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준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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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준선생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마지막회] - 기사 일부 내용 발췌 -
신동아 2008.09.01 / 통권 588호(p570~581)
해관 묘역을 내려오다 중간 오른편에 세브란스 3대 교장인 이영준(李榮俊· 1896~1968 묘번 203620)의 묘가 있다. 이영준은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처자식을 둔 28세 나이에 세브란스에 입학했다. 원만한 성격에 지도력을 갖춘 이영준은 당시 학감 오긍선의 눈에 들어 1927년 졸업 후 곧바로 오긍선의 조교로 임용됐고 세브란스 출신 최초(임상)로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피부과 주임교수와 부속병원장을 거쳐 1942년 세브란스 3대 교장이 됐다.
오긍선의 후계자 이영준
당시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제는 미국계 학교를 적산(敵産)으로 간주했고 미국인 교수는 모두 추방했다. 미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고, 총독부의 압박에 학교의 존립이 위태로울 때, 이영준은 능력을 발휘해 여러 민족재산가의 기부를 이끌어내고, 총독부와도 교묘한 교섭을 통해 광복 때까지 학교를 지켜낸 인물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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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빈선생 묘역 바로 뒤에 이영준선생 묘역이 있으며, 2기의 묘역 중에서 좌측 봉분이 이영준선생 묘역입니다. |
그러한 정치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영준은 광복과 동시에 교장을 물러나 정계로 진출했다. 국회의원(4선), 국회부의장, 동아일보 고문 등을 역임하고 1968년 72세를 일기로 이곳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비문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지었고 서예가 정필선이 썼다. 세브란스의 역사를 말하는 많은 사진에서 이영준이 항상 오긍선의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이영준은 고인이 되어서도 오긍선 옆에 잠들었다.
한편, 오긍선과 이영준에 대해 세브란스 교장 시절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특히, 전문성이 부족한 인터넷 위키백과는 오긍선을 적극적 친일파로 묘사한 글과 함께 “오긍선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 최초의 양의사로서 서양의학의 선구자이며 기독교적 양심을 지닌 사회사업가, 또는 기독교와 의술을 출세에 이용한 기회주의적 친일인사라는 이중적인 판단이 상존하고 있다”고 썼다. 이 사전의 집필을 누가 했는지 몰라도, 저술자가 해관의 삶을 개관한 글을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보았다면 친일파 서술에 상투적으로 붙이는 ‘…을 출세에 이용한 기회주의’라는 표현은 할 수 없었을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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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위 해주 최씨는 1950년 서거로 적혀있는데, 묘비에는 합장 여부가 없어서 아마도 우측 봉분이 부인 묘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큰 뉴스요, 주요 고등보통학교 졸업생 명단도 해마다 신문에 실리던 시절, 우리에게 청년교육은 총성 없는 독립운동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이룬 원동력이 되었음은 아무도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해관은 개업보다는 교육에 큰 의미를 두었다. 정치적으로 얽매이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개업의가 됐다면 명예도 지키고 큰돈을 모았을 것이다. 당시 교장을 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윤치호는 1940년 연희전문 교장직을 수락하면서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교장직을 수락해서 속을 끓이게 될 게 뻔하다. 만족시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군당국, 경찰당국, 도청 및 총독부 당국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연희전문 내부에도 달래기가 쉽지 않은 파벌들이 도사리고 있다.”(1940. 12.9 윤치호 일기, 김상태, 역사비평사, 2001)
또 그렇게 어려운 교장직에 있는 오긍선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이 학교는 매년 20만원 정도 적자를 냈다. 하지만 그는 학교와 병원의 책임을 맡기가 무섭게 수지를 맞추는 데 성공했다. 그에게 결점이 있다면 교수로 있는 선교사들을 너무 고압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외국인 그룹 전체가 그의 적이 되고 말았다.” (1939년 2월28일 윤치호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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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뒷편의 비문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찬(撰)하고, 서예가 정필선이 서(書)했다. 묘지 관리번호(203620) |
조선인을 위한 일제 협력
당시 통계를 살펴보면 오긍선과 이영준이 일제에 협력한 배경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성의전 등의 관립 학교에는 조선 학생보다 일본 학생이 더 많았다. 윤치호는 1933년 6월30일의 일기에서 “사범학교는 일본인 80%에 조선인 20%였고, 경성의전은 조선인 20%였던 것이 8%가 만주국 학생에게 할당되어 12%로 더 낮아졌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대 의학부도 비공식적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7:3의 비율로 뽑았다. 이에 반해 세브란스의전은 조선인 학생이 100%였다.
조선인의 고급 인재 교육을 철저히 억제하는 정책하에서 세브란스에 대한 총독부의 접수 시도는 계속됐다. 미국의 지원도 끊긴 상태에서, 두 조선인 교장의 일제에 대한 불가피한 협력이 방패가 돼 조선청년에 대한 의학교육이 계속될 수 있었던 공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사료에 나타난 그들의 친일 흔적을 지적하려면 위와 같은 시대 상황의 인식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
망우리 공원 묘역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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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중랑구 망우동
지하철 7호선 상봉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구리 방향 버스를 타고 망우리 고개 조금 지난 정류장에서 내리게 됩니다.
지나온 고개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있습니다.
이 도로를 따라서 쭉 올라가면 망우리 공원 묘지가 나옵니다.
◀ 안내도 7번 위치에 있는 오긍선선생 묘역 입구 좌측 박승빈선생 묘역 뒷편에 이영준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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