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록’ 깨친 순간부터가 꿈 아닌 진정한 현실
‘금강경’-‘응무소주이생기심’ 결국 같은 이야기
욕심으로 필요없는 면적 키우면 싸움 절로 생겨
6. 법을 받음(受法)
오조 스님이 밤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하자,
혜능이 한번 듣고 말끝(言下)에 바로 깨달았다.
그 밤에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했다.
오조 스님은 혜능 스님을 보호하려고 했지요.
밤 삼경이면 다 잘 때인데,
대중 몰래 혜능을 방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줍니다.
그런데 『덕이본』을 보면 ‘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돈황본』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들어간 것이죠.
그렇지만, 『금강경』 전체 내용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하는
그 자리가 ‘응무소주(應無所住)’입니다.
그 자리에서 활발하게 작용하는 것이 ‘이생기심(而生其心)’인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가 바로 그 자리를 표현해서
『금강경』 전체가 이 내용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나 같은 얘기입니다.
후대로 오면서 구체적으로 그 대목을 넣은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아는 것이 가장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나오는 그런 자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옷 잘 입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몸짱, 얼짱 되는 게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이해하면
그 분은 몸짱, 얼짱 되려고 따로 노력 안 해도 충분히 그렇게 됩니다.
왜냐? 자기 생활에 욕심으로 인해서 필요 없이 면적 키우는 일 안 합니다.
적당히 먹고 사고하고 행위해서
스트레스 받아 얼굴에 기미가 낀다든지 그런 일 없어요.
화장 안 해도 굉장히 예뻐집니다.
그래서 화장 하는 방법 중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최고입니다.
화장 값 아끼려면
응무소주(應無所住,)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확실히 이해하셔요.
“오조스님이 『금강경』을 설해 주니까
혜능스님이 한번 듣고 언하에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았다.”
이것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한마디 말에 바로 깨달았다.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 점수(漸修)인가? 천만에요. 점수와 돈오(頓悟)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모르고 수행하는 것은
아무리 100년, 200년을 닦더라도 그것은 착각 속에서,
꿈속에서 닦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닦았다고 얘기를 안 합니다.
그럼, 꿈속이 아닌 깨어 있는 현실은 언제부터냐?
바로 깨닫는 순간부터 꿈에서 깨어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몰록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 몰록 깨닫기 위해서
그냥 우연히 되는 게 아니고 꿈속이지만, 착각 속이지만 준비를 해온 겁니다.
예를 들어 육조 스님이 시장에서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얘기를 듣고,
뭔가 거기에서 깨달음이 생기거든요.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지만 그것을 알고 보니까,
어머니에게 하는 효(孝)보다 더 큰 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치관이 바뀐 것이죠. 불교의 깨달음 세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하게 됩니다. 그 기간이 있었을 것이고,
저 홍콩 근처 광주라는 곳에서 양자강 기슭까지 가는데,
기록에 한 달이라고 나옵니다.
그 걸어가는 과정에 이 분은 누구보다도 공부를 많이 한 겁니다.
착각 세계지만 이런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또 8개월 방아를 찧으면서 그 준비가 깊이 들어가서
『금강경』 한 번 더 읽는 소리 듣고 그 자리에서 깨쳐 버린 겁니다.
깨친 그 순간부터 현실이고 꿈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단박에 깨친다고 돈오(頓悟), 또는 돈법(頓法)이라고 합니다.
몰록 깨달았다, 몰록은 당장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8개월, 또 1개월 또 준비해온 과정 그것은 닦은 게 아닌가?
물론 닦았지요. 닦았으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왜? 착각 속에서 닦았기 때문에, 그래서 몰록 그런 것이지,
이 몰록에 대해서 오해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또, 몰록 깨친다고 아무 준비 없이 빈둥빈둥 놀다가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식으로 그렇게 깨쳤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닙니다.
비록 점점 닦아가는 수행이 있지만,
그건 아직 꿈속이고 착각 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로 인정을 안 합니다.
‘몰록 깨쳤다’ 오해 많아
그럼 인정은 언제부터냐?
깨닫는 그 순간부터 현실이고, 그게 꿈 깬 세계니까, 그게 진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 듣고 보고 하면서
절에 불교 믿는다고 수십 년 왔다 갔다 했는데 전부 꿈속에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은 꿈이다. 그런데 우리는 꿈인 줄 모르고 현실 중에 현실이라고
그 꿈을 집착해서 정말로 머리가 터지게 싸우지 않습니까,
그것도 제일 가까운 사람하고 많이 싸운다고 해요.
이것을 알게 되면 싸움을 왜 합니까? 서로 존경하고 인정하게 되지요.
내가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그 싸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존심 건드리는 게 제일 싸움을 크게 한다고 해요.
서로 인정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남남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이 사회도 그렇고 뭐든지 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노사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존경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저 사람 돕는 일이 나를 돕는 것이고,
나를 돕는 일이 저 사람을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면
무슨 유토피아 같은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는 100%는 경험 못 했는데 그래도 몇 % 경험을 해보니까 그 말이 맞아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더 괴로워요.
이해관계로 싸우는 마음으로, 대립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결하려면 더 괴로워요.
그런데 부처님 말씀한대로 사고하고 생각하면서
인간관계도 맺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즐거워요.
안 깨달아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는 절대 고행이 아니다.
하면 하는 것만큼 즐거움이 나고 행복감이 생깁니다.
절대 고행이 아닙니다. 불교는 고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체험은 못 하더라도
이 체험이 100%가 있고 1%가 있고 2%가 있지 않습니까?
그 체험하는 %만큼 즐겁고 행복감을 느낀다. 저는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여기에 언하(言下)에 몰록 깨친다.
그냥 된 게 아니라 준비가 되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깊이 느끼고 믿는 사람은 그 기간이 짧을 것이고,
그 믿음이 약한 사람은 길 것이다.
그 차이이지 내가 갖고 있는 능력과 존재원리는 같다, 그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 믿음의 차이에 의해서 빠르고 늦음이 있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원리는 빠른 사람이나 늦은 사람이나 같다.
그리고 이것을 믿고 조금이라도 실천하게 되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재미가 있습니다.
세속에서 이 원리를 알면 무슨 일을 하던지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요. 이게 굉장한 겁니다.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면 그 일을 즐겁게 합니다.
즐겁게 하면 열심히 하고 깊이 있게 하고 그러다 보면 전문가가 되고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보수도 따라오고 명예도 따라옵니다.
보수, 명예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되는 한 가지가 해결됩니다.
뭐냐? 보수, 명예만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 분의 인격도 같이 형성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른이 없지 않습니까, 학계나 정치계나. 종교계에도 어른이 없어요.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인정 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장차 자라면 인격자가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직업 가지려는 목적이 돈입니다.
그런 한은 절대로 인격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방금 제가 말한 대로 자기 하는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때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지,
돈을 추구해서는 인격자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자유스럽고 참 좋습니다.
좋은데 이걸 극복 못 하면 자본주의가 언젠가는 망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완성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완성되려면 불교를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민주주의, 불교 통할때 완성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전부 돈이에요.
이래서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격자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 부르기를 옆집 강아지 부르듯 합니다.
대통령 존경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런 나라에서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 부정하고 절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성세대 부정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성세대라도 과거도 보고 현재도 보고 있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따라서 우리도 변해서 포교하는 방법, 공부하는 방법도 변하고,
기성세대에서 잘못된 점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가 답습해온 그 길을 와서는 안 된다 변화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이 사회에 인격자가 없다는 거 정말로 불행한 일이에요.
돈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정말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직업도 갖고 사회활동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자기 하는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 사회가 정말로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가 완성되어 가려면 불교를 안 할 수가 없다.
부처님 말씀하고 민주주의하고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 법하고 180도로 어긋나게 제도가 되어 가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 돈에 있다는 이것은 정말로 고쳐야 합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않고는 전쟁, 갈등, 대립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전부 아까 말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그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보시면 정확하게 진단하신 겁니다.
부처님 말씀이 2,500년 전 일이지만
육조스님은 600년대니까 1,400년 전 일이지만
지금 현실에 너무나 필요합니다.
2006. 10. 05
고우 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