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성의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 여우주연상을 단숨에 거며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 전과자와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오아시스'를 필자는 두 번 봤다. 그러나 두 번 다 느낌이 같지는 않았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전과자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외와 천대를 받아가며 살아가는 중증 장애인을 인물로 설정해, 동병상련, 내지는 상처 입은 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그렸다는 데에는 공감을 한다. 이 영화는 지나치게 리얼리즘적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겨울에 주인공 홍종두(설경구 분)가 코를 훌쩍거리면서 반팔차림으로 감옥에서 출소한다. 그를 마중 나온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자신의 어머니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기가 죽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제멋대로다.
일년 반만에 찾아간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그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단다. 그는 두부와 우유를 어느 가게 주인한테서 얻어먹고, 배가 고파도 밥 한끼 사먹을 돈이 없어서 동생 회사근처까지 와 어슬렁거리지만 동생은 그를 만나주지 않는다. 철저히 버림받은 인생이다.
결국 파출소로 다시 끌러가 겨우 동생을 만나게 되지만 동생은 그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형과 형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눈치없이 그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반가워 희희낙락한다.
종두는 과일바구니를 들고 자신이 뺑소니 사고를 내서 죽인 환경미화원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건 사실 그의 형이 낸 사고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는 뺑소니 사고 가해자가 되어 징역을 살고 어제 출소했다. 마침 피해자의 집은 이삿짐을 옮기느라 분주하다. 집안에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겨우 앉아 있는 여자 하나가 있다. 바로 그의 운명의 여자 한공주(문소리 분)다.
그녀는 손거울을 천장에 요리조리 비추는 장난을 치며 혼자 놀고 있다. 거울에 의해 반사되는 빛의 그림자를 그녀는 방안을 날아다니는 새로, 또는 나비로 생각한다.
그녀는 처음 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도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히죽히죽 웃으며 반기는 듯 하다. 말이 좋아 순수지, 가히 백치 아다다 수준이다.
그러나 베란다에 걸러 있는 흰 원피스는 그녀가 여자임을 암시해준다.
공주는 오빠와 새언니가 새 집으로 이사를 간 빈집에서 이제부터 혼자 살아야 한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뿐이다.
종두는 그 다음날 공주의 집에 꽃을 사들고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공주를 강간하려 한다. 제 몸 하나 가눌 수 없는 나약한 공주로서는 기절이 강간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기절한 공주를 보고 종두는 놀라 그녀를 깨우려고 안간힘을 쓰다 겁에 질러 그대로 도망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녀의 집 거실에서 옆집 여자가 사내와 성행위를 하는 걸 본 공주는, 범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종두가 주고 간 명함을 보고 그에게 전화를 한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시작된다.
한가지 의아한 것은, 공주가 정말 지능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외롭다고 해도 그레게 전화를 했겠느냐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전화를 해 집으로 불러들이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흔히 뇌성마비 장애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육체만 불편할 뿐, 뇌 기능은 지극히 정상인 부류와 다른 부류는 장애의 정도가 심해 뇌까지 손상되어 학습능력이 전혀 없는 부류이다.
그런데 '오아시스'의 한공주는 어떤 장면에서는 전자에 속하다가도 또 다른 장면에서는 백치 아다다처럼 후자에 속한다.
즉 고급레스토랑에서 출입을 거절당하자 분개한 종두를 말리며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 똑똑한 공주, 그를 사랑하면서부터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온갖 아름다운 상상을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지능지수를 지닌 공주가 자기를 막무가내로 겁탈하려 하고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친 자에게 왜 그리 처음부터 너그러웠을까. 왜 그리 마음의 문을 쉽게 열었을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첫눈에 필링이라도 통해서였을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리얼리즘적 성격을 잃는 것이 된다.
방안에 갇혀 살아온 공주에게 남자라고는 아버지와 오빠가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에 아무도 없는 집에 처음 보는 남자가 침입했을 경우, 놀라고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공주는 백치 아다다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 몸을 허락한 그가 강간범으로 몰러 징역을 살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만난지 얼마 안되는 종두가 알아듣는 말을 왜 그녀의 오빠와 새언니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서에서는 못들은 척 해 종두의 가족에게 돈이라도 뜯어내려는 속셈이었을까.
대부분 아무리 언어장애가 심해도 자신의 가족들과는 의사소통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주가 정상적인 지능을 가졌다면, 충분히 종두에 대한 오해도 풀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글을 쓰거나 말은 할 수 없다 해도, 손짓으로는 의사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벽에 몸을 부딪치는 걸로 종두의 결백을 표현하려 한다. 그것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더 이상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방만 쓸고 닦으며 그의 출소날을 기다린다. 너무 억지스럽지 않은가.
'오아시스'는 곳곳에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장애인은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또한 외롭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인생이기 때문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거라는 생각, 혹은 의사표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방어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가 된다. 세상의 모든 장애인이 다 한공주 같지는 않음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공주가 몸은 비록 불편하지만,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래도 자기 아버지를 죽인 남자를 사랑했을까.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자기를 강간하려 바지를 벗은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제아무리 외로워도 감히 그에게 전화를 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여동생의 장애를 이용해먹는 오빠를 증오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까.
'오아시스'가 진정한 장애인 영화라면, 많은 장애인이 영화를 보고 나서 희망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이 영화를 보고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는 반응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은 나라에서 '오아시스'는 장애인을 잘 알지 못하는 비장애인들에게 잘못된 편견을 한층 더 부추길 수 있는 소지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