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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서토(西土)와 신라
(1) 고구려와 다물정책
고주몽은 서기전58년에 졸본에서 북부여를 이어 소위 졸본부여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였으며, 서기전37년에 고구려라 칭하였다. 서기전28년에 연호를 다물(多勿)이라 하고, 송양의 비류를 공격하여 굴복시켜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다물후(多勿侯)로 봉하였으며, 서기전27년 10월에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서기전26년에 수도를 졸본에서 상춘(늘봄, 訥見=눌현, 눌견)으로 옮겨 북부여를 회복하였다.
이후 유리명제(琉璃明帝)는 서기1년경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어 한나라 정벌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대문신열제(大武神烈帝)는 고구려의 남쪽에 있던 한반도의 최씨 낙랑국을 우선 멸망시켰다.
서기48년경 모본제(慕本帝)는 요동을 회복하였는데, 이대 요동지역은 지금의 난하 동쪽을 가리키며, 당시에는 낙랑군의 일부와 진번, 임둔이 속해 있었다. 이로써 진번과 임둔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서기55년경에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는 졸본, 국내성, 제1환도성을 축조하여 3경을 두었고, 난하 서쪽의 요서지역을 회복하여 요서10성을 축조하였고 서기57년에 백암성과 통도성을 축조하였다.
*고구려 요서 10성
-안시성 : 탕지보(=구 안덕향). 개평(開平)의 동북 70리. *탕지보는 단군조선의 번한 수도 중의 하나임. *개평은 지금의 당산(唐山,탕산)의 북에 있음.
-풍성 : 안시성의 서북 100리
-건안 : 안시성의 남쪽 70리
-석성 : 당산 부근으로 추정됨.
-건흥 : 난하의 서쪽
-한성(韓城) : 한성(汗城)과 같은 것으로 추정되며 번한성이 된다.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 : 구 요동국이라 함. 한성의 서남 60리에 있음.
-요동성 : 창려 남쪽 지역
-요택 : 요수의 하류와 황하북류의 하류가 만든 진흙 벌 지역. 요동성의 서남 50리
-택성 : 요택 서남쪽
*석성(石城)은 건안성의 서쪽 50리에 있음.
*요택은 황하북류의 좌안에 있음. 이세민이 서기645년에 침입하여 오다 진흙에 빠진 곳임. *발해만의 침몰 등으로 강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봄. 요택은 요하하류의 진흙 벌지역을 가리키며, 난하의 서쪽이고 황하북류 하류의 동쪽이며 요수하류 지역에 해당된다.
*이때의 요서는 난하(패수) 서쪽 강 건너 지역이 됨.
*건흥성이 난하의 서쪽에 있다 하므로 요서10성은 모두 난하와 요하와 황하북류의 하류 지역에 있는 것이 된다.
*통도성은 단군조선 초기에 요중(遼中) 12성의 하나로 이미 축조되었던 적이 있는 성임. 고려진(高麗鎭)이라 하는데, 북경의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에 있음. 즉 통도성은 북경 근처 바로 동쪽에 있는 것이 된다
백암성은 지금의 갈석산 남쪽에 있으며, 통도성은 지금의 북경 근처 동쪽에 위치한 성이다. 또 서기105년경에서 서기121년 사이에 낙랑과 현도군을 공격하여 요동을 회복하였다. 이시기의 낙랑과 현도는 고구려와 한나라의 서로 뺏고 뱃기는 격전지가 된다.
서기168년에 신대제(新大帝)가 다시 요동을 정벌하였고, 서기197년에 산상제(山上帝)의 동생 계수가 요동태수 공손도를 토벌하여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요동을 평정하였다. 산상제는 서기209년에 국내성 산상(山上)에 제2환도성을 축조하여 수도로 삼았다.
시거242년에 동천제(東川帝)는 서안평을 공격하였다가 서기246년에 위나라 관구검의 역습을 받아 제2환도성을 함락당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밀우와 유유의 애국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엇다. 동천제는 제2환도성이 폐허가 되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서기24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때부터 제3환도성을 축조한 것으로 된다.
이후 선비족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고, 서기313년경 미천제(美川帝)는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차례로 대방과 낙랑을 축출하고 현도를 정벌하여 8,000명의 포로를 평양으로 이송하였다. 이리하여 서기313년에 낙랑, 대방, 현도를 없애어 요동과 요서 지역을 모두 회복한 것이 된다. 낙랑군은 지금의 난하의 중류지역에서 고하지역까지 서남쪽에 걸친 지역이 되고, 남부에 대방군이 있었으며, 현도는 낙랑군의 서북에 위치하고 서안평의 서남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서기342년에 고국원제(故國原帝)가 전연(前燕)의 모용씨의 침입을 받아 제3환도성을 함락당하고 미천제 묘를 도굴당하였으며 5만명의 포로를 빼앗기는 등 수모를 당하였고, 백제의 근초고왕과 한강에서 전쟁하다 전사하였다.
이후 소수림제(小獸林帝)가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드디어 서기391년에 18세의 광개토경호태황이 등장하였다. 광개토경호태황은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고 서기392년에 백제의 10성을 점령하는 등 한강이북을 차지하였고, 서기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군 8,000명을 전사시켰으며, 서쪽으로는 후연을 격파하여 요동을 확보하고, 동북으로는 읍루를 정벌하고, 거란, 백제, 신라, 가락(가야), 임나(대마도), 이왜(伊倭:일본 본토. 천조대신의 나라 야마토)를 복속시키고, 서기400년에 다시 왜를 격퇴하여 삼가라(三加羅:대마도)를 복속시켰던 것이다. 서기408년에 북연과 수호하였다. 서기412년 39세의 나이로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병사하였다. 광개토경호태황 시기에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북보(北堡)가 되는 진한(眞韓) 땅을 거의 회복한 것이 된다.
서기412년에 즉위한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는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하고, 서기414년에 아버지 광개토경호태황비를 건립하였고, 서기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삼았다. 서기475년에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전사시켰으며, 서기480년에 신라를 정벌하여 죽령이북을 탈취하였다.
서기491년에 즉위한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는 연호를 명치(明治)라 하고, 서기493년에 연나부 낙씨의 부여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이에 서기86년에 동부여가 서고 서기22년에 대소왕이 대무신열제에게 망한 후 고구려 서쩍 지역이 되는 연나부에 봉해져 백랑산 부근으로 거주를 옮겨 부여로 불리면서 이어져 오다가 이때 완전히 제사가 끊긴 것이다. 처음 연나부에 봉해진 부여는 점차 독립하기 시작하여 고구려에서 이탈되어 고구려의 적국과 협조하는 등 하여 오다가 문자제에 의하여 완전 복속된 것이다. 서기501년에 제(齊:산동반도), 노(魯:산동서부), 오(吳:양자강 유역), 월(越:양자강 남부)의 땅을 복속하였으며, 백제의 동성왕을 폐하고,서기503년에 백제가 조공을 하지 아니하므로 요서군과 진평군을 병합하고 백제군을 폐지하여 버렸다.
서기559년에 즉위한 평강상호태열제(平崗上好太烈帝)는 연호를 대덕(大德)이라 하고, 서기576년에 돈달장군이 갈석산(碣石山)과 배찰산(拜察山)의 적을 토벌추적하여 북주(北周)를 대파하였으며, 유림진(楡林鎭)의 동쪽을 평정하였다. 여기의 갈석산과 배찰산은 지금의 영정하 서편의 요서지역에 있는 것이 되고, 유림진은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것이 된다.
서기590년에 즉위한 영양무원호태열제(瓔陽武元好太烈帝)는 연호를 홍무(弘武) 서기598년에 요서를 공격하고, 이해에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가 등주를 정벌하였으며,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과 전쟁을 하였다. 또 서기612년에는 수양제의 100만대군과의 전쟁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으로 몰살시켰다. 수나라는 이어 서기613년에 2차 침입하고 서기614년에 3차침입을 하였다가 실패하고 결국 서기618년에 수나라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서기603년에 연개소문이 9세에 조의선인에 선발되었는데, 결국 연개소문은 서기595년생이 되며 금관가야 왕손 김유신과 동년배가 된다.
서기624년에 영류제는 중국의 도교를 수입하고 요동반도 남북으로 부여현(부여성)과 남해부(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반대하고 결국 서기642년에 왕을 폐위시키고 보장제를 옹립하였다.
서기642년에 즉위한 보장제는 연호를 개화(開化)라 하였으며, 대막리지이던 연개소문이 신라의 김춘추와 회담에 실패하고 백제의 성충과 회담하여 맹약을 맺었는데, 이 자리에서 연개소문은 삼한이 원래 단군조선의 한 핏줄인데, 서쪽의 적을 무찌른 후 땅을 나누어 연맹으로 다스리자 제의 하였으나 김춘추는 듣지 않고 성충은 동의하였다 한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게 된다.
서기644년에 당나라가 1차 침입하여 안시성 전투를 벌인 후 연개소문의 역습으로 산서(山西: 서안 이북), 강좌(江左:양자강 북동지역), 하북(河北: 황하 이북지역), 산동(山東) 지역을 고구려가 차지하였다.
서기648년에 당나라가 2차 침입에 실패하고, 서기649년에 3차 침입에 실패하였으며, 서기657년에 연개소문이 63세로 병사하였고, 서기668년에 드디어 연개소문이 없는 고구려는 당나라 이세적이 이끄는 50만 대군과 신라의 김인문이 이끄는 27만의 당나라 군사에게 평양성을 함락당하고 망하였다.
서기668년에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 서방 경계의 영주 땅에서 소식을 들은 대중상(大仲象)이 곧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고 군사를 모아 동으로 옮기고 동모산(東牟山)에 웅거하였다. 말강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장수 이진영과 손잡았고 당군을 대파하였다. 이후 대중상이 서기699년에 붕하자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당나라 땅에 있다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당나라의 군사를 물리치면서 동모산에 이르러 대를 이어 나라를 대진국(大震國)이라 칭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으며, 수도를 상경용천부인 홀한성으로 옮기고 동모산은 중경(中京)으로 삼았다.
서기670년에 고연무, 검모잠이 안승(安勝)을 옹립하는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부흥운동은 끝났다.
-을파소 선생의 참전계경(參佺戒經) 총론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과 다물
옛날 우리 시조 고주몽성제께서 북부여로부터 나시어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햇빛을 받아 태어나시니 해를 성으로 삼았다. 태어남에 신과 같은 용맹이 있었고 골격이 영웅상이었으며, 7살 때 스스로 활을 만들었고 백발백중이었으며 천하무적이었다.
때에 사람들이 주몽이 나라에 불리하다고 하여 죽이려고 하였다(동부여에서 있었던 일). 이에 오이, 마리, 협보와 더불어 후덕한 친구로 삼고 모돈곡에 이르러 재사, 무골, 묵거 세사람을 만났다. 이에 주몽이 무리들에게 이르길, 나는 명을 받들어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이 세사람의 현인을 얻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바가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드디어 소, 돼지, 양의 피로 삼신에게 제사지내며 하늘에 고하기를, 한한상존(한인, 한웅, 단군)이시여, 구한(아홉 한족)을 비추어 살피시어...... 일곱 사람이 함께 맹세하노니......옛 강토를 회복하고..... 삼한을 통치하게 인도하여 주시고... ...구한이 한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고, ...... 나라를 도와 주시고 백성들이 오래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일곱 사람이 핏속에 손을 넣고 맹세하여 이르길, 일곱 사람이 같은 뜻이니 가히 다물흥방이로다, ...
함께 졸본천에 이르렀을 때, 북부여의 고무서(서기전 59년-서기전 58년 왕임)가 주몽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왕이 즉위한 후 2년째에 돌아 가시니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논의하여 주몽이 대를 잇게 되었다.
이에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고(높을 고)라는 말은 대광명이 비치는 세계의 한 가운데라는 뜻이다. 송양이 항복하여 나라를 넘겨주니 그땅을 다물도라고 하고 송양을 다물후로 제후로 삼았다. 다물 오계(다섯가지 계율)를 세우니, 사친이효, 사군이충,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었다(단군조선시대 삼한에 이미 오계가 있었음). 단군 고주몽게서 이르시길, 일신이 만인을 만드시고,......내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극재사가 삼일신고를 읽는 법을 제정하여 이르길... 이하 생략(아래 글 참조) - 광개토경호태황비문과 고구려의 건국 경위와 광개토황의 다물 서기전 239년에 해모수가 백악산 아사달 근처인 난빈에서 즉위하여 북부여를 열었고 서기전 86년에 동명왕 고두막한이 해부루를 동부여후로 삼고 졸본에서 즉위하였으며 서기전 58년에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하여 북부여 졸본으로 와서 북부여왕 고무서(소해모수라고도 불리움)의 사위로서 대통을 이어 졸본부여를 열게 됨. 나중에 서기전 37년에 고구려를 정식으로 열게 됨.).....유류왕(제 2대 유리왕)이 도로써 다스림을 흥하게 하고 대주류왕은 그 업을 잇고 .... 17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고주몽의 13대손이라고도 하고 17세손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고주몽의 13대손이 되고 해모수로부터는 17세손이 됨.)에 이르러 이구(18세에. 이 구는 18임. 삼 칠은 21이고 이 팔 청춘의 이 팔은 16임. 한단고기의 기록과도 일치.)에 등극하여 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덕이 .....황천에 (이르고)....위엄과 무력이 저 사해에 떨치고....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오곡은 풍숙하고 ...갑인년(서기 414년. 장수왕 때임.) 9월 29일 을유(日辰)에 산릉으로 옮겨 이에 비를 세워 공훈을 적어 후세에 보이기 위함이니 그 글은 가로되...<이상 광개토경호태황 비문 중 일부>
신성지역인 태백산 밑에 옛날에 사선각이 있었는데, 이는 발귀리(선인 발귀리: 태호복희와 동문수학한 사람, 서기전 약 3500년경), 자부선인(서기전 약 2700년경 치우천황 때 황제에게 삼황내문을 가르친 사람), 대련(공자가 말씀하신 효도의 대명사인 대련 소련 중의 대련임. 서기전 2239년 단군조선 제 2대 단군 부루께서 대련과 소련에게 정치의 도를 물었음. 일명 묘전랑이라고도 함), 을보륵(서기전 2182년 단군조선 제 3대 단군 가륵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신왕종전의 도를 물었음. 가림토38자를 정립한 분) 네 선인이다. 모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수련하여, ....도를 넓히고 백성을 이롭게 하고,......이것이 사나이 대장부의 의로움이다.<이상 참전계경 총론 중 일부, 을파소>
생각컨대 옛 시조 추모왕의 비롯된 바탕은 북부여로부터 나와(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현손자임) 천제(단군을 말함. 북부여왕도 단군이라 하였음.)의 아들이요(해모수의 손자 고진의 아들 고모수(불리지)의 아들임) 어머니는 하백녀랑으로 알을 갈라 세상에 내려와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고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수레로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부여의 엄리대수 때문에 (건너지 못하여) 왕(고주몽)이 나루터에 이르러 말하여 가로되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녀랑이며 추모왕이 바로나다 라고 하니 갈대와 거북이가 소리를 듣고 응한 즉 갈대가 엮어지고 거북이가 뜬 (다리가 만들어진) 후에 건너서 비류곡의 홀본서성의 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홀본이 졸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
이후 광개토황의 비문에는 영토확장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고구려의 다물정책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때 고구려는 단군조선 북보(北堡)가 되는 진한(眞韓)의 땅을 거의 회복한 것이 된다.
단군왕검이 9이의 추대에 응하여 임금이 되어 전쟁을 하지 않고도 반란자 요임금과 불효불충자 순을 복속시키고, 하은주(夏殷周)가 비록 전쟁광의 나라이나 대대로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자리를 지켰는데, 단군조선이 망하고 전국시대에 돌입한 이후 시대는 흘러 사람들의 심성이 점점 악하게 변하였고, 반드시 전쟁을 동원하여야만 복속하는 시대로 변하여 버렸다. 고두막한이 한나라와 전쟁을 하고, 고주몽이 다물정책을 시행한 후 광개토황에 이르러 전쟁을 통한 다물을 한 것이다. 고구려의 계승국 대진국(발해)이 망한 후 고구려의 땅은 거란, 여진, 몽고, 만주가 서로 바뀌어가며 차지하다가 오늘에 이르러 다물정신은 온데간데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과연 지금의 시대에 다물(多勿)을 할 수 있을까? 진실된 역사복원이 다물을 대신할 것이다.
(2) 고구려의 정신문화
고구려 건국세력의 철학적 정신은 바로 단군조선의 천부경, 삼일신고, 참정계경에 담겨 있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 사상이다. 고구려의 계승국인 대진국(발해)의 건국세력의 철학적 정신 또한 단군조선의 홍익인간 사상이다. 대진국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 때 찬한 삼일신고에 찬(讚)을 썼고, 대야발이 서문을 쓰고, 문적원 감이던 임아상이 주해(注解)를 달았다.
-극재사(克再思)의 삼일신고(三一神誥) 독법(讀法)
마의(麻衣) 극재사(克再思)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서기전 79-서기전 19) 등 7인(주몽, 오이, 마리, 협보, 재사, 무골, 묵거)이 고구려(서기전 37-서기668)를 건국할 때의 한 사람으로 삼일신고를 읽는 방법을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무리(일반인)들이 (삼일)신고를 읽으려면 반드시, 먼저 깨끗한 방을 택하여, 진리도[원리도]를 벽에 걸고,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옷과 관(冠)을 가지런히 하고, 냄새나는 술[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끊고, 향을 피우고, 무릎을 모아 꿇어 앉아, 조용히 일신(一神, 한얼, 하늘님)에게 기도해야 한다. 큰 믿음과 맹세를 세우고, 모든 사악한 생각을 끊고, 366알의 대단주(大檀珠)를 지니고서, 한마음으로 바른 글인 366자의 말씀의 진리[원리]를 읽어, 위 아래로 철저히 조합하여 일관되게 해야 한다.
(읽기를) 3만회에 이르면 액(厄)이 점차 소멸하고, 7만회에 이르면 질병과 전염병이 침범하지 못하고, 10만회에 이르면 칼과 병기를 피할 수 있으며, 30만회에 이르면 날짐승과 길짐승이 길들여져 엎드리고, 70만회에 이르면 사람과 귀신이 공경하여 두려워 하며, 100만회에 이르면 영철(靈哲. 神將과 神官. 武와 文에 해당)이 지도하고, 366만회에 이르면 366개의 뼈를 바꾸어 366개의 혈(穴)을 모으게 하고 366도(度)를 회전시켜, 고통을 떠나 즐거움(쾌락)으로 나아가는데, 그 신묘함을 다 적을 수 없다.
만약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는 거슬리면 사악한 견해가 생기게 된다. 외설되고 게으름이 있으면 비록 억만번을 읽더라도 바다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것과 같이 끝내는 성공치 못하고 도리어 목숨과 복록이 감소하여 잘라져 나가고, 재앙과 피해가 다가와 이르러 고통과 어두움의 세계로 굴러 떨어져, 아득하게 벗어날 기회도 없게 된다. 가히 두려워 하지 않으랴. 힘쓰고 힘써야 한다.
*신선(神仙)의 경지와 오늘날의 무속(巫俗)의 경지가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위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삼일신고를 통하여 건강을 얻고, 무(武)에 통달하게 되고, 짐승을 임의대로 부리고, 사람과 귀신이 두려워 하며, 신령이 지도하는 단계를 거쳐 환골탈태(환골이신, 뼈를 바꾸어 신선으로 됨))하게 되는데, 환골탈태하면 철인(哲人) 즉 신선(神仙)이 되는 것이며, 신령이 지도하는 단계가 무(巫)의 단계가 된다. 신령이 지도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나 만물의 과거 미래를 훤히 볼 수 있게 된다.-> 대진국 임아상의 삼일신고 주해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이해가 될 것이다.
(3) 서토(西土)의 한(漢), 위(魏), 진(晉), 수(隋), 당(唐)
고구려는 고대중국의 한, 위, 진, 수, 당의 시대에 걸쳐 존속하였는 바, 고구려가 고대중국의 속국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망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고대중국을 서토라 부른 것은 고구려가 원래 중국이라는 나라이름이기 때문이다. 참전계경 총론에 ...高句麗 言 天帝大日 高大光輝於世界之中也 ..[참전계경 총론]라 하여 고구려는 하늘님의 태양이 높게 크게 빛나는 세계의 중심을 나타낸다라고 적고 있다.
한(漢)은 서기전206년에 진(秦)을 멸하고, 한무제가 서기전120년에 흉노족을 항복시키고, 서기전108년에 위씨조선을 멸망시켰는데, 이때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의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위씨조선 땅을 지키기 위하여 한나라와 전쟁을 하였으며, 이때 수많은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나라를 물리쳤다. 이리하여 소위 한사군은 이름만 있을 뿐 실제로는 단군조선 유민들의 자치가 이루어진 것이 된다.
한나라가 도를 잃자 왕망이 서기8년에 흉노 왕족의 후손인 김씨족과 더불어 나라를 빼앗았고, 광무제에 의하여 서기23년에 후한이 일어섰다. 후한시대에 소위 한사군 중 진번과 임둔은 고구려에 복속하였으며, 낙랑군과 현도군 지역은 격전지가 되었다.
서기50년경에 고구려가 요동을 회복하였고, 서기55년경에는 요서지역을 회복하였으며, 서기105년~서기121년경에 다시 낙랑, 현도를 공격하여 요동을 회복하였으며, 서기168년에 다시 요동정벌을 하였고, 서기197년에 다시 낙랑과 현도를 정벌하여 요동을 평정하였으며, 서기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하고 서기313년에 낙랑, 대방을 축출하고 현도를 정벌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기전108년부터 서기313년까지 약420년에 걸쳐 낙랑, 대방, 현도의 땅은 서로 뺏고 뺏기는 격전지가 된다.
광개토황 이후 대체적으로 요동요서 지역은 거의 고구려 차지가 된 것이다. 고구려의 요동요서의 구분선은 지금의 난하가 된다. 원래의 요수는 지금의 영정하인데, 연나라가 팽창하던 서기전360년경부터 난하가 패수로서 요동과 요서의 구분선이 되었고, 중국의 기록으로는 여전히 영정하가 요수가 되며, 서기250년경 기록이 되는 중국의 수경(水經)의 기록을 보면 요수는 영정하, 패수는 난하가 되는데, 서기520년경의 역도원이 지었다는 수경주(水經注)를 보면, 원래의 강명과 지명이 이동된 사례가 많으며, 영정하, 난하, 대릉하, 지금의 요하, 압록강을 대요수(大遼水)로 대입하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해석에 혼동을 일으키게 하고 있고, 심지어 패수(浿水)를 대동강 패수(浿水)로 억지로 대입하고 있어 역도원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인의 날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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