지시했다. 산갈로는 조각가인 친구 미켈란젤로에게 함께 발굴작업에 참여할 것을 제의했다. 라오콘군상에 나타난 거의 신경질적인 난폭성은 당시 31세인 미켈란젤로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으며, 고전기이후의 그의 예술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음에 틀림이 없다.
라오콘 군상은 발굴당시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의 팔과 다리는 이미 파손되어 있었고, 라오콘의 절단된 오른팔은 발굴되지 못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라오콘 군상을 벨베데로 옮기게 하였으며, 이로서 그는 가장 유명한 조각상인 아폴로상과 라오콘군상을 발견한 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에 의하여 조각가 베키오 반디넬리(BaccioBandinelli)와 몬테르솔리(Montorsoli)에게 명하여 라오콘의 오른팔을 뱀을 움켜진 채 공중으로 뻗고 있는 모습으로 복원하게끔 하였다. 그후 1725년과 1727년 사이에 코르나키니(Cornacchini)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으나, 그로부터 400년 후인 1960년 학계에서는 이볼성 사나운 오른팔의 불균형을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재구성 작업을 맡은 필리오프 마기는 400여년 전의 발굴현장에서 절단된 오른팔부분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는다. 이렇게 해서 몬테르 솔리에 의해 어색하게 뻗쳐나간 라오콘의 오른팔은 400여년만에 떨어져 나가고, 필리오프 마기에 의해 제복원된 이 군상은 머리뒤로 돌아간 고통스런 동세의 오른팔이 붙게 되었다. 오른팔의 발견으로 드디어 라오콘은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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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로의 비너스 (The Venus of Milo)
조용히 고개를 들어 먼곳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시선과 양미간으로부터 직선으로 뻗어내려간 콧등, 매끈한 얼굴과 대조를 이루어 긴장감을 주고 있는 물결모양의 머리결, 이모든 것이 조금도 어색함없이 우아한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는 밀로의 비너스는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과 균형잡힌 풍만한 육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밀로의 비너스는 B.C 2세기말(B.C15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1820년 그리이스의 밀로섬에서 발견된 것이다. 농부 이오르고스는 그의 아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 이곳에는 많은 관목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뽑자 그 밑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깊은 동굴이 계속되어 있고 훌륭한 조각상이 있었다. 그리이스에서는 가장좋다고 알려진 파로스산의 대리석으로 된 높이 약 204cm의 나체 여성상이었는데, 허리아래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와함께 두 개(또는 세 개)의 헤르메상(Hermai:기둥위에 흉상이 붙은것)과 몇 개의 대리석 단편도 나왔다. 그리이스를 비롯한 로마의 유적이 많다는 것을 농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틀림없이 명작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소문은 곧 퍼져, 프랑스의 대리 영사 루이 브레스트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고대미술을 발견하였을때는
당장 사들이라" 는 비밀훈령을 받고 있었다. 미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그는 루브르미술관에 가지고 가서 조사해 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농부가 25,000 프랑이 아니면 내놓을수 없다고 버티자, 이런 대금을 지불할수 없는 브레스트는 총영사에게 보고하여 운송하던도중 얼굴과 어깨에 마마자국 모양의 흠집을 남기는 등 부분적 파손을 가져오게 하였다.
밀로섬에서 발견된 조상은 과연 비너스 일까? 그것은 품위있는 볼륨을 가지고 있고, 고전기에서 볼수 있는 높은 긴장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하반신의 옷은 고아한 조형성을 보이고 있고, B.C 5-4세기 고전기의 작품을 나타내고 있다. 많은 고고학자와 미술학자가 이 조상을 연구하였다. 그중에서도 아카데미의 비서관 카트르멜 드 켄시는 프락시텔레스작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의 목과 이 밀로의 입상 얼굴부분이 몹시 닳아다하여, 이입상을 최초로 비너스라고 단정하였다. 그후 루브르 미술관의 관리자 클라라크 백작도 같은 의견을 피력하게 됨으로써 밀로의 비너스라는 정식 명칭을 붇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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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Apollo)
걸음을 멈추는 듯, 들어올린 왼팔의 방향으로 멀리 시선을 던지며 서있는 태양의 신 아폴로는 부드럽고 곡선적인 몸매와 매끄러운 얼굴의 모습에서 남성적인 느낌보다는 오히려 여성적인 느낌이 강조되어 있어 그의 모습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잔인함에 의아함마져 느끼게 한다.
벨레데레의 아폴로는 B.C 4세기를 대표하는 아테네의 조각가 레오카레스(Leochares)가 B.C 330-320 년 경에 제작한 청동제 아폴로 입상을 원작으로 하여 로마의 하드리아누스제(Publius Aelius Hadrianus)제(A.D 117-138)때에 모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23.5cm의대리석 입상으로 1484-1492년 델라로베레 추기경(후에 교황 율리우스 II세가 된다)의 영지인 안티오에서 발굴된어 16세기 초에 교황 율리우스 II세에 의해 바티칸의 벨레데레(Belvedere: 전망대 또는 노대라고 부르는 방을 말한다)에 옮겨진 이래 수많은 찬양자의 문헌을 낳게한 걸작이다.
궁술과 음악의 신 아폴로가 왼팔을 들어올린 방향으로 멀리 시선을 던지며 서있는데, 잘려진 손목부분에는 이음쇠를 끼었던 흔적이 보인다. 오른편 어깨에 걸친 크라뮤즈의 띠는 경쾌하고 기민한 느낌을 준다. 오른팔을 늘어뜨린 팔꿈치부근에서 끊기었으나, 오른쪽에 허벅지 높이로 세워진 뱀이 감긴 나무 줄기위에 월계수 잎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월계수가지를 들었던 것으로 추측되어 진다.
이조각의 원작자 레오카레스는 심리상태의 표현에 탁월한 스코파스(Skopas)의 조수를 지낸바 있는 아테네의 조각가로서, 아테네와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활동하다가 만년에는 마케도니아로가 알렉산더 대왕의 궁중조각가로 봉직하였다. 그느 벨베데레의 아폴로상 이외에도 이소크라데스상, 뤼키스코스상, 카뉘메데스상등을 제작하여 당시에도 널리 명성을 떨쳤던 사실적 작품의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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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Hermes)
짧은 고수머리에 갸름한 얼굴,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내려다 보는 눈길, 수려한 용모와 자태에서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헤르메스는 많은 석고상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남성상으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가 보는 헤르메스 흉상이지만, 원래 헤르메스와 아기 디오니소스(Hermes with the Dionysos)라는 그리이스의 대리석 전신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작품은 그리이스의 고전기 후기에 활약했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Praxiteles : B.C 390 - ?)가 B.C 330년 경에 만든 걸작으로 1877년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내부에서 발견되어 현재 올?꽁퓸? 고고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등신대가 훨씬 넘는 높이 215cm의 순백 대리석으로 조각된 누드의 헤르메스는 옷을 벗어 걸친 나무등걸에 아기를 안은 왼팔을 기대고 쉬고 있는데, 쳐들고 있는 오른팔은 원래 포도송이를 들고 아기 디오니소스를 달래는 모습으로 여겨지며 절단된 상태에서 발굴된 것이다.
8등신의 아름다운 몸매는 아마존상에서 처럼 S자형의 커브를 완만하게 그리고 있어 더욱 우아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왼편다리는 힘을 빼어 뒤꿈치를 약간 들고 있는 편안한 자세로 되어 있다. 온몸이 건강하고 튼튼한 근육질로 덮여 있으면서도 전신에 흐르는 투명한 관능미와 달콤하고 섬세한 부드러움에서 우리는 우아한 육체미의 극치를 볼수 있다. 헤르메스의 조화되고 서정적인 매력이야말로 이 예술가의 가장 성공적인 업적이었음을알수 있다. 프락시텔렉스는 고전기 전기의 작가 피디어스와 한쌍을 이루는 조각가로, 피디어스가 신상조각의 종교적 장엄성이나 엄격성을 추구한 "숭고양식"을 낳는다면, 프락시텔레스는 비록 신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을 지닌 감성적인 "우미양식"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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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Amazon) - 그리이스부인
그리이스 부인상이라고 불리고 있는 아마존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매우 용맹스럽고 호전적인 무인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약간 수그린 얼굴에 나타난 절망적 표정에서 혁혁한 승전의 투사로서의 느낌보다는 오히려 여성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석고상 아마존의 원작은 고전기 조각가 크레실라스(Kresilas)의 작품으로 로마 카피톨리노(Capitoline)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높이 2.045m의 대리석 아마존 전신상의 부분이다. 크레실라스는 B.C 5세기말, 크레타의 키도니아 출신 조각가로 청년기에는 주로 아테네(Athens)에서 활동하였다. 오늘날 아크로 폴리스에 남아있는 조각 대좌의 명에서 그의이름을 볼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아크로 폴리스(Acropolis)에 있는 페리클레스상이 있으며, 그외에 파라디온을 가진 디오메데스의 대리석 모상이 뮌헨의 그뤼프트테크에 있다. 또한 피디아스, 폴리클레이토스 등과 경쟁하여 만든 상처입은 아마존의 모상 여러개가 있다.
아마존은 스키티아(흑해연안)와 트라키아(에게해 동북연안)에 걸친 아시아 내륙에 살았다는 신화속의 부족이다. 그녀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또는 마르스)의 자손으로, 아에아킬루스는 이들을 가리켜 전쟁을 좋아하며 남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여인들만의 부족이라 하였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시인들에게 그들에 대한 작품을 쓰도록 하는것보다 예술가로 하여금 동상을 만들게 하거나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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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Homeros)
시원하게 넓은 이마와 깊은 사유의 세계를 느끼게 하는 굵게 주름잡힌 미간, 그리고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 치켜 뜬 눈자위등 인간적 풍모와 지고의 정신세계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의 사실적 묘사는 오랜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위대한 시인 호머의 인간적 깊이를 강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헬레니즘(Hellenism : B.C 323-31년)의 그리이스 조각가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현재 나폴리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호머상과 그리이스 시대의 원작을 B.C 450년 경에 모각한, 현재 바티칸의 살라 델라 뮤즈(Sala Delle Muse)에 소장되어 있는 흉상의 호머상이 있다. 이중 나폴리에 있는 호머상이 우리가 늘 접하고 있는 석고상과 같은 모습의 것이다.
서구 문학의 시조이며, 그리이스 최고의서사 시인인 호머(Homeros : B.C 750-700 또는 B.C 900 - 820 년경)의 생애에 관해서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소아시아에 살았던 신분이 낮은 그리이스인으로 그 유명한 대서사시(일리아드(Ilias)와(오디세이(Odysseia)의 작가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개인이 아닌 편역 시인들의 집단명 또는 장님인 걸식시인 이라고도 하며, 또는 존재하지 않던 전설적 인물이라고도 한다.
문예사적인 면에서 호머의 가치는 우선 스타일과 플롯의 완벽한 통일성,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와 모티브의 파악, 보편적인 견지에서 본 위대한 인물들의 개성화, 그리고 인생의 위엄과 쾌락과 비극을 그리면서 특히 죽음의 필연성을 묘사한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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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파 (Agrippa) (B.C62∼A.D 12)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청년기에 옥타비아누스 를 도와 로마의 황금시대를 여는데 절대적인 역활을 한다. 그는 장군이었고 두 번이나 통령에 오르는 영광을 맞보았다. 아그립파상은 로마의 뛰어난 초상조각으로 로마의 카피톨리노 박물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등지에서 볼수 있으며 현재 우리가 석고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루브르 박물 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줄리앙 (Giuliano)
그는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25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실존인물이다. 지금의 쥴리앙상은 그의 유복자인 줄리오가 교황 클리멘트 7세가 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묘비제작을 의뢰하여 탄생하게 된 것이다. 줄리아상은 긴 목과 다이나믹한 동세 그리고 간결한 이목구비의 표정이 특징이다.
비너스 (Venus of milo)
밀로의 비너스상은 1820년 에게해의 조그만 섬인 밀로에서 요르고스라는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헬레니즘의 최대 걸작으로 그 고전기적인 기품 때문에 수많은 비너스상을 제치고 미의 여왕이란 지위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높이 204cm 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비너스상은 허리부분을 단면으로 상.하 두 개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아스(Ariadne)
아리아스는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딸로서 왕자 테세우스를 사랑하지만 나중에 버림받게 된다.나중에 디오니소스와 결혼하여 세명의 아들을 얻 게 된다. 아리아스상은 머리띠를 두른 양감있는 굵은 머리가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둥근 얼굴모양으로 부드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높이 76 cm 정도의 아리아스상은 현재 로마의 카피톨리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카라칼라(Caracalla) (186~217)
186년에 태어나 강대한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로 30세에 암살당한 불운의 폭군이었다. 카라칼라상은 고수머리에 구레나룻, 굵은 목과 짧은 코, 강한 골격과 근육이 인상에 긴장감을 주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지 못하는 얼굴이다. 여러개의 카라칼라상이 현재 남아 있는데 파리, 나폴리, 로마, 베를린등의 박물관에 보관 되어있다.
시어저 (Caesar) (B.C 100~44)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공화정 로마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악명높은 폭력정치가로 일명 케사르라고도 한다. 또한 이집트의 여왕인 크레오파트라와의 비밀스런 만남도 그의 찬란했던 인생을 나타내준다.
칸트
독일의 철학자,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16세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들어갔고 1765년 왕실도서관에서 일하며 많은 책을 일고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받았다. 46세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한번도 지각하는 일없이 열심히 강의 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당시 철학의 2대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과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을 종합하여 비판철학을 확립했다. 1781년 순수이성비판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계속하여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을 내놓아 근대철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투사 (보르게제 검투사) (B.C 320~146)
청동상으로 추정되고 있는 투사상은 루브브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높이 199 cm 의 대리석상은 로마시대의 모작품이다. 당시 시대상은 헬레니즘시대의 예술 이상주의적 성격을 점차 잃어가고 사실주의적인 경향이 지배적으로 되던 시기이다. 따라서 투사상은 운동상태의 복잡한 균형을 비롯해 살의 혈관을 나타낼 정도로 현실감 있게 표현되었다.
호머 (Homeros)
기원전 4 세기 헬레니즘시대의 그리이스 조각가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인인 호머는 내면 세계의 깊이를 보여 주듯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나폴리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호머상은 오랜기간 동안의 세월을 알 수 있듯이 부분적으로 부서져 있다.
헤르메스 (Hermes)
흉상인 헤르메스는 원래 그리이스의 대리석 전신상에서 나온 것이다. 1877년에 헤라 신전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헤르메스상은 보존상태가 양호하였다. 그리이스의 관념적인 이상화를 최대로 끌어 올린 헤르메스상은 현재 올림피아 고고 미술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조각품이 되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미켈란젤로는 이태리 피렌체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훌륭한 조각솜씨 뿐만 아니라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나 모자상을 그리는 등 회화에서도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 하였다.퇴폐상, 문란한 사교활동 등을 시민적 관점에서 비판하였다.
아폴로 (Apollo)
당당한 체구에 균형자힌 이상적인 용모와 화려한 머리칼과 옷은 태양신다운 올림포스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제우스, 어머니는 레토이다. 달의 신인 아르테미스는 그의 여동생이다. 아폴로는 목자의 수호신이며 예언자이고 태양의 신이며 의술과 음악의 신이다. 특히 아폴로의 예언력은 널리 알려져 있어 그리이스 전역에 아폴로 신전이 있을 정도이다.
몰리에르 (Moliere) (1622~1673)
극작가인 몰리에르는 인간심리를 드라마로 표현하였다. 등장인물에 성격을 붙여 묘사함으로 풍자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17세기 프랑스 상류 사회의 가식적인 신앙과 퇴폐상, 문란한 사교활동 등을 시민적 관심에서 비판하였다. 몰리에르상은 쟝앙트완 우동의 작품으로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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