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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가(道家) 내단(內丹)사상, 즉 단학(丹學)의 비조(鼻祖)이며,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 3대 기인으로 불리는 북창 정렴. 그는 상제님께서“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산에 도 닦으러 가서 3일 만에 천하의 모든 일을 알게 됐다고 평하실 만큼 뛰어난 도인(道人)이다. 유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금기시 되던 조선시대에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고, 신선술(神仙術) 수련법을 담은『용호비결』을 저술했으며, ‘용호대사(龍虎大師)’라고도 불렸다. 북창 정렴, 그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심법세계를 알아보자.
배우지 않아도 하늘 아래 모르는 것이 없어
정북창(鄭北窓, 1506∼1549)의 본관은 온양으로 조선조 중종 즉위년(1506년)에 정순붕(1484~1548)과 완산 이씨 사이에 6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를 기반 삼아 우의정까지 출세했던‘을사 삼간(三奸)’중 한 명이고, 모친은 세종의 장형(長兄)인 양녕대군의 증손녀이다.
정북창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아주 뛰어났으며 천문, 지리, 음률, 의약, 수학, 한문, 복서(卜筮) 등 배우지 않아도 어릴 적부터 하늘아래 있는 온갖 학문에 뛰어났으며, 스승 없이 혼자 터득하여 깨쳤다고 전해진다(장유의「북창고옥양선생시집서」中에서 ).
또한 그는 어느 나라 어느 지방 말도 배우지 않고도 듣는 대로 통했다. 14세 때 부친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배운 적도 없는 중국어와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대만) 언어를 구사하여 그곳에 온 외국사절에게『주역』,『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등 어려운 경전(經典)들을 쉽게 가르쳐주어 그들을 놀라게 했다.
이 해(1520년)에 부친 정순붕은‘전주 부윤’에 있다가 면직되는데, 이듬해에는‘종놈처럼 아첨한다’고 하여 관작까지 삭탈 당한다.
1520년부터 1537년까지 17년간, 정북창의 집안은 부친의 면직과 관작 삭탈로 의식이 궁색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워진다. 이때가 정북창의 나이 15세에서 32세에 해당되는데, 그는 이 기간에 과거시험 공부를 단념하고 유학사회에선 잡학으로 치부하는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 등의 학문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부친이 복직된 1537년에 그는 사마시(생원, 진사시험)에 급제한다. 그러나 사마시는 예비시험격인 소과(小科)여서 관직을 받으려면 대과(大科)를 치러야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과거를 치르지 않는다.
그가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급제한 것은 본인의 의도보다는 부모의 강압적 권유와 관직을 얻은 비슷한 연배들의 영향이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사마시 급제이후 과거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렸는데,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유훈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 처함에는 겸손하고 물러남에 힘써서, 고관(高官) 벼슬에 나가지 말고 낮은 지위에 머물 것이다. 혼인은 고귀한 가문에 의탁하지 말 것이며, 때가 화(和)하면 벼슬을 하되, 세상이 어그러지면 임야(林野)에 물러가 힘써 땅을 갈아 자급(自給)할 것이다.”(북창 정렴의「온성세고」유훈中에서)
정북창의 이런 견해는 유교적 처세와도 상통하지만, 17년간의 궁핍했던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부귀와 물욕에 빠지지 않고 주체성을 지키려는 자세로 살려고 했던 것이었다.
조정 출사와 은퇴
정북창이 천문, 지리, 음률, 의약 등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인재로 추천 발탁하여 장악원(掌樂院: 음악,무용 담당청) ‘주부’겸관상감(觀象監: 천문,지리,책력 담당청)과 혜민서(惠民署: 의약,치료 담당청) ‘교수’직을 준다. 그는 또한 의술이 뛰어나고 약리(藥理)에도 정통하여 중종이 위독했을 때 내의원들이 북창을‘명의’라고 천거할 정도였고, 인종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도 그가 직접 진찰하기도 했다.
이렇듯 비상한 재주로 인해 당시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공부방 병풍 위에‘우의정 정북창’이라 써놓았고 3정승 중 한 명으로 이미 마음속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으로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던 인종은 안타깝게도 9개월의 짧은 치세 끝에 문정왕후(13대 명종의 모후)에 의해 독살됨으로써정북창은 큰 뜻을 펼칠 기회가 없어진다.
조정 관직을 역임하고 포천 현감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정북창은 관직에서 물러나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경기도 과천의 청계산과 양주 괘라리(掛蘿里, 현재의 양주시 산북동 일대)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그토록 재주가 뛰어났던 그가 관직을 버리고 은둔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명종실록』,『 조선고금 명현전』,『 용주선생유고』등의 기록을 보면 그 내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북창의 욕심 없는 처세와 달리, 부친 정순붕은 17년간의 경제적, 정신적 고초를 벗어나고자 출세에 대한 야망을 불태운다.
1545년(명종1년), 부친 정순붕과 동생 정현은 작당하여 당시 권력의 횡포를 휘두르며 백성의 고혈을 짜내던 명종의 외척, 윤원형 등의 소윤(小尹) 세력에 붙어 대윤(大尹;인종 외척)과 청렴한 사림파 인물을 모함 하여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이때 정북창은 부친과 동생이 불의한 일로 출세하려는 의도를 알고는 이를 만류하고 자 눈물로써 부친께 간(諫)한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동생(정현)이 몽둥이를 들고 형 북창을 패서 죽이고자 한다.
이 일에 대해 대제학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인『용주선생유고』에는“북창의 대효로도 부친과 동생이 남을 무함(誣陷)하여 출세하려는 사악한 짓을 막을 수 없었다. … 이는‘순(舜)임금의 고사(古事)’와도 비슷하나, 실제는 북창이 순임금보다 더 고통과 어려움이 많았다.”고 적혀 있다.
부친은 비록 불의했으나, 정북창의 효심어린 처신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정북창은 동네에 애경상문(哀慶喪問)이 있으면 가장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음해하여,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 불의에 대해, “고약한 놈, 나쁜 놈”하며 욕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북창은 학식도 많고 명성이 있었기에 자신이 앉아있으면 부친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으니, 가장 먼저 가서 앉아 있다가 가장 나중에 일어나곤 했다.
을사사화의 다음 해(1546년) 정북창은 산속으로 은둔하는데, 출세욕에 빠진 부친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동생이 형을 죽이려고 하는 천륜파괴의 고통스런 상황으로 인해 그는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도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북창은 산속에서 도학, 역학, 수학 등의 학문을 연구하고 신선술을 연마하며 도인(道人)의 삶을 살아간다. 이때 그는 산속에 살면서 한양으로는 머리도 돌리기 싫어 드나드는 대문과 방안의 창문을 모두 북쪽으로만 낸 채 살았다. 북창(北窓)이라는 별호도 이때 생긴 것이라 한다.
도를 닦으며 은둔생활
정북창은 풍채가 학과 같았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서너 말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품 또한 맑고 깨끗했으며, 친구를사귈 때에도 인정(人情)과 도(道)에 바탕을 둔 도반(道伴)으로서 깊이 있는 벗을 사귀었다.
그는 선도(仙道)에 함께 몰두하며 뜻이 통했던 동생 정작과 박지화 그리고 불승(佛僧)들과 만나서 산수를 즐기며, 유(儒), 불(佛), 선(仙)에 대해 도담(道談)을 나누면서 삼교(三敎)에 두루 통했다고 한다. 이들과 정북창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고, 상대방의 사상을 인정해 주었던 진정한 도반(道伴)들이었다. 박지화(1513~1592)는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운 제자인데 후에 정작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정북창은 시도 아주 빼어났는데, 시 평론가 홍만종(1643~1725)은‘정작, 박지화, 정북창 중에 북창의 시가 가장 뛰어났고 당시(唐詩)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했다.
정북창은 선도(仙道)에 밝았던 도인 유학자 서경덕(1489~1546)을 존경하며 스승처럼 여긴다. 화담 서경덕은 어릴 적 천자문을 공부할 때, ‘하늘 천(天)’자에 문득 크게 깨우치고는‘천(天)’자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글자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덕은 소강절의『황극경세서』에 나오는‘우주일년의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선후천 시간대’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전해질만큼 수리학(數理學)과 역학(易學)에 아주 밝았던 도인이었다.
선도에 몰두했던 정북창도 말년에는‘이유 없이 몸이 마르는 병’을 앓았는데, 이 병은 특별한 증세없이 심신이 고달플 때 생긴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울화병’으로 불의했던 부친과 다투다가 근심으로 얻은 병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연단술(煉丹術)로써 스스로 치료했다. 그 방법은‘폐기-현빈일규-태식-주천화후-결태’의 신선수련법으로, 효과가 뛰어나서 한 달 정도만 하면 백가지 병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의『용호비결』에 기록하고 있다.
“폐기(閉氣)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책상다리로 단정히 앉아서 위 눈꺼풀을 내려뜨려 내려다보고 눈으로는 코끝을대하고, 코로는배꼽둘레를대하고숨을들이마시기를 오래 계속하고 내쉬기를 조금씩 하여, 늘 신기(神氣)가 배꼽아래 한 치 세 푼에 있는 단전에 머물게 하는데, 그것이 현빈일규(玄牝一竅)이며, 그 다음에 태식(胎息)이 되고, 태식에서 주천화후(周天火候)가 되고, 주천화후에서결태(結胎)가된다.”([용호비결] 中에서)
조선시대 단학의 중시조(中始祖)
정북창의 학문은 처음에는 유학으로 출발했지만 어릴 적부터 남달리 천문, 지리, 의학 등 잡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말년에 은둔하면서는 도학, 수학, 역학 등과 신선수련법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스승 없이 모든 이치를 스스로 터득했고, 제자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손 또한 손자 대에 가서 대(代)가 끊기어 양자를 받아들인다.
그는 유(儒),불(佛),선(仙) 3교에 두루 통했는데, 삼교(三敎)를 평하기를“유학은 인륜, 불·선은 견성(見性)과 명심(明心)을 주로 하여 셋은 다르지만 불·선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허목의「북창선생행적」中에서)고 했다.
정북창에게 스승이 없었다는 기록은 조선의 도가열전(道家列傳)인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조금 달라진다. 이 책에는 그가 말년에‘승(僧) 대주(大珠)’에게 도를 전수 받았다고 전해져온다.
우리나라의 선맥(仙脈)을 살펴보면, 조선조에 와서 거의 끊어질 뻔했던 도가의 맥(脈)이 김시습에 의해 다시 계승된다.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세상을 등졌던‘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뛰어난 문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진면 모는 오히려‘도인(道人)’과‘생불(生佛)’에 가깝다. 이율곡이 쓴『김시습전』에 의하면, 김시습이 죽은 지 3년 후 절 옆에 묻힌 그의 시신 관 뚜껑을 열어보고 불승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시신이 썩지 않았고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생불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김시습을 시조로 조선의 선도(仙道)는‘김시습→정희량→대주(승려)→정북창, 정작’으로 이어지는데, 정북창은 조선시대 선도에서‘단학의 중시조(中始祖)’또는‘비조(鼻祖)’로 평가받고 있다.
정북창의 도력과 기국
정북창은 앞일을 예견했고, 역술(易術)과 수학에 능통하여 사후 수십년 후까지도 궁중에서 그의 천재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지 46년이 지난 1595년, 선조와 이항복, 정경세 등이 별전(別殿)에서『주역』‘건괘(乾卦)’를 강론한 자리에서“북창은 타심통지술(他心通之術: 타인의 마음을 읽는 도술)을 터득했으며, 의술과 점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라고 거론되었다. 그리고 1601년에도 궁중 별전에서『주역』을 강론하다가‘수학에 정통한 인물’로 화제가 미치자, “북창은 서경덕에 못지않게 수학에 뛰어났으며, 모든 일에 있어 앞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거론되었다.
그는 1659년 노봉서원에 봉안되었다.
정북창은 정통유학자라기보다는 신선수련법을 행했던 도가적 인물에 가까웠기에, 그에 관해 신비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총명함이 남달랐던 정북창은 어릴 적부터 신명(神明)과도 통할 수 있었다. 가까이는 다른 집의 방안에서부터 멀리는 이민족의 풍속과 기질까지 다 알았으며, 개 짖는 소리며 백로 울음소리 등도 귀신처럼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가 산속에서 살 적에 새와 짐승소리를 모두 알아듣고는“아무개 집에 잔치가 벌어졌다”,“ 아무개 집에는 초상이 났다”고 말하면 틀림없이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정북창의 이러한 모습은『증산도 도전』에 어린 소녀 김호연 성도가 신안이 열려 사물의 모습을 훤히 꿰뚫어 보고 짐승의 소리를 모두 알아듣는 광경과 유사하다.
“호연이 수도 공부를 하매 신안(神眼)이 열려서 보니 다른 집의 방 안 광경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제사 지내는 모습, 청소하는 모습, 내외가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 등이 마치 곁에서 보는 듯 세세하게 보이더라.
또 구릿골에 사람이 오면 주머니에 돈이 얼마 든 것, ‘내놓을까 말까.’하며 아까워서 벌벌 떠는 것이 다 보이고 까치, 까마귀 등 새가 날아와‘내 일 어디서 누가 오는데 이러저러하다.’고 일러 주는 것을 다 알아들으니 모르는 것이 없더라. (道典3:150:1∼4)
또 한 번은 정북창의 절친한 친구가 중병이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부친이 와서 살려주기를 간청했다. 정북창은 친구의 천명이 다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3대 독자인 아들을 꼭 살려달라고 하소연하자 한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아무 날 저녁에 아무 산에 올라가면 산 위에서 푸른 도포와 노란 도포를 입은 두 노인이 바둑을 두며 놀고 있을 테니, 바둑이 끝날 무렵에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지성으로 권하며 사연을 고하면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일러준다. 이리하여 정북창은 노인들을 통해 자신의 수명에서 10년을 떼어 친구의 수명을 이어주었다는 신비한 일화도 전해진다.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사물을 관찰하면 3일 만에 생각한 것을 환하게 깨우치고, 백리 밖의 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알아맞히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예견했던, 그야말로 뛰어난 도인이었던 용호대사 정북창! 산속에서 도반들과 함께 산과 호수, 계곡을 거닐며 바람과 달을 벗 삼아 신선술을 연마했던 정북창은‘자만(自挽)’이란 시(詩)를 남기며 44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一生讀破萬卷書, 일생동안만권의책을독파하고
一日飮盡天鍾酒. 하루에천잔 술을마시었네.
高談伏羲以上事, 복희씨이전일을고고하게담론하고
俗說往來不掛口. 속설은입에도담지않았네.
顔子三十稱亞聖, 안자는 삼십을 살아도 아성이라 불리
었는데,
先生之壽何其久. 선생의나이는어찌그리길더뇨?
상제님께서는“천지의 조화로도 풍우(風雨)를 지으려면 무한한 공부를 들이나니, 공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하였느니라.”(道典2:34:2∼3)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천지에 정성을 들여야만 도통할 수 있다는 뜻을 말씀하심과 함께 정북창의 천재성을 칭찬하신 것이라 생각해 볼수 있다.
또 상제님께서는 만국대장 박공우 성도의 기국을 시험하시면서“용호대사(龍虎大師)의 기운을 공우에게 붙여 보았더니 그 기운이 적도다.”(道典4:88:12)고 하신다.
천하의 정북창도 박공우 성도에 비하면 오히려 기운이 작다는 말씀이시다. 상제님께서는 박공우 성도를 지구촌의 인종씨를 추리는 가을개벽의 대병겁기에 신명계의 심판대장으로 임명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상제님을 대행하는 일꾼에 의해 인사로 성사된다.(道典5:256:5 참조)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 장차 가을개벽의 의통성업을 집행할 우리 일꾼들의 기국과 도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그 경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정북창과 박공우 성
도를 통해 우리 일꾼들에게 천지의 무한한 기운을 내려받을 수 있는 심법세계를 열어주고 계신 것이리라.
궁을가(弓乙歌)
미래의 일도 훤히 예견했던 정북창은 장차 인류에게 닥칠 천지 변국의 대환란인 개벽에 대해 가사형식의 비결인‘궁을가’를 남겨 후세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이 가사에는 개벽시대에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와 개벽 이후 새로운 도통 문명시대가 열리게 됨을 전해주고 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이다.
“애고 애고 저 백성아. 간단 말이 어인 말고. 고국본토 다 버리고 어느 강산 가려는가. … 부모처자 다 버리고 길지(吉地)찾는 저 백성아. 자고(自古) 창생 피난하여 기만명(其萬名)이 살았던가. … 남천북천(南遷北遷) 어인 일고. … 차시지화(此時之禍) 궁궁을을 용화(龍華)로다. …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 사명당(四明堂)이 갱생하니 승평(乘平)시대 불원이라. … 창생도탄 없어진다. 포덕포화(布德布化)하는 때라. … 대성지화(大聖之化) 돌아오니 궁을노래 불러보자. … 태극(太極)궁을 신명(神明)이라. 궁을궁을 성도(成道)로다. …”
앞으로 지구의 남북극이 이동하는(남천북천) 천지대개벽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때는 조국을 떠나 피난할 생각을 하지 말고 도통군자가 다시 나와서 창생의 도탄이 없어지는 인류낙원의 태평시대가 오는 것이니, 대성인(大聖人)인‘궁을(=태극신명)’의 도(道)를 쫓아야만 자기생명을 구원받고 도통할 수 있음을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궁을’은 우주 절대자 하나님의 의통성업(醫統聖業)을 인사(人事)로서 매듭짓는‘천하의 주인[진주眞主]’을말한다.
글) 진성조
북창(北窓) 정렴선생은 중종 원년(1506)에 출생했다.
자는 사결이고 호가 북창이며 본관 온양이며 명종초에 정승을 지낸 순붕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 32년)에 사마시에 합격을 하고 나서 과거로 진출하기를
그만 두었으며 음률, 의약에 정통해서 장악원 주박 관상감 혜민서 교수를 역임했다.
외국어에도 능통하였고 여러 가지 이적을 남겼으며 진인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유불선에 박통한 바 일찍이 삼교에 대해 논하되
『성학은 인륜을 주로 하며 선불은 명심과 견성을 주로 한다.
이것은 삼교의 차이점인데 선불은 대동소이하다.』고 하였다.
어릴 적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과 통할 줄 알았다고 한다.
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소한 일에서 멀리는 해외의
일과 심지어는 개소리, 닭소리, 이방인들의 말까지도 잘 알아들었다고 한다.
14세에 중국을 관광 하였는데 이상한 기운을 바라보던 중국에 온 유규 사람이
북창을 보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운명을 점쳤더니 아무 날에
중국에 들어가면 어떤 이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더니 그대가 참으로 그 사람인
가 봅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 사람에게 유구말로 주역을 강의하였다.
외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앞을 다투어 찾아왔다.
북창이 외국의 말로 등대 하니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이상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북창을 천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이국 말을 다 할 수 있는 비법을
물으니 북창은 『내가 듣고서 해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지 오래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 외에도 북창에 관한 재미있는 몇 가지 설화가 있다.
짐승소리를 듣는 지음설화, 연명설화, 수도설화 등이 그것이다.
정북창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또, 대낮에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이 지지한 천재요,
그림자 없는 귀신이라고 세평을 들을 만하였다.
실제로 북창이 중국에 갔을 때 봉천천에서 중국의 도사를 만났는데
『우리나라는 삼신산이 있어서 낮에도 도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항상 볼 수
있으니 무엇이 귀하겠는가?』하며 신선이 되는 단계를 설명하니까 중국도사가
슬그머니 피해버렸다.
그가 금강에 올라 휘파람을 불었더니 바위와 골짜기가 진동하고 중들은
피리소리로 여겼다고 한다.
이상은 해도이적에 보인 설화이며 현전하는 구전설화는 다음과 같다.
① 사촌이 죽은 아버지의 묘자리를 정북창에게 부탁하여 구하여준 묘자리가 진흙
밭으로 물구덩인 지라 돌을 넣고 매장하면서 사촌형이 정북창에게 나쁜 터라고
원망하였는데 사실은 그곳이 옥관자가 여럿 나오는 명당 터였다.
돌을 넣은 수가 옥관자를 달 출세하는 후손이 태어날 숫자였던 것이다.
② 산중을 가다가 까마귀가 『대육 대육』하고 우는 소리를 듣고 시신을 찾았으나
오히려 살인자로 누명을 쓰고 죽게 될 때 새소리를 알아듣는 지음이 있다는
증거로 재판관인 원님이 이 품속에 감추어 둔 제비의 울음소리를 해석해서
살아났다. 지음은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라 하여 왕이 정북창을 잡아죽이려고 하면
서품속에 든 산 제비소리를 알아듣는지 묻자 『어미 제비가 임금님이 잡으신
새끼 제비를 살려달라고 하면서 피불용, 육불용, 골불용이라 웁니다.』
라고 말하니까 감탄하면서 정북창을 살려주었다.
③ 친구인 윤두수 이야기로 그가 40세 밖에 못 살 단명할 팔자인 것을 알고
일러주었었는데 신선이 그렇다면 이 비밀을 알려준 정북창을 감수해서 윤두수를
연명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윤두수는 장수하고 정북창은 단명하였다.
④ 정북창은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 졸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계수의 아들인
조카는 사랑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 셋은 사랑하지 않아서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
얼마 뒤에 아들 삼형제가 한 날 한시에 죽어 슬피 우는데 자세히 보니 정북창이
혼인하기 전에 죽인 구렁이가 복수하려고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 내용을 이미 알아챈 정북창이 자기 자식을 미워하였던 것이다.
위의 문헌과 구전설화를 통하여 보면 무불통지한 천재요, 천문지리와 동물과
귀신의 세계까지 이해를 한 기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설화는 사실성이 있으면서
인구에 회자될 자격이 충북한 설화라 할 것이다.
19세 때 국자 시에 뽑히고도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양주에 살 곳을 정하고
있었는데 유불도 삼교에 조예가 깊었다. 포천현감을 지내다가 사임하고 경주
의 청계사 과천의 관악산을 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북창은 의학과 도교수련에도 관심이 깊었다. 수련적인 도교를 다루는데 있어 정렴,
정작형제를 잊을 수 없다. 북창은 도교수련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그의 수련법은
고답 막연한 것이 아니고 인체의 건강을 고려하는 입장이 견지 되어 있어 의학과
직결됐다. 그의 아우 정작은 호를 고옥이라고 하였는데 시서화에 뛰어난 재주를
들어냈으며 형으로부터 수련법을 배우고 의약에도 밝았으며 동의보감 편찬에도
참여했다. 북창과 고옥형제는 한국의학에 도교적인 체계를 갖게 한 인물이다.
정렴은 「용호비결(북창비결)」을 남겼는데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그의 비결은 『폐기, 태식, 주천화후(閉氣, 胎息, 周天火候)』 세 가지로 요약되어있
다. 그에 따르면 단을 수련하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데 관계서가 너무 많고
말들이 황홀하여 알아듣기 어려워서 고금의 배우는 자들의 손을 델 방도를 몰라
장생을 얻으려다 도리어 요절을 하는 자가 많다. 정렴은 그의 용호비결 제 1장에서
단의 수련하는 방법을 설명해 나가는 도중에 이런 말을 했다.
『풍사의 질환은 혈맥 속에 숨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므로 그 역시 몸을
죽이는 도끼임을 알지 못한다. 오래되어 경락에 옮겨가고 고황 속에 깊이 들어간
연후에 의사를 찾아가 약을 쓴다 해도 이미 늦는다. 정기와 풍사는 빙판과 같아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정기가 머물러 있으며 풍아는 절로 달아나고,
백맥이 절로 유창하고 심관이 절로 승강 하는데 질병이 어디로 해서 생겨나겠는가.
조금만 정근하면 반드시 수명을 연장시켜 죽는 날을 뒤로 물리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질병이 범접하지 못하게 미리부터 준비를 갖추는 일종의 건강법 내
지는 양생법을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양생관은 더욱 확대되고 더욱 세견되어서 조선시대의 의학에 기본체계를
확립 시키기에 이르렀고 나아가서는 의학의 본 뜻을 해명하는 데에 전개되었다.
북창은 술을 즐기어 말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언젠가 말하기를
『성인은 인륜을 중하게 여기건대 석가와 노자는 마음을 닦아 견성하는 것만 알고
인사의 학문은 빠뜨렸다. 아마 서로 약간 다른 것이 있는가 보다』라고 하였다.
한때는 탄식하기를 『말하여도 믿어 주지 않고 향하여도 알아주지 않는다.』하고는
마음껏 노래 부르면서 스스로 자기를 희롱하며 방탕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러면서도 보통사람보다 남다른 점이 있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한마디도 공자의
학에서 벗어난 말이 없으니 아마 그 깨달음은 신과 같고 그 행동은 노자와 같았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한결같이 공자로 종(宗)을 삼을 것이라 했다.
숨어서 살면서 세상과는 발길을 끊고 침묵을 지킨 지 10년 만에 세상을 마치니
명종 4년(1549), 나이 44세였다. 그가 일상 경험한 처방을 모아 편찬한 것이라는
「정북창방」이 있었으나 유실되었다. 이 책은 양예수가 지은「의림촬요」에
인용되었다. 북창은 스승도 없으며 또한 제자도 없었다.
양주 사정인에 북창의 무덤이 있다.
을사사화(乙巳士化) 때 그의 부친의 소행을 힘써 감에도 듣지 않으매 은신해 있다가
이내 세상을 떠나니 나이 44세였다. 죽음에 이르러 한편의 시 「자만」을 남기기도
했다.『일생에 만 권의 책을 독파하고, 하루에 천종(天種)의 술을 마셨노라.
복희씨 이상의 일을 고담(高談)하매 용세의 일은 전부터 입에 올리지 않았노라.
안회도 심십에 아성의 말을 들었는데 선생의 수명은 어찌 그리 지리한가.
(一生讀破萬卷書 一日飮盡千鍾酒 高談伏義以上事 俗說從來不掛
口 顔回三十稱亞聖 先生之壽何其久)』
북창의 시문은 그의 청허한 인품을 따라 이처럼 고원허다.
북창시집에는 모두 삼삽제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참고서적 : 한국의 도교사상(차주환薯), 해동전도록(이종은薯), 포천군지,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문연)>
금산사가(金山寺歌)
-정북창(1506∼1549)-
천고춘추 아방궁은 만방일월 동작대라 만국활계 남조선은
청풍명월 금산사라 여보시오 세상사람 금산사가 들어보소
홍몽천지 지난후에 몇만년이 되었는고 승지강산 갱답하니
처처마다 절이로다 명산대천 찾아가닌 기묘한데 절이로다
좌우산세 살펴보니 곤륜산이 조종이라 그산맥을 살펴보니
태산일맥 장하도다 노국으로 들어가서 칠십이봉 생겨나니
공자님이 나신후에 칠십이현 나셨도다 서역이라 인도국에
일지맥이 들어가서 령산일봉 생겨나서 석가세존 탄생하니
불도교가 성했도다 그산정기 장하도다 오백봉이 생겨나서
오백라한 도통이라 또한편을 살펴보니 안동으로 연맥되어
몽고로 들어가서 장백산이 생겨나고 또한가지 백두산은
금강산이 생겼구나 그산정기 장하도다 일만이천 봉이
생겼구나 동악으로 솟아나서 도덕군자 기상이라 소태백이
중령되어 조령산이 생겼구나 조령으로 뺏어나서 보은속리
장봉되어 기운좇아 솟아있고 명승지가 되었구나 청주청전
들어가서 화양건곤 장히좋다 무이령산 그아닌가 춘추제행
유림들은 한국문명 열어놓고 일년일차 해합하야 청가성이
장하도다 조령으로 일지맥은 추풍령이 생겨나서 금신사명
추풍이라 추풍이 불어와서 마니산이 생겼으니 건들건들
추풍이라 마니산세 둘러보니 제세영웅 나리로다 경상도라
지리산은 도덕군자 기초로다 남지북해 열어놓니 천지만물
장관일세 삼팔목의 기운으로 생동산이 생겼구나 청의홍의
이산되니 위인상의 기상이라 의령으로 내려가서 회문산이
생겼구나 회문산의 기상으로 도덕동이 생겨났고 좌우산세
기장하다 우편으로 부봉이요 좌편으로 도덕동은 도덕군자
몇몇인가 천자산과 천주산은 일월정기 솟아있고 그산위에
제일봉은 시루산이 되었구나 천자산과 무령산은 대성인이
나리로다 증산일맥 내려와서 부산땅이 생겼구나 용두산하
보수동은 이십일자 지어내니 합덕궁이 분명하다 산림편이
자리로다 허튼정기 모여들어 삼천대지 되리로다 절로절로
되는구나 무궁무궁 이치로다 주인공을 찾으려고 상제님이
하강하니 천지공사 하실려고 사해팔방 다니시니 전라도라
구리봉에 청풍하고 앉아보니 금이생겨 산이되어 천하대지
거계로다 여여히 생각하야 글을한수 지어내니 만국활계
남조선은 청풍명월 금산사라 문명개화 삼천국은 도술운통
구만리라 용화동이 생겨나서 용화세계 되리로다 지중보화
쌓였으니 후천후생 복록이라 이복록을 전할사람 태을진인
분명하다 일승일패 국가흥은 변역수로 정했으니 하운도수
마련하야 해원문이 열렸도다 천하장사 초패왕은 후천운이
열렸도다 삼생으로 오신성군 태을진인 분명하다 기유도강
하신군은 주청림에 소월이라 영농땅 정하실때 자사의풍
도리로다 역발산 크거니와 지모도량 조을시구 천상옥경
들어가서 후천도덕 빌어내어 인간공덕 조을시구 오만년지
운수로다 태을성군 조림하니 십오진주 누구신고 갑오을미
사중금은 금생수로 배합이라 십이월에 오신성군 을미년에
탄생하니 사시사절 기운받아 동청룡지 운이로다 천지만물
정했으니 음양이치 없을손가 경오신미 로방토는 토생금이
상생이라 황화절에 오신상제 신미년에 탄생이라 구생구변
정좌로다 구십입중 되었으니 남이화가 되리로다 오십토로
용사하니 황제국이 분명하다 미금미토 탄생하니 금화이생
일체로다 신미년에 산을보니 금화이생 가지로다 을미년에
산을보니 금화이생 가지로다 인간복록 떡시루는 상제님의
떡시루요 억만대중 주용기는 가가호호 밥솥이라 인인가가
솥을쓰니 천하지기 대기로다 인간복록 떡시루는 솥이라야
용사하네 이를두고 일러두면 시루솥이 배합하니 구인종어
양백이라 천지현황 살펴보니 천하제일 금산사는 임자있는
절이로다 이절건축 누가했노 진표율사 조작이라 장육금신
미륵불은 진표율사 소작이라 천지금토 되었으니 극락건축
무궁하다 무궁대도 지나가도 후천불이 다시오니 금불일차
입화하면 후천불이 주임이라 진표율사 거동보소 삼이화로
정신삼아 육장금신 시봉할때 지금지한 무삼일고 수화상생
시키시니 무궁한 조화로다 이칠화로 뭉친몸이 무성무성
가지로다 부금냉금 이라하고 종금자가 생이로다 금신도덕
분명하다 궁을궁을 찾아보소 천황지황 인황후에 금산가가
제일이라 산도배합 물도배합 신인이도 상성이라 대성인이
영을주워 덕화창생 구제할때 위민지 부모로다 하루바삐
찾아보소 천장길방 하였으니 길방수를 찾아보소 월수궁에
감긴조개 열고닫고 개합하니 육육이삼 십육하니 삼십육궁
그아닌가 일년삼백 육십일에 푸를청자 으뜸일세 청자궁을
모르거든 초전명을 찾아보소 초전에 켜는곡조 양산도가
분명하다 삼칠건약 캐어내어 만병통치 신약이라 동서남북
불변해서 길열어 줄이 뉘있는고 청학동의 신동들이
안내자로 산재하여 도덕가로 살펴보니 다행이나 건질려고
청학노래 불러내어 시구시구 조을시구 정정자로 노를다려
구정팔정 십십교통 길을내어 이리절리 짐을놓아 정도로
길을내어 사사체 장하리다 산도인 을시구 보은속리
사정팔항도 세계일등 금산사는 태을성이 비쳤도다
금산사에 가신분은 주인찾아 인사하소 아무리 갈지라도
불성이면 무용이라 성심으로 찾아보소 후일지사 태평이라
태평가를 불러보소 만국유람 하여보소 청풍명월 좋은뜻은
구월금풍 가절이라 달도발고 좋은때에 시루뛰고 바로뛰어
금산사를 노래하니 금산사가 금산이지 도술운통 구만리는
지재일년 십이월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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