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과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 (계 2:8-11)
이 시간에는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1. 본문 초두에 “서머나 교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서머나”라는 지역은 소 아시아 서해안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140리(57km) 지경에 있는 상업 도시였습니다.
2) 그 곳에 교회가 설립된 경위는 확실한 문헌이 없어서 알 수가 없으나 소 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 중 하나로, 역경 중에서 신앙 생활을 하며 칭찬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3)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그 교회에 말씀을 주실 당시 그 교회는 많은 핍박으로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책망 받음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의 10대 박해(54-305) 중 2대, 3대 박해(도미시안, 트라야노,81-117년)를 받던 어간이었고, 또 기독교를 핍박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정치적 세력과 결탁하여 정치 사회적으로 오는 화근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어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4) 본문 성경이 기록된지 약 50년 후의 일이지만 서머나 교회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로 역사에 장식되었습니다. 주후 156년에 순교한 서머나 교회의 “폴리갑”이라는 감독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86세에 화형으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가 서머나에서 12번째의 순교자라고 하니 그 이전의 핍박받은 정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5) 폴리갑 감독의 순교 사화는 저희들에게 감명 깊은 내용을 전하여 줍니다. 폴리갑은 화형에 처해지기 전에 먼저 나이 10여세의 소년 “챠만익”을 맹수에게 던져 뜯기게 하였는데, 그는 믿음으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감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핍박자들은 “이것이 폴리갑 감독의 유혹과 설득에 의함이라”고 하면서 86세의 폴리갑을 죄인처럼 심문하며 “이제라도 살려 줄 것이니 예수를 저주하라”고 할 때 그는 말하기를 “내가 86년간 주를 따랐으나 주께서 나를 해롭게 하신 적이 없거늘 내가 어찌 나의 왕, 나의 주를 모독하리요” 하니 재판관이 더 듣지 않고 황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러자 폴리갑은 또 말하기를 “금세의 일시적인 불보다 내세의 영원한 불이 더 두려우니 속히 결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형리가 그 몸에 불을 붙이는데 화염이 그를 뒤덮으나 그 몸에 불이 붙지 않아서 결국은 칼로 그 몸을 쳐서 분소(焚燒)시켰다고 합니다. 또 그때에 빌라델비아 교인 11명도 함께 화형을 받으면서 찬송하며 장엄하게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2. 이런 교회에 주님이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
1) 말씀 주시는 예수님의 신분을 알리시되 “처음이며 나중이며 죽었다 살아나신 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분으로 영원히 살아계셔서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을 믿게 하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도 서머나 교회 성도들처럼 핍박을 받고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살아 계신 것을 보고 핍박과 환난이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요 거룩하신 분이지만 예수님도 핍박을 받으셨고 핍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영원히 계시고 공의롭게 끝을 맺는 심판자이심을 깨달아서 주님을 인하여 핍박받는 성도가 큰 안위를 받고 희망을 가지라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2) 모든 실상을 아시는 주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형편을 잘 아신다”고 하신 것처럼 서머나 교회의 형편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모든 성도들의 ① 환난도 아시고, ② 궁핍도 아시며, ③ 그러나 실상 부요한 것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환난은 외부로부터 당하는 고난이고, 궁핍은 핍박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물질적 타격이요, “실상 부요한 자”라는 것은 겉으로는 고난스러운 것 같으나 신앙적으로, 영적으로는 핍박을 견딜만큼 믿음이 오히려 크게 부요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또 ④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훼방이 어떠하다는 것도 주님은 아시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회”라고 밝히신 것입니다(고후6:10). 왜 자칭 유대인이라는 자들이 사단의 회일까요 ? ① 자칭이란 말 속에 외식과 거짓이 있고, ② 유대인이란 우월감을 갖는 교만이 있으며, ③ 그들이 교회와 성도를 훼방하니 사단의 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오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이기고 실상 부요한 생활을 한 것처럼 저희들도 신앙 생활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나 가난 정도를 의연하게 이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가난을 각오하고 예수믿으려고 한다면 예수 못 믿을 자가 없고 또 가난해 지지도 않을 것이며 또 죽음을 각오하고 믿는다면 역시 더 잘 믿고 형통하기도 하며 오히려 영생과 상급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3) 이상과 같은 형편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권면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①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심있는 성도가 핍박을 받고 화형당하는 것을 볼 때 자기들이 받을 환난을 예측하며 두려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장차 받을 고난이 또 있지만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② 미래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계속 핍박당할 일을 아시고 예고해 주셨으니 그것이 곧 10절 말씀의 “장차 너희 중에 또 몇 사람을 옥에 던져 10일 동안 시험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10일이란 길지 않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환난은 결코 길지 않다는 것을 아셔서 인내로 대비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③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충성의 방법과 목표를 “죽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죽도록”이란 말씀은 “죽을 때까지 하라”는 시간의 한정만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저희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죽을 때까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 정년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으니까 정년제를 실시하면 안된다고도 합니다. 죽을 때까지 충성해야 하니까요.....그러나 이 “죽도록”이라는 말씀은 충성의 시한부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충성의 방법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를 죽게 하는 방법으로 또는 자기를 쇠하게 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망하고 희생하게 하는 방법으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충성에 개인적 이기주의가 따르면 감히 충성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또는 밀 알처럼 희생과 죽음을 당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조건적으로 충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받기 위하여 충성하는 것입니다. 복이란 것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복인데 그런 것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현실적인 것만 복으로 여겨서 현실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충성하는 것은 진정한 충성이 아닐 것입니다.
④ 예수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약속하셨습니다. 현실 상급을 바라며 충성한다면 기복주의 신앙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내세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마25:21에 보시면 “적은 일에 충성하였어도 많은 것을 더하여 주신다” 하셨는데, 죽도록 충성한 자의 받을 상급이야 더 크지 않겠습니까 ? 생명의 면류관이란 승리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칭찬이요 영광을 의미합니다.
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아무나 듣지 못합니다. 특히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는 성도는 이런 말씀이 자기의 말씀으로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받을 자에게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시고(잠20:12) 또 “귀를 깨우치사 알아듣게 하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사50:4-5,행16:14). 설교를 모든 성도가 다 의미 있게 받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⑥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하셨으니, 첫째 사망은 영과 육의 분리 즉, 죽음을 뜻하므로, 둘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승리자만 그 곳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계 2:10)
예수님께서는 많은 환난을 당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충성은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임을 말씀하셨고, 충성의 목표는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죽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을 잘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하늘의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충성을 잘 하시려면,
1.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셔야 하겠습니다. 종이 주인의 뜻을 모르면 충성할 수 없으니까 주인의 뜻, 주인의 의도, 주인이 바라시는 것을 잘 파악하셔야 할 것입니다. 엡5:17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하셨고, 충성이란 원문 “피스토스”(πιστός)의 뜻도 “진실”인데, 참과 진실은 주님뿐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아는 것이 곧 진실과 그 뜻을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무조건 복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기 전에 내가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히3:5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환은 상급자의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복종하는 종의 대우를 받는 위치입니다. 저희들은 흔히 내 소원과 내 기분을 따라서 일 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떠한 고난을 겪어도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유익하고 또 내가 볼 때 발전이 없는 것 같아도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순종이 곧 충성이 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귀신병 들렸다가 고침 받은 사람이 사명적인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으나 예수님이 거절하셔서 따르지 못하였지만 그는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이히 여김을 받으므로 전도의 효력을 얻었습니다(막5:20). 그리고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서 성공적 전도를 하다가 성령님의 지시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로 갔는데 마침 그 곳으로 지나가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여 아프리카 전도의 도화선이 되게 한 것은(행8:38) 다 순종으로 얻은 전도의 열매를 입증합니다.
어떤 연하 엽서에서 백민석씨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에 복종하는 것을 배웠노라
(또)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한 몸을 구했으나
도리어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부를 얻어 행복하기를 간구하였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됨으로써 오히려 지혜를 배웠노라
한 번 세도를 부려 만민의 찬사 받기를 원했으나
세력 없는 자가 되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생을 즐기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을 바랐으나
하나님은 내게 생명을 주사
온갖 좋은 것을 즐길 수 있게 하셨노라
내가 바라고 원하던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은연중에 나는 희망하던 모든 것을 얻었나니
나는 부족하되 내가 간구하지 않은 기도까지 다 응답되었으며
이제 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충족한 축복을 입었노라”
하였으니, 이 시는 필자에게 너무 큰 감동을 주었으며, 상당 부분 필자의 생활과 상통함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소원이 충족되지 않은 중에서도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충성이고 또 축복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3. 작은 일을 크게 여겨 충성해야 합니다. 마25:21에서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일로 네게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일이란 시간을 지키는 일 부터 휴지를 줍는 일, 적은 금액의 헌금, 냉수 한 그릇 주는 봉사(마10:42)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귀하게 여기시고 작은 일을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자에게 큰 일도 맡기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성장과(마13:31-32) 한 알의 밀이 떨어짐(요12:24)도 역시 작은 일에서부터 크게 되는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4. 환난 중에서도 믿음과 사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중에서 믿음과 사명을 지켰고,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순종을 하셨으며(히11:17), 마게도냐 교회도 환난과 극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는 충성을 보였습니다.
5. 자기의 직책 수행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충성이란 두 개의 그림이 있는데, 하나는 로마 봄베이 도시에 화산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성을 탈출하지만 그 성문지기는 자기 생명이 화산과 관계없는 사람처럼 성을 빠져나가는 사람을 침착하게 안내하는 그림입니다. 또 하나는 짐을 싣고 구덩이에 빠진 수레를 끄는 소가 주인의 채찍을 맞으며 필사적으로 수레를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장면의 그림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충성의 사명과 방법을 잘 알아서 하나님이 보실 때 인정하시도록 충성을 잘 함으로써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결심,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7. 죽도록 충성하라 (계 2:8-11)
oo 교회 임직식을 맞이하여 “죽도록 충성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하나님은 은사와 직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고전12:4) 한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자기 뜻대로 주시고(고전12:11) 따라서 누구에게나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고전12:29). 바울 사도가 귀한 사도였지만 무명의 사역자인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았습니다(롬1:1,행9:12). 이 사실은 신약 교회의 모든 직분을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직을 받는 분들은 직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왜 이런 직분을 주실까요 ?
1) 우선 앞장 서서 책임을 지고 일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요(고전12:7),
2) 교회의 기반을 든든히 세우기 위함이요,
3) 경건 훈련의 방편이 되어서 모범적 생활과 봉사를 더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직임자는 자신이 충성하는 줄로 여길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자로 인정받기 위하여 연단받고 시험을 받는 위치에 있음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4) 죽도록 충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충성하라”고 주신 것이요, 개인의 명예나 교회의 요람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성도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교회의 직분을 명예로 알고 탐하기도 하고, 받고는 교만하며 나가서는 주장하는 자세까지 취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마20:25-28에서 “세상의 집권자는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려면 종이 되어야 하며,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칭찬하실 만한 충성된 역군이 되시려면,
1) 믿음의 역군이 되셔야 합니다.
① 믿음이란 성경의 바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고,
② 그것을 풍성하게 아는 것이며,
③ 성경 말씀을 충실히 이행하는 생활입니다.
성경 지식을 잘못 이해하거나 엉뚱한 주장을 하거나 사이비한 기독교인들과 동화되거나 성경을 찾지도 못하는 형편이 되거나 말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니(히11:6) 어찌 충성을 하겠습니까 ? 그래서 믿음을 갖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바른 신학 사상과 덕을 세우는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식이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세상을 옳게 사는 비결입니다. 이 지혜가 있으면,
① 겸손하고,
② 예절이 바르며 규모가 있고,
③ 화평을 유지하며,
④ 진실하며,
⑤ 자기를 책임지며,
⑥ 칭찬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겸손과 예절과 규모와 진실 등이 부족합니다. 영국의 수상 처칠은 퍽 겸손하고 규모 있는 사람으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번은 처칠 수상이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 옆을 거닐다가 바쁜 시간에 청소부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회담 시간이 지연되자 비서가 수상을 인도하면서 무슨 담화를 청소부와 나누셨습니까 ? 한즉, “청소부의 말이 너무 지혜로워서 그와 대화를 계속 하는 중에 더 지혜로운 말이 나오기를 바라고 대화를 계속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윗 사람이라도 아랫 사람의 말을 존중할 것을 교훈하는 예화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처칠 수상이 영국 국회에 국정을 보고하러 가는데 시간이 급하여 과속을 하다가 교통 순경에게 잡혔습니다. 운전수가 교통 순경을 보고 “뒤에 앉은 분이 처칠 수상이신데 시간이 급하다”고 하니까 교통 순경의 말이 “당신이 시간 급한 것과 나와는 관계가 없고, 나는 과속을 지적할 뿐이며, 뒤에 앉은 분이 처칠 수상님 비슷하기는 하나 수상님 차가 과속을 할 이치가 없으니 거짓말 마시오” 하고 의연히 딱지를 떼고 보냈다는 것입니다. 처칠 수상이 그 교통 순경에 대하여 감탄을 하였습니다. “저렇게 충실한 교통 순경이 다 있나” 하여 내무부 장관에게 즉시 1계급 특진을 시키라고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내무부에서 통지가 오기를 “경찰이 과속차 단속한 공로로 특진되는 규정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여 두 번을 망신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하고, 규모 있고, 법이 그렇다 하면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런 일들이 교회 직분 생활에서도 많이 적용이 된다는 것을 아셔서 매사에 합리적인 생활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봉사적이고 희생적이어야 하겠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 곧 자기 입장에 손해가 되다 못해 죽기까지 하라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세례 요한은 요3:30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하셨고, 바울 사도도 행21:13에서 “결박과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신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의무로 한 일을 봉사를 한 줄로 아는 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일 예배, 예배 헌금, 감사 헌금, 십일조, 자기가 사용하는 성전 건축 헌금 등입니다. 이런 것은 다 의무요 봉사가 아닙니다. 봉사는 마땅히 안해도 될 입장에서 자기의 것으로 남을 돕는 것이 봉사일 것입니다. 사명자들도 충성하면서 명예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많은 대접을 받으면 오히려 하늘의 상급이 준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내세의 소망을 걸고 인내로 견디며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에게는 내세의 소망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떠나는 것이 아쉬우면 그는 하나님과 먼 관계의 사람일 것입니다. 이 세상은 수렁과 같아서 더 살수록 죄에 빠져 들어가기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는 성도는 환멸을 느낄지언정 결코 애착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혹 충성하는 성도에게 현세적 축복이 적어질 때는 더욱 현실을 소극적으로 기대하고 내세의 상급을 사모하라는 하나님의 섭리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를 촉박하게 기다리면서 성실하게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하신 말씀을 더욱 깊이 음미하시면서 복된 생활을 결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8.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 (계 2:9-11)
(84년 4월 16일 황동 노회 개회 설교)
황동 노회 64회 정기 노회를 맞이하여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에 대하여,
1) 이 말씀을 주신 예수님이 자기를 “처음이요 나중이라” 또 “죽었다가 사신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창조와 보존과 통치와 끝맺음과 심판을 다 행사하시는 절대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절대자의 말씀을 받고 있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있으므로 저희들도 예수님처럼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사는 확실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의 말씀을 교회의 사자인 복음 사역자를 통하여 주셨습니다.
① 이것은 복음 사역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깨닫고 실천한 후에 성도들에게 전달하여야 할 사명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② 또 이것은 복음 사역자가 먼저 자기 심령을 위하여 필요한만큼 말씀의 공급을 받은 다음에,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③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복음 사역자가 설교 준비 아닌 일에 쫓기다가 말씀 전체를 증거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하여 말씀의 한 부분을 감추면서 증언 한다든지(딤후2:9) 또는 어떤 명분을 위한 증거로 또는 자기 사상을 펼치기 위한 증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 때로는 성경의 권위보다 사람의 경험을 앞세워 감동 받는 자료를 증거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음 사역자는 마치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 먼저 자신을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항상 자기의 순결을 위한 자기 개혁에 노력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④ 만일 복음 사역자가 자기 개혁과 사명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 우선 장로님 부흥사가 나오고, 평신도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또 목사가 설교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연예인 전도사나 가수 집사가 설교하면 교인들이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목사는 뒷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 혹 교인들이 “우리 교회도 부흥회 합시다”라고 하면 담임 목사가 “얼마나 내게 은혜를 못 받으면 저들이 다른 목사의 설교를 듣고자 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
작년 9월 총회 때 대구 서현 교회 마당에서 평신도가 완장을 차고 다니면서 “목사님, 장로님들 회개하시오”라고 외친 일이 있었습니다. 참 선지자의 외침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누구의 입인들 못 여시겠습니까 ? 나귀의 입도 여시고 돌들도 소리 지르게 하실 것입니다(민22:28,마3:9).
⑤ 저희들은 마땅히 들을 귀를 가지고 누가 외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교만과 정욕과 이기주의적인 자세를 버리지 못한 채 자신들을 깨우치시는 말씀을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 이런 일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서머나 교회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
1) 그 교회는 환난과 궁핍이 있었고, 악한 자들의 훼방과 더불어 더 큰 핍박이 예고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현실 교회가 환난과 궁핍을 당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저는 신앙적 핍박으로 환난 받는 것도 없고, 대체적으로 잘살기 때문에 궁핍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이 있었으니만큼 예배당도 초라하고 생활도 어려우며 교역자도 고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요한 자니라” “실상은 부요한 자라”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 차라리 오늘의 교회가 그런 궁핍과 환난을 당하면서라도 믿음의 부요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될 일이 아니겠는가 ?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불신자들의 말을 곁에서 들어보면 “돈은 교회에 많다. 예배당을 잘 짓는 것을 보아라. 목사 직업이 괜찮다. 돈 주고, 집 주고, 자동차 주고, 매일 대접받고 얼마나 좋으냐”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불신자들이 목사를 성직자로 보지 않고 직업인으로 보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눈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직자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진데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 같아야 하고, 교회는 교회 같아야 하는데 목사는 직업인 같고, 교회는 사교장 같이 전락한 것은 아닌지요 ? 아직도 저희들이 허탄한 것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가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2) 현실 교회 형편을 가만히 보면 실상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적고, 또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여 핍박받는 자도 거의 없으며 오히려 허탄한 것들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면서 “명예, 권세, 물질, 현세적 안일”을 얻으려고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전도사가 교회에서 배척을 받아 나온 후 노동법과 관련하여 퇴직금 받는 법을 문의해 온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당신이 교회 들어갈 때에 어떻게 계약하고 들어갔느냐 ?”고 반문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의 신앙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또 내가 한 일이 많을지라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하신 것이라”(고전15:10)는 사명을 가진다면 퇴직금을 문제 삼지 못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신앙과 충성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부요해졌지만 현실 교회는 허탄한 것들 때문에 믿음을 판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
1) “아신다”는 것입니다. 환난, 곤고, 핍박, 위험, 믿음이 있고 없는 여부까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심판하실 주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신다는 것은 일면 두렵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겠지요.
2)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환난, 핍박, 비천, 궁핍도 역시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만 가진다면 무엇에든지 담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사람의 인정을 못 받는 것이나 가난과 비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죽도록”은 삶을 피하거나 고행주의를 힘쓰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십자가의 정신으로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최대의 겸손, 최대의 순종, 최대의 고난과 희생이요, 예수님은 이것을 알아주지 않는 세계에서 감당하셨고 또 자원하는 제사가 되기 위하여 고통 중에서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참으신 것입니다. 성도가 십자가 정신으로 충성하고 자기가 살도록 충성하지 않기 위하여 항상 세례 요한처럼 자기는 쇠하여도 주님과 교회는 영광되고 흥하는 목적으로 처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 때에라도 자기보다 유력한 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교회를 잘되게 할 수만 있다면 기쁘게 물려주고 나오는 것이 충성된 일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하면 복음 사역자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막는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4)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죽도록 충성했다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나 그렇지 못하고 마귀와의 신앙적 싸움에서 이기는 정도라면 지옥의 형벌을 면할뿐”이란 뜻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딤전6:11-16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하면 영생을 얻고 주님이 나타나실 때 책망 받을 것이 없다“는 말씀과 비슷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죽도록 충성하면 상급이 있지만 겨우 이기는 정도이면 지옥만 면한다는 뜻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하나님이 특별히 가까이 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2:1) 마귀를 이기는 정도에서 뛰어나 충성하는 역할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현실 교회 사역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폭넓게 상상해 본다면,
① 개혁파 신학을 깊이 연구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신학자의 입에서만 주장되는 칼빈주의가 되지 말고 평신도까지 바른 신학 사상을 무장케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② 그릇된 신학 사상을 강하게 배격하고 신앙적 순결을 지켜 나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③ 은혜의 방편을 신학적으로 잘 정비하여서 올바른 방법으로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바르게 깨우치라고 하실 것입니다.
④ 목사, 장로가 성직을 받을 때 교회 헌법을 지키기로 서약을 했으면 반드시 잘 지키라고 권면하실 것입니다(시15:4).
⑤ 하나님이 죽일 기계를 만드시고, 화살을 시위에 먹이시기 전에(시7:12,13) 속히 한국교계가 부조리를 해결하는 기계를 만들어서 먼저 부조리 방지에 힘을 쓰고 하나님 앞에서 늘 떨면서 섬기고 포악하지 말며 화평과 질서를 유지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⑥ 세속적이고 허탄한 일을 힘있게 배격하고 먼저 자기 개혁에 힘쓰며 서로 양보하고, 사랑하고, 단결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⑦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동료자의 인정에 끌려 죄에 동참하지 말고 주님과 교회를 더 사랑하고 진리대로 사는 독자적인 생활을 확립하라고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