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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선사 법문 스크랩 숭산큰스님 수행이력
海雲 추천 0 조회 193 07.11.04 05: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崇山堂 行願 大宗師 行狀 / 修行 履歷


千江에 비친 달
오직 할 뿐
그냥 할 뿐
분명히 보고 분명히 들어라

“만일 이 문에 들어서거든 일체 생각을 내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一切法]은 모든 마음[一切心]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만일 모든 마음이 없다면 모든 법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찰나 찰나 오직 행할 뿐으로 날마다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해서 365공안을 성취하고 크게 깨달아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기 바란다. 높은 하늘은 항상 푸르고 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듯 우리 곁을 떠나 적적성성의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1927년 8월 1일, 평남 순천군 순천읍 창리 233번지에서 이영준 청신사 이소저 청신녀 사이에서 4대독자로 부처님법을 전세계 중생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홀연히 세상에 나투셨습니다. 숭산스님은 이소저 청신녀가 묘향산을 향해 밤마다 기도를 올리자, 9월초 하얀 학이 흰 소나무에 앉는 꿈을 꾸고 잉태하셨습니다. 속명이 덕인이었던 숭산 행원 대종사는 어릴 적부터 영민하고, 라디오 시계 등을 고치고 묘한 것을 잘 만들어내 주위로부터 공상가 에디슨이라고 불렸습니다. 1940년 순천공립학교를 졸업한 숭산 행원 대종사는 1941년 평양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셨고, 1945년에는 대동공전에 입학하셨습니다. 대동공전 시절 학생사건의 주모자가 된 숭산 행원 대종사는 묘향산 보현사로 피신을 하셨습니다. 불교와 첫 인연을 맺으신 것입니다. 북한의 사정이 더욱 악화돼 묘향산 보현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던 숭산 행원 대종사는 남한으로 피신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한에서 역시 남북 대립과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목격한 숭산 행원 대종사는 공업대학에 입학하지 않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하셨습니다.
동대 시절 3·1운동 기념식 날 좌우익 진영 학생들의 다툼을 보고 ‘망국의 징조다.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놈들이다’라고 판단하고 머리를 깎고 마곡사로 입산하셨습니다. 마곡사에 입산하신 스님은 부용암에서 일본어로 된 불교 책과 사상전집을 독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곡사에서 신소천스님이 쓴 『금강경』을 공부하다가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아, 세상은 허망하구나. 불교는 인과법이다.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하고 흐뭇해하셨습니다.
불법의 깊은 묘의를 이해한 숭산 행원스님은 1947년 마곡사에서 발심 출가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늘에 말린 생솔잎만으로 연명하며 100일기도에 들어가셨습니다. 온갖 고행을 감내하고 사경을 넘나들며 정진하던 스님은 99일째 되던 날, 어떤 사람이 걸망을 짊어지고 산길을 올라가는데 앉아 있던 까마귀가 파다닥 날아가는 것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확 열림을 느끼셨습니다.
그때 스님께서는 “아, 진공묘유가 바로 이 자리구나” 하며 오도송을 읊으셨습니다.

圓覺山下非今路 원각산 아래 한 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背囊行客非古人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濯濯履聲貫古今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날과 지금을 꿰었는데
可可烏聲飛上樹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100일기도를 끝낸 스님께서는 당대의 대선지식이셨던 만공스님에게 법을 묻기 위해 만행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만공스님은 이미 열반에 드셨고, 당시 마곡사에 법문을 온 고봉스님을 만나셨습니다. 고봉스님께서는 경허·만공스님 등 한국 선불교의 큰 맥을 이어받은 대선지식이셨습니다.
스님께서 고봉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고봉스님께서 목탁채를 들고 때리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후 일어나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고봉스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부처를 보았느냐 집을 보았느냐?”
“아무것도 안 봤습니다.”
“아무것도 안 봐? 그럼 목탁은 왜 가지고 들어왔느냐.”
스님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나중에 은사스님이 될 고봉스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을 만난 스님께서는 수덕사 정혜사로 수행처를 옮기셨습니다. 스님은 정혜사에서 춘성스님 일엽스님 금봉스님 전강스님 혜암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과 함께 용맹정진을 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께서는 1949년 1월 25일 미타사에서 고봉스님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고봉스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3 곱하기 3은 9요.”
“아니다.”
“오늘은 날씨가 맑습니다.”
“아니다.”
“방바닥이 뜨끈뜨끈합니다.”
“아니다.”
선문답을 마친 고봉스님께서 “왜 내가 네 꽃이 피었는데 네 나비노릇을 못하겠느냐”며 눈물을 뚝뚝 흘리시고 기뻐하며 당호와 인가를 내리셨습니다. 고봉스님께서는 스님에게 “덕숭산을 크게 번창시키라. 너의 법이 세계에 크게 퍼질 것이다”는 말씀을 함께 부촉하셨습니다.
고봉스님의 법어는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수덕사 만공스님의 가풍을 전세계로 실천하라는 예언적인 말씀이셨습니다.
숭산스님께서는 1952년 12월 3일 육군에 입대하셔서 57년 7월 20일 육군 중위로 전역하셨습니다.
1958년 미타사에서 정진을 끝낸 스님께서는 서울 화계사의 주지를 맡으시고 당시 조계종 종정 효봉스님, 총무원장 청담스님, 교무부장 경산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불사를 추진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께서는 1958년부터 64년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종의회를 구성하고 종회의원을 지내셨으며, 총무원 총무부장, 대한불교조계종 비상종회의장, 비구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의장, 초대감찰부장, 동국학원 재단상무이사 등을 역임하며 불교정화불사와 불교현대화에 적극 앞장서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또한 대한불교신문사를 설립하고 사장과 주필을 맡아 문서포교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3대 목적사업인 도제양성, 역경, 포교 목표를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습니다.
1966년 숭산 행원 대종사는 해외로 눈을 돌리셨습니다. 2차세계대전 때 사망한 일본인 유해 3천 구를 화계사에서 일본으로 돌려보내자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그 감사의 표시로 일본에 한국 사찰을 창건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증여하기로 한 고려사는 불에 타버리고 없어, 도쿄의 신주쿠에 본부를 만들고 재일홍법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재일홍법원은 일본 불교신도들의 외면과 조총련계 신도들의 북송운동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숭산 행원 대종사의 간절한 원력에 의해 하나둘씩 맺힌 인연으로 인해 도쿄 고라켄야구장 근처에 2층짜리 홍법원을 창건할 수 있었습니다.
재일홍법원 개원을 통해 해외포교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숭산 행원 대종사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전법의 길이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1968년 홍콩으로 건너가셨습니다.
홍콩홍법원을 창건한 스님은 이미 세 번째 해외포교지로 미국을 마음속에 심고 계셨습니다. 1972년 4월 숭산 행원 대종사는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문제였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스님은 혼자서 죽비를 탁탁 치고 앉아 계셨습니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미국인들이 죽비를 치면 앉고 죽비를 치면 일어나는 숭산스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미국인들이 오면 손수 밥도 끓여주고, 좌복도 만들어주셨습니다. 필요한 포교기금 마련을 위해 숭산스님께서는 세탁소의 세탁기계 수리공으로 취직을 하셨습니다. 숭산스님은 또 미국 제자들에게 매일 영어를 배웠습니다. 대신 스님께서는 미국 제자들에게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까막눈 벙어리 생활 3년만에 스님께서는 함께 선방생활을 하는 미국인 제자 60여 명과 영어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72년 프로비던스의 재미홍법원 개원은 미국 홍법원 개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차례로 보스턴 대각사, 뉴욕 원각사, 뉴헤이번 무각사, 샌프란시스코 공문선원 등이 개원했고 그 열기는 캐나다 토론토까지 이어졌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의 가르침을 받은 미국인들은 하버드·예일·보스턴대 출신 등 미국 최고엘리트들이 매우 많았고, 유럽과 동구권 학생들도 있어 나중에 선원을 개원하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외국인 제자들은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널리 알려진 현각스님, 미국 LA에 한국식 전통사찰 태고사를 짓고 있는 무량스님, 하버드대 출신 무상스님, 예일대 출신 해량스님, 보스턴대 출신 무심스님 등 수백 명에 이릅니다.
미국과 캐나다 홍법원 개원 이후, 해외포교의 길은 마치 한낮의 태양과 한밤중의 밝은 달이 이 세상을 고루 비추듯 세계로 세계로 넓고 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78년 폴란드, 80년 영국, 81년 스페인, 83년 브라질, 85년 프랑스, 86년 소련, 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92년 중국, 94년 베트남, 95년 스리랑카 등 동서양을 넘나들며 세상을 한송이 꽃으로 피우기 위해 1년에 지구를 두 바퀴 돌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정진과 포교를 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가 세계 각국에 세운 선원은 30여 개국에 120곳의 선원, 5만여 명의 푸른눈의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10월 16일 오슬로에서 3일간 용맹정진을 마치고 10월 20일 파리로 돌아와 3일간 용맹정진하는 식으로, 구 소련을 중심으로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등의 북유럽, 미국과 캐나다, 영국 서독 스위스 스페인 등 권역별로 나누어 순례포교를 1년 내내 하셨던 것입니다. 일반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인적인 수행력을 발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숭산 행원 대종사는 늘 본분종사의 위의를 지키셨습니다. 국경을 초월하고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 매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참선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포교뿐만 아니라 세계평화 지구보전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특히 1990년 모스크바와 도쿄에서 열린 세계종교 사회과학자들의 세계평화와 지구보전을 위한 세계지도자대회에 참석해 세계평화의 지름길에 대한 설법을 하셨습니다. 숭산스님은 또 19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제`2회 세계종교회의에서 달라이라마 등 3천여 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과 미국 불교를 대표하여 불교의 참선이 세계평화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와 모든 종교가 아집을 버리는 것만이 평화의 길임을 설파하셔서 세계 종교지도자들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를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는 고은 시인은 “새로운 자기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에 숭산선사가 세계 각 지역에서 꽃피워낸 한국 불교는 그 신승적 가능성이 무한할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해외포교사나 해외 선 지도자가 아닙니다. 세계와 한국에서 제1조와 제28조 이래의 정법을 펴는 불가결한 정신적 기둥입니다. 숭산영광. 숭산만겁”이라고 노래하셨을 정도입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생전에 세계 4대 생불로, 전세계인들의 영적 스승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재에서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 베트남 출신 프랑스 플럼빌리지의 틱낫한, 캄보디아의 종정 마하 고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깊이를 알 수 없고 자취를 남기지 않는 허공처럼 끝없는 수행 포교 정진을 이어가셨습니다. 97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되셨을 뿐만 아니라 해외포교 30주년 감사패와 만해포교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숭산 행원스님은 또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화계사에 국제선원, 계룡산에 무상사를 개원하기도 하셨습니다.
해외포교 35년을 맞던 여름날 스님께서는 홀연히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네
동서남북
지구촌을 돌고 돌아 35년
올바른 생활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네
허무한 세상을 실체의 세계로
실체의 세계를 실상의 세계로
실상의 세계를 실용의 세계로
세세상행 대보살도를
성취하려고 일분 일초도
쉴 사이 없었네
흰 얼굴 검은 얼굴 노란 얼굴들
수많은 눈동자와 하나 되어
푸른 하늘 흰 구름 대우주에 빛나는
사랑과 봉사와 세세상행 보살도를
두손 모아 간직하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이것이 무엇인고
모를 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대우주가 가루가 되어
한 물건도 없이 텅 빈 속에서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이것이 무엇인고
단지 모를 뿐
“악”(할)
뿔난 토끼는 놀라 남쪽을 달아나고
날개 돋힌 돌뱀은 북쪽으로 달아나네
아침해 동쪽 하늘에 빛나고
아름다운 흰 구름 서쪽으로 흘러가네
1, 2, 3, 4, 5, 6, 7……
35년이 꿈과 같이 흘러갔네
신묘장구대다라니
합장하나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숭산 행원 대종사는 또 2001년에는 백담사 기본선원 조실을 맡아 외국인 납자들뿐만 아니라 한국 납자들을 제접하기도 하셨습니다.
만산의 낙엽들이 모두 본체로 돌아가고 모든 산들이 수천년의 힘줄을 그대로 드러낸 2004년 11월 30일, 숭산 행원 대종사께서는 화계사 주지 성광스님, 대봉스님, 현각스님 등 제자들을 불러모으셨습니다. 스승의 임종을 맞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자들이 숭산스님께 물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제자들의 물음에 숭산 행원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萬古光明이요, 靑山流水니라.”
제자들에게 후일구를 남기신 숭산스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왔던 곳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치셨습니다.
2004년 11월 30일 오후 5시 20분,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던 숭산당 행원 대종사가 서울 화계사 염화실에서 세수 77세, 법랍 57세로 원적에 드셨습니다. ‘세계일화’를 온몸으로 실천했던 생불(生佛)의 원적에 세상만물이 꽃비를 내리며 화답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단지 모를 뿐
“악”



修行 履歷

1927년 평남 순천 출생. 속명 이덕인(李德仁).
1947년 마곡사에서 고봉스님을 은사로 득도.
1949년 수덕사에서 고봉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50년 수덕사에서 하안거 성만 이후 11안거 성취.
1951년 마곡사 강원 대교과 졸업.
1952년 육군 입대.
1957년 육군 중위 전역.
1958년 화계사 주지. 청담스님, 효봉스님, 동산스님, 경산스님 등 당시 비구계의 중추 스님들과 함께 불교정화운동 추진. 대한불교조계종 종의회 구성. 대한불교조계종 종회의원.
1960년 대한불교신문사 설립. 초대사장 취임.
1961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비상종회의장. 비구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의장.
초대감찰부장.
법무장관 출신 조병일 장군과 최고회의 위원 박기석 장군과 함께 달마회 창립. 예비역군 출신과 법조인으로 구성된 불교지식인단체.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동국학원재단 인수. 재단상무이사.
대한불교조계종 재무부장.
1964년 동국학원 상무이사 연임. 한국 불교 최초로 인재양성을 위해 종비생제도 실시. 현재까지 조계종의 3대 목적사업인 도제양성, 역경, 포교 확립 실시.
1966년 일본에 홍법원 개원. 2차세계대전 때 사망한 일본인 유해 3천 구 일본으로 송환. 일본에서 사망한 한국인 유해 인도받음. 그공로로 일본 정부에서 신주쿠의 땅을 증여함. 한일외교정상화 후 최초로 한국 사찰 일본에 창건.
군 포교를 위해 군종제도 추진.
청담스님 경산스님과 함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추진.
1969년 세계불교지도자대회 개최(11개국 참가).
홍콩 홍법원 개설.
1972년 미국 홍법원 개설.
1974년 캐나다 토론토 선원 개설.
1978년 폴란드 홍법원 및 8개 선원 개원.
1980년 영국 런던 선원 개원.
1981년 스페인 팔마선원 개원.
1982년 세계평화종교지도자대회 개최. 로드아일랜드 뉴헤이번 젠센터에서 세계 19개국 불교지도자들이 참석.
1983년 브라질 상파울루 선원 개원.
1985년 세계평화문화인대회(WUM)에서 세계평화상 수상.
프랑스 파리선원 개원.
중국 북경불교회 초청 중국 불교 방문 순회법회.
1986년 소련 정신문화협회 초청 불교 포교활동.
1987년 수덕사에서 세계일화대회.
1988년 폴란드 한국 선불교 포교 10주년 기념행사 개최.
198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한국 선지식으로 최초로 포교활동.
1990년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생존과 환경을 위한 국제대회 초청강연.
수덕사에서 2차세계일화대회.
1992년 중국 남화사에서 승려와 일반인 위한 참선 지도.
홍콩 국제선원 개원.
재미 홍법원 개설 20주년 기념대회 개최.
1993년 싱가폴 국제선원 개원.
수덕사에서 3차세계일화대회 개최.
1994년 한국 선지식 최초로 베트남 방문.
1995년 스리랑카, 미얀마 성지순례 및 한국 선불교 포교활동.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1996년 해외포교 30주년 기념대회 개최
1997년 만해포교대상 수상.
대한불교조계종 해외포교 30주년 기념 감사패.
미국 유럽 선 지도차 순방.
2000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2001년 대한불교조계종 백담사 기본선원 조실.
(사)대륜불교문화연구원 태고학회에서 3증사로 추대(덕암, 서암, 숭산)
2004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화계사 조실.


숭산 큰스님을 추모하며...........

 

출처:  킥킥.   cafe.daum.net/honggi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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