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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중종 24년(1529년)에 선릉참봉, 중종 29년(1534년)에 의금부 도사,
중종 32년(1537년)에 유곡찰방을 지내셨다.
공(公)은 후손이 없어
중형(仲兄) 우후공(虞侯公) 諱 건(騫)의 막내아들인
참판공(參判公) 諱 정언(庭彦)으로 계자(系子)하였다.
2) 묘소(墓所) 및 선적(先蹟)
묘소(墓所) :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천산성 간좌(天山城 艮坐)
내헌공(耐軒公) 諱 연(淵)의 묘(墓)는
원래 함안(咸安)에 있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적(倭賊)이 묘(墓)를 발굴하여
부장품을 훔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자 화(禍)를 피해 현재의 자리로 이장(移葬)하였다.
배 숙부인 창녕조씨 묘(配 淑夫人 昌寧曺氏 墓)
3) 언행록(言行錄)
공(公)이 일찍 한양에서 관직(官職)에 계실 때
당시 김안로(金安老)가 정권(政權)을 쥐고 전횡(專橫)할 때 공(公)이 심(甚)히 미워하다가
관직(官職)을 버리고 낙향(落鄕)하던 중
원벽(院壁)에 김안로(金安老)를 풍자(諷刺) 규탄(糾彈)하는 시(詩)를
다음과 같이 지어 붙이니
뜻있는 선비들이 이를 보고 통쾌히 여겨 암무시(暗霧詩)라 이름 하여 널리 퍼트렸다.
암무만공작세표(暗霧漫空作勢飄)
일고삼장말전소(日高三丈末全消)
불혐원객정의습(不嫌遠客征衣濕)
지공성음폐대소(只恐成陰弊大昭)
어두운 안개가 하늘에 퍼져 그 세(勢)가 휘날리는데
해가 삼장(三丈)이나 되어도 소멸(消滅)치 못하구나.
먼 길 가는 객(客)이 옷 젖는 것은 꺼리지 않건만
다만 그늘이 되어 대명(大明)을 가릴까 두렵구나.
공(公)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왕희지와 황고산(黃孤山)의 필법을 배웠으나 매양 그 필법(筆法)에 미치지 못함에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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